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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을 담은 배 - 제129회 나오키상 수상작
무라야마 유카 지음, 김난주 옮김 / 예문사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10
국내에 번역된 일본 문학 중 남자는 양억관, 여자는 김난주가 번역을 도맡는다, 부부인 두 사람이 다 해먹는다는 등 우스겟소리가 있을 만큼 번역가 김난주 씨의 작업량은 실로 엄청난 편인데, <별을 담은 배>는 그 김난주 씨가 재번역을 하게 되면서 화제를 모았던 소설이다. 말인즉슨 이전에 한 번역이 성에 차지 않아 다시 번역했다는 것인데,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어 이 소설을 다시 펼쳐봤다.
<별을 담은 배>는 나도 십여 년 전에 감명 깊게 읽은 작품이며 당시 후기를 쓸 때도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한계를 마주하기도 하는 등 감상을 남기기가 생각보다 까다로웠던 기억이 난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디테일한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아 완전히 새로 읽는 기분으로 읽을 수 있었고, 그 탓에 김난주 씨가 이전의 번역에서 아쉬움을 느꼈고 다시 번역할 땐 어떻게 개선했는지는 하나도 파악할 수 없었다. 소기의 목적은 흐지부지됐지만 시작이 어쨌든 기억에 잊힌 멋진 작품 하나를 다시 읽게 된 것에 더없이 만족감을 느낀다. 점수를 보면 알겠지만 아마 올해 읽은 최고의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소설에 대해 얘기할 때 김난주 씨의 재번역이라든가, 아니면 나오키상 수상작이라는 것도 부차적인 얘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에 격찬을 아끼지 않는 상당수의 독자들 모두 책의 마지막 수록작 '별을 담은 배'에서 조선인 위안부 미주와 시게유키의 이야기에 전에 없는 울림을 받은 것이 한목했을 터다. 일본인 입장에서 왜곡 없이 바라본 조선인 위안부의 비극적인 처지는 작품의 완성도를 높여주는 핵심 요소였고, 그전까진 만악의 근원으로 여겨진 독불장군 시게유키의 반전 과거가 드러남으로써 사랑엔 한 사람을 살릴 수도 망칠 수도 있는 극단성이 있음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킴과 동시에, 이 작품이 캐치 프레이즈대로 '세속적인 행복보다 자유로운 불행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임을 납득시켜주는 역할까지 겸해 압도적인 여운을 안겨주기까지 한다. 이는 한국인 독자라서 후하게 하는 말이 아닌 세계 어느 나라의 독자라도 비슷하게 얘기하리라 확신한다.
이 작품은 불륜은 기본에 이복 남내의 금단의 사랑 등 자극적인 소재가 넘쳐나지만, 작중 시게유키의 말마따나 사랑과 성에 관한 문제는 만연한 것인데 꼭꼭 숨겨 얘기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강해 괜히 더 비밀스럽고 더 음습해지는 것 같다. 책의 수록작 모든 이야기에 이 말이 해당되진 않지만 대체로 사랑에 죽고 사는 이들의 방황이란 점에서 이 작품이 울리는 바는 국경을 넘어 내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론 표제작 '별을 담은 배'와 더불어 미쓰구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왜 나는 나일까'도 인상적으로 읽었는데,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열정도 존재감이 사라지는 심리와 그런 무력감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이 건전하든 불건전하든 어딘지 연민을 자아내 어딘지 가장 이입이 되는 이야기였다. 미쓰구의 딸인 사토미도 마찬가지였다. 얘는 사랑과 장래 모두 순탄치 못한 과정을 겪거니와 배신을 당하기도 배신을 하기도 하는 등 작중 인물 중 유일하게 과거가 아닌 현재 진행형으로 극적인 일을 겪기에 희로애락의 순간이 내 일처럼 가슴이 아렸다.
작품의 등장인물 모두 미우나 고우나 응원하고픈 인물들이다. 마지막에 선을 넘을 듯 넘지 않은 아키라와 사에, 불륜 관계를 정리하고 새출발의 기미를 보이는 미키와 미쓰구, 할아버지인 시게유키를 통해 전쟁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계획했던 대로 이룬 사토미, 오랫동안 품고 있던 비밀을 털어놓은 뒤에 하늘의 별이 됐을 전처와 후처가 타고 있을 배를 상상해보게 된 시게유키 모두 여섯 편의 수록작에서 살아 숨쉬어 경멸하면서도 격려하게 되는 입체적인 인물들로 다가왔다.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라 생각하는데 이 작품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소설에 완벽히 부합하지 않나 싶다. 그래서 책의 여운에서 못 벗어나는 것 같다.
아... 이게 아닌데. 나름대로 분전했지만, 이번에도 책을 읽고 받은 감명을 완벽하게 풀어내지 못한 것 같다. 김난주 씨가 재번역을 했듯 나는 재재감상을 남겨야 할 듯하다. 세대를 아우르는 책의 내용의 특성상 여기서 십 년 뒤에 다시 읽어도 이번처럼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읽어내려갈 수 있을 테니 그날이 몹시 기대된다.
왜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지 못한 것일까. 왜 나는 나일까. 대체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중략)‘뭐, 어때.‘ 어디로 가든, 어차피 선로 위, 언젠가는 원치 않아도 어느 역에든 도착한다. - 288~289p
사과를 하고 마음이 편해져서 자신이 한 짓을 잊어버릴 정도라면, 차라리 사과하지 않고 후회를 껴안은 채 평생을 사는 것이 낫다는 얘기다. - 359p
행복이라 할 수 없는 행복도 있을 수 있지. - 45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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