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작들 - 당신의 작품을 출간할 수 없는 이유 망작들 1
리카르도 보치 지음, 피아 발렌티니스 외 그림, 진영인 옮김, 김태권 / 꿈꾼문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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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9.2







 블랙 유머 모음집인데 유머의 대상들이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다. 그 유명한 <돈키호테>를 시작으로 <오이디푸스 왕>, <햄릿>, <노인과 바다>, <세일즈맨의 죽음>, <변신>, <빅 슬립>, <모비 딕>, <피노키오>, <이방인>, <죄와 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등 익히 알려진 고전 명작을 한껏 조롱하고 있다. 화자는 현대를 시점으로 둔 어느 출판사의 편집자란 설정으로 앞서 열거된 고전 명작을 어째서 출간할 수 없는지, 당신의 작품이 왜 망작인가를 작가에게 설명하며 거절하는 뜻의 편지가 나열된 책인데 어떤 편지는 정말 웃기고 어떤 편지는 우스꽝스럽고 또 어떤 편지는 제법 날카롭다.

 나는 문학을 꼭 고전까지 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인데 그 이유로 고전의 작법부터 시작해 집필된 당시의 시대상과 지금의 시대상 사이에 괴리감이 커서 의외로 큰 감동을 주지 못하는 걸 들곤 했다.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과거의 이야기가 바로 고전이 아니냐고 따질 사람도 있을 것 같지만 정말로 모든 고전이 그렇다고 믿는다면 거기에 대고 나는 그저 순진하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다. 물론 오늘날까지 생존한 점에서 출간 가치를 살펴보는 재미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수고가 곧 모든 독자의 몫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말을 해버렸는데, 사실 <망작들>은 그렇게 진지하게 읽어야 할 책은 아니다. 이 책은 고전을 앞에 두고 극단적으로 몰지각한 편집자로 분한 화자가 같잖은 비판을 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책이다. <돈키호테>를 두고 왜 스페인이 배경이냐, 시장이 좀 더 괜찮은 미국을 배경으로 한 개척담을 그려달라는 등의 말 같지도 않은 내용이 질리지도 않고 이어진다. 작품의 제목이 경쟁력이 없다느니 왜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느니 너무 야하지 않고 점잖다느니 너무 길다느니 환상적이라느니 도대체 부끄러움이 있으면 쓰지 못할 내용이 마구 적혀져서 정말 웃겼다. 개중엔 너무 몰지각하고 무성의한 내용도 있어 속된 말로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 적도 있었지만 대체로 여러 요건, 가령 수준이 낮은 독자나 지금은 많이 바뀐 출판 업계의 사정에 의해 외면을 받기도 하는 고전의 처지를 작가가 총대 제대로 매고 잘 희화화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오만과 편견>을 두고 화자가 자기는 <브리짓 존스>스러운 작품을 원했다는 게 압권이었는데 문맥을 보면 감이 오겠지만 <오만과 편견>이 오리지널 <브리짓 존스>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리지널과 후대의 작품을 도치시키다니, 마치 <명탐정 코난>을 본 다음에 <셜록 홈즈>를 읽고 '코난 따라했네, 이 작가...' 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정치적 올바름이란 이유로 고전이 뜻밖의 재평가나 훼손이 이뤄지는 것도 다뤘는데 이는 유머인 동시에 상당히 일리가 있는 지적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고전의 너무 길다란 생명력 때문에 벌어지는 평가의 전환이야말로 우리가 고전을 맹신하면 안 되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를 두고 왜 선과 악이 다냐, 여성, 흑인, 레즈미언, 멕시칸, 아메리카 원주민, 채식주의자 등 여러 인격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니냐는 건 순 트집으로 웃어 넘길 수 있지만 이런 시점이 곧 무용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이른바 현대의 독자가 아니면 가질 수 없는 이런 시점은 과거엔 미처 거론되지 못한 새로운 감상 포인트를 낳는 동시에 고전이 범한 우를 되짚는 데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꽤 괜찮은 설정의 유머 모음집이라 생각하는데 편집에 있어서 아쉬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일러스트가 수록된 건 좋은데 그것 때문인지 가격이 너무 높게 책정됐다. 빌려 읽어서 망정이지 이걸 돈 주고 사서 읽었으면 누구라도 돈이 아까울 것이다. 분량을 2배 이상이었으면 저 가격을 수긍할 수 있었으려나? 사실 다루는 작품 수가 적은 건 아닌데 유머에 치중하다 보니 편지가 대부분 짧아 더욱 내용이 부실하게 여겨지는 것이 아닌지... 그나마 뒤에 실린 해설이 아니었으면 부실한 걸 넘어 썰렁하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책이 문제가 아니라 가격을 저렇게 책정한 출판사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싶다.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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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메레르 8 - 폭군들의 피
나오미 노빅 지음, 공보경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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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이 시리즈도 다음 권이 마지막이라니 참 놀랄 노자다. 7권 이후로 너무 소식이 없어서 이대로 끝을 못 보나 했는데 8권이 나오고 금방 완결까지 출간되니 감격스럽게 이를 데 없다. 솔직히 말하면 8권까지 읽었으니 정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박진감 넘치고 다음을 기대하게 해줬다. 이제 다음을 기대하는 것도 얼마 안 남았네.

 개인적으로 요번 8권이 도입부에 있어서 제일 충격적이지 않았나 싶다. 용과 함께 세계일주를 하는 내용에 더 이상 신선하거나 충격적일 게 있을까 싶지만 하필 이런 타이밍에 로렌스가 기억상실에 걸리다니 정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기억을 상실하면 테메레르와 함께한 그간의 여정은 어떻게 되는 건가? 이 문제는 비교적 완만하게 지나가지만 처음에 로렌스는 이 기억상실 때문에 일본 나가사키에서, 그것도 쇄국 정책이 극심했던 에도 시대의 일본에서 그야말로 역경을 면치 못하는데 일본 문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초반부가 제일 흥미진진하게 읽혔다. 일본을 묘사함에 있어서 내가 보고 읽은 서구권의 작품 중에 가장 고증이 괜찮았는데 단순히 유럽의 나폴레옹 전쟁사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역사적 상황을 유연하게 엮어내 풀어내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원래 대체 역사물이 그냥 역사물보다 훨씬 재밌는 법이지만 이 시리즈의 묘사에는 정말 남다른 데가 있다.


 초반부가 흥미로웠던 반면 일본을 벗어난 이후 청과 러시아에서 펼쳐지는 격동의 중후반부는 무난하게 읽혔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판타지 소설 전반에 걸친 설정에 관한 묘사나 전쟁 묘사는 늘 따라가기 버겁다. 이번에도 간신히 맥락을 파악하고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지 예측하는 정도만 가능했는데 그래도 엄청난 결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다음 권에서 나폴레옹이 그 문제의 러시아 전투에서 패배할 것인가, 부쩍 출연이 적어졌지만 존재감 하난 확실했던 리엔과 결판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등 기대되는 요소가 많았다. 정말 지구 한 바퀴 돈 다음 마무리를 앞두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 모험의 신세계를 선사하는 테메레르와 로렌스가 많은 희생과 역경을 통과해 어떤 결말을 맞을 것인지... 중간에 기억이 오락가락한 로렌스 보고 자신이 그를 지목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지금보다 행복했을지 모른다고 자책하는 테메레르를 보면 적어도 일반적인 관점의 해피엔딩이 날 것 같진 않다. 그냥 추측만 할 뿐이지만 결말이 어떻게 나느냐에 따라 이 시리즈의 평가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쯤 되니 정말 궁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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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영희 씨 창비청소년문학 70
정소연 지음 / 창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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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7.0






 분명 청소년 문학이란 레이블을 달고 출간된 책인데 내가 정말로 청소년일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내용을 반도 이해 못하지 않았을까 싶다. SF란 장르가 설정의 다양함이나 미래 지향적인 부분에선 나의 취향과 일치하나 막상 문체는 내 취향이 아닌 경우가 많이 있었는데 이 책이 딱 그랬다. 우리나라 SF 중에서도 꽤나 본격적이고 한국적인 작품이 수록됐지만 그 작법에 있어서는 은근히 까다로웠다. 이유가 뭘까.

 수록된 작품이 꽤 많은데 인상적인 작품은 몇 없다. 특히 2부에 해당하는 우주 이야기는 내가 원체 그 분야에 무지하고 관심이 없는 터라 내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1부의 몇 작품에 대해 간단히 언급하고 글을 마쳐도 될 것 같다.



 '앨리스와의 티타임'


 SF 작가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와 가상 세계에서 만나 이야길 나눈다는 흥미로운 작품. 아쉽게도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를 몰라서 놀라움은 덜했지만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대입한다면 꽤 몰입할 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다. 물론 작중의 작가도 이번 기회에 알게 돼 좋았지만.

 평행 우주는 내가 봤을 땐 이론상으론 가능할 지 몰라도 현실적으론 순 억지스런 설정인 것 같은데 작품에선 나름 재밌게 풀어냈다. 위에서 말했지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란 작가를 몰라 감동은 덜했지만 그와 만남으로 인해 주인공이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감에 있어 여러모로 도움을 얻는 스토리는 환상적이라서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아주 참신하진 않았지만 짜임새는 괜찮았다.



 '마산 앞바다'


 어떤 작품은 하나만 얘기하고 어떤 작품은 여러 얘기를 풀어낸다. 어떤 SF는 한 설정의 극한을 보여주고 어떤 SF는 하나의 설정을 통해 예상치 못한 울림을 준다. 그래서 어떤 SF는 놀라움을 안겨주지만 또 어떤 SF는 우리들의 상상력을 증폭시켜주기도 한다.

 제목만으론 내용이 영 감이 안 잡히는 이 작품은 사소한 상상 하나로 풀어낸 기가 막힌 성장담을 보여주는데 약간 설정이 짬뽕된 느낌은 들지만 이 예측불허함이 그야말로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일 SF가 미래 지향적인 장르라면 소수자 이야기와 꽤 일맥상통한 얘기일 수 있겠는데 이 작품은 두 이야기의 맞닿은 점을 활용해 남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이래저래 발상에 감탄했던 작품이다.



 '비거스렁이'


 솔직히 작품의 설정이 아주 확실히 이해되진 않았지만 주인공의 절박함이나 갈등 해소의 느낌만은 절절하게 다가왔다. 여러 세계의 불안정한 연결고리와 틈새에 의해 존재감이 지나치게 흐릿한 주인공의 심리를 엿보는 게 재밌었고 담임이나 현수 등 주변 인물과의 관계도 참 희망적이고 따뜻하게 그려져서 제법 청소년 문학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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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도둑 4 - 게메트부르를 찾아서
발 타일러 지음, 최소영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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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내가 어렸을 때 이 작품을 읽을 때 다음 편은 언제 나올까 궁금헤했는데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는 걸 보니 이대로 완결인가 보다. 아니면 작가님이 못 쓰시는 거던가. 여기서 끝나도 괜찮은 엔딩이었지만 그래도 세계관이 더 확장해도 될 듯한데 아쉽긴 아쉽다. 이번 <시간도둑: 게메트부르를 찾아서>는 전편인 '시간 원정대'보다 모든 면에서 확장된 후속작이다. 전편의 등장인물도 그대로 나오고 새로운 캐릭터나 떡밥으로만 등장했던 소재들도 아낌없이 그 정체를 그려내고 있다. 게다가 작가의 창작 동기에 맞게 이번엔 본격적으로 시간과 관련된 이야기를 한다.

 평행을 유지하며 똑같이 흘러가는 인간과 가디언의 시간. 하지만 가끔씩 그 두 시간이 어긋나서 동요가 일어날 때가 있다. 가끔씩 일어나는 것이고 조만간 한쪽 시간이 균형을 되찾아 걱정할 필요는 없는 현상인데 일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튄다. 지난 번에 가디언족이 된 꼬마 셋(뤠카족일 때 이름은 훌쩍이)은 지나치게 달라진 환경에 적응을 못해 외로움에 시달렸는데 어쩌다 보니 인간과 우연찮게 만나게 돼 친구가 되고 만 것이다. 사소한 일이지만 시간의 세계엔 커다란 파장이 일게 되고 가디언들은 대책을 찾는데...


 처음에는 무난하게 시작되지만 이윽고 따로 무리를 형성하고 있는 뤠카족 여성들과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보이는 게메트부르의 존재, 그리고 지난 번 사건으로 전쟁에 대비하는 - 지들끼리 호들갑 떠는 - 뤠카들 때문에 일이 이래저래 많이 꼬인다. 그렇다 보니 이야기가 총 다섯 가지 시점에서 전개되는데 이게 은근히 헷갈렸다. 작가가 어느 정도 조절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여러 갈래에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다 보니 복잡했던 건 사실이다. 물론 복잡할 가치는 충분했지만.

 아무래도 이번 편에서 가장 돋보인 건 쉘든 크로라 할 수 있다. 범죄자 기질이 다분했던 그 녀석은 지난 번 사건의 작은 공로 덕에 교화원에 가는 정도로만 죗값을 치루고 있었다. 아직 어리고 불우하긴 했지만 여자애를 납치해서 뤠카족에 넘기려 한 행위는 쉽게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편에도 가디언족의 냉대를 면치 못하는데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지만 나름 불쌍하긴 했다. 하지만 그 녀석이 이번에 다크 히어로나 다름없는 활약을 하다가 이윽고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진주인공임을 깨달았을 때 이 작품의 진가를 또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소설가 이전에 교육자였던 작가는 아이들에게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역설하려 했던 것이다.


 시간은 지나가지만 다시 지나가기도 한다. 애당초 지나가느니 뭐니 시간에 속성을 부여하는 건 인간밖에 없다. 이처럼 시간을 귀중히 하다 보니 지금의 시간을 잘못 살면 그 영향으로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도 똑같으리라 낙인을 찍는 경향이 있는데 이 작품 속 주인공네들을 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전편에 비해 비중이 줄어든 소피나 티드만 해도 잘못을 저질렀지만 그를 바로잡을 용기와 더불어 그들의 용기를 인정하는 기회를 줌으로써 더욱 값진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쉘든의 잘못은 앞의 둘에 비하면 지독하기 그지없었고 당사자 역시 반성의 기미도 없었지만 똑같이 기회를 줌으로써 이번 편에서는 꽤나 활약한다. 그렇게 되니 가능성이 열려 있는 아이들에게 지나간 잘못만큼 앞으로의 기회를 염려하는 게 상당히 의미있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극단적인 용서와 기회는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과 다를 바 없을 수 있지만 이 작품의 아이들에게 있어 가디언족이냐, 뤠카족이냐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선택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결코 기회를 경시할 수 없으리라 본다. 일례로 선택권 없이 반강제적으로 가디언족이 된 셋을 보라. 결과적으로 셋은 가디언족의 따뜻한 그늘에서 살게 됐지만 그건 온전히 셋의 결정은 아니었다. 결국 그 아이는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세계에 혼란을 안기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셋을 상황 파악 능력도 없고 배가 부른 아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원래 아이들은 대체로 그런 법이다. 아니, 아이뿐만이 아니라 자기 결정이 아닌 이상 혼란을 겪는 건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지난 번보다 플롯이 복잡해 읽기 까다롭긴 했지만 그만큼 깊이감이 더해져 완벽한 속편이 아니었나 싶다. 아까 서두에 후속작이 나와도 괜찮겠다고 했지만 이렇게 끝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쉘든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상상에 맡기는 것도 재밌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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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살고 죽고 - 20년차 번역가의 솔직발랄한 이야기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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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외국 소설이나 영화를 자주 보는 나로선 여러 번역가들에게 크게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번역가나 번역 업계에 대해선 굉장히 무지했고 특별히 궁금해한 적도 없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들의 존재를 별로 신경 쓴 적이 없다고 보는 게 더 맞다. 이런 나에게 있어 어느 번역가가 더 좋고 나쁘고 구분하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냥 이름이 많이 보이면 반가운 정도랄까? 우리나라에서 흔히 오역가로 알려진 오경화나 박지훈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오역인지도 모르고 넘어갈 뻔했으니 - 여담이지만 이건 나의 잘못은 아니다. 오역인 걸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통달했으면 뭐하러 번역을 보겠는가. 원서를 보거나 영화를 자막 없이 보겠지. - 내 무지가 어느 정도인지 이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권남희란 이름은 그런 나에게 있어서도 낯설지 않은 이름인데 이 책이 출간된 2011년 기준으로 역서가 150권이 넘었다니 7년이 지난 지금은 200권은 넘게 번역했을 것이다. 그만큼 왕성하게 활약하고 흔히 'A급'이라 칭해도 될 만한 번역가인데 이렇게 역자 후기가 아닌 다른 형식의 글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작품을 통하지 않고 번역가의 글을 읽는다니, 약간 긴가민가했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기에 속는 셈치고 읽어봤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든 번역가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작가가 과거 문학소녀였고 소설가를 꿈꿨던 만큼 문장력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말은 방금 내뱉고도 좀 웃긴 게, 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에게 문장력이나 스토리 텔링 능력이 뒷받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뜻을 해석하는 것과 번역은 생각보다 아주 다르다는 것, 이 점에 주목하고 읽어도 참 의미 있는 독서가 될 듯하다.

 번역에 대해 환상은 없지만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기도 한 나에게 이 책의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작가의 개인사도 재밌었지만 번역가로서 살아가는 삶 곳곳에 녹아든 번역가의 고충이나 그 직업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주 적절하고 신선하며 유익했던 것이다. 해당 직종에 뜻이 있는 사람은 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번역료 협상이나 번역의 문장을 다듬는 센스나 번역 작업과 일상 생활 사이의 조율 등 아주 일상적이다가도 전문적인 내용이 등장해, 이른바 완급 조절이 탁월했다. 격려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도 많이 있어 제법 신뢰하면서 읽게 됐다. 그리고 조금 다르긴 하지만 나도 어쨌든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서 배울 점이 많다며 읽는 내내 고갤 자주 끄덕였던 기억도 난다.


 권남희 번역가의 특징이라고 하면 역자 후기마다 자신의 딸을 언급하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 책을 보니 작가의 엉뚱함과 천성적인 매력이 더욱 두드러져 참 재밌게 읽었다. 소설이 됐든 에세이가 됐든 뭐가 됐든 화자의 내면 세계가 매력적인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생각하는데 권남희 번역가의 경우 자신만의 개성으로 이 책을 꽤 매력적으로 꾸미지 않았나 싶다. 백수 생활을 하다 우연찮게 번역 일을 하게 되고 돈을 벌고자 기획 거리를 찾고 이혼하고 딸과 나름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 등등 작가 개인의 삶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흡입력 있었다. 이렇게 작가 자체에 빠져들다 보니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작가가 작업을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책을 언급할 때 내 취향과 일치하는 책이 생각보다 적었던 점이다. 작가의 성격이 개인적으로 나와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마다 취향은 제각각인 모양이다. 이런 소소한 것 말고는 이 책에 불만이나 아쉬운 점은 없었다.

 고전이 아닌 현대 소설을 읽을 때, 독자 입장에선 번역가를 고를 기회란 없고 그저 내가 읽고싶은 작품에 얼토당토 않은 오역만 없기를 바라는 게 현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어에 무지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각 번역가의 역량을 파악할 기회가 적어서 누가 더 뛰어나고 개성적인 번역가인가 가늠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권남희 번역가는 내게 있어 무난하고 딸을 좀 더 사랑하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됐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괜히 역자 이름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편파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실 권남희 번역가에게만 국한된 변화는 아닐 것이다. 앞으로는 누가 됐든, 어떤 책이 됐든 책의 내용과 작가와 더불어 번역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만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이 책의 의의가 꽤 크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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