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스호퍼 - 개정판 킬러 시리즈 1
이사카 고타로 지음, 오유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9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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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이사카 코타로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그래스호퍼>를 드디어 읽었다. 킬러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개인적으로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손이 잘 안 갔는데 작년에 이 작품이 속한 '킬러' 시리즈의 최신작 <악스>를 나쁘지 않게 읽어서, 또 마침 최근에 <마왕>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서 '삘'이 오른 김에 이 책도 집어들었다.

 작품의 제목인 그래스호퍼는 영어로 메뚜기를 뜻한다. 작중에 등장하는 한 킬러가 자신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대해 인간은 너무 많이 모여 서로를 죽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게 됐다고 변명하며 이때 인간을 마치 메뚜기와 같다고 한다. 나름대로 적합하지만 그렇게 새로운 구석은 없는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나중엔 단지 비유로써가 아닌 킬러가 알게 모르게 외면했던 죄책감을 상징하는 키워드란 생각에 사뭇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어떻게 보면 인간을 곤충으로 비유하는 것부터가 꽤나 자조적이라고 보는데 특히 메뚜기로 묘사한 인간 사이에 킬러 자신도 예외가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참 답도 없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작가의 작품들이 대게 그렇듯 이 작품도 심각하기 짝이 없는 내용임에도 특유의 유쾌함은 잃지 않고 있다. 아내의 복수를 위해 불법 조직에 위장 침입한 스즈키, 상대로 하여금 자살을 유도하는 '고래', 상대가 여자건 어린이건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매미'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구성의 이 작품은 적절한 가독성과 어렵지 않은 퍼즐식 구성으로 준수한 몰입도를 선보인다. <악스>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이 작품도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좀 평범하단 인상을 받았는데 만화나 영화로도 나오기엔 약간 수수하지 않은가 싶어 처음엔 의아했었다. 나중엔 이 인상이 많이 달라지지만... 여담으로 그 만화와 영화를 내가 찾아볼 일이 있을진 잘 모르겠다. 이 작품의 후속작 <마리아비틀>은 당연히 보겠지만.

 중반부부터 이야기 전개가 가속돼 재미는 있었지만, 나만 느끼는 건지 몰라도 스즈키와 고래, 매미의 이야기에 본격적으로 접점이 생기는 중반부가 약간 작위적으로 느껴진 게 좀 걸렸다. 고래의 경우는 아예 현실과 환상을 분간을 못하니 대충 이해하고 넘어갈 순 있었는데 매미의 경우는 좀 더 설명이 필요하거나 혹은 다른 계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캐릭터 붕괴까진 아니지만 너무 작품의 진행을 위한 편의에 맞춰 움직이는 게 아닌가... 이 부분은 후에 자신의 고용주인 이와니시에게 정신적으로 제법 의지했음이 드러나면서 해결된 부분이지만 그래도 중반부는 좀 더 고민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스즈키가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겠지만 실질적으로 작가가 얘기하고 싶던 바는 고래와 매미를 통해서 전달이 됐다고 본다. 고래는 <몬스터>의 요한처럼 사람을 정신적인 궁지로 내모는 능력의 소유자면서 동시에 자신의 내면도 갉아먹던 모습이 죄책감을 느낄 새도 없이 파멸로 다가가는 것이라 여겨졌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들고 다니며 지금껏 소설이라곤 이것만 읽었다고 하는데, 책이란 건 여러 권이 아닌 한 권만 읽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는 말을 생각하면 고래가 이래저래 위험한 인물이란 건 뻔한 일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잭 크리스핀이라는 가상의 해외 아티스트의 어록만을 신봉하는 매미의 고용주 이와니시한테도 해당하는 말이다. 매미라고 더 나을 것 없어 보이지만, 어쨌든 고래와 이와니시처럼 특정 소설이나 인물을 신봉하다시피 하면 가치관이 지나치게 편향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죄책감을 지나칠 정도로 느끼지 못한다든가, 타인의 말은 듣지 않는다거나. 매미가 이와니시를 핑계로 삼아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국 인정하고 싶진 않겠지만 매미도 이와니시에게 의존을 많이 했다는 얘기겠지.

 최근에 찬호께이의 <풍선인간>을 읽을 때 킬러와 죄책감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같은 직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그래스호퍼>에서 해답을 얻은 느낌이다. 킬러는 의뢰인이 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는지, 아니면 그럼에도 죄책감을 외면해선 안 되는지에 대한 질문이 뒤로 갈수록 심층적으로 드러나는데 고래와 매미, 그리고 푸시맨의 모습에서 다양한 형태의 죄책감, 그 죄책감을 어떻게 떨쳐내는지 묘사돼 참 흥미롭게 읽혔다. 아무래도 킬러 역시 다른 직업처럼 수요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일 텐데 단순히 모든 도덕적인 짐을 실행자인 킬러에게만 지운다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인 듯하고, 그렇다고 너무 '의뢰니까' 라며 자신이 죽여야 할 사람의 비명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도 제정신으론 공감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에서 피해자이자 어쨌든 명백한 가해자이기도 한 - 업계(?)에 간판을 걸었던 건 본인의 의지이며 책임이니까. - 킬러들이 어떻게 자기 정신세계를 보전하며 살아가는지 눈길이 가 상대적으로 스즈키의 박애주의적인 행보가 눈에 안 들어온 것 같다. 거 참, 이 양반도 고생은 고생대로 다 했는데 말이지...


 느닷없이 결말이 나 허무하기도 했지만 후속작이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어 내심 위로가 됐다. 본의 아니게 시리즈 최신작을 먼저 읽었는데, <악스>와 이 작품이 연관성이라곤 킬러가 등장하는 것을 빼면 거의 없는 것 같아 <마리아비틀>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미 스즈키를 비롯한 모든 등장인물의 이야기는 결말이 났으니까 그 작품에선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듯하다. 그 작품도 기대된다. 이 작가가 킬러를 바라보는 방식이 단순히 흥미 위주가 아닌 좀 더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감이 있어 후속작이 기대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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