외침과 기도
시자키 유 지음, 김은모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8.0 






 


 세계 곳곳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색 추리소설 단편집을 읽었다. 여행자인 주인공을 내세워 낭만적인 세계관을 그리면서도 잔인하고 엽기적인 사건을 다루는데 묘사되는 동기들이 너무 특이한 탓에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재밌게도 독자들의 감상평을 살펴보면 수록작들의 완성도에 대한 전반적인 감상은 대동소이한데, 일반적으로 첫 번째 수록작이 최고이며 두 번째 수록작은 급이 떨어지고 마지막 수록작은 개별 작품으로는 시시하지만 책을 마무리하는 에필로그적인 성격은 봐줄 만하다고 독자들은 입을 모은다. 나 역시 동의한다. 

 내가 약 10년 전에 이 책을 읽고서 포스팅을 작성할 때 '최고 수준'이라는 표현까지 썼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다시 읽은 지금에 와선 다소 과찬을 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은 컨셉이 독특하고 만듦새가 준수한 추리소설 단편집 정도로 생각한다. 아무래도 수록작들의 재미의 기복이 있는 데다가 그나마 괜찮았던 작품들도 두 번째 접하니 약간 지루한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사이키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자신의 꿈과 이상이 훼손될 대로 훼손되는 모습은 요즘 시국과 겹쳐서 생각하니 더욱 공감이 가 안타깝기 그지없었지만, 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마지막 수록작을 집필한 작가의 노림수가 너무 노골적이라 오히려 감동이 반감된 감이 있다. 그래도 데뷔작을 이 정도로 쓴 것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작품 이후로 일본에서도 소식이 없어 작가의 다른 작품 세계를 확인하지 못해 아쉽기 그지없다. 



 '사막을 달리는 뱃길' 


 막판의 반전이 처음엔 놀랍긴 해도 약간 따로 놀지 않은가 싶었지만, 생존을 위해 인간성을 버린 범인의 추악함을 강조하기 위한 장치 중 하나란 생각에 미치자 몇 없던 단점마저 상쇄됐다. 의중을 알 수 없던 범인의 동기가 충격적이면서 어느 정도 설득력 있던 것도 좋았고 이 작품집의 컨셉을 제대로 전달하는 등 첫 번째로 수록되기에도 아주 적합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낙타를 사막을 달리는 배니 돌고래라 표현하는 게 약간 구태의연했지만 그런대로 낭만이 있어 은근 감미롭게 읽혔던 게 기억에 남는다. 



 '하얀 거인' 


 사실 중반부까지는 이 작품이 제일 흥미진진했지만 그놈의 얼렁뚱땅인 결말 때문에 기분 잡쳤다. 너무 성의 없게 마무리를 지은 게 아닌가? 사이키와 그 친구들의 캐릭터성, 스페인의 시골 마을을 아름답게 묘사한 글귀 정도가 이 작품의 얼마 안 되는 성과이리라. 다른 건 몰라도 추리소설로는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다. 차라리 시작부터 별로던가, 기대를 배신해서 더욱 괘씸했다. 



 '얼어붙은 루시' 


 사이키의 시점과 번갈아가며 다뤄지는 화자의 시점이 지루하게 읽혔으나 결말에서 눈이 뜨였다. 바로 직전의 수록작과 정반대의 매력이 있어 다행이었다. 바로 다음 수록작의 무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작중 러시아의 폐쇄적인 분위기가 잘 살아난 것도 재밌는 지점이었다. 범인의 광기를 설명하는 것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외침' 


 사람들이 이 작품을 첫 수록작과 더불어 좋게 평가하던데 오히려 난 이 작품 속 범인의 동기가 약간 뻔한 구석이 있어 무난하게 읽혔다. 다만 제목이 주는 절박함과 좌절스러움이 배어든 결말은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을 묘사함에 있어서 원시 부족의 폐쇄성이나 전근대적인 가치관을 조롱하는 기색이 없던 것까지 좋았다. 이 작가의 사람으로서의 됨됨이가 돋보였다. 



 '기도' 


 위에서 거듭 강조했듯 단일 작품으로서의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 그래도 '하얀 거인'보다는 낫다. - 조금 분량이 긴 에필로그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읽을 만하다. 여운이 있고 앞선 수록작들의 내용을 언급해 반가움도 든다. 작중에서 반전이랍시고 나온 내용이 하나도 놀랍지 않아서 구성을 근본부터 다시 짜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 이 정도면 무난한 에필로그라는 생각도 든다. 사이키를 향해 '그래도 여행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작가가 위로를 건네는 것에 성공했으니까 말이다. 

‘빈곤‘. 그 말만큼 하찮게 들리는 것은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빈곤은 대지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 26p



판타지란 현실이 뭔가를 계기 삼아 모습을 약간 바꿔 보여주는 표정이라고. 그게 세계의 규칙이지. - 93p



성인이라는 것과 성인이라 불리는 것은 다릅니다. 성인이라는 칭호 따위가 없어도 사람은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 186p



아무리 불합리해도 현실은 잔혹하고,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은 통하지 않아. 상식은 손쉽게 산산조각 나지. 영원히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이는 인간도 있고, 서로 이해한 인간을 죽이는 녀석도 있어. 그게 현실이야. - 34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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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평점 :
일시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8 





 스포일러 있음 


 옛날엔 식은땀 흘려가며 읽은 소설인데 10년이 지난 다음에 읽으니 무난하게 읽혔다. 내가 10년 사이에 사이코패스에 면역이 생긴 건가? 아무리 이미 아는 내용이라지만 이 정도로 무덤덤하게 읽을 줄은 몰랐다. 인면수심이라는 말도 아까운 사이코패스 범죄자가 작중 시기에 비하면 요즘엔 그리 드물지 않아서 그런 걸까? 내가 이 작품에서 공포를 느낀 부분은 보험 제도의 허점을 찔러 자기 가족조차 몰살시키는 사치코의 모습보다 사치코의 본모습을 유추하는 과정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기시 유스케의 실질적인 데뷔작이자 출세작으로 평가 받는 <검은 집>은 작가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 본격적으로 집필 활동을 하기 전에 보험사에서 일했던 터라 디테일이 남달랐는데 이러한 특징은 이후의 작품들의 다양한 설정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설정을 향한 작가의 탐구 정신은 다시 봐도 발군인데 가끔 작가가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아낌없이 풀어내고자 전개가 너무 설명적으로 흘러간다는 아쉬움을 제외하면 대체로 유익하고 흥미로워 읽는 맛이 제법이다. 이 작품이 20년 전에 집필됐다 보니 사이코패스를 다루는 설명하는 투가 묘하게 교과서적인 것이 - 당시엔 사이코패스란 개념이 지금보다 희박할 때라 - 시대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데, 여느 인문학 도서보다 입문용으로 적절하다 생각될 만한 사이코패스의 좋은 예시(사치코)가 있어 이 작품이 단순히 오락 소설 그 이상의 작품으로 느껴졌다. 


 사치코의 정체는 이 작품의 일종의 반전으로 작용하는데 소제목이 나오는 장에 스포일러가 있던 것을 빼면 - 왜 그렇게 편집을 했는지;; - 꽤 괜찮은 반전이었다고 생각한다. 반전의 내용이 의외인 것도 재밌었고 그 복선이 대단히 교묘하고 학술적으로 일리가 있어서 내심 소름이 돋기까지 했다. 사치코가 요즘에 각광을 받는 사이코패스 캐릭터들에 비하면 치밀하게 행동하는 지성도 부족하고 동물적 감각에 의존하는 단순무식함 때문에 이질적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한편으로 이게 과장 없이 가장 현실적인 캐릭터 설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이코패스는 그 자체로 범죄의 화신이라기보단,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범죄를 효과적인 수단으로 인식할 뿐이라는 개념을 대단히 잘 나타낸 캐릭터가 아닌가 싶었다. 

 본격적으로 액션이 난무하기 전인 중반부까지는 마치 폭풍전야처럼 인물들끼리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에 대해 갑론을박을 하는데 이 작품을 다시 읽는 내게 있어 이 부분이 퍽 인상적이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사이코패스는 세상이 각박해지고 사람들에게 욕망 실현을 애매하기 짝이 없게 부추긴 탓에 사이코패스야말로 지금 세상에 가장 생존하기 적합한 형태의 돌연변이로 거듭났다는 논지였다. 사이코패스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난다는 대단히 위험한 발언이 아닐 수 없어서 주인공은 그 논지대로라면 머잖아 우생학에 기반한 디스토피아가 재림하겠다고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그러자 상대는 주인공의 말을 적당히 수긍하면서도 그래봤자 사이코패스가 환경에 기인한다는 건 순진한 발상임을 주장하는데 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도 신념을 잃지 않은 주인공의 여자친구의 모습과 완벽히 대비된다. 그런데 날 때부터 악인은 없다는 말을 참... 믿고는 싶은데 솔직히 어느 정도 공허하게 들린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각종 보험 사기 소개 및 사이코패스라는 소재에 치중한 탓에 주인공과 주변 인물에 대한 집중이 소홀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그 탓에 주인공 형의 자살에 얽힌 진실이나 여자친구의 올곧음이 상대적으로 뜬금없거나 빈약하게 느껴졌다. 이는 아직 소설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작가의 미숙함의 탓으로 보였는데, 캐릭터 설정은 그런대로 잘 이뤄진 편이니 분량을 더 할애하거나 아니면 액션 비중을 줄여서라도 내실에 충실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성선설을 믿는 캐릭터의 주장이 덜 소개된 감이 있어 이 작품이 전체적으로 사이코패스를 소개하기 위해 집필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정도로 소재에 집중할 수 있는 작가이기에 조금 더 주제의식에 집중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막판에 그저 그런 호러 소설로 남기는 싫었는지 작가가 너무 '집'이란 단어를 강조하며 요즘 세상엔 사이코패스가 만연해졌다는 말을 주입식으로 늘어놓아서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사이코패스 캐릭터로부터의 추격전은 작가의 이후 작품에 비하면 긴장감이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특히 <신세계에서>와 <악의 교전>에서 차원이 다른 공포스러움을 묘사했기에 비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추리소설다운 묘미가 있어서 은근히 신선했는데 이런 특성이 처음에 읽었을 땐 좋았지만 다시 읽은 지금은 그 부분만 튄다는 생각에 -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의 논리적 추리가 오히려 몰입도를 깨뜨렸다고 말하면 너무 트집일까? - 전처럼 몰입할 수가 없었다. 처음 읽었을 땐 정말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는데... 이걸 담력이 세졌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감정 이입이 둔해졌다 해야 할지 모르겠다. 


 <검은 집>은 황정민 주연의 우리나라 영화로도 유명하던데 그 영화는 어떨지 궁금하다. 평이 좋지 않아서 볼까 말까 고민이 되지만 그래도 결국엔 볼 것 같다. 과연 어떨는지... 

인간의 행동은 항상 유전 환경이라는 두 가지 인자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100%이고 다른 한쪽이 제로인 경우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범죄만은 100%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은 성선설에 가까운 옛날이야기로, 일본 말고는 어느 나라에서도 통용되지 않습니다. - 2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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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의 상자 5 - 완결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시미즈 아키 그림 / 삼양출판사(만화)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9.2 







 부끄러운 얘기지만 원작의 내용이 잘 이해가 안 갔던 터라 만화로 읽는 것을 고대했다. 그림이 동반되면 이해하기 수월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만화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교고쿠도의 장광설과 특유의 뜸들이는 추리, 교차하는 서술 등은 여지없이 버거웠다. 덕분에 원작을 읽으면서 이해하지 못했던 게 그렇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반부의 충격적인 장면들이 선명하게 그려진 걸 보노라니 내 독해력이 문제였다기 보단 내 빈약한 상상력이 걸림돌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는 곧 '망량'에 고혹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란 반증이겠지. 

 사건 당사자들과 더불어 독자들까지 혼란스럽게 만든 작품의 복잡한 전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것이다. 다 읽고 나니 버릴 장면은 없었고 오히려 장면이 모자라다는 생각마저 들었으나 그럼에도 나는 초반부에 특유의 지루함과 높은 문턱 때문에 마냥 좋은 말을 하기가 꺼려진다. 이는 전술했던 장면이 모자라다는 생각과 일맥상통한 부분이다. 설명을 요하는 무수한 감정선들을 정말로 교고쿠도의 설명으로 대체할 따름이라 읽는 내내 집중력의 한계에 직면했었다. 그놈의 추리소설적인 연출을 의식한 탓에 작품의 내용이 필요 이상으로 엽기적이고 이해 불가한 영역으로 자리매김된 느낌이다. 이 소동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들이 인과응보에 따라 파멸을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일말의 여운도 없이 불쾌함만이 감돌았을 것이다. 


 확실히 교고쿠 나츠히코의 스타일은 호불호가 많이 갈리긴 한다. 이렇게 만화로 2차 창작이 이뤄진 게 신기할 만큼 그의 작품 세계는 마니악하다. 소재도 소재지만 인물들의 입으로 전개되다시피 한 진행도 문제다. 작품의 여러 문제적인 인물들 대다수가 그 내면이 직접적으로 묘사되기는커녕 교고쿠도의 입으로만 까발려져 오히려 상상력이 차단당하는 기분도 들었다. 이래서야 작가의 기괴한 상상력이 강제로 주입당하는 꼴이나 다름없어 독자마다 마음 속으로 얼마만큼 준비가 됐느냐에 따라 만족도가 천차만별로 갈릴 듯하다. 

 나는 최근에 <광골의 꿈>을 읽어서 그런지 이 작품은 상대적으로 괜찮게 읽혔다. 처음엔 지루하고 끝에 가선 엽기적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야기와 주제의식이 마음에 든 덕분이다. 참 복잡하고 먼 길을 돌아가지만 결국 이 작품은 '선'을 넘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엽기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면서 함부로 '선'을 넘어선 안 될 것을 독자에게 권한다. 작중에서 교고쿠도는 '선'을 넘은 사람들을 두고 '피안'으로 갔다고 표현하는데 이 표현은 교고쿠도 특유의 지극히 지적이고 사려 깊은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실상은 법으로 재단할 순 없어도 윤리적으로 접근하면 구분이 명확해지는 온갖 종류의 죄악이 등장하므로 진짜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 라는 다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니, 저렇게 살고 싶어도 살 수는 없겠구나. 


 그와 동시에 <우부메의 여름>에서도 강조된, 이른바 환상적인 것을 대하는 이 작가의 자세는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환상적이고 비과학적인 것을 단순히 그 이유만으로 싸잡아 비판하지 않고 그런 요소들, 가령 오컬트 같은 요소가 인간 개개인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지 여부로 접근하는 것이 퍽 공정하게 들렸다. 현대에 와선 과학은 그야말로 새로운 종교가 돼 그와 반대되는 것들은 척결의 대상으로 삼다시피 하는 경향이 있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인간과 함께 한 민간 신앙, 유사 과학의 위력을 과소평가하지도 경시하지도 않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인문학적 소양은 확실히 본받을 만하다. 소설을 꼭 인문학 책처럼 집필하는 것은 문제지만...;; 

 그림을 그린 시미즈 아키 작가의 노고 역시 언급해야겠다. 원작을 어시스트들에게까지 정독시킨 다음 작업에 들어간 이 만화가가 이룩한 결실은 가히 괄목할 수준이었다. 기괴하고 엽기적이고 난해한 특성까지 완벽히 재현하면서 '교고쿠도' 시리즈의 특징 중 하나인 캐릭터들의 골때리는 매력을 정교하게 재현한 건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약간 과한 언행을 보이는 캐릭터들이 시미즈 아키의 손을 통해 그야말로 호랑이에 날개를 단 격으로 살아 숨쉬듯 재탄생했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 원작의 팬은 물론이거니와 이 만화로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 세계를 처음 접하려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난 소설 <우부메의 여름>이 입문작으로 가장 적합하다 생각하지만 만화 <망량의 상자>도 그에 못지않게 입문작으로 괜찮다고 본다. 시리즈의 팬들이 이구동성으로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원작을 바탕으로 한 만화니까. 그리고 그 명성에 절대로 누를 끼치는 만화가 아니니까 말이다. 

설령 엉터리 주문일지라도 효력이 있으면 진짜가 되는 겁니다. - 4권 제7화



행복해지는 건 간단하거든.

인간을 그만둬버리면 되는 걸세. - 5권 제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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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고전부 시리즈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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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최근 잇달아 내가 애정하던 시리즈들에 실망을 하는 것 같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를 시작으로 교고쿠도 나츠히코의 '교고쿠도' 시리즈, 그리고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의 최신작이 기대에 못 미쳤다.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을까? 항상 '기대가 큰 탓에' 라고 둘러댔지만 이 작품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는 실망한 이유가 명확하기에 딱히 변호하지 않으려고 한다. 아마 내가 이 작품으로 시리즈에 입문하고자 했더라면 - 시리즈 여섯 번째 책으로 입문하려고 할 가능성이 극히 적긴 하지만. - 이 시리즈의 매력이 대관절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리라 단언한다. 

 일상 미스터리 계열의 작품이므로 세계관이나 작중 다뤄지는 사건이나 수수께끼의 종류가 여타 추리소설에 비해 시시하긴 했어도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이 정도면 대놓고 추리소설이 아닌데? 싶을 정도로 밋밋한 내용들이 많았다. 일반적인 추리소설의 기준에서 밋밋하다 뿐이지 시리즈 자체적인 기준에서는 어떠냐고 물어도 별로 좋은 소리는 해주고 싶지 않다. 캐릭터의 과거나 내면을 들여다봄에 있어서 시리즈 내적으로는 꽤나 의미 있는 내용이 많았으나 분량의 한계 때문인지 이야기 자체가 뜬금없이 시작되거나 급작스럽게 끝나버려 캐릭터들의 고뇌가 와 닿는 경우가 적었다. 특히 표제작인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는 지탄다의 고민과 일탈이 너무 전조 없이 대두되고 모호하게 끝맺어진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름대로 표제작에 걸맞게 중대한 사건이 발생해 가독성이 좋았지만 이 경우엔 추리가 분량을 지나치게 잡아먹은 감이 있어서... 전작에서 추리와 이야기를 적절히 융합했던 그 만듦새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작가의 다른 단편집을 읽었을 땐 이런 느낌을 못 받았는데 이 시리즈의 단편은 유독 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상술했듯 캐릭터의 과거가 집중 조명돼 시리즈의 팬으로서는 어느 정도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으나 시리즈의 팬들을 제외한 다른 독자들, 가령 이 작품으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할 수도 있는 독자들을 매료시킬 만한 만듦새엔 확실히 미치지 못했다. 시리즈에 호감이 없는 독자라면 다른 건 몰라도 이 소설을 빈말로도 좋은 추리소설이라 얘기하진 않을 것이고 심하면 속았다고 고개를 저을 독자도 있을 터다. 

 물론 추리소설이냐 아니냐가 그렇게 핏대 세워야 할 만큼 중요한 논쟁거리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의미하다고 여기기엔 수록작들이 엄연히 추리소설이라는 정체성을 지향하고 있으므로 독자인 나 역시도 추리소설적인 관점에서 이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말해 이 책이 전체적으로 갈팡질팡하다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 속하는 범작과 졸작의 기로에 놓였다는 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자면 팬이 아니었다면 완독을 포기했을 것이다. 애당초 팬을 위해 집필된 듯한 책이었으니 완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만...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저평가하는 책이 바로 팬 서비스에 치중한 후속작이기에 읽는 내내 작가에게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었다. 



 '상자 속의 결락' 


 책의 구성상 첫 번째로 수록되기에 딱 어울리는 가벼움을 겸비한 이야기였다. 한 마디로 큰 감흥이 없었다. 호타로의 추리력은 여전히 비범했지만 그가 답을 찾을 수 있도록 작가가 던진 힌트가 독자 눈에 뻔히 보여 전반적으로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끝낼 수 있는 이야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거울에는 비치지 않아'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캐릭터인 마야카는 이 책의 수록작 중 두 개에서 화자이자 주역으로 등장한다. 다른 고전부원에 비해 미묘하게 비중이 적었던 터라 팬으로서 반가운 부분이었다. 이 이야기에선 왜 마야카가 시리즈 초창기에 호타로를 그토록 삐딱하게 바라봤던 이유가 드러나는데 시간이 좀 오래 걸렸지만 마야카가 자신의 오해를 완전히 바로잡을 수 있어서 보는 내가 다 기분이 좋았다. 마야카의 성실하고 올곧은 자세와 호타로 특유의 타인의 시선에 개의치 않는 면모는 어딘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그게 사건의 진상이나 추리 장면보다 더욱 인상적이었다. 



 '첩첩 산봉우리는 맑은가' 


 이 책에서 유일하게 애니메이션화됐다고 한다. 에니메이션에서의 그 에피소드도 그렇고 이 수록작도 그렇고 다소 억지로 사건을 전개시키는 느낌이 들어 어딘가 석연찮게 읽혔다. 호타로가 평소답지 않게 주체적으로 수수께끼를 풀려고 했던 동기가 너무 사소하고 의외라 느껴서 그런 걸까? 지탄다는 감동했다지만 나는 유난을 떤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뭐, 이 시리즈에선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긴 하지만... 



 '우리 전설의 책' 


 전편에서 암시했던 마야카의 '만연' 동아리 탈퇴 사유가 드러나는 이야기다. 정말이지 답도 없는 동아리 내의 알력 다툼, 파벌 싸움을 저런 식으로 회피하다니, 상당히 통쾌한 결말이란 생각이 들었다. 전개가 지루했으나 그나마 내가 좋아하는 마야카가 화자로 나와 그런대로 몰입하며 읽을 수 있었다. 



 '긴 휴일' 


 호타로가 에너지 절약주의자가 된 계기가 드러난다. 과거에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걸 깨닫는 일련의 과정이 솔직하고 일목요연하게 묘사됐다. 개인적으로 나도 매사에 환멸을 느끼는 면이 있어 호타로의 감정선에 공감이 많이 갔는데 막판에 작가가 호타로의 누나의 입을 통해 '에너지 절약주의'를 택한 호타로를 위로해서 여운이 제법이었다. 그 나이대에 어울리는 사건과 깨달음이 디테일 있게 그려진 것도 깨알 같은 재미를 안겨줬다.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이야기에 담긴 감성은 좋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지탄다의 일탈이 너무 전조 없이 대두됐고 더군다나 전편에서의 기억이 희미하면 그녀의 고민의 무게가 와 닿지 않는 등 이래저래 불친절할 정도로 뜬금없는 이야기인 지라 생각보다 큰 감흥이 일거나 하지 않았다. 이야기는 좋은데 구성이 별로라... 참 안타까운 경우라 할 수 있겠다. 

넌 앞으로 긴 휴일을 맞이하는 거야. 그러면 돼. 푹 쉬어. 괜찮아. 쉬는 동안 네 심성이 바뀌지 않는다면......

분명 누군가 네 휴일에 마침표를 찍어줄 테니까. - 323~3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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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소녀와 달과 꽃을 품은 물의 요정 - Extreme Novel
노무라 미즈키 지음, 최고은 옮김, 타케오카 미호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6.9 







 시리즈를 너무 띄엄띄엄 읽다 보니 이 외전이 너무나 뜬금없고 맥빠지게 읽혔다. 전편에서 어마어마한 떡밥을 뿌리고서 새삼 여름방학 에피소드를 되돌아본다는 게 연출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 가닥이 잘 안 잡혔는데 이는 전적으로 시리즈를 띄엄띄엄 읽은 내 탓이라 할 수 있다. 기억하기론 이 작품에서의 몇몇 전개가 나중에 나비효과처럼 심상찮은 후폭풍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 당장 다음 작품을 언제 읽을지 가늠이 안 되는 마당에 과연 그때 가서 이 작품에서의 떡밥이 기억이 날는가 모르겠다. 

 첫 등장부터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전형인 것 같은 캐릭터 히메쿠라를 내세운 스토리는 좋았고 주제의식도 나쁘지 않았는데 전반적으로 이야기의 전개가 지루하고 시리즈의 개성이 희미해 읽는 맛은 덜했던 작품이다. 주요 소재가 되는 고전 문학의 매력도 어필이 되지 못했고 몇십 년 전 과거에 있었던 비극의 진상도 황당한 감이 있어 감동도 덜했다. 약간 작위적인 해피엔딩이라 여겨지는 것도 문제였으나 내가 봤을 땐 그것보다 그런 반전을 토오코가 척척 추리해내는 연출 - 토오코 자신은 추리가 아닌 문학소녀로서 '상상'을 해봤을 뿐이라고 오그라드는 대사를 해대지만;; - 이 문제였던 것 같다. 추리소설 중에는 먼 과거로부터 내려진 수수께끼를 탐정이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서사가 종종 있고 '문학소녀' 시리즈의 경우 오히려 그런 서사를 자주 다뤘지만 이번엔 유독 흥미가 떨어졌다. 너무 먼 과거라서 그랬나, 맨날 비슷한 플롯이라 지겨워서 그랬나, 아니면 과거 이야기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도 유별난 참극인 터라 몰입이 되지 않은 것인가... 뭐가 됐든 결말에 이르러서도 기분이 시원스럽지 못했다. 


 어떤 식으로든 자유를 갈망하는 캐릭터는 문학에서 굉장히 흔한 유형의 캐릭터이고 그렇기에 일찍이 묘사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묘사됐기에 이 작품에서 히메쿠라의 사정이나 과거사의 인물들의 이야기도 썩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나름대로 잘 만든 설정이지만 내가 더 이상 라이트노벨의 무드란 것에 기대가 없어서 그런지 아무런 신선함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외전이라지만 본편만으론 매력이 떨어지는데... 이 외전의 무슨 의미가 있었는지는 다음 권을 보고서 판단을 유보해야겠다. 

 드디어 다음 권이 마지막 권이다. 원래는 작년에 다 읽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올해까지 질질 끌게 됐다. 빨리 다 읽어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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