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성스러운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1
김보영 지음, 변영근 그래픽 / 알마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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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어느 날 신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남자에다가 백인이고 장애인이 아니며 이성애자인... 아무튼 절대자가 모든 차별 받는 존재를 적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내려오자 대부분의 차별주의자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역시 신은 남자였구나......'란 대사는 소름 끼칠 정도의 불안감을 선사한다. 나는 이 대사로 비롯될 터인 세계의 변화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그려졌을지 너무나 기대됐다.

 소설은 나의 이러한 기대를 영리하고 허무하게 배반한다. 페미니즘과 연동한 SF를 쓰라는 의뢰를 김보영 작가는 정면돌파를 감행하며 완수해낸 셈인데 그 분명한 목적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깔려 있어 읽는 재미 자체는 은근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비교를 하자면, 소설보단 다큐 같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좀 받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도 <천국보다 성스러운>에 비하면 대단히 은유적이라 느껴질 정도라는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린 차별주의자들이 태초에 성별에 따라 남녀를 차별해 세상을 개판으로 만든 도입부, 먼 미래에서 깨어난 남자가 대뜸 여자를 찾으면서 보이는 무척이나 미개한 모습, 어느 날 신이 모습을 드러낸 현재, 이 작품은 중편의 분량임에도 그 안에서도 더욱 간략한 단편들로 이뤄져 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들이 아까도 말했듯 매우 명확한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애당초 작가가 그런 글을 의뢰받았고 작가는 그대로 썼을 뿐이니까.

 소설의 메시지가 명확히 드러난다는 게 그렇게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순 없을 듯하다. 물론 직설적이다 보니 오히려 공허하단 느낌을 받았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같은 얘기라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길 풀어나갔을 때 사람들은 신선해하면서 더욱 그 이야기에 설득당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얘기를 요약하듯이 풀어낼 뿐이라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속뜻이 좋더라도 말이다. 난 소설은 가급적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할수록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비단 그렇지만 않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됐다. 굳이 말하자면 마뜩찮은 깨달음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치명적인 단점은 아니다. 내가 이 소설을 다 읽고서 정말로 아쉬웠던 부분은 사건을 수습하는 방식에 있다. 이 책의 소개글을 읽었을 때 관심이 갈 수밖에 없던 이유, 차별주의자 신이 등장한 이후에 변모할 세계의 모습이 어떤 디스토피아를 이룩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지 못했던 게 이 작품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설정은 참신하나 그 설정이 야기할 모든 상황을 간단하게 수습해버리는 전개와 결말에서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독자는 적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아예 낚였다고 생각했다. SF는 현실과 다른 형태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에 특화된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걸맞은 모양새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물론 결말의 수습 방식에 대한 떡밥을 초반부터 뿌렸기에 개연성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낚였다는 기분을 떨치기는 쉽지 않았다. 좀 맞지 않는 얘길 수 있는데 꼭 중편이어야 했나? 차라리 각 잡고 상상해서 풀어냈으면 분량을 더 늘여서라도 변화한 세계를 풀어낼 수 있었을 텐데... 어차피 작가가 의뢰를 받은 게 중편소설이니까 소용없는 가정이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작품 본편에 대한 아쉬움이 적잖다 보니 책의 일러스트며 가격 등도 눈에 안 들어오거나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일러스트의 경우엔 소설 본편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형태였으면 더 효과적이었을 듯하고 가격의 경우엔 100쪽이 넘을까 말까한 얇은 소설이 11,500원이나 한데 살 때도 그랬지만 읽고 나선 더 황당하다. 물론 종이의 재질이나 일러스트가 들어간 비용을 생각하면 그 가격이 과한 게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책을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결국 본편이 아쉬우니까 가격마저 곱게 보기가 힘들다. 차라리 확 별로였으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할 텐데 단지 아쉬울 뿐이라서 자꾸 말을 아끼게 되는 게 더 답답하다. 최소한 분량이라도 길었다면 이런 느낌은 안 들었으려나?

이백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 사람은 때로 백 년을 살고, 백 년간 백 년 전의 풍습을 지키는 데에 골몰하다가 가는 거지. 변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한 채. - 28p




인간이 비합리적이 되는 것 외에 저놈들을 사멸시킬 방법이 있겠어? - 78p




신의 의지는 언제나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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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박스 -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
토니 포터 지음, 김영진 옮김 / 한빛비즈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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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3







 리베카 솔닛의 '맨스플레인' 이후로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인 페미니즘 용어가 바로 본서의 제목이기도 한 '맨박스'가 아닌가 싶다. '맨박스'란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남자다움을 가리키는 신조어로 책에선 저자 자신을 포함해 이러한 맨박스에 갇혀버리는 남자들에게 변화를 촉구하고자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알아둬야 할 것이 있다. 저자가 변화를 촉구하는 대상은 선한 남성들이다. 이때 저자가 말하는 선한 남성들이란 자신은 선하기 때문에 딱히 맨박스고 자시고 딱히 벗어날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남성들을 가리킨다. 그럼 남자들이 자신을 선하다고 하는 게 착각이라는 게 저자의 요지란 건가? 그건 아니다. 실제 저자의 속내는 어떤지 모르나 적어도 이 책에선 그렇게 폭력적으로 이분법적인 사고를 느낄 수는 없었다.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 책의 서두는 저자의 충격적인 고백으로 채워져 있다.

 뉴욕의 브롱크스는 치안이 좋지 않은 동네로 유명한 만큼 이 지역 출신인 저자의 유년기도 어땠을지에 대해선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을 듯하다. 그래도 저자는 굳이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어쩌면 무덤까지도 갖고 가야 했을 과거를 서두에서 적극적으로 인용한다. 친구들이 인지 장애가 있는 동급생을 윤간할 때 차마 자신의 남자다움을 의심당할까 노심초사했던 일, 더러운 행위가 벌어진 장소에서 동급생의 손을 잡고 끌고 나오지 못했던 일,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기 합리화를 하며 결과적으로 방관해버린 일... 차마 그대로 옮겨 적지 못할 일을 저자는 무척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이 부분만으로 이 책, 그러니까 저자의 모든 말을 신뢰할 수 있게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겠다고 치부를 드러낸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그런데 이 저자는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낸 것이다.


 난 책을 읽는 자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하기 위해 읽는 것과 나머지 하나는 자신이 모르던 것을 알기 위해 읽는 자세다. 이 상반된 자세는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때 중요한 것이 있다면 책에 따라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에 따라 감상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맨박스>의 책장을 펼칠 땐 난 전자의 자세를 취했었는데 상술한 서두를 지난 뒤인 중반부부턴 점차 후자의 자세를 취하게 됐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아서 뒷장으로 갈수록 책이 느리게 넘어갔고 짧음에도 다 읽기까지 시간도 좀 걸렸다. 자신이 책으로부터 뭔갈 배우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건 경우에 따라선 거부감이 드는 일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때문에 살짝 갈등했던 것도 같다. 물론 지나고 보니 참 부질없는 갈등이 아니었나 싶지만 말이다.

 아까도 말했듯 저자가 쓴 이 글의 대상 독자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선한 남성들이다. 나 역시 이에 포함된다. 저자는 이 선한 남성들의 본질이나 성정에 대해선 특별히 의심을 두거나 하진 않는다. 단, 문제는 이 남성들이 자신이 선하기 때문에 모든 성차별 문제로부터 어떤 책임도 없다는 판단 하에 알게 모르게 주변에서 들리는 수많은 여성들의 외침을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중에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책과 저자의 주장이 묘하게 뉘앙스가 바뀐 채 악용된다는 얘길 접했는데 책에서 저자가 정확히 지적한 문제점들을 살펴본다면 헛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실 인간의 선함과 악함은 상황에 따라 정의가 달라지는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라 성별에 따라 이분화된다는 게 참 웃기는 일일 수도 있겠다. 여담이지만 남성이건 여성이건 선한 사람의 비율은 근본적으론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회적으로 어느 쪽의 악함이 더 부각되는 건 다른 문제지만... 어쨌든 이 책에서 저자는 자칭이건 타칭이건 어쨌든 전체적으로 다수에 해당하는 선한 남성들의 적극적인 연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한다. 단순히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필요한 이유만을 말하기 위해서라면 '맨박스'란 용어는 조금 과한 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저자는 그 이상의 이야길 하고 있다. 한 개인이 스스로의 판단으로 옳지 않다고 여기는 일들을 외면하고 지나간다는 게 왜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라는 지적보다 뼈아프게 다가오는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을 듯하다.

 돌이켜 보면 나도 다르지 않았다. 주변에서, 특히 내 앞에서 동의할 수 없는 말이 나왔어도 그냥 속으로 적당히 비웃거나 경멸하고 그랬는데 내심 그 자리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다고 속으로 타협해서 입을 열지 않았을 공산이 크다. 나는 언젠가 적잖은 사람들 앞에서 페미니스트라고 공언한 적이 있었는데 나의 발언에 대해 그다지 반응이 없었던 데에는 그 말에 책임이 있는, 혹은 설득력이 있는 모습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것은 나 혼자만의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마치 <알라딘>에서처럼 램프를 문지르며 소원을 비는 것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 아닐까. 그 작품에서 알 수 있듯 지니가 들어주는 소원은 기껏해야 겉면만 바뀌는 것에 불과한데 그럼 나도 겉면만 페미니스트였단 말인가. 책을 읽으면서 어딘가 가슴이 찔리는 느낌을 받았던 건 바로 이런 생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참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었다. 인간의 됨됨이는 인간의 말보다 행동을 통해 보는 게 더 정확하단 것처럼 저자의 주장 역시 변화와 행동을 촉구한다는 점에서 이전에 읽은 어떤 페미니즘 도서보다 근원적인 구석이 있다. 남성의 전근대적인 성역할을 꼬집으며 전개되는 주장은 다소 뻔한 감이 있었지만 방향 자체가, 이를 테면 어쨌거나 선한 남성들이 침묵하게 되는 이유를 그간 갇혀온 맨박스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임을 지적한 건 감탄할 만한 점이었다.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이 말 하나는 정말 맞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씁쓸한 얘기지만, 남자에게 페미니즘을 가장 설득력 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남성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사람도 자신 역시 맨박스에 갇혔던 사람이라며 서두를 깔고 글을 써내려갔기 때문에 더욱 와 닿았는지 모르겠다.

 뜬금없지만 이 책이 3년 전에 출간됐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나도 나름 페미니즘 저서에 관심을 가진 편이라 생각했는데 왜 이제야 읽었나 싶었던 것이다. 워낙에 랜덤으로 돌아가며 책을 읽는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늦은 만남이 아니었는지... 이런 책은 더 일찍 읽었어야 했는데. 괜히 쓸데없이 머리에 든 게 많은 상태에서 읽어서 중간에 살짝 헤맸던 걸 생각하면 이 늦은 만남은 역시 독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도 아예 만남 자체가 성사되지 않는 것보다 낫겠지... 더 늦기 전에 읽을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우리 ‘남자‘들은 마치 첫 경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우리들은 마치 두 살 때부터 섹스를 해온 것처럼 행동했다. - 32p




남성들은 자신이 필수적으로 권력과 영향력을 가져야 하며 여성들을 지배하는 위치에 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남자로서 실격처럼 느껴지는 것, 그것이 맨박스의 발현이다. - 117p




사회적으로 학습한 맨박스의 규범을 무시한다고 해서 나약하거나 무른 인상을 주진 않을까 걱정해선 안 된다. 오히려 맨박스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남자의 모습이라는 걸 깨달아야 한다. 특별한 용기와 배짱 없이는 맨박스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말이다. - 1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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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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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9.5







 이 작품을 두 번째로 읽으면서 감상이 달라진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주인공의 인상이다. 난 이 작품을 주인공 슈이치와 비슷한 연배였을 때 처음 접했다. 그땐 슈이치의 감정이 여과되지 않고 100% 전달됐다. 그가 양부를 죽여야 하는 이유, 증오심, 가족을 향한 그의 모든 행동이 섣부르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천재적이고 대담하다고 느꼈었다. 그 때문에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처음엔 분량 때문에 겁을 잔뜩 먹었지만. 참고로 이 작품은 내가 처음 읽은 기시 유스케의 작품이다. <검은 집>보다도 먼저.

 처음 읽은 시점으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즈음인 지금에 와서 읽으니까 생각이 좀 달라졌다. 다시 읽으니 슈이치가 많이 경솔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의 선택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아마 이 부분이 이 작품이 낸 가장 큰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동의할 법한 얘기를 하는 소설은 그렇게 흥미롭지 않다. 누구나 동의할 법하지 않은 행동의 속내를 설득력 있게 묘파해내는 것이야말로 소설이, 그것도 500페이지가 넘는 1인칭 시점의 장편소설이기에 쟁취할 수 있는 지점이리라. 작가의 심리 묘사는 여전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점점 궁지에 몰리다가 취하게 된 슈이치의 선택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쉽게 읽어 내려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슈이치가 살인을 저지르고 몰락하는 일련의 과정에 설득을 당하는 동시에 한 발자국 거리를 두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건의 전말과 무관하게 일단 슈이치의 결심이 어느 정도 지나친 면이 있었던 건 다시 생각해도 명확하고, 완전 범죄를 수행하고자 고심을 거듭하는 모습에선 소름이 끼쳤다. 정말 순수하게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긴 하지만, 자신의 범죄에 작전명을 붙인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 갔기 때문이다.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자 주인공이 일부러 명랑한 척한 걸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런 부분이야말로 주인공의 경솔함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보니 읽다 말고 슈이치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실은 살인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열쇠라고 말하는 것은 다 슈이치, 너 혼자만의 자기 합리화는 아니냐고.

 작품의 분량에 대해선 뭐라 더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기시 유스케답게 설명이 가득하지만 작가로선 최선을 다해 쉽게 쓴 듯하고 길이도 적절했다. 무엇보다, 작중에서 설명되는 살인의 작동 원리를 전부 이해하지 않아도 이해할 때 문제는 없기에 큰 단점이라 짚을 수도 없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어떻게 완전 범죄를 성공시키느냐가 아닌 범죄를 저지른 이후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슈이치가 완전 범죄를 궁리하는 걸 보고 이걸 쓴 작가도 언젠가 똑같은 고민을 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디테일해서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난다. 기시 유스케의 취재 능력은 몇 번을 생각해도 전율을 금치 못하겠다.


 방금 언급했듯 이 작품의 포인트는 완전 범죄를 어떻게 성공시키느냐가 아니다. 슈이치는 거사를 치르기 직전에서도 몇 번을 주저한다. 핑계를 찾으려고 한다. 이 살인을 실행하면 안 되는 이유를 가능한 한 찾으려고 노력한다. 난 이런 부분이 좋았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슈이치의 경솔함과 무척이나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런 인간적인 요소 때문에 이 작품이 길을 잃지 않았다고 본다. 슈이치가 충격적인 살인마가 아닌 끝까지 가족을 위해 경솔한 행동을 반복했을 뿐인 가여운 존재로 기억될 수 있던 것도 이런 인간적인 요소 때문에 가능했을 터다. 슈이치의 학교 생활, 일상에 대한 묘사, 친구나 여자친구와 관계가 발전하는 장면들이 하나도 사사롭지 않았던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결국은 슈이치도 인간이었던 것, 어쩌면 그게 이 작품이 가진 깊이의 원천이었는지 모르겠다.

 <푸른 불꽃>은 일본의 <죄와 벌>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작중에서도 언급되는데 나 역시 어렸을 때 읽어본 적이 있다. 근데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선지, 또 어린이판으로 읽어선지 내용이 기억나는 게 없다. 기억나는 건 주인공의 이름 정도? <푸른 불꽃>을 다시 읽으니 그 고전을 무척이나 읽고 싶어졌다. 일전에 <퇴근길엔 카프카를>에서 이 작품이 읽고 싶어졌는데 이번엔 더 읽고 싶어졌다. 올해 안에나 읽을 수 있으면 좋겠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는 언젠간 마을 사람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진짜 짐승이라면 그런 것은 의식하지 않고 최후의 최후까지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 3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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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와 불의 잔 4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수첩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9.2







 시리즈의 세계관이 본격적으로 어두워지고 방대해지는 '불의 잔'을 읽었다. 영화와는 정반대로 원작 소설은 이 4편이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를 받는데, 개인적으로 휴고상을 받았다는 것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는 내심 상업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뒀지만 문학적으로는 덜 인정 받는, 한마디로 유명세에 비해 과소평가를 당하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던 것이다. 휴고상이면 판타지/SF 장르에서 주는 최고의 상인데 '불의 잔'이 그 상을 받았다는 얘길 듣고 얼마나 얼떨떨했는지 모른다. 과소평가를 당했다니, 나도 참 별 이상한 생각을 했었다.

 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분량이 2배로 늘어서 전개나 몰입도 측면에서 불안하긴 했는데 그건 정말이지 기우에 불과했다. 사실 전개 자체는 전편에 비해 느린 편에 속한다. 1권이 다 끝나도록 호그와트에 들어가지 않는 걸 보고 작가가 작정하고 분량을 키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호그와트 4학년생의 바쁘도록 치열한 일상과 더불어 다른 마법 학교의 대표단과 경쟁을 하는 트리위저드 시합, 그리고 불안하게 꿈틀대는 볼드모트의 위협이 어우러져 분량에 대한 기우가 무색하게 아주 긴박하게 진행된다. 긴 분량이 몰입도를 저해시키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아주 대표적인 사례가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 번째로 읽으니까 전개가 빠르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해리 포터'는 일단 시작은 아동 독자를 대상으로 기획된 시리즈라 문장의 깊이나 심오함이 상대적으로 옅은 건 사실이나 대신 가독성은 괄목할 만하다고 인정받았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이라고 딱히 문장이 거슬린다거나 하는 건 없었지만 바티 크라우치나 볼드모트를 위시로 한 죽음을 먹는 자들의 대두를 다루는 대목에선 내가 기대했던 감정선이 생각보다 덜 묘사된 것 같아 어딘지 모르게 김새기도 했다. 이건 좀 미묘한 문제긴 한데, 특히 바티 크라우치의 과거의 전모가 쥐고 있는 사건의 열쇠는 그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는데 펜시브나 베리타세룸처럼 마법의 도구가 사용되면서 연출상 쉽게 묘사된 건 약간 썰렁한 감이 있었다. 4권 다 합쳐서 1,2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동안 끌고 온 긴장감을 간단히 묘사함으로써 읽는 입장에서 시원한 맛은 있었지만, 또한 작가 입장에서도 무척 경제적인 연출이었겠지만, 난 어째선지 아쉬움을 감출 수 없다. 워낙에 추리소설적으로 쓰인 작품이라서 그런 걸까? 역시 '해리 포터'답게 반전은 놀라웠지만 복선의 빈도나 인상이 얕아서 아쉬움이 떠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문장이나 연출 같은 것을 문제삼는 상황이 되고 말았는데... 그럼에도 이번 '불의 잔'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고평가받아 마땅한 부분이 다수 존재한다. 본격적으로 마법부라는 조직을 독자들 뇌리에 각인시킨 것, 리타 스키터 같은 기레기를 등장시키면서 자극적인 기사에 선동당하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한 고찰에도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고 본의 아니게 트리위저드 시합에 참가해 온갖 누명에 시달려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리는 해리의 심리 묘사도 인상적이었다. 론의 열등감이나 헤르미온느의 빠질 수 없는 존재감이 이 3인방의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도 엿볼 수 있었는데 특히 좋았던 건 사춘기랍시고 튀어나오는 인물들의 돌발 행동이 그렇게 유치하게 그려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무리 사춘기라 하더라도 가끔은 용납하기 어렵거나 손발이 오그라드는 경우도 있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선 그 선을 잘 지키지 않았나 싶다. 가령 론의 열등감이랄지... 앞으로 남은 3편의 후속작에서 얘가 어떻게 열등감을 표출시킬지 떠오르기 때문에 지금 4편에서의 모습은 차라리 귀엽게 느껴진다. 세상에...


 심화된 인물 묘사와 세계관 확장은 '불의 잔'이 후속작에게 남긴 최고의 유산이다. 어쩌면 볼드모트의 부활 같은 것보다 더 흥미진진한 전개를 기대할 수 있는 요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볼드모트의 존재 역시 간과할 순 없다. 하지만 때론 이런 절대악만큼이나, 애매하게 악하거나 비겁한 무리가 만만찮은 스트레스를 주기에 다음 '불사조 기사단'이 벌써부터 기대되고 불안하다. 그 작품에선 마법부의 뻘짓과 더불어 엄브릿지까지...... 어쩌면 해리는 바로 다음 해에 이런 험난한 상황과 직면할 것을 알았기에 우승 상금을 조지와 프레드 형제에게 내줬는지 모른다. 웃음을 위해 돈을 투자하다니, 통찰력 있는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만약 어떤 사람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이 자신과 동등한 사람이 아닌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잘 살펴보면 된단다. - 3권 237p




포터, 원래 품성이 바른 사람은 조종하기가 더 쉬운 법이다. - 4권 1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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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의 형태 7 - 완결
오이마 요시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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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다 읽기까지 생각보다 오래 걸린 작품이다. 7권으로 완결되는 짧은 만화라 마음만 먹으면 금방 읽었을 텐데, 내용의 무게와 깊이 때문에 점점 다음 장면을 읽는 게 부담이 돼 손길이 잘 안 갔다. 처음엔 청각장애인이 등장한다는 말만 듣고 호기심으로 접했는데 정작 궁금했던 청각장애인이 바라보는 세계나 일상보다 친구와의 관계라는 테마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지라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고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 작품의 개요는 간단히 말하면 이렇다. 왕따 가해자인 소년 쇼야가 시간이 흘러 죄를 뉘우쳐 자신이 왕따시킨 소녀 쇼코에게 용서를 비는 이야기다. 쇼코의 청각장애를 빌미 삼아 어리다고 해서 그냥 넘어가기 힘들 정도로 그녀를 따돌린 쇼야는 머잖아 그 대가로 반 아이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쇼코의 보청기가 고장난 것으로 시작된 왕따 가해자 색출 과정에서 쇼야가 지목되는데, 그로서는 억울한 마음에 자기와 함께 그녈 따돌리거나 그를 방관하기만 한 동급생, 심지어 담임 선생까지 걸고 넘어지다가 비롯된 결과다.

 그 결과 쇼코는 전학을 가고 쇼야의 어머니는 고장난 보청기 값 170만엔 때문에 쇼코의 어머니 앞에 고갤 숙이고 쇼야는 자신이 쇼코에게 저질렀던 따돌림의 대가를 받는다. 쇼야는 자신이 따돌림을 받는 입장에 처하자 그제야 같은 처지였던 쇼코가 상상을 초월하는 반응을 보였던 것을 떠올리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한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굳이 같은 처지의 쇼야가 아닌 독자 입장에서도 쇼코의 반응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쇼코는 보살이기라도 한 건가? 왕따 가해자 무리의 주모자를 끝까지 '친구로서' 대했던 쇼코의 지난 모습을 잊지 못한 쇼야는 가족을 제외한 인간관계가 망가질대로 망가졌음에도 한 가지 목표 의식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지점, 쇼야가 형태를 갖춘 목소리인 수화를 배운 뒤 쇼코에게 그간의 미안함을 달래러 가는 장면은 사람마다 해석이 갈릴 듯하다. 기특하기도 하지만 역겹다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엔 같은 처지에 처한 다음에야 정신을 차린 게 한숨이 나오리만치 안타까웠다. 혹자는 이 작품이 '가해자의 판타지'에 지나지 않는다고 일축하기도 했다. 피해자에게 손쉽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란 가벼운 생각에서 비롯된 전개인 것 같다는 뜻에서 나온 말일 터다.

 아무튼 예상치 못한 이 극적인 만남은 단숨에 둘의 주변을 통째로 뒤흔든다. 처음엔 쇼코를 만나 사과를 하고 바로 생을 마감할 생각이었던 쇼야는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그녀가 행복을 되찾도록 이번엔 자신의 한 몸을 바치기로 한다. 원래라면 행복했어야 할 그녀의 어린 시절을 자신이 망쳤다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새로운 목표 의식이다. 그 이후부터 쇼야와 쇼코는 자신들이 처음 만났을 적에 동급생이었던 인물들을 한명씩 만나러 간다. 몇 명은 일부러 찾아가기도 하고, 몇 명은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집단 따돌림이 본격적으로 심화되기 전 전학을 가서 쇼야가 쇼코를 괴롭힌 사실을 모르기도 하고, 누구는 쇼야 못지않게 쇼코를 괴롭힌 주제에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뻔뻔스럽게 잘 살아왔으며, 또 누구는 아예 자신이 쇼코를 따돌렸다는 자각 자체를 못하기도 하는 등... 쇼코의 행복을 되찾으려는 쇼야의 여정은 힘겨워만 보인다. 쇼코도 쇼코지만 쇼야 역시 모두에게 따돌림 당한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므로.


 작품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집단 따돌림의 양상을 매우 현실적으로 그렸다는 것인데, 예를 들면 가해자가 순식간에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무서움이나 상황을 해결할 때 초기 단계에서의 행동, 특히 담임 교사의 역할에 따라 결과가 크게 좌우되는 것을 무서울 정도로 잘 묘사한 것을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주요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선인이라고도 악인이라고도 볼 수 있는 캐릭터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가 직접 한 말이기도 한데, 말인즉슨 이 작품의 입체성을 완벽히 신용할 수 있다는 것과 같다. 이 작품의 현실성과 입체성은 관계를 쌓아감에 있어서 상대에게 다가가는 자세, 그리고 불가능하게만 보이는 용서와 화해라는 주제를 완성도 있게 풀어낸다.

 일견 '친구 놀이'로도 보이는 쇼야와 쇼코의 여정은 불안하게 시작된 만큼 다시 한 번 제대로 파국을 맞이하고 만다. 다른 건 몰라도 쇼코의 면전에다 '난 옛날에 너에게 한 짓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한 인물이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결말 같은 건 도무지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 말에 대한 쇼코의 반응은 더 가관이었다. '난 내가 싫을 뿐이야.' 이 말을 듣자 상대는 그건 싸움을 회피하는 것이라며 매도한다. 난 쇼코의 이런 모습에서 극도의 자기 혐오를 읽어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쇼코는 자신이 왕따 피해자건 뭐건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은 바로 자기자신, 자신의 장애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쇼코의 자기 혐오적인 태도는 객관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건 어쩌면 쇼코의 장애보다 더 심각하다고 볼 수 있는데 나중에 이런 성격이 어쩔 수 없는 일임이 드러난다. 청각장애인을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시부모에게 이혼을 요구당한 쇼코의 어머니의 수모를 보고 자란 어린 쇼코로선 자신의 장애를 비관하며 사는 것말곤 달리 도리가 없었을 법하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쇼코는 가는 학교마다 장애를 이유로 따돌림을 당하고 그런 식으로 학교를 옮겨다니는 등 쇼코의 비관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쇼코의 보살과도 같이 보였던 모습엔 다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은 애석하게도 쇼코가 극복해야 하는 것이라고 작품은 말한다. 잔인하게 들릴 테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쇼코는 그저 다른 인물들이 그렇듯 자기에게 주어진 난관을 부여받았으며 그를 헤쳐나갈 적절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을 뿐이다. 청각장애라는 압도적인 구실로 인해 자기애가 지나치게 부족한 쇼코는 본의와 상관없이 상황을 악화시킨 면이 없지않아 있으며 - 물론 그 책임은 가해자들과는 가히 비할 수 없이 적으나 - 작품 후반부에선 이 때문에 엄청난 민폐를 끼치기까지 한다. 쇼코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앙금을 털어내지 않고 속으로 담아놓기만 하면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형태로 터질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 후반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객관적으로 얘기하게 된다.

 워낙에 문제적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라 내가 지금 쇼코의 사소하고 미미한 단점을 침소봉대하여 말하는 게 아닐까 싶지만, 한편으로 쇼야와 함께 작품의 주인공인 쇼코인 만큼 작가가 신경 써서 묘사한 것 같아 시간이 지날수록 가장 얘기하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다르게 보면 쇼야나 다른 인물들보다도 특수하고 민감하거니와 딱히 누구를 선, 누구를 악으로 상정하고 그리지 않았다는 작가의 말에 근거했을 때 가장 흥미로운 게 또 쇼코란 캐릭터인 지라 이렇게 길게 얘기했던 것 같다.


 결말이 느닷없다거나 대가를 치러야 할 사람이 대가를 충분히 치르지 않은 것이 불편하다는 게 사람들이 작품의 결말을 별로 환영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도 어느 정도 동의하는데, 특히 쇼코와 쇼야가 받은 상처에 비해 다른 인물이 너무나 쉽게 용서를 받았다는 건 누구나 공감하리라 본다. 그래서 여운을 낸답시고 끝이 나버린 모양새가 그리 달갑지 않을 수 있겠다. 작품 속에서 가장 피해를 받은 둘이 너무 대인배에다가 낙관적으로 앞을 내다보는 감이 있는 게 답답할 수도 있다. 아마 독자들 대부분은 정녕 이대로 끝나도 되느냐고 되물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나는 이 작품의 결말을 덜 만족스럽더라도 변호를 하고자 한다. 이 작품이 전체적으로 쇼야와 쇼코의 성장을 그림과 더불어 대부분의 갈등을 개연성 있게 해소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해자의 판타지'라는 의심의 눈초릴 받게 했던 쇼코의 보살과도 같은 성품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쇼코란 캐릭터까지 입체적으로 묘사해 이 세상엔 완벽한 선인도 악인도 없어 인간 관계가 어렵거니와 용서와 화해가 우리의 생각보다 불가능한 영역에 있음을 시사하는 등 이래저래 현실성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도 이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엔 타인의 잘못만이 아닌 자기 혐오 또한 주요한 원인일 수 있음을 냉정하지만 따끔하게 지적한 건 신선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역시나, 이토록 현실적으로 결말이 난 것이 무척이나 <목소리의 형태>다웠기에 덜 만족스럽더라도 작품의 결말을 지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읽은 작품이다 보니 말도 그만큼 길어졌는데 간단하게 정리해보겠다. 이 작품을 담당한 편집자가 '사지 않아도 좋으니 모든 사람이 읽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는데, 적어도 그 극찬이 아깝지 않은 작품임엔 분명했다. 쉽게 읽기에 너무 잔혹했지만 그렇기에 좋은 작품이었다.

어떡하면 자신이 옛날보다 성장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을까? - 제41화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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