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자는 죽어야 한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5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7.6







 이 작품의 제목은 저자의 전작들과 비교해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매우 직설적이고 독선적이라 읽기 전 고개를 갸웃했는데 막상 정말로 '죽어 마땅한 어리석은 자'랄 인물은 별로 보이지 않아서 의아하기도 했다. 난 또 어리석은 놈들이 줄을 이어서 등장하는 줄 알았더니,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하드보일드 작가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하라 료의 작품인 만큼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다음 작품을 읽기 시작한 건 곤란을 자처했던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제목이 함축하는 바가 후반부에서 터지긴 하지만 약간 독자를 낚는 제목이란 생각도 들었다.

 시리즈 2기의 시작을 알리는 이 작품은 일본에서 전작으로부터 10년이 지나 발표됐고 한국에서도 대략 5년 정도 지나고 출간됐다. 아마 내가 아는 한 과작의 정점을 점하는 작가면서 발표하는 작품마다 밀도가 높아 후속작이 나올 때까지의 긴 기다림이 용인되는 흔치 않은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가라 할 만했다. 장편 3권과 단편집 한 권, 그리고 시리즈 2기를 알리는 이번 신작은 - 일본에선 최근에 시리즈 5권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출간할 때가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 처음으로 기대에 못 미쳤던 작품이다. 내가 이 과작 작가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품은 걸까?


 전반적으로 작풍이 좀 바뀐 듯하다. 시리즈 2기라 그런가? 시간이 흘러 이젠 21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고 사와자키를 비롯한 주역 인물들이 죄다 나이를 좀 먹었다. 여전히 사와자키는 단독으로 활동하는데 경찰과 야쿠자 사이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초연하다. 작중 표현을 빌리자면 평정하게 탐정 업무를 수행하는데 정의를 위해서라거나 속물적인 이유도 아닌 정말 딱 탐정이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예의만 차릴 뿐이라 이번에도 하드보일드의 느낌은 충만했다. 분위기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는데 내가 바뀐 것 같다고 느낀 건 바로 이야기의 모양새다. 사건의 복잡한 내막이야 그렇다 쳐도 다소 정리가 안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전개도 이상하게 빠른데 전반적으로 등장인물이나 등장 단체가 너무 많은 것에 비해 이야기 전개엔 완급 조절이 안 된 것 같아 가독성에 비해 몰입도는 떨어졌다.

 시리즈의 2기를 알리는 작품이라고 계속 말했는데 그렇게 의미가 부여된 작품치고 에피소드에 크게 임팩트가 없던 것도 좀 걸린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게 2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과작도 보통 과작이 아닌 작가에게 있어 지나치게 힘을 뺀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문장력이 상당한 나머지 옮겨 적고 싶은 구절이 많았던 전작에 비해 이번 작품은 신기하게 문장마저 평이했는데 내가 기대를 너무 많이 한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작가가 매너리즘 비슷한 무언가에 시달리는 것인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재독하면 인상이 많이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 시리즈의 팬으로서 소장하고 있겠지만 기대에 비해 미진한 인상을 남겨 평가는 좀 유보해야 할 듯하다. 재독을 언제 하려나.



인상 깊은 구절


병원이 인간 생명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지만, 가장 잘하는 일은 생명에 가격표를 매기는 짓이다. 가격표가 붙으면 보험사 직원도 나타나고 사기꾼도 등장한다. 머지않아 탐정도 얼굴을 내민다. 그뿐이다. - 7~8p


즐거운 시간은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게 인생의 첫걸음이지만, 괴로운 시간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인생이 끝나갈 때가 되어서도 알기 힘들다. - 186p


자네도 알다시피 우리 변호사들은 늘 흥분 상태인 사람들을 상대하네. 겉모습만의 문제가 아니라 밖에서는 볼 수 없는 정신 상태도 포함해서 말이야. 우리는 그렇게 흥분한 사람을 다루는 일에는 충분히 능숙해. 그런데 때론 무서우리만큼 냉정한 녀석이 나타나는데, 냉정이란 말하자면 흥분의 반대 같은 거지. 수완 좋은 변호사는 이런 녀석도 급소만 찌른다면 어떻게든 대응할 수 있겠지. 곤란한 건 평정한 인간이야. 자네처럼 평정한 인간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니 경계할 수밖에 없지. - 188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노우맨 (리커버 에디션)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7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9.5







 내가 가장 처음 접한 작가의 책을 다시 읽었다. 이 작품을 읽고 시리즈의 1권부터 순서대로 읽겠노라 다짐했는데 꼬박 4년이 걸렸다. 이게 다 전편인 <리디머>가 늦게 출간된 탓이다. <스노우맨>이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이지만 전편을 예습하지 않아도, 또 개별적인 완성도도 뛰어나 국내에 처음 출간시킨 건 인정하지만 역시 들쑥날쑥한 출간 순서와 속도는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전편을 예습하지 않아도 괜찮은 작품이긴 해도, 역시 1권부터 차근차근 읽어나간 다음에 읽었을 때 감동이 배가되니 가급적 시리즈는 순서대로 읽어야겠단 생각은 변하지 않게 됐다.

 혹시 이 시리즈를 처음 접하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1권인 <박쥐>부터, 적어도 3권인 <레드 브레스트>부터 읽길 권한다. 물론 7권인 <스노우맨>도 시작으로선 그리 나쁘지 않다. 해리와 연쇄살인범의 대결이란 빅 이벤트가 드디어 그의 고국인 노르웨이에서도 펼쳐진 작품이니까. 1권과 7권 사이의 작품은 이를 위한 사전 단계이자 담금질로 생각할 수도 있고. 그렇게 표현하기엔 정말 많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무튼 이 작품 역시 이야기의 무대인 노르웨이, 특히 오슬로에서 읽으니 몰입도가 더욱 남달랐던 작품이다.

 직접 오슬로의 거리를 걸어본 나로선 작중의 서늘한 분위기가 더욱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왜 해리의 동료들이 노르웨이에선 연쇄살인은 없다고 단정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지금까지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해서 앞으로 일어나지 않으리란 건 사실 굉장히 순진하고 비논리적인 주장이지만 직접 그 동네를 걸어다닌 나로선 왠지 납득이 갔던 것이다. 그럼 요 네스뵈의 이 이야기는 그저 픽션으로 치부하면 그만인 것일까? 극우와 청산하지 않은 역사 문제가 현대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에 대해 매우 통찰력 있게 짚어낸 작가인 만큼 마냥 허구적이라 치부하긴 힘들어 보인다. 바라선 안 되는 일이지만, 그의 진단은 예언 같은 구석이 있으니까.


 직전에 <리디머>를 포스팅하면서도 언급한 사항이지만, 하나의 작품을 평가할 때 작가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국가가 중요한 요소로 거론되는 게 꼭 좋은 일이라 볼 수는 없다. 어쩔 때는 한계로 여겨질 수도 있는 부분인데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의 경우엔 노르웨이란 나라가 생소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어마어마한 강점으로 다가온다.

 작품의 서두에서 '세계 무대에서 노르웨이는 돈이 많아 세상 물정 모르는 금발의 여자와 같다'는 식의 묘사가 나오는데 - 왜 하필 여자인지는 의문이 들지만... - 이 점은 연쇄살인의 낌새가 느껴짐에도 떨떠름하는 걸 넘어 아예 해리가 유명해지고 싶어 안달이 난 관종으로 넘겨짚는 오슬로 경찰청의 분위기에서 문제점이 극대화된다. 톰 롭 스미스의 <차일드44>와는 경우가 많이 다르지만 이 정도면 연쇄살인범이 자아도취돼서 활개할 무대가 되기에 충분한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노우맨>은 시리즈의 어떤 작품보다 이야기가 명확하고 흡입력이 강하다. 연쇄살인범 '스노우맨'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계속 바뀌며 독자들을 현혹하는 진행도 일품이고 극을 이끌어가는 캐릭터들도 매력적이다. 해리의 성장을 위해 퇴장당한 인물이 한둘이 아니라 못내 아쉽지만;;; 새로 등장한 인물들의 존재감이나 역할도 이전의 동료들 못지않아 심심찮은 위로가 됐다. 처음 나왔을 때 괜히 한 번 반항하고 놀려주고 싶던 하겐 경정도 참 괜찮은 양반으로 등장하고 대놓고 노린 캐릭터인 줄 알았던 카트리네 브라트도 의외로 해리와 스노우맨에 뒤쳐지지 않은 활약을 보여 흥미진진했다. 출연 비중을 떠나 괜찮은 캐릭터를 만들 줄 아는 작가에게 어떻게 보면 내심 백과사전 수준의 분량은 필수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개인적으로 서양 스릴러 특유의, 사건의 내막에 주인공 형사의 개인사가 강하게 반영된 서사를 선호하지 않는데 이 시리즈만은 예외다. 한 가지 예로 <레드 브레스트>부터 이어진 라켈과의 관계가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날 것인지 보는 것도 흥미로운데 이 시리즈가 해리의 성장을 다룬 하나의 길다란 이야기 안에서 참으로 일맥상통한 서사라 불만이 생기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이야기의 무대가 노르웨이인 것과 마찬가지로 시리즈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일 텐데 작가가 개연성을 저버리지 않고 잘 완성시켰다는 생각만 든다. 늘 말하지만 백과사전 수준의 두께임에도 하나의 흐름 안에 여러 요소를 잘 연결시키는 작가의 솜씨는 늘 감탄스럽다.

 방심할 수 없는 전개와 더불어 시리즈의 가장 큰 미덕일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결말이 어우러져 깊은 만족감을 선사해준 작품이다. 형사와 연쇄살인범의 대결로 정의될 수 있는 작품이라 뻔한 양상을 보이기 십상이었지만 노르웨이를 넘어 북유럽이기에 구현이 용이해 보이는 눈에 대한 서늘한 묘사가 기가 막히게 활용돼 상당한 존재감을 안겨줬다. 한마디로 기획이 탁월한 작품이었다. 위에서 후속작을 기대하게 만드는 결말이란 얘기를 했는데 그와 동시에 전작을 다시 보고 싶게 만드는 내용이란 점 역시 인상적이었다.

 솔직히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 개인적으로 작품성으로는 <레드 브레스트>, 오락성으로는 <네메시스>를 시리즈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다. - 시리즈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란 점에선 이견을 제시하기가 힘들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사람들이 시리즈 최고의 작품이라 칭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작품이 마이클 패스밴더 주연의 영화로도 나왔다기에 기대가 됐는데 평가가 바닥을 기어서 걱정이 된다. 이렇게 두 번 읽은 마당에 영화를 안 볼 수가 없는데... 또 예고편은 잘 만든 것 같아서... 모든 못 만든 영화는 그래도 예고편은 잘 만든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닌 걸까.

좋은 이야기는 연이은 성공이 아니라, 처절한 실패에서 나옵니다. - 369p




그러니까 겉으로 청렴결백하게만 보인다면, 청렴결백한 거로군요.

그게 <리베랄>을 팔리게 하는 요인이오. 사람들은 진실이 밝혀졌다고 생각하면 만족하니까. - 462p




정의란 건 철학에서든 재판에서든 무딘 칼과 같으니까. 우리가 가진 건 운 좋은 혹은 운이 나쁜 의학적 소견이라네. - 613p




살고자 하는 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과 죽고자 하는 자에게서 죽음을 빼앗는 것 중에 뭐가 더 나쁜 것 같소? - 615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디머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6
요 네스뵈 지음, 노진선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9




 


 국내에 출간되는 순서가 워낙 뒤죽박죽인 시리즈라 매번 전편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질 때 읽게 된다. 그래도 이번 6권은 '오슬로 3부작'과 <스노우맨> 사이에서 쉬려는 듯 나름 독립적인 에피소드라서 별 어려움 없이 몰입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노르웨이에서 읽은 터라 몰입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고 아무래도 시리즈의 작품 중 처음 접했던 <스노우맨>의 직전 이야기라 정서적 연결고리가 형성돼 만족도가 꽤 높았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이는 유독 출간 순서가 오락가락한 우리나라의 독자들만이 경험할 일이리라.

 요 네스뵈의 강점은 백과사전 수준의 두께의 분량과 그에 걸맞는 작품의 밀도를 들 수 있다. 장편소설이라는 거대한 흐름 안에 맞춰 들어가는 각 요소의 구성이 일품으로 충분히 하나의 중, 단편으로 분리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장면이나 설정들이 해리의 성장담과 도덕적 딜레마에 맞춰 상당히 하드보일드적으로 연결됐다. '중2병'과 '간지'의 기로에 있어야 표현이 가능한 하드보일드적인 작풍은 여전하고 굳이 크로아티아인을 개입시킨 청부 살인이란 본편의 핵심 사건도 제법 박진감 넘쳤다.

 처음엔 다소 뜬금없고 지루했지만 이내 범해지는 비정한 진행 방식에 또 속절없이 읽어내려가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뻔한데 참신하게 사고를 전환시켜 눈을 번쩍 뜨게 만든 트릭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비아르네 묄레르의 존재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가히 일본인도 울고 갈 죄의식이 그려진 건 익숙한 한편으로 신선했다.


 일본과 더불어서 중국과 북유럽의 추리소설도 좀 믿고 읽는 편인데, 중국은 일본 추리소설의 엔터테인먼트가 더 부각된 추리소설을 쓰고 북유럽은 사회파적인 면모가 강조된 추리소설을 잘 쓴다고 개인적으로 생각된다. 특히 요 네스뵈는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뛰어났던 몇몇 작품을 선보여 그런 인상이 더욱 남았는데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가장 최근에 읽은 작가의 작품 <바퀴벌레>가 마치 '양산된 범죄 소설' 같은 모양새였던 걸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오지만... 이번에 그려진 구세군 조직의 병폐는 그 어디에도 이상적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작가의 진단과 일맥상통해 이젠 쾌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노르웨이처럼 부유하고 복지가 탄탄하고 사람들의 시민의식이 높다고 해서 범죄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린 '해리 홀레' 시리즈를 통해 볼 수 있었다. 부끄러운 역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않거나, 극단적으로 관용을 잃었을 때 터질 비극이나, 심지어는 연쇄 살인까지 모조리. 허무맹랑하거나 결코 자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리라 여겨지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글쎄, 진짜 노르웨이인에겐 어떻게 읽힐지 모르겠는데 어디에도 완벽한 세상이 없다는 것은 곧 어디에도 완벽한 사람은 없어서 문제가 생긴다는 말과 같은데 노르웨이가 사람 사는 곳이라면 크게 다를 리 없을 테니, 또 구세군이라고 마냥 청렴하게 운영될 턱이 없을 테니 퍽 일리 있게 들렸던 것이다.


 이 작품을 읽을 당시 노르웨이를 여행 중이었던 나는 눈에 담겨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너무 대비되는 작품의 내용에 괴리감이 들긴 했지만 한편으론 노르웨이란 나라를 이해할 척도가 부분부분 제시된 것도 같아 의미심장하게 읽혔다. 실제로 경찰과 어떤 식으로 마주치는 경우 없이 여행은 무사히 잘 다녀왔는데 - 책의 지도를 참고 삼아 경찰청 앞을 지나가보긴 했다. - 작중 시기가 시기인 터라 적잖이 몰입됐다.

 물론 노르웨이 소설이라고 노르웨이를 이해해야 감상할 수 있다는 게 꼭 장점이리란 법은 없지만 적어도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는 이를 확실히 장점으로 승화시킨 면이 적잖다. 이게 바로 요 네스뵈의 작품이 여느 양산형 범죄 소설과 차별화되는 결정적인 이유이자 작가의 천부적인 재능이기도 하다. 노르웨이 국민 500만 명 중 한 사람이 작가적 사명감을 띄고 승화시킨 이야기, 이 시리즈의 정체성이자 어마어마한 강점이 아닐 수 없다.

 어째 작품의 내적인 이야기보다 외적인 이야기만 하게 됐는데;; 오히려 이야기 본편보다 비아르네 묄레르의 이야기가 더 인상적이라서 이런 식으로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다른 건 몰라도 묄레르의 이야길 읽어야 작품 전체상이 이해가 되는 등 이래저래 작품의 또 하나의 주요 에피소드였으니까.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흡사 일본인에 비견될 죄의식이 묘사됐는데 진지할 뿐더러 사뭇 문학적이라 한 번 읽은 것만으로 손대기 힘들 지경이다. 어쩌면 노르웨이 특유의 애수가 가장 깊이 드러난 부분일 수 있으니까... 다음에 두 번째 읽고 포스팅할 때는 이 점을 중점적으로 언급해야지.

차별받는 사람들이 꼭 이 사회의 약자는 아니라는 게 우리 측 주장입니다. - 168p




순간적으로 해리는 마음이 약해져 진한 연민을 느꼈다. 피해자 혹은 피해자의 가족에게가 아니라, 이렇게 가슴 아픈 순간에 자신의 한심한 인간성을 보게 된 남자에게. - 340p




어떻게 생각하세요?

심리학처럼 질문은 많고, 대답은 가설일 뿐이지. - 351p




올바른 행동은 게으르고 비전 없는 사람들의 미덕이지. - 617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란구미의 돈까스 취업 2 - 재일교포 2.5세 노란구미의 좌충우돌 취업 분투기
정구미 글 그림 / 거북이북스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5






 예전에 한창 논란이 있었음에도 개의치 않고 웹툰 <세 개의 시간>을 읽었던 이유는 작가 노란구미의 스토리텔링 자체에 반했기 때문이다. 국적이나 취업 등 자전적이면서 현실적인 고민을 풀어내는 게 좋았기 때문인데 작가의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을 이번에 읽게 돼서 여러모로 즐거웠다. 세대 차이는 좀 나지만 거의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이 작품을 읽으니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 내용일 수가 없던 것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하며 살고 싶은데 현실은 결코 녹록지 않고 누구도 내게 채근하지 않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 심리적으로 압박감이 더해지는 우울한 심정을 유머 코드와 섞어 완급을 조절해 표현한 작가가 과연 대단했다. <세 개의 시간> 때도 돋보였던 재일 교포의 정체성에 대한 파트를 다루는 솜씨도 남달랐고.

 혹자는 <돈까스 취업>이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괜찮다고 하는데 <세 개의 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은주의 방>이 아직 연재 중이라 판단하기 힘들단 걸 생각하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분량도 두 권으로 깔끔하게 끝나서 진입 장벽도 낮고 무엇보다 제목이 독특한 것도 강점 중 하나다. 모두의 예상과 달리 이 작품은 돈까스 가게에 취업하는 얘긴 아니고;; 대신 돈까스가 일본에서 시험이나 면접 등 중요한 일을 하기 전에 먹는 음식이라는 맥락에서 붙인 단어다. 돈까스의 일본 발음 '톤카츠'에서 '카츠'는 '이긴다'는 뜻의 '카츠勝'와 발음이 같은 것에서 일본인들의 미신/습관이 생겼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엿이나 찹쌀떡 같은 것이려나? 아무튼 이 작품은 작가가 실제로 반다이에 취업하려 했지만 좌절당한, 혹은 스스로 포기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현재 만화가로서 나름 족적을 남긴 작가의 성과를 떠올리며 읽으니 사뭇 고무적으로 읽혔다. 만화가는 아니지만 비슷한 꿈을 꾸고 있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귀여운 그림체와 캐릭터, 그리고 분위기로 유지되는 작품이지만 중간중간 진지한 장면은 진지한 장면대로 잘 연출해서 내심 방심할 수 없는 작품이라 생각됐다. 개그 소재인 줄 알았던 반지하에 출몰하는 곱등이와 남자친구 블랙남자의 패션을 후반부에 작품의 주제의식과 연결시킨 건 분명 감탄스러웠다. 또 처음엔 대놓고 밉상 캐릭터인 줄만 보였던 기찬 선배도 주인공과 같은 꿈을 꿨지만 현실과 타협해 시니컬해졌다는 설정 덕에 작품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아니었을까? 뜬금없이 시비를 거는 것 같아도 주인공에게 뼈가 되는 질문을 던져서 상당히 자극이 되긴 했으니까.

 역경도 있는 한편으로 탄탄대로 취업의 길을 걷는 주인공이 막판에 다다라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바와 마주한 건 자칫 썰렁한 결말로 비춰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중간에 묘사된 주인공의 고뇌가 무척 중요했다. 취업과 무관하게 보이는 학교에서의 일상적인 장면들과 재일 교포 가족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 등 제법 많은 요소가 한 작품 안에 다 다뤄진 셈인데 전혀 과하지 않고 오히려 꽤나 매끄럽게 연결시켰다고 본다. 각각의 요소가 주인공이 취업에 진지하게 임하는 이유와 더불어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 충동, 그리고 꿈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인데 그렇다 보니 문득 우리네 삶의 그 어떤 사소한 요소도 우리 자신과 무관한 게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과거의 선택에 대해 후회를 꼭 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아예 과거로 돌아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그럼 지금의 나는 없지 않을까 싶어 종종 소름이 돋곤 한다. 물론 지금의 나와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이니 그 나름대로 흥미로운 일이지만 문제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니 그렇게 어색하게 느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게 되면 결국 과거의 내 지난 나날들 모든 장면을 모두 소중히 여기게 되는데 다 기억나지 않더라도 소위 말하는 흑역사는 있으나 버릴 과거란 없구나 싶다.

 저번 달에 졸업 이후의 진로 등 여러 이유 때문에 상당히 우울했었는데 반쯤 충동적으로 내 몇몇 과거의 선택을 비관하는 지경에도 이르러 아무래도 이런 감정을 직접적으로 환기할 계기가 필요했다. 곧 있으면 떠나는 여행이 그런 역할을 해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직전에 읽은 이 작품이 우울한 감정을 많이 덜어줘서 여행도 홀가분하게 다녀올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여행을 다녀오면 바로 내년에 돌입하게 되는데 그 이후의 삶의 여정도 조금은 당찬 마음으로 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각오까지 드니 작중에서의 무모할 수 있을 주인공의 선택이 더욱 고맙기 그지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풍운의 첩자단 노키자루 1
야부구치 쿠로코 글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9.0







 아무래도 닌자라고 하면 <나루토>가 바로 연상됐는데 이제는 <노키자루>가 그보다 먼저 떠오를 것 같다. 일본 전국 시대에 우에스기 켄신의 밑에 있던 닌자들인 '노키자루'를 설정으로 한 이 만화는 역사적 배경과 설정에 적절한 픽션을 가미한 작품이다. 주인공 아사히의 능력 '천리 귀'와 일부 만화적이고 현대적인 비주얼의 캐릭터들만 제외하면 제법 사실적이고 비정한 묘사와 고증 - 적어도 <나루토>보다 개연성도 있고 허황되지도 않아서 좋았다. - 이 빼곡히 들어찬 작품이었는데 잡지 폐간이란 작품 외적인 배경 때문에 급히 완결된 게 그저 황당할 따름이다. 숙적인 신겐과의 전투가 아직 그려지지도 않았거니와 언젠가 아사히에게 내려질 명령에 대한 떡밥도 풀러지 않았건만...

 <기믹>을 재밌게 읽은 사람으로서 그 작품의 작화가인 야부구치 쿠로코의 그림은 물론이고 스토리 텔링까지 감상할 수 있었던 게 무엇보다 좋았다. 겉보기엔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것 같은 꼬맹이인 아사히가 주인을 위해 비인간적인 행동도 서슴지 말아야 할 노키자루가 되려고 노력한다는 이야기는 다분히 소년 만화/성장 만화적이었지만 수위에 있어서 수준이 남다른 작품이었다. 전란이란 상황에 따른 잔혹한 묘사가 여간 수위가 센 게 아니라서 전국 시대의 참혹함이 절로 피부에 와 닿았다. 특히 지금 기준에서 보면 비인간적인 걸 넘어 아주 야만적이고 미개하기까지 한 당시의 사고 방식은 자칫 잘못 손대면 미화하는 거냐며 반감이 들 법도 했는데 - 이를 테면 카미카제 같은... - 노키자루들의 동료애를 비롯한 드라마적인 요소 덕에 제법 예술적으로 다가왔다. 누군가 맡아야 할 더러운 일을 자처하는 숭고함과 무고한 희생자를 내게 되는 죄책감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아사히의 심리 묘사가 그런 의미에서 아주 뜻깊은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는 캐릭터들도 매력적이었고 전국 시대의 분위기, 그리고 아사히의 능력인 '천리 귀'도 꽤 인상적이었다. 천리 귀는 허구적이게 들리고 너무 사기적이면서 시각적으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소재일 것 같아 아사히의 정체성에 직결되는 만큼 그 쓰임이 매우 기대됐다. 아쉽게도 급히 완결되느라 이 기대는 보답받을 수가 없었는데, 거의 소머즈에 비견될 엄청난 청력이었던 터라 다시 말하지만 너무 아쉽다. 이는 작품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기도 하다. 작품이 흥하든 망하든 자체적인 완성도에 의해 정해질 일이어야 하는데 잡지가 폐간되면서 완결되는 바람에 장편 만화의 잠재력이 꺾인 건, 그리고 누군가 그 잠재력을 못 알아보고 다른 잡지에서 마저 연재되고 마무리되지 않은 건 정말 아까운 일이다. 좀 더 제대로 된 환경에서 연재됐다면 엄청난 작품이 됐을 텐데...

 여담이지만 이 작품의 1권을 구한 과정이 개인적으로 꽤나 뜻깊었다. 절판본이라 중고서점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필 1권이 알라딘 중고서점 광주충장로점에 있어서 결국 광주에 내려가야 했던 것이다. <기믹>의 팬이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물론 광주로 가는 김에 거기 사는 군대 선임도 만나고 왔고 고기도 얻어먹었지만 학교 과제 때문에 일상이 바빠 광주를 당일치기로 다녀온 건 역시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게 구한 1권과 더불어 작품 전체가 비록 급한 완결에도 불구하고 내용이 좋아서 올해 3월의 광주행이 좋은 경험이자 추억으로 기억될 듯해 참으로 다행이다. 알 수 없는 인연으로 이어진 작품이라 더욱 뜻깊게 읽힌 것도 있겠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