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9.5




 

 이 작품은 내게 의미가 깊은 작품이다. 처음으로 접했던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인데 너무 감명 깊게 읽은 나머지 작년에 작가가 내한했을 때 이 책으로 사인까지 받았다. 시간이 흘러 이렇게 다시 읽어보니 작가의 작품 중에서 꽤나 이질적인 작품이었는데, 특유의 메타포와 각종 인용들, 그리고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 나오는 인물이 등장했던 걸 제외하면 확실히 작가가 쓰고 싶은 걸 원없이 써내려간 느낌이다. 이전 작품에서도 정치니 투표권이니 하는 내용을 경쾌하게 다뤘지만 이 작품처럼 대놓고 정치를 소재로 삼은 적은 없었다. 물론 이 작품에서도 경쾌하게 풀어낸다. 정확히 말하면 소재며 내용이며 그닥 경쾌하지 않은데도 참 경쾌하게 풀어나가는데 이런 걸 보면 정말 재주꾼이 따로 없다.

 <마왕>을 읽은 사람들은 1부는 호평해도 2부의 흐지부지한 열린 결말에 대해선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2부는 1부에 비해서 긴장도 느슨하고 무엇보다 서사적 밀도가 떨어져보인다. 최대한 스포일러를 피하고 얘기해본다면 이제 이런 식으로 싸워나갈 것이라고 운만 띄워놓고 막을 내려서 호불호가 많이 갈린 듯하다. 처음 읽었을 때 이 결말이 꽤 신선했는데 작가의 다른 작품을 접하고 다시 읽으니 확실히 심심한 감이 없잖다. 이 작품의 후속작이랄 수 있는 <모던 타임즈>도 읽었는데 그 작품이 그렇게 만족스럽진 못했기에 2부의 마무리가 허무하게 다가오는 듯하다. 궁금한 사람은 그 작품도 읽어보시길.


 작가가 내한했을 때 한국 독자가 <마왕>을 자기 작품 Best 5안에 넣는 걸 보고 이런 얘길 했다. 아무래도 정치에 관심이 적은 일본에선 평단한텐 호평을 받아도 독자한텐 외면을 당한 모양인데 한국에선 다른 평가를 받아서 놀랐다나. 실제로 내가 이 책을 보여주며 사인해달랬더니 무척 놀라면서 반가워하는 눈치더라. 아무튼 이 작품은 지금의 일본과는 같은 듯 다른 가상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물인데 이 디스토피아의 중심엔 대놓고 무솔리니와 흡사한 이누카이란 인물이 있다. 그가 총리 후보로 등장하면서 일본이 미국과 중국 등 크고 강한 나라한테 눈치를 안 보도록 - 신기하게 미국, 중국은 얘기해도 한국은 신기하리만치 언급도 안 된다... - 다 같이 단결하자는 분위기가 사화 전체에 팽배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어렸을 때부터 매사에 고찰을 해왔던 주인공 안도가 자신의 특별한 능력에 눈을 뜨면서 점점 광기로 내달리는 세상을 상대로 자신이 생각한 바를 관철하려는데...

 정치 얘기를 함에도 작품의 진입 장벽이 낮은 이유는 바로 주인공의 초능력 덕분일 것이다. 최근 <풍선인간>의 풍선인간, <겨울왕국>의 엘사 등 초능력을 가진 캐릭터를 접했는데 이 작품의 안도는 앞서 언급한 둘에 비하면 사소하고도 초라한 능력을 가졌다. 자신의 말을 타인의 입으로 발설시킬 수 있는, 이른바 복화술 능력인데... 본래 이런 초능력물의 묘미는 초능력의 스케일이 아닌 초능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쓸지 주인공이 머릴 굴리는 데서 온다는 걸 생각하면 꽤나 적절한 능력이라 할 수 있다. <풍선인간>에선 초능력이 엔터테인먼트적 요소로, <겨울왕국>에선 주인공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요소로써 다뤄졌다면 <마왕>은 이 두 요소가 다 있으면서도 작품 주제의식, 나아가 작가의 신념과도 대단히 맞닿아 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다.


 얼마 전에 같은 작가의 <그래스호퍼>를 읽었는데 거기 실린 역자의 후기에서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들엔 자신이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라는 메시지가 공통으로 녹아있다는 구절이 있었다. 이 구절이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이 바로 <마왕>이 아닐까 싶다. <마왕>이 가장 이질적인 이유는 작가가 담고 싶은 메시지가 너무나 극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정도냐면 작가가 직접 파시즘이니 헌법이니 자주 언급했지만 그것들이 곧 주제는 아니라고 할 정도다. 사실 정치에선 명확한 옳고 그름을 가리기 쉽지 않고 역사의 순간마다 이 잣대들이 항상 변해왔기에 어떻게 보면 정치야말로 '자신이 믿는 바'를 얘기해보기엔 적합한 소재일 수 있다. 역시나 이사카 코타로답게 2부에선 대놓고 이누카이의 모델인 무솔리니를 인용하면서 이 부분을 꽤나 알기 쉽게 설명해준다. 무솔리니와 함께 그의 애인인 클라라도 총살당하고 어떤 주유소 기둥에 거꾸로 매달렸는데 이때 치마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남녀 가릴 것 없이 광기에 휩싸여 이 광경을 비웃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자기 허리띠를 풀어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줬다고 한다.

 처음엔 이누카이가 마왕인 줄 알았으나 2부로 접어들면서 마왕의 정체가 옮겨져갔던 걸 고려했을 때 아주 적절한 예시가 아닐 수 없다. 이게 실화라는데 마치 작가가 상상으로 꾸몄다고 해도 좋을 만큼 꽤 절묘한 얘기였다. 결국 이 작품은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주는 사람이 되자며 -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소신을 갖고 행동한다'는 뜻으로 '클라라의 치마를 여며주다' 라는 관용어가 있다고 한다. - 다소 급하게 마무리되는데, 급해서 허무했을지언정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일단락을 지은 것 같아 내심 속이 다 시원했다.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지인 중 한 명한테 이 책을 빌려줬더니 다 읽고서 하는 말이 '이렇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작가는 처음 본다.' 였다. 그 다음엔 부럽다는 말도 덧붙였는데 나도 동의한다. 이런 점이야말로 내가 이사카 코타로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을 계속 읽는 이유일 터다.


 벌써 세 번째 언급하는 것 같은데 이 작품은 이사카 코타로의 작품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에 해당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이사카 코타로의 작품 중 가장 먼저 접해야 할 작품으로 <마왕>을 꼽고 싶다. 특히 요즘 같은 시국엔 정치에 대한 일본인의 가치관을 엿볼 수 있단 점에서 의의가 클 듯한데, 굳이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정치와 파시즘처럼 쉽지 않은 소재와 심각한 이야기를 경쾌하게 풀어나가는 작가의 재주가 크게 발휘됐기에 입문작으론 더할 나위 없다고 본다. 오히려 입문작이 아니라 애매한 타이밍에 읽으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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