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장 다나카 겐이치의 우울
가와사키 소시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9.4







 처음 이 소설의 개요를 접했을 때 속으로 '뭐 이런 잡다한 소설까지 출간하는 거지?' 라고 생각했다. 일본에 정말 다양한 추리소설이 있고 작가가 있지만 우리가 꼭 그 전부를 알아야 하는가 하고 괜히 시큰둥했다. 하지만 친구가 가볍게 읽기에 좋지만 재밌다고 하니 흥미가 생겼다. 더군다나 내가 여행을 간 적 있던 에히메 현이 배경이라고 해 속는 셈치고 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싶었다.

 코믹한 작풍의 추리소설을 은근히 많이 접했지만 이 작품은 제법 신선했다. 보통 작풍이 코믹해도 탐정이나 형사가 주체적으로 사건에 임하고 해결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서의 주인공은 완전히 달랐던 것이다. 서장 다나카 겐이치는 커리어 출신으로 무사안일주의로 무장한 전형적인 소시민이다. 게다가 명색이 경찰인데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머릿속엔 일본 군함 프라모델 조립 외에는 들어있지 않은 남자다. 이런 인간이 용케 경찰 고위직에 올랐다고 말세라는 생각까지 들었는데 작품은 이러한 커리어 제도의 허와 실을 보기 좋게 코미디로 승화시킨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인가, 분명 다나카 겐이치는 무심코 혼잣말을 했을 뿐이고 전부 다 개떡 같은 소린데 부하들은 서장의 말씀이랍시고 찰떡 같이 알아들어 범인을 검거하고 사건을 해결하게 된다. 그러면서 부하들은 서장님의 지시가 없었으면 해결 못했을 거라고 추켜세우고 그때마다 다나카 겐이치는 머릴 긁적이는 게 바로 이 작품의 포인트다.


 허술한 주인공을 과대평가하는 건 고전적이면서 판타지에 가까운 코미디 설정이긴 하지만 이게 추리소설이란 장르와 맞물리니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다나카 겐이치는 정말이지 머릿속엔 일본 군함 프라모델 조립 밖엔 들어있지 않고 사건 해결엔 진즉에 겁을 먹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범하는 실수나 실언이 기가 막히게도 사건 해결로 이어지게 되는데 부하들이 어떻게 오해를 해서 사건을 해결할 것인지 그게 궁금해서 계속 읽어나갔던 기억이 난다. 이른바 단서가 아닌 단서, 복선이 아닌 복선이라 할 수 있는데 들을 가치도 없는 프라모델 이야기가 오히려 이 작품이 추리소설로써 기능하게 하는 장치로 활약하니 참 절묘하단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프라모델 이야기도 나름대로 진지하니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도 웃기는 한편으로 인상적이기까지 하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매력적이었는데 누구보다 서장을 믿고 따라 사건을 다수 해결하는 돼지마쓰 순경과 서장의 활약을 진심으로 믿고 혼자서 연심을 품는 기쿠치 경사, 서장의 행동을 한발 앞서 해석해 그를 보좌하는 고지식한 모리 부서장... 이들의 진지함과 충직함이 작품의 코미디를 배가시켰지만 역시 주인공 다나카 겐이치의 매력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겠다. 모든 사실을 아는 독자로서 그렇게 존경할 만한 인물이 아닌 건 알지만 충분히 기고만장하고 으스댈 만한 상황이 연이어 터짐에도 한결같이 소심하게 처신한다는 게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솔직히 이런 경찰이 있으면 안 될 테지만 이런 사람과 상황이 있어선 안 되리란 법은 없으니까.


 작가는 무서운 작풍의 작품으로 데뷔하고 줄곧 비슷한 작풍을 유지해서 오히려 코믹한 작풍의 요번 작품이 도전이었다고 하는데 딱히 그런 기색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안정적이고 확실한 컨셉의 작품이었다. 드라마로도 나오면 무지 재밌을 것 같은데 - 시리즈물은 약간 애매한 감이 있지만. - 한번 웃음을 머금고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아, 그 전에 작가의 다른 작품이 먼저 번역 출간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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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8.7






 듣기론 전작인 <우부메의 여름>을 능가하는 작품이라기에 하루 빨리 읽기를 벼르다시피 했던 작품이다. 확실히 전작을 능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분량도, 어려움도, 괴기스러움도,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결말도. 원래 이렇게 난해한가 싶어 중간에 많이 버거웠는데 역자는 이걸 어떻게 번역했나 싶다. 이게 정녕 한국어인가, 아님 외계의 말인지... 하마터면 좌절할 뻔했다.

 좌절할 뻔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작가에 대한 일종의 믿음 덕분이 크다. 흔히 작가의 최고작으로 <망량의 상자>를 많이 꼽던데 - 실제로 시리즈 작품 중 가장 먼저 2차 창작됐고 가장 많이 2차 창작되기도 했다. - 그래도 <우부메의 여름>을, 그 600쪽이 넘는 소설이라도 먼저 읽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이 소설을 단순히 특이한 추리소설 정도나 괴기스러운 환상 소설로 접근하면 당혹스러울 수 있으니까. 전자의 시선, 그러니까 추리소설적으로 작품을 보면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틀만 차용한 다른 종류의 소설이나 다름없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추리소설 같지 않은 점은 그냥 넘기기로 하자. 그 상을 받은 작품이 이러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까. 후자의 시선, 괴기 소설적인 측면에서 봐도 이 소설, 나아가 이 시리즈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그렇게 일치하진 않을 것 같다. 평행선을 달리는 건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부분은 근대성이 함몰된 사람들, 이른바 '요괴에 씌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기도사인 주인공이 밝혀내는 이야기를 추구하는 시리즈니까.


 이야기는 보다 복잡해졌다. 중심 화자랄 것 없이 교차 서술이 수없이 반복되고 작중의 소설이나 서간 등 여러 시점과 문체가 혼용돼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만큼 등장하는 사건도 많아졌고 수수께끼는 풀릴 길 없이 장광설은 그칠 줄 모른 채 페이지를 내달려 읽기에 지칠 정도며 신뢰할 수 없는 화자에다 막판에 탐정의 추리에 모든 것을 거는 듯한 연출을 강조해 답답해 미치는 것도 한몫했다. 한마디로 이야기가 난해한 것 이상으로 연출도 난해해서 끈기가 필요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전작을 읽지 않으면 그 끈기가 생길 수조차 없으니 이 작품으로 작가에게 입문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망량'이라는 이름의 악마의 속삭임과 마주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현실과 이상을 오가는 심리를 '상자'의 안팎으로 묘사해낸 게 바로 <망량의 상자>라는 작품이다. 오컬트에 무지하며 영능력자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을 제대로 정의내리지 않는 것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 교고쿠도나 여전히 우울하고 음침한 세키구치 때문에 읽는 나도 옮을 듯한 분위기며 폭주하는 조증 탐정 에노키즈,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 주요 화자로서 열렬한 행보를 보이는 기바슈의 이야기는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취향에 따라 즐기면 되겠으나 - 어느 등장인물도 중요하지 않다는 얘긴 아니다. 모두 소중하고 특출난 개성의 인물들이다. - 이 작품의 범인들의 이야기는 앞서 요약한 부분을 기억하며 따라가면 좋을 듯하다. 안 그랬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니. 두 번째 읽을 때는 헤매지 않고 읽어야지.


 글쎄, 모든 부분에서 시리즈의 개성이 본격화한 작품이라 완벽하게 취향과 합치했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이 정도로 컨셉이 출중하고 캐릭터 설정이나 작풍, 이야기의 지향점 등에서 후대에 영향을 끼치는 작품도 없으므로 공부하는 차원에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분명 취향을 탈 만한 작품이고 두 번째 읽을 때라고 크게 다를까 싶지만 어쨌든 재독의 여지는 확실히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 번에 완벽하게 이해하긴 힘든 한편으로 막판에 거의 200페이지에 걸쳐 밝혀지는 진상은 꽤나 장관이라 - 그런 막장이 다 있나. - 그 장면을 다시 음미하고 싶은 마음도 커서 말이다. 다시 음미하고 싶은 좌절이란 이 작품을 두고 하는 말 아닐까.

과학자가 행복을 말할 때는 과학자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하권 451~452p




행복해지는 것은 간단한 일이거든.

사람을 그만둬 버리면 되네. - 하권 5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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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9.9







 재밌게 읽었던 책이 있다고 치자. 그럼 그 책에 대한 좋은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보정을 받은 듯 더욱 견고하게 자리잡는데 이는 다시 읽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부서지는 정도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할 수밖에 없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절대적인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도 더욱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레몬>은 요번에 홋카이도에 갈 때 들고 간 책이다. 도쿄, 하코다테, 삿포로, 아사히카와 등이 배경으로 나온다. 태반이 홋카이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그 적절한 현장감에 의해 반가운 독서를 했다. 내용도 물론 좋았다. 8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도 하루 만에 완독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번에도 역시 빠른 시간 안에 읽었다. 다른 걸 떠나서 이 작품이 탄생한 지 이제 거의 30년을 향해 간다니, 해묵은 SF 설정인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도 매우 유효한 설정이고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SF 메디컬 스릴러로 정의되는 이 작품의 원제는 <분신>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고 너무 대놓고 내용을 말하는 감이 있어 번역가가 친히 제목을 <레몬>으로 바꿨는데 참 대담하고 초월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왜 원작자가 레몬에 착안을 두고 제목을 그리 짓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레몬은 같은 DNA에 같은 모습을 가진 두 주인공 마리코와 후타바를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라서 나 또한 제목을 그렇게 바꿨을 것 같다.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캐릭터가 각자 얼굴이 판박이라는 미스터리, 가족에 대한 미스터리와 마주한 이 두 개의 이야기는 구성적으로 아주 탁월했다. 두 인물의 성격이나 행보, 획득한 정보의 내용이 판이한데도 독자는 하나의 작품 안에서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데 문제가 없고 오히려 효율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돼 서스펜스가 됐든 SF가 됐든 몰입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더군다나 전혀 다른 두 주인공이 각자의 이야기의 주역일 때 보이는 존재감은 물론이고 조력자 포지션에 있는 캐릭터들도 입체적이고 매력적이라 흥미가 배가됐던 것 같다. 물론 흑막이 조여오는 긴장감과 막판에 밝혀지는 차가운 반전도 인상적이었다.


 작중 복제 인간의 원리에 대한 과학적 서술은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아도 어쨌든 복제 인간이 사회에 등장했을 때 발생할 혼란에 대한 상상이 충분히 그려져 작품의 고민에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인간이 신이 됐다고 착각했을 때 만들어선 안 될 무언가를 만든다면? 어떤 생물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을 두고 실험을 한다면 그 혼란을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당사자는 극심한 자기 혐오에 시달릴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무엇보다 좋았던 이유는 매우 과학적인 이야기를 매우 인간적으로 접근한 것에 있다.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생물학적/윤리학적 논란을 갖고 태어난 두 주인공이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과 암투를 추적하는 내용이 무척 보편적이었고 타당한 감정선에 기반했던 것이다. 자신과 얼굴이 닮았다는 타인의 존재를 알았을 때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가 오리지널이고 상대가 자기의 복제일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데 그것이 부정당했을 때 터져버리는 상실감과 이윽고 솟아나는 유대감이 아주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야말로 언젠가 복제 인간이 저도 몰랐던 자신의 비밀을 알았을 때 보일 법한 감정의 편린을 마치 예습한 것과 같았는데 읽는 내가 다 혼란스럽고 서글플 지경이었다.


 어쩌면 복제 인간이건 뭐건 그들이 사람으로서 살아감에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실제로 마리코와 후타바는 생김새와 레몬을 좋아하는 점은 판박이지만 기본적인 성격, 말투, 가치관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지 않은가. 허나, 작중에서 드러난 복제 인간의 탄생 이유가 단순히 기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라서 섣불리 용인할 수 없었다. 어떠한 대의도 없이 흥미 위주로 훼손당해야 할 만큼 값싼 생명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아직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우린 고민해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그 역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 그렇다고 마리코와 후타바가 잘못 태어난 건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게 마리코나 후타바의 잘못은 절대 아니다. - 말이다.

 압도적인 몰입감이 돋보이는 스토리는 느낌 있는 결말로 화룡점정이 되는데 드라마로도 나왔다니 도무지 안 찾아볼 수가 없다. 일부분에 있어선 원작을 초월했다고 하는데 이 이상 어떻게 원작을 초월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알았더라면 진작에 찾아봤을 텐데 이제라도 안 게 어딘가 싶다. 드라마로 아주 제격일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화됐다니 기쁘기 그지없다. 그 드라마도 보고 작품에 대한 찬양을 계속 이어나가야겠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분신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하는. 오히려 누구나 자기 분신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걸 발견하지 못해 사람들은 고독한 것이다. - 4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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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의 마음 - 철학하는 외교관이 730일간 관찰한 핀란드 이야기
방민수 지음 / 책과나무 / 2016년 6월
평점 :
품절


8.7






 1년 조금 넘게 일한 알바처에서 내 기대를 상회하는 액수의 퇴직금을 받았다. 그로 인해 나는, 드디어, 북유럽 여행을 현실화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도전에 가까운 여행이라 위험할 순 있지만 '지금이 아니면 나중에 갈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어서 빨리 비행기 표부터 끊기로 했다. 그런데 어느 나라로 가지? 여러 나라를 가기 보단 짧더라도 한 나라를 진득하게 구경하고 싶어 북유럽 4개국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기에 이르렀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읽게 된 책이다.

 730일간 핀란드에서 외교관으로 생활한 저자의 이 글은 꽤 유익했다. 어디 인터넷 서점에는 '핀란드로 떠날 짐을 꾸렸다면 가장 먼저 읽어야 할 책'이라 썼는데 꽤 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전문적인 여행 서적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철학하는 외교관'이라는 작가의 이명에 걸맞게 내용에 깊이가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한국인 입장에서 저 머나먼 핀란드란 나라를 수박 겉 핥기 그 이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 아닐까 싶다.


 글 자체는 그렇게 일관적인 서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핀란드에 관련한 여러 글들이 각각의 주제에 맞게 실려 있을 뿐이라 가볍고 핵심만 짚고 넘어가기에 좋았다. 핀란드의 전설이라 할 수 있는 칼레발라는 솔직히 처음 들었고 그 전설에서 말미암아 살펴보는 핀란드의 문화는 적잖이 신선했다. 너무 얘기를 깊게 하느라 삼천포로 빠지지 않고 딱 핀란드란 나라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아주 충분할 정도로 건드리고 빠진다. 그래서 한 번에 집중하고 읽어내려가기엔 글이 자꾸 바뀌니 구조적으로 봤을 땐 가독성이 떨어지는 감은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구조적인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가 외교관이기에 가질 법한 시선과 사유가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남다른 책이었다. 지금 내 안에서 핀란드와 노르웨이가 꽤나 각축을 벌이고 있는데 만약 핀란드에 가게 된다면 이 책의 덕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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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이 죽었습니다 - 아들이 살해당한 후, 남은 가족의 끝나지 않은 고통을 추적한 충격 에세이
오쿠노 슈지 지음, 서영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절판


8.9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픽션인지 논픽션인지 구분이 안 갔다. 알게 모르게 잔인한 범죄를 다루는 소설을 많이 접했기 때문일까, 오히려 이 책에서 다뤄지는 사건이나 비극의 형질이 정말 현실에서 발생한 일이라곤 바로 와 닿지 않았다. 하지만 책 속의 사건은 엄연히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고 지금으로부터 무려 50년 전에 벌어졌음에도 당사자들의 상처가 치유될 길이 없어보여 가슴 한편이 답답했다. 10년 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애석하게도 10년 뒤인 요즘이라고 크게 변한 게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에서 옴진리교 교주이자 사린가스의 주범이 사형당했다는 뉴스를 봤다. 진작 죽어야 했는데 너무 오래 살려뒀다는 말이 주위에서 들렸다. 사형제도는 이 책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내용과 약간 다른 개념의 주제이므로 나중에 기회가 있을 때 더 얘기할 텐데 어쨌든 우리네 현실엔 법이 종종 가해자나 피해자에게 대한 처우가 너무 불합리해 보이는 경우를 목격하곤 한다. 하나의 비극이 터졌을 때 국가적 차원에서 돈을 더 들여야 할 곳은 가해자의 인권이 아닌 피해자 유족에 대한 감정적 배려 쪽이 아닐까.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함에도 '인권'을 내세운 법이란 가해자에게 온정적인 처우를 보이고 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인권주의자들에게 응석을 부리는 살인마들을 낳는 막장을 만들고 말았다.


 이 책은 저자가 1997년, 일본을 들썩거리게 한 사카키바라 사건 - 직접 찾아보길 바란다. 사건의 전말을 쫓다 보면 '일본엔 뭐 이런 미친 X이 많지?' 라는 편견이 생길지 모른다. - 을 접한 뒤 과거에도 유사한 사건이 있었음을 알고서 그 사건의 전말을 쫓는 논픽션이다. 소설이 아닌 본격적인 르포는 처음 읽는데 유가족 진술의 공백은 소설적 상상력으로 메꾸긴 했지만 그래도 전체적으로 의미가 남다른 내용이었다. 일본의 불합리한 사회 구조나 법에 대해 일침을 가하는 소설, 특히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관련 이야기를 많이 접했지만 그래봤자 실제 사건을 모델로 한 가상의 사건일 뿐, 이렇게 실제 사건 자체를 다루는 책은 처음 읽었기 때문이다. 현실이 픽션보다 막장이란 것은 정치에 한정해서 말하면 씁쓸하지만 범죄에 대입시키면 참혹함과 처절함이 배가된다.

 아들이 동급생에게 살해당하고 심지어 진달래 꽃밭에서 참수된 채 발견돼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가족의 지난날, 그리고 아들을 살해한 소년 A가 미성년자란 이유로 소년원에 송치돼 교육을 받고 이후 3년만 있다 출소한 뒤 변호사가 되어 승승장구하는 잔인한 이야기가 담겨있는 책이다. 전자의 경우엔 정독하기에 가슴이 다 아플 정도로 처참하기 그지없었고 후자에선 괜히 누가 오해할까 헛웃음도 마음대로 짓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충격이 가해졌다. '법적으로' 죄가 없어졌으며 심지어 법의 프로이기도 한 A에게 진정한 사죄를 요구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는 울분이 적혀있는데......... 현실이란 왜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잔인하고 불합리한 것인가 하고 망연자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출간 당시 일본 사횔 뒤흔들었고 '마음에 비수를 품고'라는 제목에 맞게 작가가 정말 비수를 품은 채 쓴 덕분에 문제의 소년 A는 네티즌들에 의해 신분이 까발려져 사무소는 문을 닫고 행방을 잠적한 등 사회적이고 도의적인 정의가 구현됐다고 한다. 이는 법을 따르지 않는 독선적인 정의가 폭주한 것이 아닌 정의를 대변하지 못하는 법의 잘못된 현재를 비꼬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피해자에 대해 진중하고 사려 깊은 내용이었던 이 책이라고 사실 비판에서 자유로웠던 아니란다. 사건의 전말을 다룰 때 소년 A의 살의가 촉발된 계기를 소홀히 다룬 게 그 이유인데, 이지메에 대한 불만이 상대를 칼로 셀 수 없이 찌르고 끝내 참수시킨다는 비이성적이고 용서할 수 없는 형태로 터져버렸다지만 어떻게 보면 '가해자가 된 피해자'라고 볼 수 있어 그 부분에 대한 고민이 누락됐다는 게 아쉽다는 이유다. 1969년에 발생한 사건이라 추적하기 힘든 점도 있었겠지만 중립이야말로 르포에 가장 우선된다고 한다면 아쉬운 요소가 아닐 수 없겠다.


 하지만 감정이 있기에 그만큼 전달되는 것도 있었다. 시간이 해결할 것이라는 무책임한 말과 달리 아직도 아물지 못한 충격 속에 놓인 유가족들과 그런 유가족을 찾아뵙지도 않고 떳떳하게, 부끄러운 줄 모르고 법을 들먹이는 가해자의 관계를 제대로 역설하기 때문이다. 실로 전에 없는 울림을 전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위에서 말했듯 이 이야기가 과거가 아닌 현재에도 변함없을 것 같아서 남의 이야기라 생각하지 말고 가슴 속에 품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언제까지고 불합리하게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A는 히로시에게 물리적인 상처를 입혀 살해했지만, 그 가족에게도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혔다. 그 상처는 30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았다. A를 향한 원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원망을 가슴에 품는 것조차 두려울 만큼 상처가 깊었던 것이다. - 229p




이를테면 범인 A와 만났을 때 내가 그보다 훨씬 인간답게, 또한 손가락질 받지 않는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하면서 "뭐야, 이거. 상대할 만한 인간이 아니잖아?"라고 냉정하게 평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결말이 나는 것이다. - 26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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