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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에 살고 죽고 - 20년차 번역가의 솔직발랄한 이야기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9.5
외국 소설이나 영화를 자주 보는 나로선 여러 번역가들에게 크게 신세를 지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번역가나 번역 업계에 대해선 굉장히 무지했고 특별히 궁금해한 적도 없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들의 존재를 별로 신경 쓴 적이 없다고 보는 게 더 맞다. 이런 나에게 있어 어느 번역가가 더 좋고 나쁘고 구분하긴 참 어려운 일이다. 그냥 이름이 많이 보이면 반가운 정도랄까? 우리나라에서 흔히 오역가로 알려진 오경화나 박지훈 같은 사람도 다른 사람이 알려주지 않았으면 오역인지도 모르고 넘어갈 뻔했으니 - 여담이지만 이건 나의 잘못은 아니다. 오역인 걸 간파할 수 있을 정도로 언어에 통달했으면 뭐하러 번역을 보겠는가. 원서를 보거나 영화를 자막 없이 보겠지. - 내 무지가 어느 정도인지 이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으리라 본다.
권남희란 이름은 그런 나에게 있어서도 낯설지 않은 이름인데 이 책이 출간된 2011년 기준으로 역서가 150권이 넘었다니 7년이 지난 지금은 200권은 넘게 번역했을 것이다. 그만큼 왕성하게 활약하고 흔히 'A급'이라 칭해도 될 만한 번역가인데 이렇게 역자 후기가 아닌 다른 형식의 글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작품을 통하지 않고 번역가의 글을 읽는다니, 약간 긴가민가했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기에 속는 셈치고 읽어봤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모든 번역가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작가가 과거 문학소녀였고 소설가를 꿈꿨던 만큼 문장력이나 이야기를 풀어내는 능력이 상당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이 말은 방금 내뱉고도 좀 웃긴 게, 문학을 번역하는 사람에게 문장력이나 스토리 텔링 능력이 뒷받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뜻을 해석하는 것과 번역은 생각보다 아주 다르다는 것, 이 점에 주목하고 읽어도 참 의미 있는 독서가 될 듯하다.
번역에 대해 환상은 없지만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기도 한 나에게 이 책의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작가의 개인사도 재밌었지만 번역가로서 살아가는 삶 곳곳에 녹아든 번역가의 고충이나 그 직업 세계에 대한 묘사가 아주 적절하고 신선하며 유익했던 것이다. 해당 직종에 뜻이 있는 사람은 꽤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번역료 협상이나 번역의 문장을 다듬는 센스나 번역 작업과 일상 생활 사이의 조율 등 아주 일상적이다가도 전문적인 내용이 등장해, 이른바 완급 조절이 탁월했다. 격려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도 많이 있어 제법 신뢰하면서 읽게 됐다. 그리고 조금 다르긴 하지만 나도 어쨌든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라서 배울 점이 많다며 읽는 내내 고갤 자주 끄덕였던 기억도 난다.
권남희 번역가의 특징이라고 하면 역자 후기마다 자신의 딸을 언급하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 책을 보니 작가의 엉뚱함과 천성적인 매력이 더욱 두드러져 참 재밌게 읽었다. 소설이 됐든 에세이가 됐든 뭐가 됐든 화자의 내면 세계가 매력적인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생각하는데 권남희 번역가의 경우 자신만의 개성으로 이 책을 꽤 매력적으로 꾸미지 않았나 싶다. 백수 생활을 하다 우연찮게 번역 일을 하게 되고 돈을 벌고자 기획 거리를 찾고 이혼하고 딸과 나름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 등등 작가 개인의 삶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흡입력 있었다. 이렇게 작가 자체에 빠져들다 보니 아쉬운 점이 있었는데 작가가 작업을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책을 언급할 때 내 취향과 일치하는 책이 생각보다 적었던 점이다. 작가의 성격이 개인적으로 나와 일맥상통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사람마다 취향은 제각각인 모양이다. 이런 소소한 것 말고는 이 책에 불만이나 아쉬운 점은 없었다.
고전이 아닌 현대 소설을 읽을 때, 독자 입장에선 번역가를 고를 기회란 없고 그저 내가 읽고싶은 작품에 얼토당토 않은 오역만 없기를 바라는 게 현실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어에 무지한 대부분의 독자들은 각 번역가의 역량을 파악할 기회가 적어서 누가 더 뛰어나고 개성적인 번역가인가 가늠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권남희 번역가는 내게 있어 무난하고 딸을 좀 더 사랑하는 사람 정도로만 인식됐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괜히 역자 이름을 한 번 더 쳐다보게 될 것 같다. 어떻게 보면 편파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사실 권남희 번역가에게만 국한된 변화는 아닐 것이다. 앞으로는 누가 됐든, 어떤 책이 됐든 책의 내용과 작가와 더불어 번역가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만 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이 책의 의의가 꽤 크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