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8.7






 듣기론 전작인 <우부메의 여름>을 능가하는 작품이라기에 하루 빨리 읽기를 벼르다시피 했던 작품이다. 확실히 전작을 능가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분량도, 어려움도, 괴기스러움도,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결말도. 원래 이렇게 난해한가 싶어 중간에 많이 버거웠는데 역자는 이걸 어떻게 번역했나 싶다. 이게 정녕 한국어인가, 아님 외계의 말인지... 하마터면 좌절할 뻔했다.

 좌절할 뻔했지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작가에 대한 일종의 믿음 덕분이 크다. 흔히 작가의 최고작으로 <망량의 상자>를 많이 꼽던데 - 실제로 시리즈 작품 중 가장 먼저 2차 창작됐고 가장 많이 2차 창작되기도 했다. - 그래도 <우부메의 여름>을, 그 600쪽이 넘는 소설이라도 먼저 읽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이 소설을 단순히 특이한 추리소설 정도나 괴기스러운 환상 소설로 접근하면 당혹스러울 수 있으니까. 전자의 시선, 그러니까 추리소설적으로 작품을 보면 전형적인 추리소설의 틀만 차용한 다른 종류의 소설이나 다름없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작품이지만 추리소설 같지 않은 점은 그냥 넘기기로 하자. 그 상을 받은 작품이 이러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니까. 후자의 시선, 괴기 소설적인 측면에서 봐도 이 소설, 나아가 이 시리즈가 추구하는 방향성이 그렇게 일치하진 않을 것 같다. 평행선을 달리는 건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부분은 근대성이 함몰된 사람들, 이른바 '요괴에 씌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기도사인 주인공이 밝혀내는 이야기를 추구하는 시리즈니까.


 이야기는 보다 복잡해졌다. 중심 화자랄 것 없이 교차 서술이 수없이 반복되고 작중의 소설이나 서간 등 여러 시점과 문체가 혼용돼 읽는 이로 하여금 상당한 집중력을 요구했다. 그만큼 등장하는 사건도 많아졌고 수수께끼는 풀릴 길 없이 장광설은 그칠 줄 모른 채 페이지를 내달려 읽기에 지칠 정도며 신뢰할 수 없는 화자에다 막판에 탐정의 추리에 모든 것을 거는 듯한 연출을 강조해 답답해 미치는 것도 한몫했다. 한마디로 이야기가 난해한 것 이상으로 연출도 난해해서 끈기가 필요한 작품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전작을 읽지 않으면 그 끈기가 생길 수조차 없으니 이 작품으로 작가에게 입문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망량'이라는 이름의 악마의 속삭임과 마주한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현실과 이상을 오가는 심리를 '상자'의 안팎으로 묘사해낸 게 바로 <망량의 상자>라는 작품이다. 오컬트에 무지하며 영능력자를 사칭하는 사기꾼들을 제대로 정의내리지 않는 것에 대해 일장연설을 하는 교고쿠도나 여전히 우울하고 음침한 세키구치 때문에 읽는 나도 옮을 듯한 분위기며 폭주하는 조증 탐정 에노키즈, 그리고 이번 작품에서 주요 화자로서 열렬한 행보를 보이는 기바슈의 이야기는 작가에겐 미안하지만 취향에 따라 즐기면 되겠으나 - 어느 등장인물도 중요하지 않다는 얘긴 아니다. 모두 소중하고 특출난 개성의 인물들이다. - 이 작품의 범인들의 이야기는 앞서 요약한 부분을 기억하며 따라가면 좋을 듯하다. 안 그랬다간 길을 잃기 십상이니. 두 번째 읽을 때는 헤매지 않고 읽어야지.


 글쎄, 모든 부분에서 시리즈의 개성이 본격화한 작품이라 완벽하게 취향과 합치했다고는 못하겠다. 하지만 이 정도로 컨셉이 출중하고 캐릭터 설정이나 작풍, 이야기의 지향점 등에서 후대에 영향을 끼치는 작품도 없으므로 공부하는 차원에서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지 않을까 싶다. 분명 취향을 탈 만한 작품이고 두 번째 읽을 때라고 크게 다를까 싶지만 어쨌든 재독의 여지는 확실히 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 번에 완벽하게 이해하긴 힘든 한편으로 막판에 거의 200페이지에 걸쳐 밝혀지는 진상은 꽤나 장관이라 - 그런 막장이 다 있나. - 그 장면을 다시 음미하고 싶은 마음도 커서 말이다. 다시 음미하고 싶은 좌절이란 이 작품을 두고 하는 말 아닐까.

과학자가 행복을 말할 때는 과학자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하권 451~452p




행복해지는 것은 간단한 일이거든.

사람을 그만둬 버리면 되네. - 하권 50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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