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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Lemon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9.9
재밌게 읽었던 책이 있다고 치자. 그럼 그 책에 대한 좋은 기억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보정을 받은 듯 더욱 견고하게 자리잡는데 이는 다시 읽는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그 부서지는 정도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강할 수밖에 없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절대적인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도 더욱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레몬>은 요번에 홋카이도에 갈 때 들고 간 책이다. 도쿄, 하코다테, 삿포로, 아사히카와 등이 배경으로 나온다. 태반이 홋카이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인데 그 적절한 현장감에 의해 반가운 독서를 했다. 내용도 물론 좋았다. 8년 전에 처음 읽었을 때도 하루 만에 완독했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이번에도 역시 빠른 시간 안에 읽었다. 다른 걸 떠나서 이 작품이 탄생한 지 이제 거의 30년을 향해 간다니, 해묵은 SF 설정인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도 매우 유효한 설정이고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SF 메디컬 스릴러로 정의되는 이 작품의 원제는 <분신>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고 너무 대놓고 내용을 말하는 감이 있어 번역가가 친히 제목을 <레몬>으로 바꿨는데 참 대담하고 초월적인 제목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왜 원작자가 레몬에 착안을 두고 제목을 그리 짓지 않았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레몬은 같은 DNA에 같은 모습을 가진 두 주인공 마리코와 후타바를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키워드라서 나 또한 제목을 그렇게 바꿨을 것 같다.
이 작품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 중에서도 단연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 명도 아닌 두 명의 캐릭터가 각자 얼굴이 판박이라는 미스터리, 가족에 대한 미스터리와 마주한 이 두 개의 이야기는 구성적으로 아주 탁월했다. 두 인물의 성격이나 행보, 획득한 정보의 내용이 판이한데도 독자는 하나의 작품 안에서의 퍼즐을 맞춰나가는 데 문제가 없고 오히려 효율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돼 서스펜스가 됐든 SF가 됐든 몰입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더군다나 전혀 다른 두 주인공이 각자의 이야기의 주역일 때 보이는 존재감은 물론이고 조력자 포지션에 있는 캐릭터들도 입체적이고 매력적이라 흥미가 배가됐던 것 같다. 물론 흑막이 조여오는 긴장감과 막판에 밝혀지는 차가운 반전도 인상적이었다.
작중 복제 인간의 원리에 대한 과학적 서술은 완벽하게 이해되지 않아도 어쨌든 복제 인간이 사회에 등장했을 때 발생할 혼란에 대한 상상이 충분히 그려져 작품의 고민에 십분 공감할 수 있었다. 인간이 신이 됐다고 착각했을 때 만들어선 안 될 무언가를 만든다면? 어떤 생물이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을 두고 실험을 한다면 그 혼란을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당사자는 극심한 자기 혐오에 시달릴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이 무엇보다 좋았던 이유는 매우 과학적인 이야기를 매우 인간적으로 접근한 것에 있다. 그저 태어났을 뿐인데 어마어마한 생물학적/윤리학적 논란을 갖고 태어난 두 주인공이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과 암투를 추적하는 내용이 무척 보편적이었고 타당한 감정선에 기반했던 것이다. 자신과 얼굴이 닮았다는 타인의 존재를 알았을 때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가 오리지널이고 상대가 자기의 복제일 것이라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데 그것이 부정당했을 때 터져버리는 상실감과 이윽고 솟아나는 유대감이 아주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그야말로 언젠가 복제 인간이 저도 몰랐던 자신의 비밀을 알았을 때 보일 법한 감정의 편린을 마치 예습한 것과 같았는데 읽는 내가 다 혼란스럽고 서글플 지경이었다.
어쩌면 복제 인간이건 뭐건 그들이 사람으로서 살아감에 있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 모른다. 실제로 마리코와 후타바는 생김새와 레몬을 좋아하는 점은 판박이지만 기본적인 성격, 말투, 가치관은 완전히 다른 인간이지 않은가. 허나, 작중에서 드러난 복제 인간의 탄생 이유가 단순히 기술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 이상 이하도 아니라서 섣불리 용인할 수 없었다. 어떠한 대의도 없이 흥미 위주로 훼손당해야 할 만큼 값싼 생명은 없기 때문이다. 설령 아직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우린 고민해야 한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그 역시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 그렇다고 마리코와 후타바가 잘못 태어난 건 아니다. 백번 양보해서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게 마리코나 후타바의 잘못은 절대 아니다. - 말이다.
압도적인 몰입감이 돋보이는 스토리는 느낌 있는 결말로 화룡점정이 되는데 드라마로도 나왔다니 도무지 안 찾아볼 수가 없다. 일부분에 있어선 원작을 초월했다고 하는데 이 이상 어떻게 원작을 초월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알았더라면 진작에 찾아봤을 텐데 이제라도 안 게 어딘가 싶다. 드라마로 아주 제격일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화됐다니 기쁘기 그지없다. 그 드라마도 보고 작품에 대한 찬양을 계속 이어나가야겠다.
그렇지만 자신의 삶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까? 동시에 이런 생각도 했다. 자신이 누군가의 분신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걸까, 하는. 오히려 누구나 자기 분신을 원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걸 발견하지 못해 사람들은 고독한 것이다. - 4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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