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매탐정 조즈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5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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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처음에 크게 관심이 가지 않았지만 하도 이름이 많이 거론돼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던 작품이다. 읽기 전엔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데뷔작 <시인장의 살인>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 특히 상을 휩쓸었단 점에서 - 다 읽고 나선 이노우에 마기의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가 떠올랐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란 측면에서 최근 일본 추리소설계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둔 이 세 작품은 아쉽게도 내게 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는데, 세 작품 다 소재만 특이하지 완성도는 미묘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는 것이 내가 공통적으로 느낀 단점이었다. 

 <영매탐정 조즈카>는 <시인장의 살인>과 <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의 딱 중간 지점에 위치를 점한 작품이다. 소재의 신선함이나 반전이나 완성도나.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것은 마지막 장에서의 촌철살인 추리쇼였다. 그 압도적인 장점에 의해 앞에 산재된 단점들이 많이 희석된 감이 있는데... 작년에 이 작품이 일본 추리소설계의 랭킹과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는 얘길 듣고선 작년에도 흉작이었나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정답에 도달하는 길이 두 가지씩 마련된 단편들이 사뭇 특이하긴 했으나 개별적인 완성도나 매력이 떨어지고 특히 어떤 의미에서 '노리고 쓴' 캐릭터 묘사가 인내심을 요구해서... 과연 몇 명의 독자가 라이트 노벨 스타일의 유치한 문체와 캐릭터 설정을 참고 이 작품의 마지막 장까지 읽을 수 있을지 의심이 든다. 첫 번째 에피소드부터 너무 시시해서 거기서 이탈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니까. 


 영매 능력으로 진범을 단번에 지목할 수 있는 영매사 조즈카와 조즈카의 영매를 통해 알게 된 사건의 진상에 논리적인 해답을 덧붙여 경찰 수사에 협조하는 추리소설가 고게쓰 콤비는 흥미롭긴 하나 이미 다뤄질 대로 다뤄진 캐릭터다. 아마 작가는 더 이상 신선함을 유발하기 힘든 추리소설계의 세태를 비틀기 위해 이 콤비를 토대로 마지막에 그런 반전을 연출한 모양인데, 호불호를 떠나서 그 반전에 논리적으로 아무 문제도 없고 무엇보다 이 부분에서 추리소설다운 진가가 잘 드러났기에 그토록 찬사를 받지 않았나 싶다. 개별적인 에피소드의 미스터리들이 독자가 공평하게 참여할 수 있을 만큼 흥미롭다거나 진입장벽이 낮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 집요할 정도로 논리성을 구축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내심을 갖고 읽은 보람이 있게 '괜히 읽었다'고 후회하진 않았지만... 'No.1 미스터리!'라는 수식의 홍보 문구처럼 이 작품을 둘러싼 전반적인 과대평가가 눈에 밟혀 오히려 반발심이 드는 것 같다. 객관적으로 특출난 장점이 있음에도 말이다. 본래 추리소설이 결말에서 다 만회하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결말을 제외한 나머지가 볼품없는 수준이라면 얘기가 다르잖은가. 내 기대가 너무 과한 탓인지, 유독 취향이 맞지 않은 탓인지... 막판의 촌철살인 추리쇼가 없었다면 정말 엄청나게 독기를 품고 후기를 남겼을 텐데, 그 정도로 형편없는 작품이 아니란 게 어찌나 다행인지 모른다. 망작을 까는 게 당장엔 재밌을지 몰라도 까도 까도 끝이 없고 또 공허한 지라 그런 작품을 애당초 만나지 않는 게 상책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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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천천히, 북유럽 - 손으로 그린 하얀 밤의 도시들
리모 김현길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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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발군의 일러스트에 반해서 읽게 됐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엔 오히려 작가의 문체에 반해 있었다. 책의 가격이 너무 저렴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일러스트가 꼼꼼하게 배치된 것도 좋았지만 역시 에세이에서 중요한 건 사진이나 그림보다 글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아주 전문적인 에세이나 여행기라고 하기에 이 책의 분위기나 전문성은 사뭇 가벼운 편에 속한다. 무릎을 딱 치게 할 만한 깨달음이나 자아 성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상천외한 컨셉을 잡고 북유럽을 샅샅이 돌아다닌 것도 아니다. 작가에게 허락된 약 한 달이란 시간 동안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네 개 국가를 돌아다녔을 뿐이라 여행 전문 서적처럼 다양하고 디테일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때론 다른 사람들이 잘 가지 않을 법한 시골도 가는 등 소소하고 신선한 간접 경험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른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북유럽을 한 달이나 여행이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소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또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자신의 여행 장면을 설명한다는 게 참으로 비범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여행 일정을 아주 차분하고 평범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작가의 화풍이야 너무 뛰어나서 두말할 나위 없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사진이 아닌 그림이 주는 효과가 생각 이상으로 독특해서 책을 읽는 내내 아주 흥미로웠다. 뭐가 독특한가 생각해봤더니 사진은 순간 포착인 데다가 그 장소에서만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함이 있는 반면, 그림은 대강의 이미지를 작가가 기억하고서 나중에 열심히 보완해가며 완성해야 하므로 성실함이 느껴진다는 차이가 있었다. 한마디로 이 많은 그림을 작가가 나중에 일일이 다 완성시켰다는 얘긴데 이 부분에서 이미 별 네 개는 먹고 들어갔다. 그림들의 내용이나 구도는 아주 신선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장면이 다 그림이란 점만으로 특별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여행을 추억하는 작가의 성실함에 끌려 작가의 문장 한 줄도 허투루 읽지 않게 됐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책의 문장은 허투루 읽고 싶어도 그렇게 못한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 같다. 그림과 텍스트의 비율이 대략 6:4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글이 빽빽하지 않아서 기본적으로 부담없이 읽힌다. 뿐만 아니라 괜히 묘사에 공을 들이거나 MSG를 쳐서 자신의 실수를 과장하거나 모든 순간에 의미부여를 했다면 취향 따라 대충 읽거나 넘어가기도 했을 텐데, 자신의 감정을 차분하면서 소모적이지 않게 전달한 덕에 오히려 가벼운 기분 속에서 정독하게 됐다. 


 아무래도 읽으면서 질투가 생기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할 듯하다. 작년 3월에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터져서 나의 헬싱키-스톡홀름 여행이 무산됐을 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이 작가의 여정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때론 실수하거나 일정 탓에 짧게 머물고 지나가는 대목에선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하며 탄식하곤 했는데, 지금까지 여행기나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 정도로 몰입한 적이 없기에 이런 걸 두고 바로 간접 경험이라 하는구나 싶었다. 

 나도 여행이 끝나면 블로그에 여행기를 쓰다 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이 작가만큼 성실히 여행을 추억하고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흡입력 있는 글을 썼을까' 하는 질문과 마주한 적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적이 많았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추억하긴 했는데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전달이 됐을지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꼭 이 작가처럼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최근 여행기를 의무감에 적당히 쓰고 끝마친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다. 다음엔 조금 더 나은 여행기를 써야 할 텐데... 이 책을 떠올리며 앞의 다짐이 무색해지지 않게 하겠다. 


 여담이지만 최근에 사람들이 백신도 많이 맞고 트래블버블도 활발하게 논의되는 등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말하곤 하는 것 같다. 나는 가급적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아무리 빨라도 5년 뒤라고 마음 속으로 정리를 해둔 상태지만, 희망적인 얘기가 들리니 아무래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북유럽에 방문할 수 있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테지만... 이 책을 보니 그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하고 자연스럽게 중얼거리게 됐다. 이게 바로 여행기의 위험한 점일 테지. 위험한 걸 알면서도 읽다니, 나도 참 바보 같은 독자다. 

그동안 예쁜 돌을 줍듯 그림을 그려왔던 것은 아닐까. 허무한 가치를 좇지 않고, 나의 경험과 사유에서 비롯된 솔직함으로 반짝이는 그림.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 3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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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소가 웃는 순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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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6.6 







 한 작가를 무한 신뢰하는 순간부터 나는 꼭 그 작가의 '지뢰작'을 접하는 것 같다. <염소가 웃는 순간>은 객관적으로 지뢰작이라 부를 만큼 처참한 완성도의 작품은 아니지만, 작가의 대표작 <13.67>이나 최신작 <망내인>, 은근히 빛을 못 본 단편집 <풍선인간>과 비교하면 가볍고도 가벼운 수준의 평작이었다. 작가의 데뷔작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보다 모자란 부분이 많았는데, 특히 산만하고 신선하지 못한 전개와 캐릭터, 나중에 가선 논리적으로 접근하지만 기본적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인 설정까지 눈에 걸리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었다. 가독성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을 장점일 테지만, 흡입력이 좋다기 보다 시간을 들여 정독할 정도로 밀도 높은 내용이 아니라 그저 빨리 읽힌 것에 가까워 이걸 장점이라 봐야 할는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내가 호러 소설을 굉장히 안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나 박하게 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극찬한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나 아야츠지 유키토의 <어나더>도 혹평했던 나인 만큼 제아무리 찬호께이가 재주가 좋아도 그의 호러 소설이 내게 먹혀들 리는 만무할 터다. 만약 호러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 이 소설이 나름대로 괜찮았다고 한다면 솔직히 할 말은 없다. 내겐 어쭙잖게 느껴진 후반부의 논리적인 전개도 독자에 따라선 신선한 포인트일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비록, 나는 독자도 논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공정함이 부족한 소설에게 과도한 칭찬은 자제해야 한다는 주의지만, 내가 작가에 대한 애정이 이 작품만으로 바래지지 않아서 아주 헐뜯고 싶진 않다. 작가에 대한 애정이 지대한 나머지 더욱 헐뜯을 수 있는 법이지만 말이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입이 근질거린다는 것을 숨기진 않겠다. 평범함을 개성으로 내세운 주인공의 매력도 잘 와 닿지 않고 작가가 청춘물을 표방한답시고 만든 캐릭터들이 머릿수만 많지 대부분 작위적인 성격들인 터라 몰입을 방해한 적이 - 특히 버스... 일단 별명부터가... - 많았다. 뿐만 아니라 노퍽관에 얽힌 괴담이 한두 개도 아니고 무려 7가지나 돼 산만하기 그지없었는데, 일부 괴담은 제법 오싹했지만 테마파크마냥 파트별로 한 번씩 소개하고 넘어가는 게 무분별하게 소비되는 느낌이 들어서 뒤로 갈수록 실소가 나왔다. 이거 분명 호러 소설인데... 

 아무래도 내가 요즘 마음의 여유가 없다 보니 일종의 시적 허용이라 웃어 넘길 만한 요소에도 일일이 열받은 감이 있으나... 다른 건 몰라도 '이거... 뻔한데, 이상하게 재미있다! Why? 찬호께이니까!'라는 띠지의 문구가 괜히 기대감을 증폭시킨 탓인지 이렇게 실망감을 날카롭게 반응을 내비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이 작품을 집필한 작가가 마지막에 가서 쓸데없는 의미 부여를 하기 보단 끝까지 철저하게 재미를 위한 글을 쓴 덕분에 엄청난 불쾌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완성도도 떨어지는데 주제의식 내세우면서 있어 보이려고 했다면 진짜 가루가 되도록 깠을 것이다. 


 만약 찬호께이의 작품을 혹시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한 사람이 있다면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이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는 작품마다 분량에 걸맞게 내용도 알차고 복선 회수나 반전도 예사롭지 않은 중화권 최고의 추리소설가임을 확인하고 싶다면 <13.67>이나 <풍선인간>, <망내인>을 접하길 간곡히 부탁한다. 제발 이 작품으로 찬호께이를 판단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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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녀 이야기 그래픽 노블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르네 놀트 그림,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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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예전에 두어 번 도전했다가 문체의 벽에 막혀 번번이 실패했던 소설 <시녀 이야기>를 원작으로 둔 그래픽 노블이다. 만화로 접하면 좀 괜찮을 줄 알았더니, 예상과는 다르게 조금 다른 의미에서 읽기 힘들었다. 내용 이해에는 지장은 없었고 오히려 쉬웠지만 그래픽 노블 특유의 선명한 색채 탓에 작중 묘사되는 디스토피아의 막장스러움이 한층 강조돼 읽는 내내 혐오스러움이 들끓었다. 시녀들이 입는 옷의 색깔부터 정말이지 무엇 하나 혐오스럽지 않은 것이 없는 세계관이었는데, 이 모든 걸 어느 정도 완결성 있는 이야기로 집필한 원작자 마가렛 애트우드의 비위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당초에는 원작 소설의 후속작 <증언들>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이 작품을 다 읽으니 그 작품도 읽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이런 극단적인 디스토피아 국가가 건설됐고 어떻게 멸망했고 대관절 제목이 왜 '증언들'인지도 확인해야 직성이 풀릴 듯하다. 이야기 본편이 너무 느닷없이 결말이 나고 세계관 소개만 하다가 끝난 감이 있어서 적잖이 감질 났기 때문이다. 대충 짐작하기론 출산율 저하를 여성의 탓으로만 돌리고, 젊은 남자는 전쟁터로 보내고, 출산이 가능한 여성은 딱 봐도 생식 능력이 떨어져 보이는 소수의 늙은 남자들이 데리고 있으니 그 나라에 미래가 없음은 너무나 자명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짐작만 하기 보단 직접 생존자들의 '증언'을 통해 이 길리어드라는 막장 나라가 어떻게 붕괴됐는지 그 전말을 듣고 싶다. 


 이 작품의 세계관에서 가장 역겨웠던 부분은 여성을 철저하게 착취하는 시스템 자체보다 이 시스템이야말로 여성이 여성의 본분(=출산)에 충실할 수 있고 또 여성을 성 노리개로 삼는 이전 시대(=미국)의 가치관을 가진 남성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는 길리어드 정권의 주장(=개소리)이었다. 주인공을 비롯한 절대다수의 여성들은 사형당하지 않기 위해 마지못해 순종할 뿐이고, 아마 절대다수의 남성들 역시 사형당하고 싶지 않아서 성욕을 억누를 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이 체제에 순종한다. 오직 힘 있는 기득권 남성만이 이전 시대의 색채가 묻어 있는 비밀 사교 클럽을 운영해 자신들만의 하렘을 만들었는데 이조차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폐쇄적인 체제에 비하면 하렘의 분위기는 활기차고 남성들도 대놓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니 그나마 덜 기만적이다는 점을 제외하면 결국 여성들의 비참함을 부각시킨다는 점에선 기존 길리어드 정권과 큰 차이가 없으니까 말이다. 

 원작 소설이 굉장히 유명하긴 하지만 사실 정확히 무슨 내용의 소설인지 몰랐었다. 소재만 들었을 땐 섹슈얼한 묘사가 없을 수가 없는 유사 성애 소설(=야설)로 생각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혹여나 이 작품에 어떤 식으로든 섹슈얼한 묘사가 있으리라 기대하고 읽을 생각이라면 당장 책장을 덮길 권한다. 이 책의 독자들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인지 서평을 읽어보면 감상평이 대동소이하던데 - 아마 이 부분이 <시녀 이야기>란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일 것이다. 누가 읽어도 비슷한 감상이 나온다는 것. - 남자 독자인 나는 그 감상에 공감을 하면서도 꼭 이 말을 첨언하고 싶어 목이 근질근질했다. 이런 세계는 여성은 물론이고 남성도 원하지 않는 세계라고. 한 명의 남성으로서 말하건대, 인간의 성욕을 죄악시하고 인간의 역할은 출산이 전부라고 규정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적 세계관에 좋다고 할 남성은 극히 적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 이런 정권이 들어섰는지 궁금하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력 쿠데타가 있었다지만 그 전에 적잖은 사람들이 동의를 하고 지지해줘야 출범할 수 있는 게 정권이니까. 


 작품의 세계관도 세계관이지만 그래픽 노블의 특성상 원작의 내용을 충실하게 그려냈을 것으로 추정되는 르네 놀트 작가의 화풍 및 연출력도 인상적이었다. 성별과 계급의 차이에 따른 다양한 복장들의 색깔을 선명하게 그린 것도 인상적이었고 특히 길리어드 출범 이전의 세계는 따스하고 몽환적으로, 현재의 세계관을 아주 차갑게, 먼 미래로 추정되는 결말에서는 다시 따스하게 그린 것이 강렬하게 다가왔다. 원작 소설을 완독하지 못해서 비교는 못하겠지만 전반적으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주인공의 독백과 세계관 묘사를 대부분 자세하게 살리되 작가가 그림을 적절하게 넣어 읽으면서 집중력이 환기됐다. 그래픽 노블도 분량에 비해 은근히 가독성이 떨어졌지만 그 말은 곧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반증이지 않을까 싶다. 덕분에 내용 이해에 원작을 읽은 독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아 그래픽 노블로 도전한 보람을 느꼈다. 

 아까도 말했지만 후속작 <증언들>은 꼭 읽어볼 것이고,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나 원작 소설은 아마 보지 않을 것 같다. 드라마도 스트레스 엄청 받을 것 같고 소설은... 좀 더 내공을 쌓은 다음에 도전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뭐, 고전은 어디 도망가지 않으니까. 설마 길리어드와 유사한 정권이 들어서서 분서라도 당하지 않는 이상 이 작품은 언제든 그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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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소년 아톰 박스세트 1~23 - 전23권 (완결)
데즈카 오사무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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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옛날부터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했지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쉽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만큼 연식이 된 작품이기도 하고 분량도 길어서 기껏 박스 세트를 구입해놓고 손길이 잘 가지 않았다. 결국 다 읽기까지 3주 넘게 걸렸다. 구성이 옴니버스식이다 보니 하루에 한 권 이상 읽기 힘들더군. 여하튼 여러모로 거리감이 있던 작품이지만 다 읽고 나니 기대 이상으로 배울 점이 많아서 보람이 느껴지기도 했다. 옛날 만화 특유의 유치하면서도 기괴한 느낌도 도리어 신선했고 은근히 같은 패턴이 남발되는 듯하면서도 새로이 얘기할 지점을 낳는 에피소드들이 여간 흥미로운 게 아니었다. 

 뒤로 갈수록 아톰이 가장 구식 기술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상천외한 존재들이 등장하는 것도 재밌었고 특히 인상적인 것은 첫 번째 에피소드와 마지막 에피소드가 의외의 내용이란 것도 인상적이었다. 특히 첫 번째 에피소드는. 왜 '우주소년' 아톰인가 했더니... 이 만화가 처음 연재된 게 50년대란 걸 생각하면 평행 우주 설정은 참 신박하지 않은가 싶었다. 


 듣기로는 아톰은 일본인의 로봇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미국에서 만드는 로봇은 주로 전투용 로봇이나 채굴용 로봇인 반면 일본에서 만드는 로봇은 간호용 로봇인 것엔 다 그럴싸한 이유가 있었다. 아톰을 보고 자란 일본인들에게 로봇이란 인간과 공생하는 존재이며 그들이 인간에게 파괴당하지 않게끔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를 갖고 있어야 한다고 뇌리에 각인됐다는 것이다. 이는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로봇은 그저 인간이 누리기만 할 대상이 아니라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듯 똑같이 배려하고 존중하는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논리인데 실제로 작중에서 누누이 강조되는 주제기도 하다. 

 이런 주제의식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파격적인데, 은근히 비정하고 현실감 넘치는 세계관과 대조되게 무척 따뜻한 인간애가 돋보이는 주제의식인 터라 경우에 따라서 무척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예를 들면 '클레오파트라'나 '로비오와 로비에트' 에피소드처럼 자신을 만든 부모(박사)의 뜻을 거스르지 못해 악행을 저질러야 하는 로봇들의 비애가 어떤 비극을 낳고 거기다 어떤 식으로든 인과응보의 결말을 맞이해 씁쓸함이 배가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두 에피소드는 천재적인 로봇 공학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낳은 로봇을 통해 분에 넘치는 꿈을 이루려거나 소모적인 감정 싸움에서 이기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작가는 이러한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과 그에 신음하는 로봇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이기심과 오만함은 모든 것을 망칠 뿐이라는 교훈을 한껏 강조한다. 


 아마 아톰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상 최대의 로봇'과 '청기사' 에피소드를 최고의 에피소드로 꼽을 듯하다. 전자는 단순히 배틀물로도 재밌었지만 그저 힘을 추구할 뿐인 로봇(기술)엔 미래는커녕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날카롭게 시사했고 후자는 로봇의 자존감과 권리에 대해 얘기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에피소드였다. 이 에피소드는 유례 없이 인간들로부터 등진 아톰의 모습이 인간인 독자 입장에서 공감이 갔던 것이나 그럼에도 인간을 향한 아톰의 선한 마음에 큰 변함이 없는 것 등 여러 면에서 눈길이 갔다. 어떤 때는 아톰이 약간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나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위해를 가할 수 없는 아톰의 처지가 고매하면서도 짠하게 느껴졌는데, 이는 반대로 말하면 인간이 바라는 로봇이란 경우에 따라선 진언도 날리는 동등한 존재가 아닌 무조건 자신을 섬기는 노예인 것 같아 어떤 면에선 인간의 한계를 엿볼 수도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말하지만 이 작품에선 인간이 굳이 아톰처럼 지성이 있는 존재를 만든다면 그를 대우할 때 가히 인간 못지않게 존중해야 함을 꾸준하게 강조하고 있다. 아톰을 포함해 작품에 등장하는 무수한 로봇들은 지성을 갖췄으나 인간들에게 도구로 취급당하면서 엇나가거나 오히려 인간이 그 화를 뒤집어쓰는 전개가 적잖이 묘사된다. 때론 존재 자체만으로 위험천만한 로봇은 꼭 아톰으로부터 파괴당해야만 하는 전개가 나오기도 하는데 이럴 때마다 아톰이나 파괴당하는 로봇이나 '왜 인간은 이렇게 위험한 로봇을 만들어서...' 라는 탄식을 낳는 장면은 반드시 나온다. 


 한마디로 철학적인 사유도 성찰도 없이 도구적이고 비인간적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접근한다면 남는 것은 없다는 걸 한결같이 비판한 작품이 바로 <우주소년 아톰>이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애들 보는 로봇 만화 정도로만 인식하던데 생각보다 무겁고 심오하고 서사나 장르에 관해서도 실로 역사에 남을 법한 시도가 많았던 작품이라 새삼 이 작품이 일본 만화를 넘어서 문화에서 점하고 있는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울러 왜 데즈카 오사무가 만화의 신이라 불리는지도 알 것 같았다. 이토록 시대를 앞서간 인류애가 담긴 만화를 그린 작가의 다른 작품도 궁금해졌다. <불새>와 <붓다> 등 아톰말고도 대표작이 참 많던데 뭐부터 읽을지... 어떤 작품이든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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