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보다 성스러운 FoP 포비든 플래닛 시리즈 1
김보영 지음, 변영근 그래픽 / 알마 / 2019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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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어느 날 신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남자에다가 백인이고 장애인이 아니며 이성애자인... 아무튼 절대자가 모든 차별 받는 존재를 적대하는 듯한 모습으로 내려오자 대부분의 차별주의자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다. '역시 신은 남자였구나......'란 대사는 소름 끼칠 정도의 불안감을 선사한다. 나는 이 대사로 비롯될 터인 세계의 변화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그려졌을지 너무나 기대됐다.

 소설은 나의 이러한 기대를 영리하고 허무하게 배반한다. 페미니즘과 연동한 SF를 쓰라는 의뢰를 김보영 작가는 정면돌파를 감행하며 완수해낸 셈인데 그 분명한 목적성이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깔려 있어 읽는 재미 자체는 은근히 떨어지는 편이었다. 비교를 하자면, 소설보단 다큐 같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좀 받은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도 <천국보다 성스러운>에 비하면 대단히 은유적이라 느껴질 정도라는 것이다.


 신의 이름을 빌린 차별주의자들이 태초에 성별에 따라 남녀를 차별해 세상을 개판으로 만든 도입부, 먼 미래에서 깨어난 남자가 대뜸 여자를 찾으면서 보이는 무척이나 미개한 모습, 어느 날 신이 모습을 드러낸 현재, 이 작품은 중편의 분량임에도 그 안에서도 더욱 간략한 단편들로 이뤄져 있다.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들이 아까도 말했듯 매우 명확한데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애당초 작가가 그런 글을 의뢰받았고 작가는 그대로 썼을 뿐이니까.

 소설의 메시지가 명확히 드러난다는 게 그렇게 치명적인 단점이라 할 순 없을 듯하다. 물론 직설적이다 보니 오히려 공허하단 느낌을 받았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같은 얘기라도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길 풀어나갔을 때 사람들은 신선해하면서 더욱 그 이야기에 설득당하기 마련인데, 이 작품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얘기를 요약하듯이 풀어낼 뿐이라면 아무래도 집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속뜻이 좋더라도 말이다. 난 소설은 가급적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할수록 더 좋다고 생각했는데 비단 그렇지만 않다는 걸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됐다. 굳이 말하자면 마뜩찮은 깨달음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다시 말하지만 그렇게 치명적인 단점은 아니다. 내가 이 소설을 다 읽고서 정말로 아쉬웠던 부분은 사건을 수습하는 방식에 있다. 이 책의 소개글을 읽었을 때 관심이 갈 수밖에 없던 이유, 차별주의자 신이 등장한 이후에 변모할 세계의 모습이 어떤 디스토피아를 이룩할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지 못했던 게 이 작품의 치명적인 단점이다. 설정은 참신하나 그 설정이 야기할 모든 상황을 간단하게 수습해버리는 전개와 결말에서 허무함을 느끼지 않을 독자는 적을 것이다. 나의 경우엔 아예 낚였다고 생각했다. SF는 현실과 다른 형태의 세계를 상상하는 것에 특화된 장르라고 생각하는데 그에 걸맞은 모양새는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물론 결말의 수습 방식에 대한 떡밥을 초반부터 뿌렸기에 개연성이 아주 없진 않았지만 그래도 낚였다는 기분을 떨치기는 쉽지 않았다. 좀 맞지 않는 얘길 수 있는데 꼭 중편이어야 했나? 차라리 각 잡고 상상해서 풀어냈으면 분량을 더 늘여서라도 변화한 세계를 풀어낼 수 있었을 텐데... 어차피 작가가 의뢰를 받은 게 중편소설이니까 소용없는 가정이지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작품 본편에 대한 아쉬움이 적잖다 보니 책의 일러스트며 가격 등도 눈에 안 들어오거나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일러스트의 경우엔 소설 본편 중간중간에 삽입되는 형태였으면 더 효과적이었을 듯하고 가격의 경우엔 100쪽이 넘을까 말까한 얇은 소설이 11,500원이나 한데 살 때도 그랬지만 읽고 나선 더 황당하다. 물론 종이의 재질이나 일러스트가 들어간 비용을 생각하면 그 가격이 과한 게 아니겠지만 그래도... 어지간하면 책을 비싸다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결국 본편이 아쉬우니까 가격마저 곱게 보기가 힘들다. 차라리 확 별로였으면 시원하게 욕이라도 할 텐데 단지 아쉬울 뿐이라서 자꾸 말을 아끼게 되는 게 더 답답하다. 최소한 분량이라도 길었다면 이런 느낌은 안 들었으려나?

이백 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 사람은 때로 백 년을 살고, 백 년간 백 년 전의 풍습을 지키는 데에 골몰하다가 가는 거지. 변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한 채. - 28p




인간이 비합리적이 되는 것 외에 저놈들을 사멸시킬 방법이 있겠어? - 78p




신의 의지는 언제나 신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 8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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