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헤드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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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9.8


 스포일러 한가득


 '악마가 소설을 쓴다면 분명 이러할 것이다!'

 출판사의 이 문구를 보고서 너무 유난을 떠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우선 들었다. 추리소설은 살인사건으로 인한 비극을 다루는 작품들이 대부분인 만큼 추리소설가들에겐 비극을 펼쳐내는 악마적 심성이 크든 작든 내제돼 있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거두절미하고 정말 악마의 경지에 달한 소설이었다.

 기시 유스케의 <악의 교전>이 연상되기도 했는데, 시라이 도모유키가 그 작품에다 평행세계라는 설정을 넣고 본인만의 잔혹한 센스로 버무려 악마적 심성으로나 오락 소설적인 측면으로나 대단한 경지를 이룩했다. 이렇게 잔인하고 정이 가지 않는 주인공이 무려 네다섯 갈래로 분열함에도 질리지 않고 끝까지 다 읽은 건 순수하게 트릭의 전말과 이야기의 결말이 궁금해서였다. 이미 주인공이 저지른 짓이 너무도 극악무도해서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인과응보가 이뤄질 것 같지도 않고, 어떤 교훈도 반면교사도 얻을 수 없는 근래 보기 드문 순도 100%의 오락 중심의 이야기였는데... 도덕성을 비롯해 오만가지 요소를 포기한 성과는 거둔 작품이라고 본다.


 평행세계, 요새 유행하는 멀티버스 소재가 어찌 보면 정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일 만큼 한계도 없고 성의도 없는 소재로 비춰지기 십상이지만 특수 설정을 접목한 추리소설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답게 맹점과 논리와 복선을 칼같이 지켜가며 다뤄서 안정감이 다 느껴질 정도였다. 결말에서 도망자가 처한 딜레마도 마찬가지였다. 전술했듯 주인공이 저지른 짓이 너무도 극악무도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인과응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영원한 분열을 택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는 일반인인 내가 가늠하기엔 지독하게 끔찍한 형벌이라 인과응보의 마지노선은 지키지 않았나 싶다.

 물론 주인공 하는 짓이 너무 잔혹할 뿐더러 어느 순간부턴 완전히 주객이 전도된 느낌까지 받아 독서하는 내내 해소되지 못한 분노가 깔끔하게 가라앉혀진 것은 아니다. 가족을 위해서, 정확히는 평온한 일상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을 죽이고 희생양 삼는 것은 이해한다손 치더라도 종국엔 불안 요소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칼끝을 가족에게 돌리는 것은 무슨 심보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가족을 자기 손으로 죽일 때도 망설이거나 뉘우치는 기색도 없고...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종자라 넘기려 해도 한 번 정도는 의문을 제기하고 싶었다.


 주인공의 직장이 정신병동임을 알았던 순간에 범상찮은 작품이리라 각오는 했지만 내 각오를 적어도 백 배 이상 상회해버리는 광기와 잔혹함에 놀랐다. 또 작년에 작가가 <명탐정의 제물>에 이어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로 2년 연속 선정된 것도 납득이 가는 완성도여서 직전에 <명탐정의 창자>를 읽고 느낀 실망감이 어느 정도 회복됐다.

 이 작품 속 미스터리는 과연 이걸 순수하게 추리해서 풀어낼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려웠지만 추리가 그에 상응하게 정교해 추리소설의 정체성을 지킨 것도 좋았다. 자극에만 함몰되지 않고 짜임새에 소홀하지 않은 걸 보고 다시금 작가의 수준을 확인했으며 이쯤 되니 다음 작품이 기대되면서도 걱정됐다. <엘리펀트 헤드>보다 충격적일 수 있을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작가의 뇌 용량이 정말로 코끼리에 버금가길 바랄 수밖에.

피부에 새겨진 것에는 반드시 큰 의미가 있어요. - 12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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