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니시키 씨의 행방
이케이도 준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9.0







 <한자와 나오키>와 <하늘을 나는 타이어>를 보면 이케이도 준만큼 조직의 병폐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작가도 없을 것 같다. 비단 은행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아무튼 전직 은행원이었던 경험을 십분 살린 이 작가는 비정한 조직 생활의 쓴 맛, 그리고 그 안에서 무너지는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함에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돌리지 못하게끔 만든다. 작품 속 거액의 돈의 행방 이상으로 몰입도가 있는데 날 때부터 혼자 오지에서 자란 사람이 아닌 이상 누구라도 감정을 이입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처음 언급한 두 작품과 비교해 이 작품은 작가의 장기가 가장 잘 살아난 조직 소설로 통상적인 추리/스릴러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제목에 등장하는 니시키 씨도 늦게 등장하고 그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것도 그렇고 그를 찾아 나서는 것까지 점진적으로 묘사한다. 이는 작중 등장인물인 수많은 은행원의 가혹한 일상과 연동된 결과로 총 10명의 은행원의 등장에 따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은행의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


 적지 않은 수의 등장인물을 짤막하면서도 가독성 있게 처리한 점이 우선 눈길을 끌었다. 아무래도 중심 화자가 주기적으로 바뀌니 몰입도가 유지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는데 그를 감안해도 꽤나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은행의 부지점장부터 시작해 다양한 인생 배경과 입장을 갖고 있는 은행원들이 처한 갈등은 지극히 은행원스러운, 나아가 조직에 속한 인물들다운 행동거지를 보이는데 이건 정말이지 이 작가만이 쓸 수 있겠구나 싶었다. 특수한 환경 속에서만 피어나는 암투나 비극은 언제나 환영하므로 - 그런 의미에서 봉준호 감독의 <살인의 추억>과 톰 롭 스미스의 데뷔작 <차일드44>를 무척 좋아한다. - 전개상의 지지부진함을 얼마든지 차치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사건이 발생한 이유, 범인의 동기를 추적하는 'why done it?' 류의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 있어 이 소설의 후반부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거액의 돈은 어째서 사라져야 했고 니시키 씨가 왜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결말과 에필로그에서 다뤄지는데 이때 마지막 파트는 신의 한 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엔 사족 같았는데 이런 여지를 남겨두다니,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감탄스러웠다. 이건 추리소설로도, 조직 소설로도 격을 상승시킨 마무리라 할 수 있겠다.


 이로써 이케이도 준의 국내 출간작은 전부 읽어봤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더는 출간이 안 되는데 작가의 명성이나 작품 완성도를 생각하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금융 미스터리라는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한 작가라지만 <하늘을 나는 타이어>를 보면 딱히 특정 이야기에 국한된 행보만 걷는 것도 아닌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작가인데 - <한자와 나오키>를 비롯해 드라마화된 작품이 한두 개가 아닌 걸로 알고 있다. -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이 출간됐으면 좋겠다. <한자와 나오키> 원작 소설을 읽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이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영상만으론 전달되기 힘든 무언가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니 꼭 글로도 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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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8.2






http://blog.naver.com/jimesking/220949507979

 

 지난 번에 본 낭독극에서 아주 운 좋은 일이 있었다. 그 낭독극 자체도 초대받아 보게 된 것이었는데 연극의 원작 소설을 추첨으로 받기까지 한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는 제목이 하도 특이해 전부터 궁금하긴 했는데 잘 됐다. 더군다나 김영하라니. 기댈 안 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장편만 읽었는데 단편집은 처음 접해본다. 낭독극의 원작 소설인 '고압선', 일전에 학교 수업 때 다룬 소설 '피뢰침'부터 몇몇 작품은 드라마화, 영화화되는 등 내가 아는 것 이상으로 유명한 책이었다. 다 읽고 나니 확실히 그럴 만했다. 김영하의 다른 단편도 궁금해졌다.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전형적인 코미디 소설. 엘리베이터 낀 남자에게 신고할 때마다 겹치는 화자의 불운이 적당히 애가 타고 적당히 긴박감 넘쳤다. 풍자하는 사회의 모습도 알기 쉬운 구석이 있어 전체적으로 생각 없이 읽어도 감흥이 남는 작품이었다. 가벼워서 감칠맛이 나는, 일반적인 통념과는 결을 달리하기도 했다.



 '사진관 살인사건'


 제목과 전혀 다른 식으로 진행될 줄 알았다. 김영하니까. 김영하는 추리소설가도 아니거니와 꼭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더라도 아무튼 추리소설을 꼭 써야 한다는 이유도 없고 제목이 저렇다고 추리소설이어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으니까. 뭐가 됐든 살인 사건 때문에 들춰진 사람들 사이의 균열을 다룬 점에서 나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잘 꾸며진 치정극이란 느낌은 강하지만.



 '피뢰침'


 번개를 맞기 위해 길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모임에 관한 이야기. 번개에 인생의 꿈이니 뭐니 이것저것 대입하면 와 닿는 바가 달라질 듯하다. 1학년 때 수업 자료로 읽은 작품인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독특하기 그지없는 작품이다. 하여튼 이런 이상한 판타지를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작가다.  



 '비상구'


 뒷골목에서 배회하는, 거침없이 내달리는 청춘들의 자화상... 이라고 평론가들이 말할 것 같다. 김영하가 지금보다 훨씬 젊었을 적에 쓴, 그러나 지금 읽어도 어색하지 않게 젊은 느낌이 물씬 베어 나오는 작품이었다. 각종 은어, 비속어 사용이 눈살 찌푸리게 만들지만 이 작품에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추측이지만 이 작품이 가장 쓰기 어려웠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고압선'


 읽는 내내 몇 개월 전에 본 낭독극이 많이 떠올랐다. 공연의 연출자가 연극으로 잘 옮긴 거더라. 솔직히 나였다면 공연으로 만들 생각 자체를 못 했을 수도 있다. 투명인간 테마에 관심이 있다면 또 모르겠는데 기본적으로 평범한 작품에 불과하다. 불륜에 빠진 화자가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인데 파멸의 방식이 강제로 투명해진다는 것이다. 생뚱맞긴 한데 사회적 활동이 완전히 봉쇄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 부분도 없지않아 있다. 없지않아 있을 뿐이지만. 오히려 제목이 '고압선'인 이유를 파악하는 게 더 의미있을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내용은 위에 링크한 낭독극 <고압선> 후기에서 다뤘다.

 이 모든 게 낭독극을 먼저 봤기 때문이 아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다. 어쨌든 거듭 말하건대 나였으면 연극화할 영감을 못 얻었을 것이다. 결과물은 상당히 좋았지만.



 p.s '사진관 살인사건'은 작가의 다른 단편 '거울에 대한 명상'과 합쳐져서 <주홍글씨>란 영화로 만들어졌다는데 관심이 간다.

여자들은 한 번쯤은 바라는 것일까. 어떤 남자가 자기를 위해 남편을 죽여주기를, 목숨을 걸어주기를. - 71p




인생을 흉내내는 영화는 인생보다 더 지겹다. - 98p




꿈꾸는 일을 위해 석 달을 하루같이 뭔가를 할 수 있는 그가 경이로웠다. 나였다면 단 일주일도 힘들었을 터이다. 세상은 그런 사람들 때문에 굴러간다. - 240~2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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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산장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7.8







 지금이야 아주 잘 나가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사실 우여곡절이 많은 작가였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고 펴낸 작품이 거의 100권에 육박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엄청난 다작 작가가 아닐 수 없는데 그렇다 보니 책을 고르는 입장에선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명탐정의 규칙> 이전의 초기작, '갈릴레오' 시리즈로 위시되는 과학적 추리소설과 현재의 드라마틱한 사회파 추리소설로 삼분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작가의 초기작들이다. 작가의 방황이 10년에 걸쳐 녹아든 시기인 만큼 작가 이름만 믿고 접근했다간 실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 <백마산장 살인사건>은 굉장히 초기에 나온 작품이다. 몰랐는데 이 작가가 세 번째로 펴낸 작품이더라. 확실히 젋었을 적, 패기 넘치는 시절에 쓴 게 역력한 작품이긴 했다. 작가의 대표작인 <용의자 X의 헌신>, <백야행>,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등을 읽은 독자라면 이 작품의 양식이 낯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본격 추리소설이라니. 영락없는 코난, 김전일 같은 추리소설인데 작가의 다른 소설에 비하면 시시한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범작 이상은 한다. 평범해서 문제지.


 초기의 히가시노 게이고는 밀실이나 알리바이, 저택 같은 고전적인 소재의 추리소설로 성공하려는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 이 작품만 봐도 그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건 아주 전형적인 추리소설이다. 지금의 히가시노 게이고도 전형적이라는 얘기를 듣지만 여기서 말하는 전형성이란 작가 스스로가 만든 스타일 자체를 일컫는다. <백마산장 살인사건>이 전형적인 추리소설이라는 건, 이전에도 숱하게 읽었던 추리소설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작가의 개성이 아직 발현되기 전의 작품이란 것이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란 이름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그런대로 괜찮은 작품이다. 어쨌든 저택을 무대로 한 고전적인 추리소설은 그 자체로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시리즈가 아닌 단독 작품임에도 캐릭터들이 나름 생동감이 있고 또 매력적이라서 그들의 여정을 쫓아가기에 모자람은 없었다.


 1년 전, 생전의 오빠가 죽은 장소인 산장을 찾은 나오코와 그녀의 친구 마코토. 밀실의 방 안에서 죽은 오빠는 살인이 아닌 자살로 처리됐는데 동생인 나오코 입장에서 아무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다. 정확히 1년 뒤, 오빠가 죽기 전에 남긴 편지를 근거로 백마산장에 숨겨진 무언가를 찾으러 떠난 나오코는 그곳에서 연쇄 살인사건에 휘말린다.

 아까부터 전형적이라는 얘기를 질리도록 했는데 작품 자체의 독창성만 봤을 때는 제법 흥미를 돋우는 요소가 많다. 몇 년에 걸친 연쇄 살인사건의 내막이 일단 독자들로 하여금 궁금증이 일게 하고 범인의 정체와 동기, 그리고 무엇보다 백마산장 자체의 개성에도 눈길이 간다. 한 영국인이 지었다는 백마산장에는 방마다 영국의 전래 동요인 머더구스가 한 편씩 남겨져 있는데 이는 백마산장에 오는 손님들에게 수수께끼로써 다가온다.


 밀실 살인사건, 연쇄 살인, 암호. 이 작품을 요약하면 이렇다. 암호와 관련된 머더구스의 가사의 내용은 한국인인 나로서는 생소하기 그지없어 솔직히 시큰둥했다. 결국 주인공들과 함께 추리에 동참하기 보단 맹목적으로 따라가게 된 건 아쉬웠다. 수동적인 독서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그래도 후반부에서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은 인상적이었다. 더불어 에필로그는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욕심은 참 덧없다니까.

 이렇게 보면 히가시노 게이고도 고전적인 추리소설을 나쁘지 않게 쓰긴 하는데 당시엔 작가로서 돈벌이도 안 되고 무엇보다 더 뛰어난 작가 - 노리즈키 린타로, 아리스가와 아리스... - 에 비하면 어딘가 어설프니 결국 회의감이 들었나 보다. 이후 작가는 <명탐정의 규칙> 이후로 전혀 다른 양식의, 혁신적인 추리소설을 잇달아 발표하는데 초기의 그의 작풍과 비교하면 정말 판이하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처음 접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대표작부터 읽을 테니 이와 같은 초기작은 상대적으로 어색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가의 팬이라면, 히가시노 게이고에 지대한 관심이 생겼다면 초기작의 작품도 나쁘지 않게 읽힐 것이다. 좀 실망스러울 순 있어도 그 나름의 매력 또한 분명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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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날개 재인 가가 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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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워낙 다작 작가인지라 이제 히가시노 게이고란 이름만 보고 작품을 읽을 수 없게 됐다. 처음 접했을 땐 대표작들만 읽어서 최고의 작가라 생각했지만 몇몇 범작을 접하니 차츰 무턱대고 골라선 안 된다는 경각심이 생기게 됐다. 그래도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무리 못 써도 범작 정도니... 라고 생각했으나 최근 들어서는 그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가 형사' 시리즈라면 얘기가 다르다. 데뷔한 지 30년이 넘었지만 가가 형사가 등장하는 작품은 10작품 정도라는 것에서 작가가 이 시리즈를 얼마나 공들여 쓰는가 짐작할 수 있다. 그 짐작은 틀린 적 없이 매 작품마다 안정적인 완성도를 자랑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도시 한복판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피해자, 그 죽음에 얽힌 진상을 파헤치려는 형사 가가의 얘기다. 사건의 양상은 무척 단순하고 유력한 용의자도 잡혀 사건은 금방 해결될 것 같았다. 비록 용의자는 의식 불명인 상황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피해자가 죽기 전의 행적이 조금씩 밝혀지자 수사 방향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흐르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사회파 추리소설은 오랜만에 읽었다. 나는 이 작가 덕분에 사회파 추리소설을 처음 접했는데 그 당시에 느끼곤 했던 전율이 다시금 떠올라 읽으면서 참 반가웠다. 이제는 전형적인 느낌도 들고 또 심리 묘사가 너무 단순한 게 아니냐며 심드렁해 할 법도 한데 쉽사리 빈정대지 못하겠다. 아무래도 살인 사건과 마주한 가가 형사의 진정성 있는 태도에 감화됐기 때문인 것 같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 있는데 이 작품에 너무나 잘 맞는 말인 것 같다. 표면상으로 유력 용의자가 검거돼 논리적으로 동기를 추론해서 해결했다고 서류 작업을 해봤자 실상 끝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기껏해야 형사들의 업무가 끝났을 뿐, 사건의 당사자들에게는 그 무엇도 끝나지 않은 것이다.

 추리소설이란 모름지기 범인을 잡으면 끝나는 소설이라고 인식했었던 나에게 위와 같은 가가 형사의 신념은 꽤 충격적이었다. 직업으로서의 형사와 인간으로서의 형사가 추구하는 가치가 완전히 다르고 후자의 형사야말로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한다는 게 어린 나에게 꽤 남기는 바가 컸다.


 사실 이 작품은 이미 영화로 접했다. 도이 노부히로 연출에 아베 히로시 주연의 영화로 당시 드라마로 흥행에 성공한 '가가 형사' 시리즈를 완전히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그 특유의 드라마를 워낙 잘 살린 덕에 원작마저 바래 보이게 만드는 느낌을 받곤 했다. 드라마 <유성의 인연>과 <신참자>, 그리고 이 작품 <기린의 날개>가 그랬다. 어디 가서 가독성 좋다는 얘긴 빠지지 않고 듣는 작가지만 그와 동시에 가독성밖에 없는 문장이라는 얘기도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게 떠올랐다.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는 문장력이 뛰어난 작가는 아니다. 이번에 그걸 제대로 느꼈다. 표현도 어딘가 상투적이고 심리 묘사도 겉만 핥는 식으로 싱겁다. 하필 영화를 먼저 봐서 - 이게 다 소설이 늦게 번역 출간됐기 때문이다... - 여러모로 비교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작가의 단점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작가의 장기인 스토리 텔링, 설정, 주제의식의 진가를 깎을 정도는 아니지만 전에 없이 눈에 밟혀 괜히 안타까웠다.


 유달리 단점을 인식하긴 했어도 작가의 장점 또한 역할을 다했다. 살인 사건을 둘러싼 인간미 있는 접근은 역시 사회파 추리소설의 귀감이 될 만했다. 혹자는 미스터리와 반전이 약하다고 하던데 나는 분량 분배가 미흡한 것을 제외하면 추리소설로도 충분히 만족하며 읽을 수 있었다. 띠지에서처럼 '가가 형사' 시리즈 최고의 걸작이라고는 못하겠지만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하려는 가가 형사의 노력 덕분에 작품은 예측불가하게 전개됐다. 얼핏 보면 단순하게만 보이는 사건에 저렇게 복잡한 이면이 숨겨졌다는 것과 그를 밝히는 과정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는 사회파 추리소설이란 형식과 연동된 재미라서, 한마디로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은 몰입도를 선사해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감동이 녹아든 반전과 결말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아주 좋았다. 누구는 신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정도면 그렇게 심하지 않다. 무미건조한 편에 속하는 작가의 문장 덕분인진 모르겠는데 모르긴 몰라도 눈물을 짜내기 위해 애쓰는 기색은 읽어낼 수 없었다. 부성애와 후회, 소통 없이 단절된 가족 관계가 긴밀하게 연결됐고 아이에게 올바른 가치관을 심지 못하는 모든 어른을 겨냥한 일침은 특히 기억에 남았다.


 물론 이런 요소가 작가의 다른 작품들 어딘가에서 한 번쯤 본 것 같아 좀 식상한 감이 없지않아 있긴 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그렇게 심드렁하진 않다. 어쨌든 작가의 장기가 빈틈없이 녹아들었고 게다가 주인공이 있는 시리즈물다운 주인공의 개인사도 적잖이 개입시키는 등 전체적으로 볼거리가 풍성해 즐기기에 부족함이랄 게 없었다.

 '가가 형사' 시리즈의 9번째 작품까지 읽어봤다. 일본에는 10번째 작품까지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나오든 기다리고 있겠다. 반드시 읽을 용의가 있으니.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 243p




살인 사건이란 게 암세포와 같아서 일단 생겼다 하면 그 고통이 주위로 번진단 말이지. 범인이 잡히든 수사가 종결되든, 그 고통에 의한 침식을 막기가 어려워. - 249p




가가 씨가 본 것은 시체지 살아 있는 사람의 죽음이 아니에요. 저는 죽어 가는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어요. 죽음을 눈앞에 두었을 때 사람은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죠. 자존심이나 의지 같은 것을 다 버리고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마주하게 돼요. 그런 그들의 마지막 메시지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의무예요. - 313p




공식을 기억하면 여러 가지 문제를 풀 수 있죠. 그런데 처음에 잘못 기억하면 똑같은 실수를 계속 반복하게 됩니다. - 3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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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서의 겨울
엘리자 수아 뒤사팽 지음, 이상해 옮김 / 북레시피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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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한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엘리자 수아 뒤사팽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낸 소설이다. 혼혈로서 겪어야 했던 필연적인 정체성 혼란을 속초에서의 기묘한 사랑 이야기로 발현해냈다. 쉽게 설명하면 이런 내용인데... 대부분의 프랑스 소설이 그렇듯 이 작품도 난해한 구석이 적잖았다. 그리고 그 이전에 한국인으로서 느낄 수밖에 없는 어색함도 있어 조금 아쉬웠다.

 실제 저자는 프랑스에서 살았지만 작품 속 주인공은 속초에서 사는 것으로 변경했다. 이런 설정은 나름 인상적이긴 한데 정서적으로 와 닿거나 혹은 실질적으로 전달된 바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건 그냥 혼혈인 주인공이 얀 케랑이라는 만화가와 교감을 나누는 이야기다. 부분적으로는 혼혈만이 가질 수 있는 시각이 드러나 흥미롭긴 했지만 그게 작품 속에서 겉도는 느낌이 있었다. 사랑 이야기 자체도 지지부진한 편에 속하는데 괜히 애매하게 정체성 이야기와 결부시키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니게 된 것 같다.


 글쎄, 작가가 작품 속에 자전적인 요소를 얼마든지 넣어도 상관 없다고 본다. 중요한 건 작품에 결정적으로 필요한 요소였는가의 여부인 것 같다. 냉정하게 말하면 작가의 사정 같은 건 독자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은 것이고 요는 작품의 완성도와 설득력이다. 작중의 한국에 관한 묘사가 한국적이지 않고 다분히 외국인의 시선인 것만 같았던 건 기분 탓이라 치부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이야기의 무대가 꼭 한국이어야 할 당위성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럼 한국이면 안 될 당위성이 있냐고 묻는다면 나는 작가에게 익숙한 요소일수록 작품이 자연스러워진다고 대답하겠다. 작가조차도 낯설어 하는 무대를 얘기해봐야 어설프게 보일 뿐이다. 이 작품에 국한된 얘기는 아닌데 아무튼 시도에 비해 성과는 미미해 읽는 내내 어딘가 답답했다.

 속초는 최근에 여행을 간 적이 있어 - 하필 그때 여행 시기가 겨울이었다. - 제목에 눈에 띈 책이었다. 무슨 얘기일까 싶어 읽었는데 예상 외의 정경이 펼쳐져 의외였다. 확실히 겨울의 속초는 황량한 데가 있었다. 나쁘지 않은 장소 선정인데 작중에서의 묘사는 크게 두드러지지 못했다. 프랑스의 노르망디와 동일선상에 놓고 뭔가 의미를 찾아내긴 했는데 이거야말로 지극히 외국인스러워서 거리감이 있었다. 번역의 문젠가? 어째 하나같이 시큰둥하기 그지없었다.


 친구 중에 속초가 고향인 녀석이 있는데 괜히 또 들러보고 - 겨울에 간 것도 친구 때문이었다. - 싶었다. 여름은 또 어떤 풍경일지. 뜬금 없지만... 이런 말이 아니고서야 이 할 말 없는 책에 대한 감상을 끝맺을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어떤 식으로라도 추천하기 애매한 작품은 곤혹스럽다.

결국, 글쓰기는 내가 현실에서 찾아내지 못한 거처를 창조해내는 방법이었던 것 같다. 모든 경계 너머에서 모든 공간이 동일할 수 있고 모든 상상이 가능한 그런 거처 말이다. - 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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