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체험
오에 겐자부로 지음, 이규조 옮김 / 꿈이있는집 / 1991년 10월
평점 :
절판


7.6







 일본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에 이어 두 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오에 겐자부로는 작품보다는 솔직히 이름으로 더 익숙한 작가였다. 이 작품이 노벨문학상 수상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작품이라는데 제목도 처음 들어봤다. 이 작품이 제목 그대로 작가의 개인적인 일화를 바탕으로 두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집에 엄마가 사놓은 옛날 판본이 있길래 한 번 도전해봤는데 쉽게 읽히지 않았다. 처음엔 번역이 이상한 걸까 싶었지만 원래 오에 겐자부로의 책이 일본인들도 누구나 한 권씩 집에 놓고는 있지만 정작 완독해본 적은 없다고 할 정도로 진입 장벽이 높다고 한다. 비교적 최근에 나온 번역본을 읽으면 느낌이 또 다를 순 있겠지만 일단은 이렇게 한 번 읽어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문장이 잘 안 들어오던 것에 비해 내용은 쉽게 파악이 가능했다. 작가가 불어불문학을 전공했다는게 과연 그렇구나 싶었다. 프랑스 문학 특유의 남 눈치보지 않는 솔직함이 기분 나쁠 정도로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고 있는 작품이었다. 장애아를 마주한 젊은 아빠 '버드'가 - 주인공 이름부터 당혹스러웠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차라리 양반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 현실을 도피하고자 짧은 기간동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방황하다 결정을 내리는 이야기다. 장애아를 키울 것인지 어차피 가망이 없으니까 안락사를 할 것인지, 최대한 티가 안 나게끔 의사에게 물어보는 도입부부터 이 버드라는 인물의 됨됨이에 구역질이 나 짧은 소설임에도 쉽게 넘어가지 못했다. 난해한 문장은 덤이고 지나친 솔직함으로 인해 이야기에 집중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찾아보니까 오에 겐자부로의 아들 오에 히카리 씨가 이 작품의 실제 모델이라는데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하니까 작품의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진다. 작가가 이 이야기를 구상하고 발표하기까지 버드에 준하는 방황을 겪었을 게 눈에 선했다. 작가의 <회복하는 가족>이란 책이 아마 이들 부자의 이야기를 담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 책도 읽어봐야겠다. 물론 <개인적 체험>하곤 결이 많이 다를 것 같다. <개인적 체험>은 버드의 마지막 결단을 빼면 대체로 구역질이 나는 작품이었다. 그래서 결말이 더 돋보였다. 글쎄, 작품이 통상적인 형태의 인간애를 그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결말에 상당한 의문을 느낄 독자들이 많을 듯하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싶지만 나는 버드의 아들이 장애아로 태어난 게 순전히 버드의 방탕한 삶의 대가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버드가 그런 식으로 자책 아닌 자책을 하는 게 작중에 간혹 암시되기도 했다. 물론 아이한텐 죄가 없으므로 저런 해석은 무척이나 가혹하고 무책임한 넘겨짚기에 불과할 것이다.

 이 작품을 읽으니 노벨문학상이 선호하는 이야기란 어떤 것인지 알 것만 같았다. 알게 모르게 옳은 선택을 강요당하는 버드의 모습이 비단 동양뿐만이 아니라 서양 문화권에도 울리는 바가 컸으리라. 그도 그럴 것이 어쨌든 버드의 내면을 작가가 꽤나 솔직하게 묘사했기 때문이다. 주변에서 최대한 나쁜 사람으로 보여지긴 싫고 그렇지만 자신의 본능은 따르고 싶다는 게 심정적으로 공감이 갔다. 그냥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든데 장애아를 키우는 건 그 이상의 숭고함이 필요하단 걸 생각하면 버드에게 무조건적인 부성애, 인간애를 바라는 게 더 이기적인 일인지 모르겠다.


 작품의 결말이 예상 가능했으면서 예측불허였던 것엔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무엇을 택하든 그건 버드의 자유지만 그 모든 책임과 도덕적 잣대 역시 버드가 감당할 일이다. 버드가 방황하는 과정이 하도 어지러워서 무슨 결말이건 가능하겠다 싶었는데 그래도 끝내 인간애의 손을 들어주는 게 석연찮으면서도 묘하게 감동적이었다. 실제로 오에 겐자부로의 아들 오에 히카리 씨가 음악인으로 거듭난 걸 생각하면 더욱 뜻깊은 결말이 아닐 수 없다.

 오에 겐자부로의 글을 소설로 처음 접해봤다. 국내에 소개된 책이 생각보다 적긴 해도 그래도 주기적으로 개정이 되는 등 노벨문학상 수상자라는 타이틀은 건재한 듯하다. 기회가 닿는다면 작가의 다른 책도 더 읽어봐야겠다. 다른 책들도 <개인적 체험>과 같다면 읽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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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투어 - 어두운 역사의 흔적에서 오늘의 교훈을 얻다
김민주 지음 / 영인미디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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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나는 '다크 투어'가,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못된 짓을 한 일본인이 묻힌 신사라든가 아니면 강제 징용당한 시설을 탐방하는 아주 마니악한 종류의 여행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상당히 강렬한 제목이면서 얇지 않은 두께의 이 책을 처음 보고서 '도대체 다크 투어란 게 얼마나 다양하기에' 싶었다. 이 책에서 김민주 저자는 다크 투어의 범위를 모든 역사적 비극이 일어난 장소에 방문하는 것으로 잡았는데 이는 내가 막연하게 생각한 것보다 규모가 거창했다. 흔히 역사를 알아야 현재와 미래에서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 말이 그닥 와 닿지 않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저자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주 다양한 나라의, 또 다양한 종류의 다크 투어를 소개해준다. 우리나라의 다크 투어가 책의 전체 비중에서 1/3 이상을 차지해 더욱 다양한 구성을 원했던 나로선 약간 아쉽긴 했지만, 굳이 외국이 아니라도 우리 주변에 충분히 역사적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많다는 걸 깨달아 그것대로 꽤나 흥미로웠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작가가 정의한 다크 투어라는 것이 내가 추구하는 여행관과 꽤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읽는 내내 반가운 기분도 들었다. 그래봤자 수박 겉 핥기에 불과하다고 늘 생각하지만, 어쨌든 어딘가로 여행을 갈 때마다 관련 책들이나 방송을 통해 공부하는데 그게 꼭 역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저자의 여행관이랑 일맥상통한 데가 있지 않았나 싶다. 아무래도 다크 투어라고 하면 일본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텐데, 간혹 히로시마 원폭 공원이나 야스쿠니 신사처럼 언뜻 봤을 때 부정적인 느낌이 드는 장소는 무작정 거르고 본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는 그런 곳에서도 배울 점이 분명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야스쿠니의 경우엔 전범한테 참배만 안 한다면, 히로시마 원폭 공원은 핵폭탄의 위력이 우리 시대에 울리는 경종에 주목한다면 충분히 뜻깊지 않은가 싶어서 말이다. 이는 분명 통상적인 목적의 여행과는, 이를테면 휴양과 힐링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과는 차이가 있지만 '책은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은 움직이는 책이다.' 라는 말을 생각한다면 저자가 소개하는 다크 투어라는 것도 값진 여행이라 불려도 마땅할 것이다.


 책에 소개된 역사적 사건과 그와 관련된 명소들 중 원래 관심을 갖고 가보고 싶었던 곳도 있었고 아예 처음 접하는 것도 있었는데 저자가 종류별로 잘 정리해준 덕분에 앞으로의 여행 버킷 리스트를 보다 명확하게 세울 수 있어 고마웠다. 저자가 분류한 다크 투어의 키워드는 대학살, 암살, 전쟁, 감옥, 묘지, 슬럼, 유배, 표류 등이 있고 이후엔 일본과 러시아, 베트남 등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관련이 깊은 나라에서 할 수 있는 다크 투어를 소개해 여러모로 유익했다. 내가 국내사에 관심이 덜한 편이라 서울의 다크 투어와 한국의 다크 투어는 그렇게 흥미가 동하지 않았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꽤나 참고가 될 듯하다. 명소와 관련된 이야기를 저자가 간결하게 핵심을 잘 짚어내서 흥미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최근에 읽은 <스칸디나비아 예술사>가 양만 많지 다루고 있는 내용이 잘 전달이 되지 않은 반면 이 책은 정반대였다. 정확히 말하면 양과 질이 모두 알찼다.

 여담이지만 저자 이름만 보면 내 또래의 여성인 줄 알았는데 사진을 보니까 적어도 50대로 보이는 남성이었다. 편견이면 편견일 수 있지만 연령대가 좀 되는 남성 작가의 글은 되도록 경계를 하며 읽는 편인데 이 책에선 그럴 필요가 딱히 없었다고 본다. 이 정도면 아주 오픈 마인드인 사람이라... 특히 여행지에 대한 간략한 인상을 적는 부분에서마저 공감이 가기도 해 내가 참 편견이 심했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다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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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 예술사
이희숙 지음 / 이담북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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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작년 노르웨이 여행과 올초에 읽은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덕에 스칸디나비아 예술에 관심이 지대해졌다. 때문에 이에 대한 갈증을 정기적으로 해결해야 했는데, 그 방안으로 이 책이 딱 좋을 것 같았다. 제목이 <스칸디나비아 예술사>라니, 정말 기대되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스칸디나비아 5개국이라고 하는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덴마크, 아이슬란드 순으로 해당 국가별로 2~4명의 화가들을 소개한다. 한 사람당 지면을 할애하는 게 많아봤자 30페이지고 - 이 비중의 주인공은 뭉크다. - 짧으면 아예 5페이지 안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엔 그림을 두 점 정도 소개하고 끝인 셈인데, 이쯤 되면 의아함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기대했던 것에 비해 너무 부실한 내용에 실망을 금치 못했는데, 가장 많은 지면을 할애한 뭉크조차 수박 겉 핥기에 불과했으니 다른 작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본다. 이 책에서 가장 영양가가 있던 부분은 책의 서문이지 않을까. 근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각각의 고유한 민속주의를 확립하려는 수단으로써 회화가 동원됐다는 주장이 꽤 그럴싸해 앞으로 소개될 그림들에 대한 기대감을 충분히 드높이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 수박 겉 핥기만 하고 다음 작가로 넘어가는 식이라서, 이럴 거면 차라리 소개하는 작가 수를 줄이는 게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질보다 양도 아니고.


 처음엔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 싶었는데, 혹은 외국어 표기들이 최대한 원어에 가깝게 표기한 건가 싶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저자 소개란에 '수개 국어에 능통'하단 구절이 있어 아무래도 긴가민가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책에서 소개되는 작가며 작품들을 전부 영어식 표기법과 영어 제목으로 적어놓은 것도 그렇고 프랑스어 표기마저도 거의 엉망이었다. 내가 해당 언어들에 능통한 편은 아니지만 하도 일관성있게 영어식으로만 표기를 해서 심히 거슬렸다. 어느 지경이냐면, 뭉크munch를 '뭉치'라고 표기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의문일 정도였다. 책에 소개된 작가 이름도 이름이거니와 쓸데없이 영문으로 적어놓은 작품 제목들 때문에 반감만 커져갔다. 작가에게 이상한 선민의식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되는데... 내가 너무 과민한 걸까?

 흔히 번역된 소설을 읽을 때, 내용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싶으면 번역을 탓하곤 하는데 솔직히 말하면 괜히 번역을 걸고 넘어지는 적도 몇 번 있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번역된 글을 읽을 때나 통용되는 것이고 국내 작가가 쓴 글을 읽을 땐 잘 대지 않는 핑곈데, 처음으로 한국 작가가 쓴 한국 문장을 보고 번역이 이상한 건지 의심이 갔다. 혹시 영어로 쓴 걸 한국어로 번역한 걸까? 그렇지 않은 이상 책의 혼란스런 문장들이 설명되지 않는다. 작가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이 책만 읽고선 스칸디나비아 예술은 커녕 스칸디나비아 자체에 대한 기대감을 품지 못할 것 같다. 예술에 대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짧은 글이 가독성이 떨어지기는 정말 오래간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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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양들의 성야 닷쿠 & 다카치
니시자와 야스히코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7.5







 몇 년을 주기로 크리스마스 때마다 비슷한 형태의 투신 자살 사건이 벌어진 것을 두고 닷쿠와 다카치가 그 내막을 추리하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다. 이번 작품은 전작처럼 안락의자 탐정물이 아닌 캐릭터들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걸로 바뀌었는데, 전작인 <맥주별장의 모험>을 읽은지 3년이 넘어 시리즈에 대한 기억이 흐릿했기에 딱히 그렇게 와 닿는 변화는 아니었다. 굳이 주목할 만한 점이라면 술을 거의 안 마시다시피 하고 웃음기가 많이 사라졌다는 것 정도? 이런 변화야말로 읽는 사람에 따라선 참 당황스런 부분일 수 있겠는데, 책 말미에 실린 작가 후기를 읽으니 이런 이질적인 부분들이 이해가 갔다. 작가의 초도작 - 처녀작이라는 표현은 성차별적이라 바꿔서 사용한다. - 이 원형인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에게 있어 가장 의미가 있고 작가의 모든 것을 담아냈다고 할 만큼 정서적으로 진지한 편인데 솔직히 개인적으로 소설의 완성도는 미흡한 편이었다고 본다.

 연쇄 자살 사건이나 그 사건들의 흑막에 대해 추적하는 내용의 소설이라 하면 도나토 카리시의 <속삭이는 자>, 아가사 크리스티의 <커튼>, 혼다 다카요시의 <체인 포이즌> 그리고 캐릭터로는 만화 <몬스터>의 요한과 최근에 읽은 이사카 코타로의 <그래스호퍼>에 나오는 킬러 '고래'가 연상되는데 각 작품의 연출과 사건의 내막 양상이 달라 설정이 겹친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어린 양들의 성야>도 앞에 언급한 작품들과 다른 느낌인데 대놓고 작가가 성장물을 의식한 탓에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나 '소시민' 시리즈가 겹쳐 보여 상대적으로 초라하게 다가왔다. 일단 사건의 규모 자체가 장편에 어울리지 않고 반전과 결말이 드러나는 방식이 너무 느닷없거나 허무한 측면이 없잖기 때문이다. 난 의외로 추리소설을 읽을 때 복선의 공정성 같은 걸 따지는 편은 아닌데 이 작품의 복선 같은 경우는 너무 사소하고 의외라 놀랍다기보단 황당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사건은 그래도 연관 관계가 있는데 세 번째 사건이 벌어진 이유는 너무 따로 노는 감이 있던 게 이 작품이 치밀하게 집필되지 않았다는 것의 반증이리라.


 솔직히 말해 사건이 이목을 끄는 요소가 부족했던 것도 있고, 시리즈의 전통적인 설명 위주의 도입부도 흥미를 잡아끌지 못했다. 추리소설에서 설명이 길어진다 싶으면 거의 여지없이 사소하지만 중요한 복선이 나온다는 걸 알곤 있지만 그래도 이야기가 발동이 걸리는 타이밍이 너무 늦어 지레 지쳐버리기도 했다. 자살한 인물들의 유족의 면면들이 그나마 좀 인상적이었는데, 그들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기도 하단 점이 드러나 참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자살은 사회가 저지르는 살인이란 말이 있는데, 굳이 사회가 아니더라도 그 개인의 배경을 주목해보면 꽤나 그럴싸하게 들리는 말이 아닌가 싶다. 물론 작중의 어떤 유족들은 이 말에 절대 동의하지 않을 테지만.

 이야기가 전작에 비해 진지해진 건 상관없는데 진행될수록 늘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게 아쉬웠다. 늘어지는 느낌을 받았을 뿐더러 약간 유난을 떤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작품 자체를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작가의 초도작의 플롯을 닷쿠와 다카치 얘기에 끼워넣는 감이 있어서 작가가 원하는 감상을 이끌어내기엔 이래저래 어설펐다고밖엔 할 말이 없다. 일상 추리물인 '닷쿠&다카치' 시리즈엔 나름 어울리는 이야기였다고는 보지만 좀 더 고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시리즈의 분기점에 해당하는 작품으론 의미가 있긴 하지만 앞으로 국내에 시리즈의 후속작이 출간되기엔 요원해보이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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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스호퍼 - 개정판 킬러 시리즈 1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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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이사카 코타로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그래스호퍼>를 드디어 읽었다. 킬러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손이 잘 안 갔는데 작년에 이 작품이 속한 '킬러' 시리즈의 최신작 <악스>를 나쁘지 않게 읽어서, 또 마침 최근에 <마왕>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서 '삘'이 오른 김에 이 책도 집어들었다.

 작품의 제목인 그래스호퍼는 영어로 메뚜기를 뜻한다. 작중에 등장하는 한 킬러가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 인간은 너무 많이 모여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됐다고 변명하며 이때 인간을 마치 메뚜기와 같다고 한다. 나름대로 적합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구석은 없는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나중엔 단지 비유로써가 아닌 킬러가 알게 모르게 외면했던 죄책감을 상징하는 키워드란 생각에 사뭇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인간을 곤충으로 비유하는 것부터가 꽤나 자조적이라고 보는데 특히 메뚜기로 묘사한 인간 사이에 킬러 자신도 예외가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참 답도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작가의 작품들이 대게 그렇듯 이 작품도 심각하기 짝이 없는 내용임에도 특유의 유쾌함은 잃지 않고 있다. 아내의 복수를 위해 불법 조직에 위장 침입한 스즈키, 상대로 하여금 자살을 유도하는 '고래', 상대가 여자건 어린이건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매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구성의 이 작품은 적절한 가독성과 어렵지 않은 퍼즐식 구성으로 준수한 몰입도를 선보인다. <악스>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이 작품도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좀 평범하단 인상을 받았는데 만화나 영화로도 나오기엔 약간 수수하지 않은가 싶어 처음엔 의아했었다. 나중엔 이 인상이 많이 달라지지만... 여담으로 그 만화와 영화를 내가 찾아볼 일이 있을진 잘 모르겠다. 이 작품의 후속작 <마리아비틀>은 당연히 보겠지만.

 중반부부터 이야기 전개가 가속돼 재미는 있었지만, 나만 느끼는 건지 몰라도 스즈키와 고래, 매미의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접점이 생기는 중반부가 약간 작위적으로 느껴진 게 좀 걸렸다. 고래의 경우는 아예 현실과 환상을 분간을 못하니 대충 이해하고 넘어갈 순 있었는데 매미의 경우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거나 혹은 다른 계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캐릭터 붕괴까진 아니지만 너무 작품의 진행을 위한 편의에 맞춰 움직이는 게 아닌가... 이 부분은 후에 자신의 고용주인 이와니시에게 정신적으로 제법 의지했음이 드러나면서 해결된 부분이지만 그래도 중반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스즈키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작가가 얘기하고 싶던 바는 고래와 매미를 통해서 전달이 됐다고 본다. 고래는 <몬스터>의 요한처럼 사람을 정신적인 궁지로 내모는 능력의 소유자면서 동시에 자신의 내면도 갉아먹던 모습이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파멸로 다가가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들고 다니며 지금껏 소설이라곤 이것만 읽었다고 하는데, 책이란 건 여러 권이 아닌 한 권만 읽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는 말을 생각하면 고래가 이래저래 위험한 인물이란 건 뻔한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잭 크리스핀이라는 가상의 해외 아티스트의 어록만을 신봉하는 매미의 고용주 이와니시한테도 해당하는 말이다. 매미라고 더 나을 것 없어 보이지만, 어쨌든 고래와 이와니시처럼 특정 소설이나 인물을 신봉하다시피 하면 가치관이 지나치게 편향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죄책감을 지나칠 정도로 느끼지 못한다든가, 타인의 말은 듣지 않는다거나. 매미가 이와니시를 핑계로 삼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매미도 이와니시에게 의존을 많이 했다는 얘기겠지.

 최근에 찬호께이의 <풍선인간>을 읽을 때 킬러와 죄책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같은 직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래스호퍼>에서 해답을 얻은 느낌이다. 킬러는 의뢰인이 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지, 아니면 그럼에도 죄책감을 외면해선 안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뒤로 갈수록 심층적으로 드러나는데 고래와 매미, 그리고 푸시맨의 모습에서 다양한 형태의 죄책감, 그 죄책감을 어떻게 떨쳐내는지 묘사돼 참 흥미롭게 읽혔다. 아무래도 킬러 역시 다른 직업처럼 수요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 텐데 단순히 모든 도덕적인 짐을 실행자인 킬러에게만 지운다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인 듯하고, 그렇다고 너무 '의뢰니까' 라며 자신이 죽여야 할 사람의 비명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도 제정신으론 공감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에서 피해자이자 어쨌든 명백한 가해자이기도 한 - 업계(?)에 간판을 걸었던 건 본인의 의지이며 책임이니까. - 킬러들이 어떻게 자기 정신세계를 보전하며 살아가는지 눈길이 가 상대적으로 스즈키의 박애주의적인 행보가 눈에 안 들어온 것 같다. 거 참, 이 양반도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는데 말이지...


 느닷없이 결말이 나 허무하기도 했지만 후속작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 내심 위로가 됐다. 본의 아니게 시리즈 최신작을 먼저 읽었는데, <악스>와 이 작품이 연관성이라곤 킬러가 등장하는 것을 빼면 거의 없는 것 같아 <마리아비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미 스즈키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결말이 났으니까 그 작품에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듯하다. 그 작품도 기대된다. 이 작가가 킬러를 바라보는 방식이 단순히 흥미 위주가 아닌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감이 있어 후속작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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