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악몽과 계단실의 여왕
마스다 타다노리 지음, 김은모 옮김 / 한겨레출판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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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3 







 근래 접한 데뷔작 중 가장 좋았다. 이렇게 수록작 전부가 완성도가 고른 경우는 흔치 않아 읽는 내내 감탄했다. 난 또 표제작이나 수상작만 좋을 줄 알았지. 작가의 데뷔작이라던데 이 작품 이후의 다른 작품도 볼 수 있길 바란다. 



 '매그놀리아 거리, 흐림' 


 투신 자살하려는 사람을 말리기는커녕 자살을 부추기는 무책임한 군중 심리를 짜증을 유발하는 인질극을 통해 꼬집는 이야기가 독특했다. 또 세속적인 목적 없이 악의로만 똘똘 뭉친 범인에게 주인공이 끝까지 농락 당하는 전개가 몰입감이 넘쳤다. 상대가 제대로 돌아버린 작자이기에 대적할 방도가 없는 데서 비롯되는 무력함이 독자 입장에서도 확실히 와 닿았다. 그야말로 악몽이라 부르기에 적합했는데, 주인공이 억울한 한편으로 인과응보라는 느낌도 없잖았던 만큼 뒷맛이 한없이 찝찝했다. 같은 소설추리 신인상 수상작인 미나토 가나에의 <고백>의 첫 번째 수록작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시시각각 변하는 사건의 양상이나 결말까지. 



 '밤에 깨어나' 


 반전이 사족이었던 걸 제외하면 아주 좋았던 작품. 대학도 안 가고 변변한 직장 없이 부모 집에 얹혀 산다는 이유로 주인공이 오해에 시달리다 미쳐버리고 끝끝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파멸에 이르는 전개가 끔찍했다. 밤길에 욱하는 심정으로 여자를 겁주려고 한 그 장면만 놓고 보면 이 주인공이 경솔하다고, 한마디로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냐고... 이러니 의심을 받지' 하고 한숨이 나오지만,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점점 악의가 솟아 오르는 주인공의 심리를 실감나게 표현했기에 맥락상 자연스럽게 읽힌 게 돌이켜보니 참 무섭게 느껴졌다. 어떤 수순으로 전개될지 뻔히 보였지만 그렇기에 수록작 중 가장 필력이 돋보였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복수의 꽃은 시들지 않는다' 


 왠지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들이 연상되는 복수극이었다. 앞선 두 작품에 비해 주인공이 상대적으로 덜 억울하게 느껴지고 인과응보가 적절히 이뤄지지 않았나 싶다. 그래, 이 단편집은 억울함과 인과응보 사이의 짜증남과 씁쓸함에 잘 주목하고 있는데 이 세 번째 작품의 주인공은 누명을 썼다기 보단 타인의 범죄에 가담했고 시간이 흘러도 남의 탓을 하는 모습 때문에 - 그래서 더 인간적이었지만 - 그리 동정심이 일지 않았던 것 같다. 뭐, 그래도 다음 작품의 주인공에 비하면 이 정도면 양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계단실의 여왕' 


 어떤 의미에서 가장 별로였던 작품. 주인공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기 싫어서, 그리고 열등감이 폭발해서 계단에서 넘어진 이웃을 위해 구급차를 부르지 않은 것까지 이해하겠는데, 그 이후의 행보가 너무나 멍청해서... 정말이지 비호감도 이런 비호감이 다 있나 싶었다. 계단을 오가는 복잡한 전개 내지는 트릭이 있어 일본추리작가협회상 후보에도 오른 것 같은데 전개나 결말이 너무 뻔해서 수상이 불발이 된 게 납득이 갔다. 계단을 소재로 다룬 걸 빼면 그렇게 신선하지도 않았고. 단편집을 읽다 보면 표제작만 좋은 경우가 은근히 많은데 이 책은 정반대였다. 차라리 이 작품이 제일 첫 번째로 수록됐으면 어땠을까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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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복복서가 x 김영하 소설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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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오랜만에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읽어봤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실망했다. 전에 동기로부터 이 책을 두고 신랄하게 비평한 게 기억이 나는데 내용은 이렇다. '편집자의 개입 없이 작가 본인이 내키는 대로 글을 쓰는 것은 위험하다.' 동기가 말한 '편집자의 개입 없이' 라고 말한 부분은 잘 와 닿지 않았지만, 이 책의 수록작들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는 다소 가볍게 집필됐다는 느낌은 확실히 부정하기 어려웠다. 사실상 이상문학상 후보작이었던 '아이스크림'을 제외하면 김영하식 재기 발랄함은 있을지언정 완성도는 미묘하거나 떨어져서... 작가의 어지간한 팬이 아닌 독자한테 함부로 추천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아이스크림' 


 한 젊은 부부가 평소 자주 사먹던 아이스크림에 이상한 냄새가 나자 컴플레인을 거는 소동을 그린 단편. 자기들의 입맛이 이상한 걸까봐, 공연히 일만 키운 데다 양치기 소년 취급을 당할까 노심초사하는 묘사들이 공감 갔다. 특히 컴플레인을 걸면서도 긴장을 해야 하는 특수하고 씁쓸한 상황 설정은 어디서도 당당하기 쉽지 않은 젊은 세대의 서러움... 같은 것을 생각해볼 여지를 남겨 제법 인상적이었다. 이런 감성을 보면 이 작가가 왜 '젊은 작가'로 불리는지 대번에 느껴진다.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인간의 연애사에 대입한 시시한 소설. 3원칙의 맹점이 충돌해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지는 로봇 서사의 묘미를 김영하 작가치고 너무 소모적으로 다루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착안점은 나름 괜찮았지만 - 정말로 로봇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선하고 좋았다. - 결과적으로 로봇인지 무엇인지 모를 남자가 자기가 로봇이며 로봇 3원칙의 충돌을 핑계로 여자 곁을 떠났다는 이야기에 불과해 솔직히 소재가 아깝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SF 애독자들은 아예 거품 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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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스릴러 - 스릴러는 풍토병과 닮았다 아무튼 시리즈 10
이다혜 지음 / 코난북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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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일전에 읽었던 <아무튼, 방콕>이 괜찮아서 다른 '아무튼' 시리즈엔 어떤 책이 있을까 둘러보았다. 그 무수한 책 중에 이 책의 제목이 단연 눈에 띄었다. 제목도 제목이지만 저자의 이름도 낯익었는데 이렇게 책으로 접하기는 또 처음이라 사뭇 기대가 됐다. 

 저자가 서두에서 밝히듯 스릴러는 명쾌하게 설명이 가능한 장르가 아니다. 워낙에 나뉘는 갈래가 다양하기에 일목요연하게 스릴러란 이렇다 하고 정의 내리기란 저자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하긴 고작 '단순히 스릴이 있고 범죄가 묘사된 소설'이라는 식의 정의를 읽으려고 이 책을 집어든 게 아닌 만큼 서두에서부터 겸손하게 스릴러의 정의 내리기를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 더 인상적이었다.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스포일러를 최대한 절제한 다양한 작품 소개와 스릴러를 좋아한 사람들 사이의 공감대를 풀어낸 것이다. 전자에 대해 얘기하자면, 대관절 스포일러의 기준은 어디까지이며 어느 정도의 스포일러가 이로운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다. 내가 추리소설로 독서에 입문했다 보니까 블로그를 시작할 때부터 스포일러 없이 글을 쓰는 것을 의식하게 됐는데, 책에 적혀있는 고충, 가령 스포일러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씁쓸함 등이 퍽 공감이 됐다. 다른 장르의 독자들 사이에선 은근히 스포일러가 크게 중요하지 않은 모양인데, 반전이 참 중요하긴 해도 거기에 함몰돼 글을 읽고서 사람들에게 감상을 들려주는 재미가 추리소설 독자들 사이에서 너무 제한되는 것 같아 아쉽기 그지없다. 스포일러 없이 소개하는 것도 기술이라지만 작품에 따라선 한계가 있는 법. 너무 대놓고 악의적인 스포일러가 아니라면 좀 더 관대하게 넘어가도 괜찮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작가가 연구를 많이 한 모양인지 글에서 언급된 작품들이 하나 같이 절묘하게 소개됐다. 내가 읽었던 작품들이 거의 스포일러 없이 소개되는 것을 보고 내가 아직 접하지 못한 작품들을 거론할 때 노심초사하지 않게 되더라. 역시 괜히 유명한 사람은 아니구나 하고 감탄했다. 


 스릴러,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눈치가 보일 때가 있다. 은근히 추리소설을 잔인하고 저속할 뿐인 소설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이 많더라. 특히 우리 부모님 세대엔 그런 인식이 만연해서 내가 막 추리소설에 빠져들었을 때 어머니와 마찰이 잦았다. 결국엔 내가 추천한 소설들,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나 <이니시에이션 러브> 같은 '추리소설 같지 않은' 추리소설을 읽고서 내가 잔인하고 저속한 소설을 읽는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는데, 이는 내가 어머니 아들이니까 가능했지 생면부지의 남에게 통용되는 방식은 아닐 테다. 내가 어머니에게 했던 '속는 셈치고 읽어봐라' 라는 말에 다른 사람까지 귀 기울이리라곤 기대하기 힘드니까 말이다. 

 선입견이 강하면 강할 수록 그 선입견을 공고히 하려고 하지 그 선입견을 굳이 깨려고 한 걸음 양보하는 사람은 그렇게 흔치 않다. 하물며 추리소설은 '잔인하고 저속할 뿐인 소설'이란 선입견은 일견 맞는 소리지 않나 싶을 정도로 그 이미지를 일부러 깨지 않으려는 잔인하고 저속할 뿐인 소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에 무턱대고 유명하거나 혹은 베스트셀러를 읽어볼 것이 아니라 자기 취향에 맞는 추리소설을 추천해줄 만한 사람을 찾아가거나, 아니면 이렇게 전문가가 쓴 책으로 감을 잡아보길 바란다. 추리소설 읽어봤는데 별로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서점에서 가장 눈에 띄는 책을 무작정 읽어본 경우다. 내 생각에 추리소설/스릴러 장르는 아무 책이나 집어들어도 될 만큼 천편일률적인 장르가 아니므로 저런 식의 접근은 시늉에 불과하다고 추리소설 애독자로서 감히 말해보겠다. 


 이 책은 위에서 말했듯 스릴러란 장르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지는 않지만 150쪽도 안 되는 짧은 분량 속에서 장르의 세부적으로 어떻게 구분되고 특징들을 다양하게 분석했다. 특히 코지 미스터리, 이야미스, 여성 작가가 쓰는 여성이 주인공인 스릴러 등에 대한 분석은 서점가에서 범람하다시피 하는 추리소설/스릴러 코너에서 괜찮은 길라잡이가 될 듯하다. 내게 새로운 내용은 없었지만 그 하위 장르들의 묘미와 요즘 각광 받는 이유, 대표작들의 소개는 제법 구미가 당기게끔 - 이미 읽은 작품도 다시 읽고 싶어졌다면 말 다했다. - 썼다. 

 아울러 스릴러 장르와 실제 잔인한 사건과의 불편한 공생 관계,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은 잔인한 심성을 좋아하리란 불쾌한 꼬리표, 왜 우리는 스릴러에 열광하는가에 대한 작가의 분석도 괜찮았다. 이 부분도 내겐 그렇게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스릴러의 'ㅅ'자도 모르는 사람에겐 진정성 있게 읽히길 바란다. 정말로 잔인한 걸 좋아해서 스릴러를 읽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다 잔인한 현실에 대한 대리 만족을 위해서 읽는 사람이 더 많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 작가처럼 '내가 이렇게 스릴러에 좋아하는 것이 괜찮은 건가?' 하고 자문하는 사람 또한 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모든 사람이 천편일률적이지 않듯 모든 추리소설가들 역시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당연히 그들이 집필하는 작품들이 천편일률적일 리 없다. 일단은 스릴러로 명명되는 작품들이 세부적으로 들여다봤을 때 오히려 스릴러란 단어 하나로 묶기에 힘들다는 것을 설명한 것만으로 이 책은 소임을 다했다고 본다. 어설프게 정의를 내리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영양가 있었다. 한마디로 스릴러를 좋아하는 사람, 스릴러를 모르는 사람, 이제 접하려는 사람 모두에게 추천할 수 있는 책이었다. 

놀이의 도구가 신뢰라는 말은, 자칫하면 신뢰와 애정 모두를 놓치는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48p



그래서 범죄물을 읽는다. 이해할 수 없는 악의의 정체가 궁금해서, 불가능해 보이는 범죄가 이루어지고 또 그것을 해결하는 천재적인 두뇌플레이를 보고 싶어서, 그 안에서는 언제나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서사 안에서 안전한 쾌락을 느끼고 싶어서. 하지만 ‘내가 파는 장르‘가 무엇을 소비하는지 알고는 있어야 한다. - 116p



현실이 잔인하다고 잔인한 설정을 한껏 이용하는 창작물을 즐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현실의 문제를 픽션의 연장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픽션‘과 ‘픽션 같은‘은 전혀 다른 말이다. 픽션을 픽션으로 즐기려면 현실의 문제를 현실에서 해결하려는 책임감이 필요하다.

나는 여전히 스릴러를 좋아한다. 그 사실은 종종 나를 괴롭게 한다. 내가 ‘파는‘ 장르의 구성 성분이 무엇인지, 쾌락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를 생각하는 일이 그렇다. 스릴러가 현실의 피난처로 근사하게 기능해온 시간에 빚진 만큼, 현실이 스릴러 뒤로 숨지 않게 하리라. - 13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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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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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8.3 






 8년 뒤에 운석이 충돌해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동시에 죽는다는 초유의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종말이 예고된 직후가 아닌 5년 정도가 지난 애매한 즈음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람들은 패닉에 빠지고 범죄가 들끓고 대책을 강구해보기도 하지만 그래봤자 운석 충돌은 기정 사실이며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기까지 5년이 걸렸다고 소개된다. 

 현재 시점은 남은 3년을 평화롭게 보내다 모두 다 같이 종말을 맞이하는 게 그나마 낫다고 다들 암묵적으로 합의한 상태이며 이 애매한 상황이 도리어 신의 한 수로 적용돼 이 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제는 무언가를 이루기도 포기하기도 애매한 3년, 희망을 갖는 것은 물론 절망에 빠져 하루 하루를 낭비하기도 뭔가 아까운 이 3년이란 시간을 앞두고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인생을 찬양하거나 해묵은 감정을 풀어낸다. 소재와 분위기가 독특한 것에 비해 이야기의 담론이 식상한 에피소드도 있었고 이사카 코타로가 쓴 것치고 정교한 퍼즐식 구성의 묘미가 옅다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다루는 주제가 종말이 아닌 인생에 초점이 맞춰진 만큼 때에 따라서 당장은 식상했던 얘기도 달리 읽힐 것으로 기대된다. 


 개인적으로 코믹스가 더 재밌었지만 코믹스에서 미처 다뤄지지 않은 소설만의 에피소드가 있어서 예전부터 원작도 읽어야지 하고 벼르고 있던 작품이다. 결혼 생활 내내 아기가 생기지 않아 기대도 하지 않던 찰나에 아이러니하게도 종말 3년을 앞두고 임신이 된 부부의 에피소드와 꿈이 좌절된 배우 지망생이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이웃 사람들의 소중한 사람을 연기하며 관계를 쌓아가는 에피소드다. 분량 문제 때문에 그랬나? 이 두 작품이 다른 수록작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진다거나 몰개성하지도 않은데 코믹스에서 왜 다루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특히 부부 에피소드는 차원이 다른 감동을 선사했으며 또 결말도 좋았기에 소설로만 접할 수밖에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 무슨 연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코믹스에서 만족하지 않고 원작을 찾아본 보람이 있었다. 

 종말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작중에서 학교는 폐교하고 유통이나 경찰, 언론, 정치인 등의 직업은 소수의 직업적 사명감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사실상 전 지구가 휴업 상태에 돌입했다는 구절이 씁쓸하게 읽혔다. 우리는 미래가 막연하고 불안한 한편으로 그렇기에 꿈을 꾸며 노력하며 살아가기도 하는데 미래가 차단당하면서 삽시간에 패닉에 빠질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상상해볼 수 있었다. 교육이라는 게 꼭 좋은 대학이나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해 밟는 절차도 아닌데 종말이 머잖았다는 이유로 더는 누구도 학교에 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게 왜 그렇게 씁쓸하게 느껴지던지... 우리는 미래를 의식하지 않으면 현실에선 자포자기한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동물이란 말인가. 이렇게 무기력한 동물이 어딨을까 싶어 '현재를 살아라' 라는 격언이 남달리 들렸다. 그래, 쉽지 않지만 어쨌든 남은 기간 동안 현재를 살아야 나중에 후회가 덜 남을 테니까. 


 작가 특유의 골때리는 사람들의 등장이 덜하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다른 작품 속 주인공이 출현하지 않은 것 등 작가의 다른 작품과도 차별적인 구석이 많았다. 듣자 하니 작가가 처음으로 추리소설 외의 다른 장르의 소설을 집필해달라는 의뢰를 받고서 쓴 연작 소설이라고 한다. 따지고 보면 이사카 코타로가 작정하고 추리소설을 쓰는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보아하니 이 작품을 기준으로 다양한 작풍에 도전하게 된 건가 싶어 이 작품이 다른 의미에서 대단하게 읽혔다. 

 처음에 말했듯 군데군데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추리소설을 쓰고 싶은 유혹을 잘 견뎌낸 것 같아 그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렇게 장르적인 재미를 절제한 작품을 접하니 이후 출간작의 남다른 무게감의 원천이 마냥 타고난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문단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을 추구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인 듯하다. 

내일 죽는다면 인생이 바뀝니까?

지금 당신의 인생은 몇 년짜리 인생입니까? - 2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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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무더위 - 살인곰 서점의 사건파일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문승준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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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하무라 아키라' 시리즈 2부에 해당하는 <조용한 무더위>는 작가의 장기인 블랙유머와 서늘한 분위기, 그리고 추리소설이란 장르에 대한 애정이 유감 없이 발휘된 단편집이다. 하무라 아키라가 서점에 적을 두다 보니 전작 <이별의 수법> 때와 마찬가지로 서점과 출판계를 배경으로 사건이 펼쳐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독특한 분위기가 퍽 아기자기하게 다가왔다. 왜 진작 이런 식으로 설정을 짜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서점과 하무라 아키라는 정말 딱 맞는 궁합이었는데,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눈도 침침하고 탐정으로서의 능력도 미묘하게 허술하고 무엇보다 '불운함'이 이 아기자기한 설정과 맞물려 쉬지 않고 폭소를 유발했다. 그래봤자 유머는 곁가지에 불과하다지만 데뷔 때부터 코지 미스터리를 써온 작가답게 능수능란하게 잔재미를 녹여낸다. 덕분에 코지 미스터리라기엔 심각하기 이를 데 없는 사건이 다뤄짐에도 틈틈이 킥킥거리며 술술 읽어나갈 수 있었다. 



 '파란 그늘' 


 개인적으로 첫 번째 수록작이 표제작보다 더 재밌었다. 이제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하무라 아키라라지만 탐정으로서의 실력은 아직 건재함을 알린 것과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범인을 궁지로 몰아가는 소설의 절묘한 구성에 깜짝 놀랐다. 특히, 재밌긴 하나 별로 대단한 설정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살인곰 서점이란 배경이 십분 활용돼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하무라 아키라의 책임감 내지는 도덕성을 엿볼 수 있던 것도 인상적이었다. 



 '조용한 무더위' 


 표제작이자 작년에 나온 드라마 <하무라 아키라>에서도 다뤄진 작품이다. 허무함이 남발되는 코믹한 전개 이면에 숨겨진 서늘한 범죄 계획이 하무라 아키라의 불운과 촉으로 끝끝내 저지당하는 결말이 놀라웠다. 일본의 여름을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작중에서 묘사되는 더위의 수위가 종이 너머로 십분 전해졌는데, 그 와중에도 추리소설 특유의 서늘함을 전달한 작가의 필력이 실로 절륜하게 느껴졌다. 하무라 아키라의 촉도 마찬가지다. 이 정도면 정말 명탐정이 따로 없다... 



 '소에지마 씨 가라사대' 


 시리즈 최초의 안락의자 컨셉인 것도 신기했고 반가운 캐릭터가 등장해서 반갑기까지 했다. 여러모로 골때리는 상황 속에서 최소한의 책임감과 움직임으로 사건을 무마하는 전개가 속도감 있고 좋았으며 결말도 기억에 남았다. 소 뒷걸음질 치다 쥐를 잡는다고 했던가. 탐정에게 잘못 걸리면 정말 어떻게든 죄가 탄로 나기 마련이다. '트러블 메이커'라는 하무라 아키라의 이전 별명이 오랜만에 떠오르는 결말이었다. 



 '붉은 흉작' 


 중반부의 몰입도는 그저 그랬지만 도입부와 결말이 제법이었다. 하무라 아키라가 탐정이지 정의의 사도까진 아니라는 이 시리즈의 컨셉, 혹은 작가의 가치관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누가 자신에게 사건을 맡기려고 하면 장난하지 말라며 툴툴대다가도 막상 조사를 시작하면 자기 사전엔 적당히란 말은 없다면서 끝장을 보고, 사건이 일단락이 난 후에도 어느 정도 사후 책임에 신경을 쓴다. 이러니 이 캐릭터에 애정이 안 갈 수가 없다. 



 다음 작품인 <녹슨 도르래>는 장편이고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멘탈 붕괴 수준의 전개가 펼쳐진다고 하니 기대가 된다. 이 책을 읽으니 단편도 나쁘지 않지만 난 작가의 장편이 더 취향에 맞는구나 싶어서 - 작가의 주 종목이 단편이라는 데엔 어느 정도 동의는 하지만. - 다음 작품도 조만간 찾아 읽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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