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칸디나비아 - 우리가 몰랐던 또 하나의 유럽
토니 그리피스 지음, 차혁 옮김 / 미래의창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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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6







 이 책이 출간된 2006년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스칸디나비아란 단어 자체가 우리나라에선 아직은 생소하게 들린다고 본다. 흔히 북유럽이라고 하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3국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속하며 이들과 전혀 다른 민족과 언어 체계를 갖고 있는 핀란드가 비슷한 수준의 문화적 환경과 복지 체계를 갖추고 있어 뭉뚱그려 스칸디나비아로 부른다는 점, 아이슬란드도 아슬아슬하게 스칸디나비아로 묶이기도 한다는 것 등 모르는 경우도 많다. 물론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도 어지간히 관심이 있지 않는 이상 세 나라의 차이가 정확히 무엇인지 짚어낼 수 있는 사람도 그리 많지 않겠다. 심지어 스칸디나비아가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는 사람도 있겠지.

 일전에 읽은 <동남아 문화 돋보기> 포스팅 때도 한 말이지만 동남아가 그렇듯 스칸디나비아도 자세히 뜯어보면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과 역사적 상황이 있어 역시 세상은 넓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해 절로 각양각색이란 말이 떠올랐다. 북유럽의 패자 스웨덴, 과거의 영광을 잃었지만 현재에 만족하기로 한 덴마크, 어찌저찌 독립해놓고도 계속 가난하게 살다가 유전으로 빵 뜬 노르웨이, 독립하기까지 스웨덴과 소련, 나치 사이에서 독립을 위해 피터지게 싸워나간 핀란드. 이 책에선 이 네 나라에 대해서 얘기한다. 여담이지만 핀란드의 근대사가 처절한 줄은 알았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괜히 '북유럽의 외로운 늑대'라 불리는 게 아니었군.


 마이클 부스의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과의 차이점으론 그 책이 나라별로 진행했다면 이 책은 역사의 순서대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이 나라 얘기가 지겨워질 참이면 다른 나라로 눈을 돌리는데, 대체로 정치와 경제에 대해 얘기했지만 간혹 문화와 예술과 관련한 얘기도 해 적잖이 흥미로웠다. 그냥 맥락 없이 예술 얘기를 꺼내는 게 아니라 당시 시대상에 기인한 예술 세계를 보여준 키에르케고르, 입센, 뭉크나, 그리그, 라르손, 시벨리우스 등의 사례를 짧고 굵게 설명해 귀에 쏙 들어왔다.

 2006년에 출간된 책이라 그런지 북유럽 언어 표기법이 최근의 책들보다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 가령 '외' 발음을 전부 영어식으로 '오'로 번역해놨다. - 내용 자체의 풍부함은 다른 북유럽 인문 도서들과 비교해도 뒤지는 부분이 없었다. 단, 시사성은 약간 걸린다. 이 책이 대충 16~17세기부터 시작해 20세기 후반까지 살펴보고 있는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들>에서 현대사를 메인으로 다룬 것과는 대조된다. 책의 출간 시기를 고려하면 현대사를 다뤄봤자 2010년대 들어선 굵직한 사건들이 언급될 일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EU에 가입한 시점에서 책이 끝난다는 게 약간 아쉬운 감이 없지 않았다. 과거 이야기를 많이 하는 건 상관없지만 현대로 넘어오기 직전에 끝나니까 솔직히 허전한 느낌까지 받았다.


 내가 봤을 땐 책의 제목에 달랑 '스칸디나비아'만 있던 게 원인이 아닐까 싶다. 이 제목만으론 책이 정확히 어디부터 어디까지 얘기할 것이고 무엇에 중점을 두는 것인지 짐작하기가 영 어렵다. 결국 내 마음대로 기대하고 읽을 수밖에 없었는데 차라리 '스칸디나비아의 역사' 정도로 제목을 붙였다면 밋밋하긴 해도 글의 목적이 확실해지므로 책을 다 읽고 괜한 허전함을 느낄 일은 없었을 것 같다. 글쎄, 굳이 허전하고 어땠고를 떠나서 사실 제목 자체가 책을 펼쳐 들기 전부터 너무 밋밋한 나머지 손이 잘 안 간다는 단점도 있어서...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내가 제목에 약간 민감한 편이라서 유독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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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문화 돋보기 - 예술, 종교, 문화 유산으로 즐기고 느끼고 생각하는 동남아 문화 이야기
박장식 엮음 / 눌민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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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최근 태국을 다녀와서 그런지 태국을 비롯해 동남아 전반에 이전보다 관심이 가게 됐는데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해 아주 시기적절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제목에 들어간 돋보기란 단어 그대로 어쩐지 '심화' 학습의 느낌이 드는 책이었지만 그래도 태국, 말레이시아처럼 갔던 나라와 미얀마, 인도네시아처럼 아예 생소한 나라들과 관련한 문화의 이모저모를 살펴볼 수 있어 유익했다. 사람들은 동남아라고 하면 다 똑같으리라 여기는데 한중일이 아주 다르듯 동남아에 속한 국가들 역시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다를 수가 없다. 베트남 정도를 제외하면 종교가 상대적으로 동북아보다 힘이 세다는 정도만 제외하면 이 나라들에 공통점이랄 게 있을까 싶다. 역시 세상은 넓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한다.

 상술한 대로 이 책은 어딘지 심화 학습의 느낌이 들었던 책이다. 옛날에 읽은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이란 소설에서 '외국어를 공부하려고 외고에 가는 줄 알았더니, 외국어를 배워서 들어가야 하는 줄은 몰랐다'는 구절이 나오는데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여행을 가기 전에, 그리고 여행 중에도 공부를 많이 한 태국과 말레이시아를 제외하면 다른 나라는 아예 모르는 나라였는데 책의 저자들은 그런 건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써내려가 선행 학습이라도 할 걸 그랬나 싶어 약간 외롭기도 했다. 마지막에 수록된 박광우 조교수의 글 정도가 한국에 사는 인도네시아인들의 모습을 그렸기에 그나마 손쉽게 읽혔지 다른 글은 직접적으로 그 나라로 여행을 갈 예정이 아니라면 솔직히 말해 눈에 잘 들어올 내용들이 아니었다. 비꼬는 건 아니고, 내가 교수들의 글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접근했는가 보다.


 아무래도 극히 최근에 태국을 다녀와서 태국 관련 글들이 - 이 책에 수록된 글 중 미얀마에 대한 글이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태국이었다. - 쏙쏙 들어왔다. 태국의 지폐를 따라가는 태국의 역사나 태국의 전통극으로 보는 태국의 관광 전략, 그리고 색깔에 따라 보는 태국 문화 같은 것 등 하나같이 흥미롭게 읽혔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더 자세히 알게 된 내용도 있고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내게 해답을 준 내용도 있고 아예 모르고 있던 내용 - 색깔 - 도 있어서 다음에 태국에 갈 때 더 유심히 관찰할 것 같다. 태국도 그렇고 말레이시아에 관한 글도 반갑게 읽혔는데 내가 알던 것보다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적혀져 있어 약간 어색하게 읽혔다. 그놈의 나무위키를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그 사이트의 정보들이 워낙 다채로워서 책의 글들은 상대적으로 너무 점잔을 빼거나 밋밋한 감이 없잖았다. 이 책은 대체로 좋은 말만 하려는 기미가 보였다. 어디까지나 느낌적인 느낌이지만.

 상당히 다양한 글이 수록됐는데 글마다 몰입도의 편차가 좀 있는 편이다. 다녀온 나라, 관심 없는 나라란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특징은 이런 다양한 글들을 통해 동남아의 이모저모를 엿본다는 것에 있으니 기획 자체는 제법 성과를 거둔 편이리라 본다. 개인적으로 마지막에 수록된 박광우 조교수의 글이 가장 좋았고 그 다음엔 태국과 관련된 글들, 그리고 필리핀에 대해 얘기한 김동엽 교수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전문가로선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저자들이기에 선입견은 선입견대로, 새로운 이야기는 또 새로운 이야기대로 흥미로운 구석이 많았다. 동남아를 남자 혼자 간다고 하면 이상한 색안경 끼고 농이나 치는 사람이 은근 많던데 혼자 가서 이상한 짓이나 하는 남자들이나 혹은 이상한 짓하러 가냐고 농이나 치는 인간들이 이런 책을 꼭 좀 읽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너무 염세적이었나,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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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거인 1 : Before the fall - Extreme Novel
이사야마 하지메 원작, 스즈카제 료 지음, 시바모토 토레스 그림 / 학산문화사(라이트노벨)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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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한창 <진격의 거인>이 유행할 때 충동적으로 구매했다가 이제서야 읽었다. 작중에서 인류가 거인에게 대항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다뤄야 할 '입체 기동 장치'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주된 내용이다. 본편으로부터 100년 전을 무대로 한 외전이며 기대를 안 한 것치고 결과물이 준수해서 즐겁게 읽었다. 물론 내가 <진격의 거인> 팬이라서 즐겁게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만화를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입체 기동 장치가 없으면 인간은 그냥 거인에게 먹히길 기다리는 존재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력해지기 때문에 이걸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과정엔 정말 처절함이 가득했다. 역시 <진격의 거인>답게 피와 살이 난무했는데 여담이지만 일러스트가 그걸 표현하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다. 너무 정적이고 그리나 마나 한 장면만 나와서... 꽤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라던데 그의 진가를 이 작품으로만 접해선 잘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부분, 거인이 인간을 먹는 장면을 소설적으로 잘 표현해줬고 장치를 만들기 위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식으로 재료를 구하고 거인의 약점을 알아가는 과정이 생각보다 지루하지 않게 읽혀서 좋았다. 지루하지 않을 뿐더러 너무 주인공들이 헤매고 불확실함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니 내가 다 끼어들어서 알려주고 싶을 정도였다. 거인의 약점은 목 뒤고... 이런 식으로. 어쨌든 주인공네 일행이 목숨을 걸고 조사를 거듭한 결과 장치를 만들 수 있어서 내가 다 통쾌했다. 경험상 뭘 만드는 이야기가 그렇게 흥미로운 서사는 아닌 것 같아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몰입도가 있었다. 이게 다 <진격의 거인>이기 때문인 걸까.


 이 'Before the fall' 시리즈는 3권으로 완결되고 만화책으로도 꽤 나온 모양인데, 아쉽지만 그것들까지 보기엔 이번 1권만으론 흥미가 솟진 않았다. 나는 본편 <진격의 거인>만으로 일단은 만족하기에 안타깝게도 어지간히 시간이 남지 않는 한 이 외전 시리즈로 눈을 돌리거나 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좋은 외전이었던 건 인정한다. 이 정도면 원작에 누를 끼치지 않고 완성도를 뽑아냈다고 감히 얘기할 수 있다. 아, 일러스트는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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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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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9.5




 

 이 작품은 내게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처음으로 접했던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인데 너무 감명 깊게 읽은 나머지 작년에 작가가 내한했을 때 이 책으로 사인까지 받았다. 시간이 흘러 이렇게 다시 읽어보니 작가의 작품 중에서 꽤나 이질적인 작품이었는데, 특유의 메타포와 각종 인용들, 그리고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나오는 인물이 등장했던 걸 제외하면 확실히 작가가 쓰고 싶은 걸 원없이 써내려간 느낌이다. 이전 작품에서도 정치니 투표권이니 하는 내용을 경쾌하게 다뤘지만 이 작품처럼 대놓고 정치를 소재로 삼은 적은 없었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경쾌하게 풀어낸다. 정확히 말하면 소재며 내용이며 그닥 경쾌하지 않은데도 참 경쾌하게 풀어나가는데 이런 걸 보면 정말 재주꾼이 따로 없다.

 <마왕>을 읽은 사람들은 1부는 호평해도 2부의 흐지부지한 열린 결말에 대해선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2부는 1부에 비해서 긴장도 느슨하고 무엇보다 서사적 밀도가 떨어져보인다.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하고 얘기해본다면 이제 이런 식으로 싸워나갈 것이라고 운만 띄워놓고 막을 내려서 호불호가 많이 갈린 듯하다. 처음 읽었을 때 이 결말이 꽤 신선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을 접하고 다시 읽으니 확실히 심심한 감이 없잖다. 이 작품의 후속작이랄 수 있는 <모던 타임즈>도 읽었는데 그 작품이 그렇게 만족스럽진 못했기에 2부의 마무리가 허무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궁금한 사람은 그 작품도 읽어보시길.


 작가가 내한했을 때 한국 독자가 <마왕>을 자기 작품 Best 5안에 넣는 걸 보고 이런 얘길 했다. 아무래도 정치에 관심이 적은 일본에선 평단한텐 호평을 받아도 독자한텐 외면을 당한 모양인데 한국에선 다른 평가를 받아서 놀랐다나. 실제로 내가 이 책을 보여주며 사인해달랬더니 무척 놀라면서 반가워하는 눈치더라. 아무튼 이 작품은 지금의 일본과는 같은 듯 다른 가상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물인데 이 디스토피아의 중심엔 대놓고 무솔리니와 흡사한 이누카이란 인물이 있다. 그가 총리 후보로 등장하면서 일본이 미국과 중국 등 크고 강한 나라한테 눈치를 안 보도록 - 신기하게 미국, 중국은 얘기해도 한국은 신기하리만치 언급도 안 된다... - 다 같이 단결하자는 분위기가 사화 전체에 팽배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렸을 때부터 매사에 고찰을 해왔던 주인공 안도가 자신의 특별한 능력에 눈을 뜨면서 점점 광기로 내달리는 세상을 상대로 자신이 생각한 바를 관철하려는데...

 정치 얘기를 함에도 작품의 진입 장벽이 낮은 이유는 바로 주인공의 초능력 덕분일 것이다. 최근 <풍선인간>의 풍선인간, <겨울왕국>의 엘사 등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를 접했는데 이 작품의 안도는 앞서 언급한 둘에 비하면 사소하고도 초라한 능력을 가졌다. 자신의 말을 타인의 입으로 발설시킬 수 있는, 이른바 복화술 능력인데... 본래 이런 초능력물의 묘미는 초능력의 스케일이 아닌 초능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쓸지 주인공이 머릴 굴리는 데서 온다는 걸 생각하면 꽤나 적절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풍선인간>에선 초능력이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로, <겨울왕국>에선 주인공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요소로써 다뤄졌다면 <마왕>은 이 두 요소가 다 있으면서도 작품 주제의식, 나아가 작가의 신념과도 대단히 맞닿아 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


 얼마 전에 같은 작가의 <그래스호퍼>를 읽었는데 거기 실린 역자의 후기에서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들엔 자신이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라는 메시지가 공통으로 녹아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 구절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 바로 <마왕>이 아닐까 싶다. <마왕>이 가장 이질적인 이유는 작가가 담고 싶은 메시지가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정도냐면 작가가 직접 파시즘이니 헌법이니 자주 언급했지만 그것들이 곧 주제는 아니라고 할 정도다. 사실 정치에선 명확한 옳고 그름을 가리기 쉽지 않고 역사의 순간마다 이 잣대들이 항상 변해왔기에 어떻게 보면 정치야말로 '자신이 믿는 바'를 얘기해보기엔 적합한 소재일 수 있다. 역시나 이사카 코타로답게 2부에선 대놓고 이누카이의 모델인 무솔리니를 인용하면서 이 부분을 꽤나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무솔리니와 함께 그의 애인인 클라라도 총살당하고 어떤 주유소 기둥에 거꾸로 매달렸는데 이때 치마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광기에 휩싸여 이 광경을 비웃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자기 허리띠를 풀어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줬다고 한다.

 처음엔 이누카이가 마왕인 줄 알았으나 2부로 접어들면서 마왕의 정체가 옮겨져갔던 걸 고려했을 때 아주 적절한 예시가 아닐 수 없다. 이게 실화라는데 마치 작가가 상상으로 꾸몄다고 해도 좋을 만큼 꽤 절묘한 얘기였다. 결국 이 작품은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주는 사람이 되자며 -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소신을 갖고 행동한다'는 뜻으로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주다' 라는 관용어가 있다고 한다. - 다소 급하게 마무리되는데, 급해서 허무했을지언정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일단락을 지은 것 같아 내심 속이 다 시원했다.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지인 중 한 명한테 이 책을 빌려줬더니 다 읽고서 하는 말이 '이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작가는 처음 본다.' 였다. 그 다음엔 부럽다는 말도 덧붙였는데 나도 동의한다. 이런 점이야말로 내가 이사카 코타로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을 계속 읽는 이유일 터다.


 벌써 세 번째 언급하는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에 해당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이사카 코타로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접해야 할 작품으로 <마왕>을 꼽고 싶다. 특히 요즘 같은 시국엔 정치에 대한 일본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단 점에서 의의가 클 듯한데,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정치와 파시즘처럼 쉽지 않은 소재와 심각한 이야기를 경쾌하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재주가 크게 발휘됐기에 입문작으론 더할 나위 없다고 본다. 오히려 입문작이 아니라 애매한 타이밍에 읽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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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인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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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어떤 책을 읽을 때 본편 이전에 '작가의 서문'이 나오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꼭 이렇게 읽어달라고 읍소를 하는 것 같아 부담스럽거니와 또, 그렇게 작가에게 작품을 안내받으면 자칫 작가가 원하는 감상만이 나올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고, 4번째로 만나는 찬호께이의 이번 소설의 서문은 나름 적절한 역할을 해내지 않았나 싶다.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사람이 간혹 초콜릿이 듬뿍 들어간 케이크를 먹듯 우리에겐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가 필요하단 말엔 동의하니까. 가끔은 철저하게 선과 악을 배제한 이야기도 읽고 싶은 법이지.

 <풍선인간>은 달랑 4편만 수록된 게 아쉬울 정도로 매력 넘치는 킬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집이다. 2편이 나올지 안 나올지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론 굳이 2편이 나오지 않아도 괜찮을 듯하다. 사람의 몸에 접촉하면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남자가 킬러로 전직하고서 벌어지는 4편의 짤막한 이야기는 짤막한 대로 간결한 매력이 있어 후편은 나와도 그만, 안 나와도 그만이다. 어찌 됐건 마지막 수록작에서 캐릭터에 대해 일단락은 지어놨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정말 절묘한 결말이기도 했고.



 '이런 귀찮은 일'


 살인 의뢰를 받지 않은 킬러 '풍선인간'이 자신의 일상을 일할 때처럼 프로페셔널하게 지켜내는 이야기. 근데 말이 좋아 프로페셔널이지, 실상 감정을 완전히 배제해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킬러가 남들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생활을 지키고자 벌이는 짓거리가 아주 섬뜩하다. 특이한 건 자신의 절대적인 능력에 도취될 법도 한데 딱히 그런 기색도 없이 제법 소시민에 가까운 마인드로 조심 조심 또 조심하는 언행이다. 타인의 몸에만 접촉해야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약과 그에 따라 킬러의 행동에도 제약이 걸렸던 것, 그래서 주인공이 꽤나 머릴 굴리는 게 마치 만화 <데스노트>를 연상시키기도 했다. 풍선인간에겐 그 작품의 주인공과 달리 신세계의 신이 되겠다는 거창한 목표가 없어 결국 원하는 바를 무탈하게 얻어내는 게 인상적이었다.



 '십면매복'


 이 작품에서 드디어 의뢰를 받은 풍선인간은 작정하고 일을 벌이면 누구도 막을 수 없음을 선보인다. 풍선인간이 아닌 그의 대척자격인 형사의 시점으로 전개되는데 그래서인지 순수하게 타인의 시점에서 보는 풍선인간의 능력과 살인이 바로 이전 수록작보다 섬뜩하게 다가왔다. 삼엄한 경비를 뚫고 타겟을 죽이고야 마는 계획성과 그런 능력자를 체포 직전까지 몰고가는 형사의 추적, 그리고 그걸 또 자신만의 방식으로 무탈히 벗어나는 풍선인간의 모습엔 눈을 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재밌던 건 풍선인간이 시간을 벌고자 자기 딴에는 어울리지도 않는 허세를 부린 것에 이불킥을 차려는 장면이다. 이것 참, 어떻게 보면 클리셰를 파괴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사랑에 목숨을 걸다'


 사건의 양상이나 반전의 정체는 그렇게 새로울 게 없었고, 또 풍선인간의 능력이 강하게 드러나질 않아 상대적으로 인상이 흐릿한 작품이었다. 하지만, 풍선인간이 차라리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로 막장 의뢰인이 등장해 어떻게 보면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만 보면 정말 찬호께이가 <13.67>을 쓴 그 작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냉소적이기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으니... 말이 나와서 말이지만 킬러라는 직업이 결국 수요가 있기 때문에 존재할 뿐이란 사실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파티'


 교묘한 트릭과 더불어 엄청난 당혹감을 안겨주던 작품. 이 당혹감 때문에 <풍선인간>이란 책의 제목에 걸맞는 마지막 장면조차 임팩트가 약했다. 이 작품의 후반부 반전이 꼭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연상시키기도 했는데, 그 작품에서처럼 킬러인 풍선인간을 복잡미묘하게 바라보게 돼 씁쓸한 침묵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뜬금없게도 작가가 쓴 서문에서 배신감이 느껴졌다. 작가의 서문에서 말했듯 이 소설집이 정말로 '길티 플레져'에만 집중한 줄 알았는데... 설마 이런 식으로 킬러 역시 사람이란 걸 시사할 줄은 몰랐다. 그만큼 내 딴에는 정말 예상치 못한 결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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