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평점 :
품절


9.5







 이 작품을 두 번째로 읽으면서 감상이 달라진 부분이 있는데 그건 바로 주인공의 인상이다. 난 이 작품을 주인공 슈이치와 비슷한 연배였을 때 처음 접했다. 그땐 슈이치의 감정이 여과되지 않고 100% 전달됐다. 그가 양부를 죽여야 하는 이유, 증오심, 가족을 향한 그의 모든 행동이 섣부르다고 느껴지지 않았고 나이에 맞지 않게 천재적이고 대담하다고 느꼈었다. 그 때문에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처음엔 분량 때문에 겁을 잔뜩 먹었지만. 참고로 이 작품은 내가 처음 읽은 기시 유스케의 작품이다. <검은 집>보다도 먼저.

 처음 읽은 시점으로부터 거의 10년이 지난 즈음인 지금에 와서 읽으니까 생각이 좀 달라졌다. 다시 읽으니 슈이치가 많이 경솔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의 선택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 아마 이 부분이 이 작품이 낸 가장 큰 성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동의할 법한 얘기를 하는 소설은 그렇게 흥미롭지 않다. 누구나 동의할 법하지 않은 행동의 속내를 설득력 있게 묘파해내는 것이야말로 소설이, 그것도 500페이지가 넘는 1인칭 시점의 장편소설이기에 쟁취할 수 있는 지점이리라. 작가의 심리 묘사는 여전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점점 궁지에 몰리다가 취하게 된 슈이치의 선택은 1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쉽게 읽어 내려가기 힘들었다.


 하지만 슈이치가 살인을 저지르고 몰락하는 일련의 과정에 설득을 당하는 동시에 한 발자국 거리를 두게 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건의 전말과 무관하게 일단 슈이치의 결심이 어느 정도 지나친 면이 있었던 건 다시 생각해도 명확하고, 완전 범죄를 수행하고자 고심을 거듭하는 모습에선 소름이 끼쳤다. 정말 순수하게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긴 하지만, 자신의 범죄에 작전명을 붙인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 갔기 때문이다. 너무나 무거운 분위기를 깨고자 주인공이 일부러 명랑한 척한 걸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런 부분이야말로 주인공의 경솔함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는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 보니 읽다 말고 슈이치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을 지경이었다. 실은 살인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열쇠라고 말하는 것은 다 슈이치, 너 혼자만의 자기 합리화는 아니냐고.

 작품의 분량에 대해선 뭐라 더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기시 유스케답게 설명이 가득하지만 작가로선 최선을 다해 쉽게 쓴 듯하고 길이도 적절했다. 무엇보다, 작중에서 설명되는 살인의 작동 원리를 전부 이해하지 않아도 이해할 때 문제는 없기에 큰 단점이라 짚을 수도 없다. 이 작품의 포인트는 어떻게 완전 범죄를 성공시키느냐가 아닌 범죄를 저지른 이후에 있기 때문에. 그래도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슈이치가 완전 범죄를 궁리하는 걸 보고 이걸 쓴 작가도 언젠가 똑같은 고민을 한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디테일해서 소름이 끼쳤던 기억이 난다. 기시 유스케의 취재 능력은 몇 번을 생각해도 전율을 금치 못하겠다.


 방금 언급했듯 이 작품의 포인트는 완전 범죄를 어떻게 성공시키느냐가 아니다. 슈이치는 거사를 치르기 직전에서도 몇 번을 주저한다. 핑계를 찾으려고 한다. 이 살인을 실행하면 안 되는 이유를 가능한 한 찾으려고 노력한다. 난 이런 부분이 좋았다. 이것은 앞서 지적한 슈이치의 경솔함과 무척이나 대비되는 부분이다. 이런 인간적인 요소 때문에 이 작품이 길을 잃지 않았다고 본다. 슈이치가 충격적인 살인마가 아닌 끝까지 가족을 위해 경솔한 행동을 반복했을 뿐인 가여운 존재로 기억될 수 있던 것도 이런 인간적인 요소 때문에 가능했을 터다. 슈이치의 학교 생활, 일상에 대한 묘사, 친구나 여자친구와 관계가 발전하는 장면들이 하나도 사사롭지 않았던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결국은 슈이치도 인간이었던 것, 어쩌면 그게 이 작품이 가진 깊이의 원천이었는지 모르겠다.

 <푸른 불꽃>은 일본의 <죄와 벌>이라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작중에서도 언급되는데 나 역시 어렸을 때 읽어본 적이 있다. 근데 너무 어렸을 때 읽어선지, 또 어린이판으로 읽어선지 내용이 기억나는 게 없다. 기억나는 건 주인공의 이름 정도? <푸른 불꽃>을 다시 읽으니 그 고전을 무척이나 읽고 싶어졌다. 일전에 <퇴근길엔 카프카를>에서 이 작품이 읽고 싶어졌는데 이번엔 더 읽고 싶어졌다. 올해 안에나 읽을 수 있으면 좋겠네.

사람을 잡아먹는 호랑이는 언젠간 마을 사람들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당할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진짜 짐승이라면 그런 것은 의식하지 않고 최후의 최후까지 절망적인 싸움을 계속할 것이다. - 39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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