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결혼했다 - 2006년 제2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이당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6



 약 10년 전에 읽은 <아내와 결혼했다>를 다시 포스팅으로 남기려니 감회가 새롭다. 이전보다 나는 축구에 대한 상식이 늘었고 주인공 덕훈과 비슷한 나이대가 됐으며 관계에 치인 경험이 없잖다 보니 덕훈의 아내 인아에 대한 반감이 곱절은 늘었다. 전에 읽었을 땐 그런 사람도 있지 라며 전형적으로 소설 속 캐릭터를 대하듯 감상을 남겼다면 이번엔 PTSD를 유발하는 그녀의 이기적인 모습에 제대로 질렸다. 덕훈도 전에 없이 불쌍했다. 일처다부제를 기어코 실현하려는 인아의 논리에 심적으론 납득하지 못함에도 그녀를 사랑하기에 조금씩 순응하게 되는 모습은 강한 연민을 자아냈다. 이 소설이 이렇게 슬픈 작품임을 잊고 있었다니.

 그렇기에 덕훈이 언급하는 여러 축구 썰도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어쩔 땐 끼어맞추는 것도 있었는데 대체로 유머러스하고 유익했으며 인아를 향한 애증이 더없이 잘 드러나 소설 본문보다 훨씬 탄력적으로 읽혔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소설의 집필 시기가 독일 월드컵 전이라 아직 메시와 호날두가 신예 선수 정도로 언급되는 등 어쩔 수 없이 최신화가 덜 됐다는 것 정도다. 요즘 버전으로 다시 쓰여진다면 엘 클라시코도 유로컵에 대한 썰도 보다 풍성하게 나왔을 텐데 하는 소소한 아쉬움이 남았다.


 지단이라는 멋진 선수에 반해 레알 마드리드의 팬이 된 덕훈과 FC바르셀로나라는 팀의 역사와 정신에 끌렸다는 인아의 첫 만남은 천생연분인 듯하면서도 두 캐릭터의 가치관이 정반대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축구를 축구이기에 좋아하는 덕훈과 축구의 외적인 요소까지 좋아하는 인아, 어느 쪽도 우열을 가리는 것은 의미가 없으나 작품의 화자가 덕훈인 만큼 아무래도 덕훈의 사고방식에 좀 더 끌릴 수밖에 없었다. 인아가 비단 축구뿐 아니라 결혼 제도를 비롯해 온갖 가치관에 자신만의 철학을 그럴싸하게 늘어놓지만 그 논리와 철학 속엔 남편 덕훈에 대한 배려가 없지 않았는가. 그에 비해 조금 답답하더라도 자신의 본능과 감정을 앞세우는 덕훈의 사고방식이 훨씬 근원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새삼 논리란 그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인아와 덕훈의 설전을 통해 느꼈다.

 나는 인아의 일처다부제 논리에 대해 반박할 생각은 없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고 자기 뜻대로 살아감에 있어 상처 받는 이가 없다면 얼마든지 남 눈치 볼 것 없이 그렇게 살아야 마땅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상처 받는 이가 없어야 한다는 것인데 인아에겐 이 난국을 헤쳐 나가기 위한 칼자루를 남편에게 쥐여 줌으로써 책임을 교묘히 회피하니 참으로 역겨웠다. 물론 알면서도 당하는 덕훈도 문제다. 결국 이혼 서류를 무효로 만들고 재경이라는 두 번째 남편의 존재를 까발리지 않음으로써 인아의 버릇만 나빠지게 하는 데 한몫했는데... 말이 쉽지, 이미 인아에게 사로잡힐 대로 사로잡힌 덕훈에게 잘못을 탓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인 것 같다. 잘못을 탓해야 한다면 남편에게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인아뿐이다.


 일처다부제에 대한 아주 흥미롭고 유쾌하게 질문을 제기하는 작품이지만, 인아의 자기중심적이고 영악한 면모 때문에 오히려 단호하게 질문을 제껴버리게 되는 맹점이 있는 작품이기도 했다. 충분한 대화와 논의와 배려를 해봤는데도, 그래도 안 되겠다 싶으면 이혼을 하든가 했어야지 대뜸 두 번째 남편과 결혼하고 청첩장을 덕훈에게 보내고... 이쯤 되면 사람 놀리는 것인지, 이럴 거면 두 집 살림을 차리는 의미가 있나 싶을 만큼 덕훈을 홀대하니까 말이다. 어느 정도는 첫 번째 남편에 걸맞는 대우를 하는 듯하지만 참 이래저래 골때리는 여자다.

 만약 제대로 질문을 제기하려고 했다면 소설이 덕훈의 1인칭 시점이 아닌 인아나 재경의 시점도 부분적으로 넣었어야 했다고 본다. 이래서야 덕훈에게 유리한 관점이 형성돼 천편일률적인 감상을 낳는 역효과가 발생하진 않을까? 오늘날에 읽어도 여전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소재여서 시점의 다각화처럼 균형 있는 연출이 부분적으로 더해졌더라면 보다 흥미로운 작품으로 거듭나지 않았을까 싶다. 주인공의 처지에 과몰입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이미 훌륭한 소설이지만 다시 읽으니 이런 구조적 아쉬움에 눈길이 갔다.


 그러고 보니 <아내가 결혼했다> 이후로 작품 활동이 뜸했던 박찬욱 작가의 신작이 아주 최근에 출간됐다. 제목이 <원할 때는 가질 수 없고 가지고 나면 원하지 않아>인데... 제법 의미심장한 제목이라 기대된다. 내심 고대했던 작가의 신작인 지라 늦어도 1년 안에 구입해 읽을 예정이다. 과연 <아내가 결혼했다>를 뛰어넘을 만한 작품일까? 그러길 바란다.

축구는 잠시나마 새로운 갈등 구조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기존의 갈등을 잊게 만들 따름이다. 그러나 모든 정치색을 거세해도 축구는 여전히 재미있으며 그것이야말로 진짜 축구다. - 38p

잡힌 물고기에 먹이를 주지 않는 이유는 바로 상대방이 잡힌 물고기임을 믿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신뢰가 꼭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식어 빠진 사랑을 에둘러 표현할 때 신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조금 이상한 얘기지만 아내가 믿을 수 없는 여자일수록 나는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 110~111p

싫어하는 사람이 하나 줄어든다 해서 갑자기 인생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 342p

축구공이란 바로 행복이다.
자본가들이 선수들을 축구 노동자로 만들어 축구라는 상품을 화려하게 포장해서 소비자들에게 판매하더라도, 정치가들이 축구 열기를 이용해서 표를 훔쳐 가고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축구공 속에 깃든 행복만은 그들이 독점할 수도, 팔아먹을 수도, 훔쳐 갈 수도 없다. - 351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