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우타노 쇼고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10








 내가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말하자면, 늘 가치관 전복을 추구하는 장르 특유의 경향을 크게 들 수 있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부분이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중요하지 않게 여겼던 부분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는 식의 전개는 단순히 놀라울 뿐만 아니라 뜻밖의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신참자>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유별난 작품이었는데, 동명의 드라마에서 주인공 가가는 같이 수사하는 형사한테서 '자네, 듣자하니 쓸모 없는 것만 뒤지고 다닌다면서?'라고 비아냥 어린 소릴 듣는다. 그때 가가는 이렇게 말했다. '저에겐 저만의 수사 방식이 있습니다.' 그 작품을 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런 가가 형사만의 수사 방식은 보는 입장에서도 왜 굳이 저런 걸 궁금해하는 걸까 싶은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수사는 사건 해결에 크든 작든 다 도움이 된다. 이게 단순히 픽션이라서 그런 걸까? 픽션이라 치부하고 싶으면 그래도 상관없지만 난 그러고 싶지 않다.

 우타노 쇼고의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이번에 두 번째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가히 전설적인 작품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정적인 제목이며 표지는 연애소설 못지않게 달달하지만 이 작품은 엄연히 복선과 반전이 두드러지는 추리소설이다. 그렇다고 반전을 빼면 시체인 소설도 아니며 살인사건의 범인을 지목하는 보편적 형식의 추리소설과도 결을 달리한다. 하지만 출간된 그해에 추리소설상이란 추리소설상을 모조리 휩쓸고 각종 랭킹에서 1, 2위를 석권하면서 작가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긴 대표작이기도 하다. 작가의 '밀실살인게임' 시리즈도 압권이지만 적어도 가치관을 전복시키는 차원에서 보자면 이 작품 만한 수준의 추리소설은 이후 다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반전이 중요한 추리소설일수록 후기를 쓰기가 참 난감하다. 스포일러가 없어야 사람들한테 추천하기 좋지만 그렇게 되면 내밀한 감상은 포기해야 한다. 이 작품을 소개함에 있어 스포일러는 절대 가당찮은 것이기에 말을 삼가야겠지만 그렇게 되면 아무래도 쓰는 입장에서 수박 겉만 핥고 마는 기분이 들 것이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윤곽을 흐리게 그리면서 작품을 최대한 추천했으니, 이제 스포일러가 첨가된 감상을 쓰려고 한다.


 작품을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이 아래는 쳐다보지도 마세요.




 스포일러 출몰 구간




 사실 이 작품의 반전이나 트릭엔 조금 치사한 구석이 있다. 말은 되지만 보여주는 방식이 참 약았다. 처음부터 시답잖은 얘기나 하는 주인공이 제아무리 자칭 젊게 사는 양반이라지만 현실에서도 볼 수 있는 존재라고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반쯤 양보해도 허구가 적잖이 가미된 인물로 이와 같은 주인공의 정체에 대해서는 내 스스로 타협하며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추측해보는 거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작가의 이상이 반영된 인물이자 더 나아가서는 작가가 자기는 이렇게 늙어가고 싶다고 사람들한테 고백하는 것도 같았다. 물론 이게 나쁘다는 얘긴 아니다. 작가가 이상을 얘기하는 한편 자신의 장기인 수다나 오독을 유도하는 서술을 활용한 건 대단히 흥미로웠다. 덕분에 응큼한 장면으로 등장을 했음에도 끝까지 캐릭터나 이야기의 매력에 취했으며 결국 작가가 원하는대로 기분 좋은 배신감을 즐길 수 있었다. 처음부터 주인공이 '나는 60대 후반 노인인데...' 하면서 시작했다간 이 작품의 재미나 주제의식을 반의 반도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식으로 시작된 소설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게 쓰여진 소설밖엔 안 될 것이다.

 처음 이 작품을 읽었을 때가 생각난다. 사람들이 말하던 특급 반전이 도통 나올 기미가 없는데 갑자기 주인공 여동생의 손녀라는 캐릭터가 나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졸았는데 그 틈에 갑자기 미래로 시간이 흘렀나 싶었다. 그런 줄 알았다가 시간이 흐른 기색 없이 자꾸 나이 얘기를 해대니까 내가 지금 들고 있는 책만 오역이 한가득인 거냐고 혼란스러웠다. 하필 그때 수업이 시작돼서 되게 애매한 시간에 흐름이 끊긴 탓에 나의 혼란은 이내 망상으로 번지기까지 했다. 어딜 어떻게 생각해도 나루세가 노인일 리가 없는데, 이게 말이 되나? 하지만 수업이 끝나고 다시 읽으니까 이게 다 말이 됐던 것이다. 말이 안 된다고 여긴 건 다 나의 선입견 때문이었고.


 위에서 말했듯 작가가 우리의 선입견을 너무 작정하고 이용해서 속을 수밖에 없기도 했다. 하지만 서술 트릭의 묘미는 원래 작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독자가 알아서 속아넘어가는 기교이기 때문에 분한 대신 이게 바로 활자의 매력이구나 하며 신세계를 경험한 것으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서술 트릭이 있다는 작품이라면 한번 더 눈길이 갔는데 이 작품처럼 놀랍고 감동적인 트릭은 보질 못했다. ... 아, 엇비슷한 작품이 있긴 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말했다간 스포일러니까 마찬가지로 말을 삼가겠다.

 추리소설은 이른바 반전의 문학이라 할 만큼 항상 놀라움을 추구하긴 하지만 단순히 놀라움 뿐이라면 금세 질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벚꽃~>은 놀라움에서 끝나는 소설이 아니다. 작가가 실제로 나루세 같은 노인을 만난 경험이 있는지, 아니면 추측한 것처럼 작가 본인이 그렇게 늙어가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는 나루세의 입을 통해 자기 반전의 의의란 무엇인지 최선을 다해 설득한다. 어떻게 보면 약간 오그라들 법한 내용이었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의 대사인 지라 진정성이 남달랐다.


 루이 암스트롱의 명곡 'What a wonderful world'에서 3절의 가사가 이런 내용이다.

 지금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전 그 아기들이 자라는 걸 보겠지요. 그 아이들은 제가 알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될 테구요. 그렇게 생각하노라니 이 세상은 참 멋진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요, 이 세상은 참 멋진 곳이라니까요.

 난 이 가사의 내용에서 드러난 노인의 여유나 겸손함에 충격을 받았었다. 왜냐하면 난 이 정도의 어른을 단언컨대 실생활에서 만나뵌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신의 늙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순수하게 궁금해하고 배우려하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다. 애당초 세상이 그들에게 마땅히 기대하는 바가 없고 그들로서도 굳이 기력이 떨어진 마당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긴 버거운 일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런데 노인이 젊음이나 미래에 대해 시샘하거나 폄훼하기 보다는 멋진 세상이라 칭하다니, 깊이가 다른 가사라고 생각했다. <벚꽃~>도 마찬가지였다.


 이 소설의 짜임새가 난 여러모로 마음에 들었다. 필요한 듯 불필요한 듯 과거와 현재를 왔다 갔다 하는 구성은 그 자체로도 작품을 풍성하게 했고 주인공의 젊은 활극이란 점이 강조돼 작가의 함정에 더욱 속아넘어갔으니 말이다. 이러한 주인공의 작중 행적은 반전의 효과에 크게 한몫했는데 책장을 덮고 실제로 작중 행적대로 움직였던 노인의 모습을 찬찬히 상상하니 기가 차면서도 가슴에 남겨지는 바가 컸다. 상상하기에 좀 민망한 장면도 일부 있었지만 나루세 말마따나 그야말로 하나같이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들이라서 감동하지 않을 여력이 없었다. 누군가도 그렇고 나 역시도 이 작품은 사기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나루세의 커피 훔치기와 같은 불쾌한 수업료가 아닌 상상력을 자극하는 통쾌한 수업료라서 결코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끝까지 추측하는 거지만 작가의 생각에 동의한다. 나도 이렇게 나이를 먹고 싶다.

빨간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어. 단풍나무나 은행나무처럼 선명하진 않고, 약간 은은한 빛을 띠고 있지만 그래서 눈에 잘 띄지 않아. 다들 그냥 지나치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꽃구경하던 때를 생각해봐. 전국에 벚나무가 얼마나 많아. 그걸 바라보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탄했어. 그러면서 꽃이 지면 다들 무시하지. 색이 칙칙하다느니 어쩌니 하는 건 그래도 좀 나은 편이야. 대부분은 단풍이 드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어. 좀 심한 거 아닌가? - 50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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