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를 사는 남자
우타노 쇼고 지음, 김성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8.5






 어디 가서 꼭 빠지지 않고 일본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부끄럽게도 아직 에도가와 란포의 소설은 읽어보지 않았다. 이상하게 관심이 잘 안 가던데 우타노 쇼고의 이 작품을 읽으니까 살짝 흥미가 생겼다. 이 작품은 액자 구성을 띤 추리소설인데 액자 속에 해당할 '백골귀'란 작중의 소설 에도가와 란포 스타일로 쓰여져서 약간 구태의연하게 읽히긴 했지만 고전은 고전대로 느낌이 있어서 그런대로 읽을 만했다. 또 이 작품에서 액자 밖에 해당할 노년의 추리소설가 이야기는 작품에 있어서 의외의 역할과 반전을 담당하는데 어떻게 보면 '백골귀'의 핵심 트릭만큼이나 뻔하기도 있지만 다행히도 잘 속아넘어가고 말았다. 두 번째 읽는 작품이라 내용이 가물가물하긴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기억이 안 날 줄이야... 8년이나 지나서 읽으니 추리소설도 다시 읽는 맛이 제법이다. 어지간하지 않으면 내용을 다 까먹으니까. 이거, 칭찬이 아니려나?

 창작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했다가 어느 청년에게 구출을 당하는 에도가와 란포. 며칠 뒤 그 청년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의심스러운 란포는 절친한 사이이자 추리소설 애호가로 유명한 당대의 시인 하기와라 사쿠타로와 함께 청년의 죽음에서 느껴지는 미스터리함을 파헤친다. 그러면서 동반되는 모험과 기괴한 분위기, 그리고 반전... 작중의 소설 '백골귀'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만들어진 본격 추리소설인데 이걸 다른 작가도 아닌 우타노 쇼고가 썼다니까 되려 신선하게 읽혔다. 아무래도 고전이자 란포의 느낌을 표방하느라 고루한 감도 없지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이 아이러니할 정도의 신선함은 작가 특유의 비틀기로 더욱 빛을 발해 그 자체가 곧 단점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상관 없어 보이는 액자의 안과 밖의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인지 그 진면목이 빛났던 소설이었다. 작품이 발표된 당시엔 작가도 거의 신인이었는데 이렇게 옛날 작가의 문체를 따라하는 등 상당히 도전적인 작품을 썼구나 싶었다. 란포의 작품을 읽지 않아서 정확히 비교할 순 없지만 딱 봐도 그 작가의 문체를 잘 구사한 듯하고 작중의 소설인 '백골귀'도 짜임새가 좋아서 아예 그 작품만 봐도 어느 정도 만족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거기서 만족할 우타노 쇼고가 아니지, 작가는 거기서 한번 더 비트는데 그 방향이 자연스럽고 의미심장해서 작품을 보다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목이 시체를 사는 남자라니... 무시무시한 제목에 비하면 작풍은 가볍고 무엇보다 작품 내용과 따로 노는 것 같아서 의아할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나도 그렇고.

 이 제목에 대한 해석은 여러 버전이 있는데 역자가 한 해석도 그럴 듯하고 다른 해설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보통 이렇게 해석의 여지가 너무 많은 제목을 선호하지 않고 이 제목도 거의 그럴 뻔했는데 어떤 해석을 접하느냐에 따라서는 꽤 괜찮다 느껴지기도 해서 이것도 단점이라 할 순 없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렇게 해석하고 싶을 정도로 마구 흥미로운 제목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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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인 포이즌 미도리의 책장 13
혼다 다카요시 지음, 이기웅 옮김 / 시작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9.4







 한 여자가 무심코 자살하고 싶다는 말을 꺼냈 때 누군가 다가와 '절 믿고 1년만 기다려주지 않겠습니까? 그럼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테니.' 라고 속삭인다. 자살을 얘기한 여자도, 이상한 말을 꺼낸 누군가도 서로 혼잣말이었으니 듣고 잊어버리라 하지만 아무래도 사람 마음이란 말처럼 되지는 않는 법이다. 자살을 입에 담았을 뿐인 여자는 1년 뒤, 정말로 잠에 드는 기분으로 죽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서 남은 1년을 살아가게 된다.

 주간지의 기자인 하라다는 자기가 취재했던 비극의 주인공들이 비슷한 시기에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취재 당시에는 그래도 시련을 극복하고 잘 살아갈 것 같더니 돌연 자살해버린 것에 책임감, 허망함이 뒤섞인 기분이 들고 때마침 그들과 같은 종류의 독극물을 통해 자살한 한 여자에 대한 소식도 듣는다. 자살한 여자는 청각을 잃은 천재 바이올린 연주자나 처자식을 사이코패스에게 살해당한 남자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눈길이 덜 가는 평범한 회사원인데 하라다는 의문을 떨쳐낼 수 없다. 자신의 의문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하라다는 그녀의 지난 날을 살펴보게 되는데...


 국내에 출간된 혼다 다카요시의 책은 대부분 다 읽은 거 같은데 이 작품이 가장 추리소설다웠다. 물론 그마저도 추리소설인 줄 모르고 읽었다가 알고보니 추리소설이었다는 식인데 작가 입장에서 구현하기 까다로운 트릭인 것에 비해 독자 입장에서는 난이도는 쉬운 편에 속했다. 하지만 주제의식이나 작품 전체에 녹아든 감성과 기가 막히게 어울려 여운이 상당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반전이 없어도 되지 않나 싶기도 했다.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는 반전이 꼭 필요하다고 보기에도 애매하고 특히 반전이 드러나는 대목이 그다지 강렬하지 않아 작가에게 이래저래 도전이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를 당사자의 시선과 생판 타인의 시선에서 접근하기에 그것만으로도 이번 교차 서술이 상당히 의의가 있었다.

 보험을 들 때 당사자가 1년 이내에 자살하면 보험금이 지급되지 않는다고 한다. 보험금 수령이 곧 목적이 되는 막장 같은 현상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이 작품은 그 룰의 가치가 제대로 빛났다고 할 수 있겠다. 이미 여자가 죽었으니 결말까지 다 나온 거 아니냐고 생각이 들 테지만 인생에는 처음과 끝만 중요한 게 아니니 그리 속단해선 안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의 그 중간에서 당사자가 얼마나 고민하고 헤맸을 것인가 상상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이 작품은 인물들의 번민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풀어냈고 그 과정이 은근히 긴박감 넘쳤다. 그리고 결말에선 교묘한 반전과 묵직한 여운이 자리하고 있었다.


 작중에서 자살 충동이란 독이 연쇄적으로 퍼져나가는 것처럼 사람들의 인생은 크든 작든 다 연결된 것 같다. 그래서 누군가의 죽음이 전적으로 자신과 무관하다고 여기기가 쉽지 않은 게 아닐까. 어쩌면 내가 누군가와 짧게 대중교통을 탈 때 스쳐지나간 사이더라도 그 짧은 순간에 상대를 배려하거나 최소한 웃는 얼굴로 마주치기만 했더라면 상대의 운명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타인의 불행이 직간접적으로 다 나의 책임이라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한번 그렇게 상상해보게 된다면 어디서 어떻게 또 누구가 자살을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자니 절로 겸허해졌다.

 작품은 자살에 대해 무조건 비판하지도 찬양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번 이해해보자고 얘기하는 것이다. 누군가 자살했네? 여기서 끝내지 말고. 물론 자살자의 지난 날을 상상해보는 게 숨이 막힐 듯한 일일 수 있지만 적어도 이 소설만큼은 그러한 한계에 도전해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자살이라는 결말이 정해진 어떤 인생도 소설적으로 의미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본 것이 아닐까 하고.



https://cafe.naver.com/mysteryjapan/15767 


 이건 옛날에 쓴 포스팅.

인간이란 원래 고독한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그 사람 몫만큼의 고독을 안고 살아가죠. 어느 누구라도 더 가볍거나 더 무겁거나 하지 않아요. 똑같이 한 사람 몫의 고독을 모두가 안고 살아갑니다. 한 사람 몫의 고독이라면 참을 수 있어요. 인간에게는 그런 참을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절망에 빠졌을 경우는요? - 159p




어차피 죽은 사람입니다. 산 사람이 이해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죽기 전에는 살아 있었죠. - 2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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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기억
다카하시 가쓰히코 지음, 오근형 옮김 / 네오픽션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7.0







 우리가 흔히 '일본적이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을 할 때 공통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음울하고 끈적하고... 이런 특징은 일본의 소설, 만화, 영화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작풍이다. 이 <붉은 기억>이란 소설집이 그런 의미에서 가히 '일본적'인 책이었다. 기억에 관한 7편의 소설이 수록됐는데 상술한 음울하고 끈적한 일본적인 이야기의 전형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플롯도 비슷하고 결말의 느낌도 엇비슷해 그 느낌을 떨치기가 쉽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제목에 '붉은-'이 들어간 일본 소설은 어떤 의미에서든 각오하고 읽어야 하는 것 같다. 첫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붉은 기억'부터 장난 아니었다.

 <샤라쿠 살인사건>으로 인상을 남긴 다카하시 가츠히코의 또 하나의 대표작 <붉은 기억>은 기억 시리즈의 작품이자 나오키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작가 자체도 이름이 있고 걸출한 상도 받아서 읽기 전에 기대했는데 - 할인가로 판매될 때 예상을 했어야 했나... - 내용은 충격적인 게 많았다. 아니, 충격적이라기 보단 일본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그 이유를 설명할 때 예시로 들 만한 책이었다. 이 작품이 92년도에 출간된 걸 감안해야 한다고 하면 감이 잡힐까?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이 대단히 선정적이고 피상적이면서 도구적이었다면 내가 너무 과장하는 걸까? 차라리 두 번째 수록작인 '뒤틀린 기억' 정도면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을 변주했기 때문에 볼 만했지만 나머지 수록작에 대해선 말을 아끼고 싶다. 기억에 관한 이 기묘한 이야기들이 어떤 식으로든 불쾌함을 독자에게 떠맡기는데 내 개인적으론 화자의 공포에 공감하기 보단 화자 자체에 불쾌함을 느낀 적이 많아서 선뜻 추천하기가 망설여진다. 좋아할 사람은 분명히 좋아하겠지만 안 그럴 사람이, 적어도 요즘 시대엔 더 많지 않을까 하고 조심스럽게 예측해 본다. 좋게 말하면 토속적인 거고 나쁘게 말하면 전근대적인 지라.


 단순히 기억에 대한 불가사의한 접근 뿐만 아니라 이 책의 수록작들엔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여자에 대한 묘사를 제외한 다른 공통점이란 작가의 고향 이와테에 대한 묘사다. <샤라쿠 살인사건> 때도 느꼈지만 이 작가, 애향심이 보통이 아니구나 싶었다. 일본에서 시골 취급을 받는 도호쿠(동북) 지방의 이와테는 우리나라에는 아무래도 잘 알려진 지역이 아닌데 그 고장 출신으로서 작가가 굉장히 애정 어리게 묘사해 개인적으로 흥미롭게 읽혔다. 물론 작품의 특성상 하나같이 불길한 무언가를 품고 있는 지역으로 묘사됐지만;; 얼만큼 고증이 됐고 상상을 불어넣었는지 몰라도 그 지역의 이모저모를 잘 활용해서 한 편의 지역 가이드로써 쏠쏠한 재미가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흥미가 동한 김에 직접 가보고도 싶지만 하필 이와테가 '그 동네'와 가까워서 참... 아쉽다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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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0








 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늘 가치관 전복을 추구하는 장르 특유의 경향을 크게 들 수 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부분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전개는 단순히 놀라울 뿐만 아니라 뜻밖의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참자>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유별난 작품이었는데, 동명의 드라마에서 주인공 가가는 같이 수사하는 형사한테서 '자네, 듣자하니 쓸모 없는 것만 뒤지고 다닌다면서?'라고 비아냥 어린 소릴 듣는다. 그때 가가는 이렇게 말했다. '저에겐 저만의 수사 방식이 있습니다.' 그 작품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런 가가 형사만의 수사 방식은 보는 입장에서도 왜 굳이 저런 걸 궁금해하는 걸까 싶은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수사는 사건 해결에 크든 작든 다 도움이 된다. 이게 단순히 픽션이라서 그런 걸까? 픽션이라 치부하고 싶으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이번에 두 번째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가히 전설적인 작품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정적인 제목이며 표지는 연애소설 못지않게 달달하지만 이 작품은 엄연히 복선과 반전이 두드러지는 추리소설이다. 그렇다고 반전을 빼면 시체인 소설도 아니며 살인사건의 범인을 지목하는 보편적 형식의 추리소설과도 결을 달리한다. 하지만 출간된 그해에 추리소설상이란 추리소설상을 모조리 휩쓸고 각종 랭킹에서 1, 2위를 석권하면서 작가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긴 대표작이기도 하다. 작가의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도 압권이지만 적어도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차원에서 보자면 이 작품 만한 수준의 추리소설은 이후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반전이 중요한 추리소설일수록 후기를 쓰기가 참 난감하다. 스포일러가 없어야 사람들한테 추천하기 좋지만 그렇게 되면 내밀한 감상은 포기해야 한다. 이 작품을 소개함에 있어 스포일러는 절대 가당찮은 것이기에 말을 삼가야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쓰는 입장에서 수박 겉만 핥고 마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윤곽을 흐리게 그리면서 작품을 최대한 추천했으니, 이제 스포일러가 첨가된 감상을 쓰려고 한다.


 작품을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이 아래는 쳐다보지도 마세요.




 스포일러 출몰 구간




 사실 이 작품의 반전이나 트릭엔 조금 치사한 구석이 있다. 말은 되지만 보여주는 방식이 참 약았다. 처음부터 시답잖은 얘기나 하는 주인공이 제아무리 자칭 젊게 사는 양반이라지만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 존재라고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반쯤 양보해도 허구가 적잖이 가미된 인물로 이와 같은 주인공의 정체에 대해서는 내 스스로 타협하며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추측해보는 거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작가의 이상이 반영된 인물이자 더 나아가서는 작가가 자기는 이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사람들한테 고백하는 것도 같았다. 물론 이게 나쁘다는 얘긴 아니다. 작가가 이상을 얘기하는 한편 자신의 장기인 수다나 오독을 유도하는 서술을 활용한 건 대단히 흥미로웠다. 덕분에 응큼한 장면으로 등장을 했음에도 끝까지 캐릭터나 이야기의 매력에 취했으며 결국 작가가 원하는대로 기분 좋은 배신감을 즐길 수 있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이 '나는 60대 후반 노인인데...' 하면서 시작했다간 이 작품의 재미나 주제의식을 반의 반도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식으로 시작된 소설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게 쓰여진 소설밖엔 안 될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사람들이 말하던 특급 반전이 도통 나올 기미가 없는데 갑자기 주인공 여동생의 손녀라는 캐릭터가 나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았는데 그 틈에 갑자기 미래로 시간이 흘렀나 싶었다. 그런 줄 알았다가 시간이 흐른 기색 없이 자꾸 나이 얘기를 해대니까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책만 오역이 한가득인 거냐고 혼란스러웠다. 하필 그때 수업이 시작돼서 되게 애매한 시간에 흐름이 끊긴 탓에 나의 혼란은 이내 망상으로 번지기까지 했다. 어딜 어떻게 생각해도 나루세가 노인일 리가 없는데, 이게 말이 되나?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다시 읽으니까 이게 다 말이 됐던 것이다. 말이 안 된다고 여긴 건 다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고.


 위에서 말했듯 작가가 우리의 선입견을 너무 작정하고 이용해서 속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하지만 서술 트릭의 묘미는 원래 작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독자가 알아서 속아넘어가는 기교이기 때문에 분한 대신 이게 바로 활자의 매력이구나 하며 신세계를 경험한 것으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서술 트릭이 있다는 작품이라면 한번 더 눈길이 갔는데 이 작품처럼 놀랍고 감동적인 트릭은 보질 못했다. ... 아, 엇비슷한 작품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말했다간 스포일러니까 마찬가지로 말을 삼가겠다.

 추리소설은 이른바 반전의 문학이라 할 만큼 항상 놀라움을 추구하긴 하지만 단순히 놀라움 뿐이라면 금세 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벚꽃~>은 놀라움에서 끝나는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실제로 나루세 같은 노인을 만난 경험이 있는지, 아니면 추측한 것처럼 작가 본인이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나루세의 입을 통해 자기 반전의 의의란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설득한다. 어떻게 보면 약간 오그라들 법한 내용이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대사인 지라 진정성이 남달랐다.


 루이 암스트롱의 명곡 'What a wonderful world'에서 3절의 가사가 이런 내용이다.

 지금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전 그 아기들이 자라는 걸 보겠지요. 그 아이들은 제가 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테구요. 그렇게 생각하노라니 이 세상은 참 멋진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이 세상은 참 멋진 곳이라니까요.

 난 이 가사의 내용에서 드러난 노인의 여유나 겸손함에 충격을 받았었다. 왜냐하면 난 이 정도의 어른을 단언컨대 실생활에서 만나뵌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늙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순수하게 궁금해하고 배우려하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애당초 세상이 그들에게 마땅히 기대하는 바가 없고 그들로서도 굳이 기력이 떨어진 마당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긴 버거운 일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노인이 젊음이나 미래에 대해 시샘하거나 폄훼하기 보다는 멋진 세상이라 칭하다니, 깊이가 다른 가사라고 생각했다. <벚꽃~>도 마찬가지였다.


 이 소설의 짜임새가 난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필요한 듯 불필요한 듯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구성은 그 자체로도 작품을 풍성하게 했고 주인공의 젊은 활극이란 점이 강조돼 작가의 함정에 더욱 속아넘어갔으니 말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작중 행적은 반전의 효과에 크게 한몫했는데 책장을 덮고 실제로 작중 행적대로 움직였던 노인의 모습을 찬찬히 상상하니 기가 차면서도 가슴에 남겨지는 바가 컸다. 상상하기에 좀 민망한 장면도 일부 있었지만 나루세 말마따나 그야말로 하나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들이라서 감동하지 않을 여력이 없었다. 누군가도 그렇고 나 역시도 이 작품은 사기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나루세의 커피 훔치기와 같은 불쾌한 수업료가 아닌 상상력을 자극하는 통쾌한 수업료라서 결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끝까지 추측하는 거지만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나도 이렇게 나이를 먹고 싶다.

빨간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어. 단풍나무나 은행나무처럼 선명하진 않고, 약간 은은한 빛을 띠고 있지만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아. 다들 그냥 지나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꽃구경하던 때를 생각해봐. 전국에 벚나무가 얼마나 많아. 그걸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어. 그러면서 꽃이 지면 다들 무시하지. 색이 칙칙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건 그래도 좀 나은 편이야. 대부분은 단풍이 드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어. 좀 심한 거 아닌가? - 5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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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필립 K. 딕 걸작선 12
필립 K.딕 지음, 박중서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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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영화에 열광한 것에 비해 원작 소설은 좀 늦게 찾아본 것 같다. 원래라면 가장 먼저 봤어야 했는데...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와 영화 <블레이드 러너>, <블레이드 러너 2049>까지. 이렇게 세 작품을 다 봤는데 소설은 블레이드 러너 시리즈의 1편의 원작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 두 작품은 별개의 작품으로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스토리는 큰 틀만 똑같고 캐릭터 설정도 같은 듯 다르며 무엇보다 주제의식이 근본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다. 개인적으로 스토리는 원작이, 주제의식은 영화 쪽이 더 좋았다. 하지만 소설이고 영화고 독자적으로 제작된 후속작 2049에는 미치지 못한다. 가장 재밌는 걸 맨 처음에 보고 말았네.

 필립 K. 딕의 소설은 처음 읽었는데 딱 봐도 이 작가가 디스토피아 묘사에 능한 작가구나 싶었다. 감정을 조절하는 장치를 언급하며 시작되는 도입부에는 한때 유행했을 법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됐는데 이게 꽤 느낌 있었다. 60년대에 나온 소설이라 옛날 느낌도 나지만 장르가 SF인 지라 미래를 배경으로 펼쳐진다는 이 특이한 괴리는 사뭇 독특하게 다가왔다. 전쟁의 후폭풍으로 인해 살기 힘들어져 사람들이 다른 식민지 행성으로 이주하는 미래의 지구, 그 지구를 저마다의 사정 때문에 잔류해버린 사람들이 점점 사람과 유사해지는 안드로이드와 엮이면서 벌어지는 혼란의 이야기가 바로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였다.


 간단히 말해 안드로이드(영화에선 레플리컨트)와 현상금 사냥꾼(영화에선 블레이드 러너) 사이의 추격전을 다룬 하드보일드 SF라고 보면 되는데 내용은 단순하지만 일부 설정이 상당히 돋보였다. 안드로이드가 외양으로나 말하는 거나 사람이랑 구별할 수 없게 된 나머지 골치가 아파진 현상금 사냥꾼들은 안드로이드와 인간을 식별할 수 있는 보이트 캠프 시스템을 이용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현상금 사냥꾼인 주인공은 말썽 많은 안드로이드를 '퇴역'시켜 현상금을 받아낼 수 있겠다 생각하지만 그의 앞에는 생각보다 험난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는데...

 보이트 캠프 시스템은 도의적으로 거부감이 드는 질문이나 말을 던져봄으로써 상대의 반응을 엿보는 검사 방식인데 예를 들면 TV를 보다가 검지에 말벌이 앉았다든가 잡지를 펼쳤는데 나체의 여자 사진이 떡 하니 있다든가 자기가 들고 있는 가방은 갓난아기 가죽으로 만들었다는 등 거부감이 들고 역겨운 내용의 말을 사냥꾼이 막 던진다. 이때 인간이라면 내용을 이성적으로 판단하기 이전에 공통된 반응을 보이는 반면 안드로이드는 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거지? 안드로이드들은 인간의 대체 노동력으로써 날 때부터 어른의 몸을 갖춰서 따로 인성 교육, 윤리관을 갖출 틈이 없었던 탓에 - 다만 입력됐을 뿐 - 이상한 질문이 있으면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지 거부감은 나중에 따라오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주인공은 이런 검사 방식을 통해 자기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믿고 있던 안드로이드마저 솎아내는 것도 가능해졌지만 점차 사냥이 거듭될수록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오게 된다.


 설정 자체만으로도 재밌었지만 그 검사 장면에서 주인공과 상대 안드로이드 사이에 오가는 대화 내용도 인상적이었다. 대사도 찰졌고 무엇보다 안드로이드가 릭을 흔들고자 '당신도 인간의 기억이 주입됐을 뿐인 안드로이드가 아니란 보장이 있느냐'고 하는 건 의미심장하기까지 했다. 여기까지만 봤을 땐 영화와 유사했는데 이 이후부터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소설은 인간과 안드로이드는 외양만 똑같지만 결정적으로 감정을 타고나는가, 아니면 감정을 학습하는가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다고 결론을 짓는다. 반면 영화에서는 진정한 인간의 증표란 태생적인 것이 아닌 후천적인 요인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했는데 난 후자가 더 마음에 든다. 원작은 결국 안드로이드에 한계가 있다는 식으로 마무릴 지어서 허무한 경향이 있었다. 안드로이드와 엎치락뒤치락하는 전개 자체는 좋았지만 결론을 내리는 근거가 좀 옛스럽지 않았나 싶다.

 이처럼 소설은 익히 알려진 영화와도 차이가 나는데 늘 그렇듯 일장일단이 있다. 영화가 주제의식에 비해 지루하고 통속적인 감정선에 따라 스토리를 전개시켰다면 소설은 보다 분위기 있고 철학적이지만 결정적으로 주제의식이 허무했다. 꽤 큰 차이가 나서 정말 완전히 별개의 작품으로 생각하고 접하는 게 마음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심지어 제목도 완전히 다르니... 소설을 맨 처음에 읽었더라면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역시 난 2049가 제일 좋았다.



https://blog.naver.com/jimesking/221230538170

 이건 영화에 대한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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