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천천히, 북유럽 - 손으로 그린 하얀 밤의 도시들
리모 김현길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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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발군의 일러스트에 반해서 읽게 됐지만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엔 오히려 작가의 문체에 반해 있었다. 책의 가격이 너무 저렴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일러스트가 꼼꼼하게 배치된 것도 좋았지만 역시 에세이에서 중요한 건 사진이나 그림보다 글이란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너무 당연한 말이긴 하지만. 

 아주 전문적인 에세이나 여행기라고 하기에 이 책의 분위기나 전문성은 사뭇 가벼운 편에 속한다. 무릎을 딱 치게 할 만한 깨달음이나 자아 성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기상천외한 컨셉을 잡고 북유럽을 샅샅이 돌아다닌 것도 아니다. 작가에게 허락된 약 한 달이란 시간 동안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네 개 국가를 돌아다녔을 뿐이라 여행 전문 서적처럼 다양하고 디테일한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때론 다른 사람들이 잘 가지 않을 법한 시골도 가는 등 소소하고 신선한 간접 경험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른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미 북유럽을 한 달이나 여행이나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소소함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 테지만, 또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자신의 여행 장면을 설명한다는 게 참으로 비범하다고 할 수 있겠으나,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여행 일정을 아주 차분하고 평범하게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작가의 화풍이야 너무 뛰어나서 두말할 나위 없고,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말하자면, 사진이 아닌 그림이 주는 효과가 생각 이상으로 독특해서 책을 읽는 내내 아주 흥미로웠다. 뭐가 독특한가 생각해봤더니 사진은 순간 포착인 데다가 그 장소에서만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함이 있는 반면, 그림은 대강의 이미지를 작가가 기억하고서 나중에 열심히 보완해가며 완성해야 하므로 성실함이 느껴진다는 차이가 있었다. 한마디로 이 많은 그림을 작가가 나중에 일일이 다 완성시켰다는 얘긴데 이 부분에서 이미 별 네 개는 먹고 들어갔다. 그림들의 내용이나 구도는 아주 신선하지 않았지만 이 모든 장면이 다 그림이란 점만으로 특별하기 그지없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여행을 추억하는 작가의 성실함에 끌려 작가의 문장 한 줄도 허투루 읽지 않게 됐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 책의 문장은 허투루 읽고 싶어도 그렇게 못한다는 게 더 맞는 말일 것 같다. 그림과 텍스트의 비율이 대략 6:4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글이 빽빽하지 않아서 기본적으로 부담없이 읽힌다. 뿐만 아니라 괜히 묘사에 공을 들이거나 MSG를 쳐서 자신의 실수를 과장하거나 모든 순간에 의미부여를 했다면 취향 따라 대충 읽거나 넘어가기도 했을 텐데, 자신의 감정을 차분하면서 소모적이지 않게 전달한 덕에 오히려 가벼운 기분 속에서 정독하게 됐다. 


 아무래도 읽으면서 질투가 생기지 않았다고는 말하지 못할 듯하다. 작년 3월에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터져서 나의 헬싱키-스톡홀름 여행이 무산됐을 때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이 작가의 여정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때론 실수하거나 일정 탓에 짧게 머물고 지나가는 대목에선 '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하며 탄식하곤 했는데, 지금까지 여행기나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 정도로 몰입한 적이 없기에 이런 걸 두고 바로 간접 경험이라 하는구나 싶었다. 

 나도 여행이 끝나면 블로그에 여행기를 쓰다 보니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과연 이 작가만큼 성실히 여행을 추억하고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흡입력 있는 글을 썼을까' 하는 질문과 마주한 적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적이 많았는데... 나름대로 열심히 추억하긴 했는데 과연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전달이 됐을지 솔직히 확신이 서지 않는다. 꼭 이 작가처럼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겠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최근 여행기를 의무감에 적당히 쓰고 끝마친 것 같아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다. 다음엔 조금 더 나은 여행기를 써야 할 텐데... 이 책을 떠올리며 앞의 다짐이 무색해지지 않게 하겠다. 


 여담이지만 최근에 사람들이 백신도 많이 맞고 트래블버블도 활발하게 논의되는 등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말하곤 하는 것 같다. 나는 가급적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아무리 빨라도 5년 뒤라고 마음 속으로 정리를 해둔 상태지만, 희망적인 얘기가 들리니 아무래도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북유럽에 방문할 수 있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테지만... 이 책을 보니 그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하고 자연스럽게 중얼거리게 됐다. 이게 바로 여행기의 위험한 점일 테지. 위험한 걸 알면서도 읽다니, 나도 참 바보 같은 독자다. 

그동안 예쁜 돌을 줍듯 그림을 그려왔던 것은 아닐까. 허무한 가치를 좇지 않고, 나의 경험과 사유에서 비롯된 솔직함으로 반짝이는 그림.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운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다. - 3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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