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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와 담배
브누아 뒤퇴르트르 지음, 한지선 옮김 / 강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9.3
내 논리를 이해시키기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이성적인 증거를 대봤자 그들의 감성이 나의 결백을 인정하려 하지 않으니까. - 177p
최근 후임들한테 일 가르치느라 곤혹스럽다. 말 안 듣고 답답한 후임과 그런 후임을 닦달하면 잔소릴 해대는 선임까지... 지들은 나한테 더한 짓도 했으면서. 군대에 있을 때도 심한 갈등을 겪어보지 못한 나는 무작정 '요즘 애들은 다르다'며 두둔하는 언행에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다. 이렇게 배경 설명 생략하고 말하면 나한테 너무 유리할 테지만 어쨌든 최근 불만이 이래저래 많이 쌓였었다.
하여간 호들갑과 감수성의 시대다. 엄밀히 말하면 감수성은 필요하다. 이성을 너무 앞지르지 않는 선에서 말이다. 그런데 호들갑은 확실히 문제다. 호들갑은 자칫 생사람을 잡기 십상이다. 나 역시 후임을 다루는 솜씨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감정을 제어할 필요하단 것은 인정하나 상황의 단면만 보고 상대편만 들어주는 모습들엔 의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래도 그간 쌓아온 이미지와 공헌도가 있기에 함부리 흔들릴 자리라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10월부터 포르투갈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른 넘어 뭔갈 새로 공부하려니 머리도 생각만큼 잘 굴러가지 않고 입력도 바로바로 되지 않아 1년이라도 먼저 하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뭐든 다 적기라는 게 있다지만 그런 아쉬움이 들 만큼 공부 성과가 미진한 편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선생님이 격려해주고 인내하시는 걸 보고서 많이 배웠다. 나도 일터에서 후임들이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고 짜증을 낼 게 아니라 더 인내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야 일을 오래 했으니 숨쉬듯 하는 거지 후임들이야 이제 와 처음 배우니까 말이다.
그렇다 보니 요새는 공연히 애들 가르친답시고 괜히 짜증을 내거나 하는 일 없이 솔선수범을 하거나 적극적인 역지사지를 통해 애당초 짜증을 낼 일 자체를 줄이는 것에 골몰하고 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변하면 병이 난다는 말처럼 결코 쉽지 않지만 그래도 잘 극복하고 있다고 자평하는 중이다. 포르투갈어를 배우면서 얻은 의외의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 덕분에라도 포르투갈어를 배우길 참 잘한 것 같다.
잡설이 아주 길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도 나처럼 자신의 불만을 잘 다스려보고자 노력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내내 들었다. 물론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극단적인 나머지 동정심을 유발하지만 그래도 문제가 있는 인물임을 부정할 순 없다. 그가 어린이를 싫어하는 특유의 논리도 무슨 카뮈의 <이방인>에 빙의한 듯 지치지도 않고 나불거리는 게 읽는 입장에서 곤란할 지경이었는데 작중 인물들 입장에선 오죽했을까 싶다. 어차피 망한 인생, 하고 싶은 말 원없이 하자는 심정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보기엔 그저 똘끼 충만한 인물이다.
금연이라든가 어린이들의 권리엔 결벽에 가까운 잣대를 들이대면서 호들갑을 떠는 세태에 반론을 제기한 소설의 의도 자체는 훌륭하다고 본다. 아무리 선한 의도라도 무지성적으로 신봉하면 얼마든지 광기에 치달을 수 있음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으니까. 이 작품의 대표적 무지성적 신봉엔 '어린이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인데, 주인공이 화장실에서 몰래 흡연하는 걸 지적한 어린아이가 도리어 주인공이 노발대발하자 그대로 자신이 위협을 당했으며 성폭력을 당할 뻔했다고 고자질하면서 펼쳐진 대환장 서사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는 사형수가 사형을 당하기 전 마지막으로 흡연을 하고 싶다고 하자 사형수의 권리나 금연 건물에서의 규정 같은 걸로 온갖 사람들이 나와 대안을 마련하고자 호들갑을 떤 것과 같은 맥락의 일이다. 시작은 사소하고 하찮기까지 한데 과정과 결과가 이렇게나 이상하고 충격적일 수 있다고? 이쯤 되면 사람들은 정치적 목적 같은 건 호들갑을 떨기 위한 구실에 불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최근 동덕여대에서 남녀공학에 반대하기 위해 일어난 일도 연상됐다. 사명도 책임도 적법한 절차도 없이 단지 학교를 엉망으로 만든 결과만이 나왔을 뿐인 그 풍경에서 나는 지성이 부재한 호들갑의 전형을 느낄 수 있었다. 투표의 원칙도 없이 공개 거수 투표의 방식은 사회주의 내지는 전체주의까지 연상시키며 분명 학교를 점거하는 과정에서 적잖이 선동했을 총학생회도 결정적 순간에 자신들이 기물파손을 지시한 게 아니라며 꼬리 자르기를 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의리도 사명감도 엿볼 수 없었다. 수리비는 찬성에 투표한 2천 명 가까운 학우들과 자신들의 시위에 동참한 졸업생들과 그토록 중요시하는 연대를 통해 분담하고, 그 대신 반드시 남녀공학 폐지를 약속하라고 학교측에 먼저 제시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평소에도 여대의 필요성이란 무엇이냐며 관심이 있던 사안이었기에 내심 이 시위가 어떤 결과를 낼 지 궁금했는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무책임한, 한마디로 최악의 전개를 보이고 있어 대단히 실망스러웠다. 결국 호들갑이었군.
전술했듯 정말 호들갑의 시대다. <소녀와 담배> 속 호들갑이 결코 소설 속 이야기만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쏜 화살이 정조준되지 않아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무고한 사람들만 다치는 상황이 기가 찰 따름이다. 의도만 좋다면 정말 어떤 결과든 용인될 수 있는 것일까? 어린애한테 손대는 성폭행범은 사형당해야 마땅하지, 그런데 명백한 물증 없이 어린이의 진술만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가당키나 한 일인가. 여대의 필요성? 여대에 재학 중인 당사자들이 여대가 꼭 있어야 주장한다면 남녀공학으로 전환돼선 안 되겠지, 그런데 학교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자신과 의견이 다를 수도 있을 학우들의 수업권까지 방해하는 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주제의식만 그럴싸하고 재미는 대가리도 없는 소설을 쓴 주제에 인정받으려는 욕구는 다분한 소설가가 한심하듯 그들 모두 역시 한심하다. 의도와 사명을 언급할 가치마저 없는, 그저 호들갑쟁이들일 뿐이니 원.
그런 의미에서 소설 자체는 전혀 호감이 가지 않고 뒷맛도 아주 나쁘지만 자신만의 경종을 울린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다. 두 번 읽은 보람이 있었다. 처음 읽었을 땐 주인공이 그저 불쌍했지만 다시 읽으니 정말 많은 생각이 마치 고구마줄기처럼 뻗어나갔다. 살기 부담스러운 세상이니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