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빨개지는 아이
장 자끄 상뻬 글 그림, 김호영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5월
평점 :
절판


9.7 





 아무 이유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와 아무 이유 없이 재채기를 하는 아이의 우정 이야기. 서로의 결점은 둘을 외톨이로 만들기도, 그래서 서로를 각별한 친구 사이로 만들기도, 긴 시간이 흘러 성인으로 자란 뒤에도 서로를 한눈에 알아보게 만들기도 한다. 남과 다른 자신의 개성을 결점으로 여기다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자신의 결점을 사랑하는 이야기는 흔하지만 훗날 두 사람이 서로를 알아보는 대목에선 감탄했다. 작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엿볼 수 있었다. 

 어렸을 적 사귀었던 친구와 다시 만나도 바로 알아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생김새도 많이 바뀌었고 성격이나 가치관도 예전 그대로일 확률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바뀌면 바뀐 모습대로 나름대로 재밌지만 못 알아볼 정도로 바뀌면 속으로 실망해버리곤 한다. 물론 평생에 걸쳐 전혀 바뀌지 않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선 무서운 사람이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이 작품에선 그렇게 심각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뜻밖의 이별로 서로를 그리워한 두 친구가 성인이 되어 한눈에 알아본 뒤 예전처럼 허물없는 친구가 되는 이야기에 작가는 과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다만 그런 생각은 든다. 내겐 저렇게 알아보는 것만으로 반색할 만한 친구가 있을까? 


 시게마츠 기요시의 <친구가 되기 5분 전>이란 작품에선 '평생에 기억될 친구는 단 한 명이라도 충분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 말에 해당하는 사람이 <얼굴 빨개지는 아이>에 등장인물들일 텐데, 나는 어떨까? 지금 친구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렸을 적 친구라면 대답하기 조금 애매하다. 어렸을 적 친구란 그런 존재인 것 같다. 그립긴커녕 사실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설령 알아봐도 어색할 뿐일 터다.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생각해보면 친구'였'다면 그렇게 거북할 리 없겠지만 만약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난다고 한들 엄청 반갑진 않을 듯하다. 확실히 이런 걸 보면 내가 다소 삭막한 인생을 살아온 감이 없진 않은 것 같다. 뭐, 지금이라면 경우는 다르지만 예전엔 친구 소중한 줄 잘 모르고 지냈던 것 같달까? 

 가볍고 따뜻한 작품을 읽었는데 나는 왜 자꾸 무거운 이야길 꺼내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작중 인물들이 부러워서 주저리주저리 얘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게도 그립고 헤어짐이 아쉬웠던 친구가 있었더라면... 그리움을 갖고 있는 것이 꼭 좋은 일은 아니지만 반대로 그런 감성을 느낄 여력이 없는 삶도 꼭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별 이상한 걸 다 부러워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작품 이야기가 워낙 따뜻하고 흐뭇한 나머지 내가 느끼는 부러움의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봤던 것 같다. 어쨌든, 나로 하여금 부러움을 느끼게 하다니, 짧지만 강렬해서 괜히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고 싶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종이 여자
기욤 뮈소 지음, 전미연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8.7 





  <종이 여자>는 백지 공포증에 빠진 작가인 주인공이 자신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도움으로 다시 글을 쓰게 된다는 이야기를 기욤 뮈소가 로맨스 작가다운 상상력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최근 어둡고 심각하고 속에 안 좋은 이야길 내리 접했더니 급격하게 밝고 가볍고 통통 튀는 소설이 땡겨 다시 읽었다. 기욤 뮈소의 책은 그 바람에 더없이 적합했는데, 이 책을 처음 읽은지 자그마치 10년이 훌쩍 지났기 때문일까, 그야말로 고등학생 시절에 읽기 딱 좋을 정도로 가볍디 가벼운 소설이란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다. 상처와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전개를 띈 이야기의 무게감이나 책 속의 등장인물이 현실 세계로 튀어나왔다는 설정 등 흥미로운 요소들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놈의 미칠 듯한 가벼운 문체와 사유로 인해 좋은 요소들이 100% 발휘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쉬운 소설은 흔히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는 것 같다. 문체가 좋지만 설정이 별로인 경우와 설정은 기발한데 문체가 구린 경우다. 기욤 뮈소의 작품은 전적으로 후자에 속하며 더 큰 문제는 이 작가의 책이 대부분 설정이 다 다름에도 항상 비슷한 느낌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팬들에게 물어보면 이 작가의 책 중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은 '가장 처음에 접한 책'이라고 하며 나 역시 처음에 접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가 제일 재밌었다. 작품을 접하면 접할수록 식상함이 느껴진다니 참... 최근에 이 작가 책을 전혀 안 읽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내공이 애매한 것에 비해 독자들의 사랑은 듬뿍 받는 복에 겨운 작가구나 싶었다. 


 물론 식상하고 가볍고 한없이 대중적인 작품을 쓰지만 그래도 장점이 많은 작가다. 다음을 궁금하게 만들고 순간순간 긴장을 유발하는 이야길 짤 줄 알며 캐릭터들이 확실히 개성적이면서 제법 인상적인 반전도 있어 그의 작품은 대체로 결말이 쉽게 잊히질 않는다. <종이 여자>의 경우 주인공이 작가인 것치고 내면 세계나 사용하는 어휘가 평범하기 그지없었지만 주변 인물들의 매력과 활약이 차고 넘쳐 그들에게 휘둘리면서 재밌는 그림이 많이 그려졌던 게 흥미로웠다. 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주인공의 친구 밀로와 캐롤의 활약도 만만치 않았다. 오로르는... 주인공과 그녀 사이의 에피소드가 다소 오글거려 내 개인적으로 작가의 밑천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부분으로 느껴졌다. 그래도 작가가 판단력은 있어서 그다지 흥미롭다고 여겨지지 않는 오로르와의 만남을 재빨리 다루고 끝내서 이후의 에피소드에 바로 몰입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소설의 반전이나 결말은 다 좋았다. 주인공이 처음에 경악하며 '속았다'고 화를 내는 것이나 운명의 상대 앞에서 망설이는 이유도 모두 개연성 있는 태도라 좋았고, 그럼에도 운명이 엇갈리지 않고 결실을 맺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로맨스 소설이 새드엔딩이면 유독 심적 타격이 큰데 내가 아는 한 기욤 뮈소는 그 정도로 잔인한 심보를 가진 작가는 아니다. 아무튼 뻔하긴 해도 해피엔딩으로 이끈 결말은 다시 읽어도 좋았다. 그리고 만약 이 작품에 반전이 없었다면 결말도 그저 그런 인상을 남겼을 텐데, 반전을 더욱 충격적으로 만들 복선이 약간 부족했던 것은 아쉬웠지만 반전의 내용과 그 안에 담긴 진정성만으로 이 소설은 그래도 작가의 작품 중 꽤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본다. 


 위에서 작가를 두고 내공이 어쩌니 하며 실컷 씹었지만, 그래도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그 후에>와 더불어 <종이 여자>는 제법 수작 반열에 드는 대중 소설이라 생각한다. 어린 독자들이 특히 열광할 만한 가벼운 무게감은 지금 내 나이엔 유독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약 10년 전에 이 소설을 재밌게 읽었던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라 오랜만에 추억 여행도 해 나름대로 즐겁게 읽어내려간 작품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과 더불어 <당신~>과 <그 후에>도 다시 읽어볼 생각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동정 없는 세상 - 제6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박현욱 지음 / 문학동네 / 200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9.4 






 중의적인 제목 그대로 주인공이 자기 여자친구와 한 번 하려다 퇴짜를 맞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이 유머러스한 톤은 그대로 진행되고 이 어린 커플의 다툼도 진지하되 풋풋하게 그려진다. 지금이야 많이 개방된 편이지만 이 작품이 신인상을 수상한 즈음인 20년도 훨씬 전에 용케 이 유쾌한 작풍이 인정을 받았구나 싶을 정도로 <동정 없는 세상>은 세월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 소설이다. 이상적인 어른과 짓궂어도 선은 넘지 않는 친구들, 속세에 속하지 않는 듯 대학 진학에 대한 욕구나 걱정이 전무한 4차원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유일하게 갖고 있는 목표인 '한 번 하고 싶은' 대상인 여자친구는 만만찮은 존재로 등장한다. 


 쉽게 말하자면 여러 우여곡절 끝에 여자친구와 실랑이를 벌이다 얼추 무드를 잘 잡아 거사를 치르는 뭐 그런 내용이다. 조금 어렵게 말하자면 정작 성관계보다 주인공이 인격적으로 어느 수준의 됨됨이를 갖춰 나가게 되는지가 더 눈길이 가던 성장 소설이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관계 뒤에 쪼그라든 주인공의 물건을 보고 여자친구가 귀엽다고 말하자 주인공이 영원히 쪼그라들어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그 나이대 남성의 성욕을 유쾌하다 못해 시종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작가의 성관념이 그릇됐다라고 여길 만한 부분이 느껴지지 않아 끝까지 기분 좋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현대 문학에서 성에 대한 묘사를 과시하듯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트렌드를 넘어 일종의 소양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소설은 그중에서 성이란 관념을 가장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시선으로 묘사하지 않았나 싶다. 


 때문에 이 소설이 단편 드라마로 나왔다는 소식이 반갑기보다 불안하다. 보려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겠지만 원작의 풋풋함이나 적절한 수위가 드라마에서 제대로 구현됐으리란 기대가 잘 되지 않는다. 뚜껑은 열어봐야 아는 것이라지만 당장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만약 본다 해도 그 전에 작가의 대표작 <아내가 결혼했다>를 다시 읽고 그 소설을 원작으로 둔 영화를 찾아볼 듯하다. 아, 물론 작가의 다른 책도 찾아 읽어볼 생각이다.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는 얘기하고 비슷해. - 142p



무엇을 하건 간에 어차피 어른이 되는 것이라면 근사한 어른이 되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근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근사한 사람이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근사하게 살아갈 것이다. - 181~18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한발설 - 성매매 경험 당사자
성매매경험당사자네트워크 뭉치 지음 / 봄알람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8 





 20년 동안 성매매 여성이었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풀어낸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에 이어서 이 책도 읽었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 네트워크 뭉치는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을 읽을 때부터 들어왔던 이름이라 그 단체에 소속된 여성들이 직접 풀어낸 책도 읽어보고 싶었다. '무한발설'이란 제목에 걸맞는 내용으로, 익명의 저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쏟아내는데 책의 디자인 덕분인지 지저분한 내용과 다르게 읽히기는 굉장히 감각적으로 읽혔다.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이 산문이면 이 책은 운문에 가까웠다. 어딘지 리듬감이 있었고 그렇기에 보다 성매매 경험 당사자들의 경험담이 매우 파괴력 있게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성구매를 해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이 책에서 거론된 온갖 엽색 행각을 보노라면 앞의 내 생각에 '반드시' 라는 말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여자 질에 뭘 넣고 행위를 한 다음에도 불만족스러웠다고 값을 치르려 하지 않는다거나 신고한다거나 진상질은 있는 대로 하고... 뭔가 많이 읽은 기억이 나는데 하도 충격적이라 일부러 잊은 것도 있다. 어떤 부분에선 성애 소설 <O 이야기>를 능가하기도 하니 진짜 말 다했다. 역시 픽션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현실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 같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은 나쁜 일에만 하게 되는 건지... 


 특히 섬에 데려가서 성매매를 시키는 건 기함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런 일을 겪고도 살아남은 분들이 존경스러웠고 그런 일이 꽤나 비일비재한 것과 성구매자나 포주 등 가해자들이 처벌받지 않았음이 자명한 것도 한탄스런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살려둔 게 이상할 정도로 정신이 이상한 작자가 한둘 언급되는 것이 아닌 터라 그자들의 악행이 법적으로 정녕 제지가 안 되는 것인지 읽는 내내 답답해서 체할 지경이었다. 당사자분들이 겪은 고통에 비할 바는 당연히 안 되겠지만 짧은 책임에도 후유증은 상당히 컸다. 

 성매매 시장이 망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성매매 경험 당사자 네트워크가 외치는 것만으론 계란으로 바위 치기 격일 수 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는 말로도 역부족인 듯하다.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엔 이런 말이 나온다. '남자는 짐승이고 성욕은 본능이니 성매매를 못 하게 하면 성범죄자가 된다는 말에 진정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 것은 누구인가.' 내가 봤을 때 이 말에 깊이 동의하는 남성들이 들고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남자는 다 성구매자고 변태'라 싸잡는 일반화에 저항하는 사람도 동참해야 비로소 성매매 시장에 타격이 있을 듯하다. 당장 나부터 구체적인 실천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누굴 계몽시키고자 설치는 것이 어불성설이니 일단 나부터 뭔가를 해야겠다. 그 뭔가가 무엇인지는 아직 갈피도 잡히지 않지만, 성매매 경험 여성들의 이야길 몇 주 동안 듣다 보니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의 일이라 치부하고 무시하기엔 그들은 나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아파하고 슬퍼할 줄 아는 사람들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길 하나 건너면 벼랑 끝 - 성매매라는 착취와 폭력에서 살아남은 한 여성의 용감한 기록
봄날 지음 / 반비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9.9 






 일전에 읽은 <성매매, 상식의 블랙홀>에서 언급된 책으로 '성매매 여성으로 20년을 살아온 여성의 경험담'이라 언급돼 바로 구매해 읽었다. 400페이지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으로 300페이지에 달하는 1부는 저자가 성매매 여성으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나머지 100페이지 가량의 2부는 탈성매매 이후 어떻게 사회에 적응했는지를 그리고 있다. 누군가는 이 책을 올해의 논픽션으로 꼽기도 하는데, 나 역시 동의하며 아마도 내가 올해 읽은 모든 논픽션 중 가장 으뜸이리라 감히 점쳐본다. 꼭 실화여서, 저자가 직접 경험했고 내가 애써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는 성매매 현장을 그렸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한 고통을 겪고도 살아남은 저자의 생명력에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서다. 

 저자는 성매매 여성을 둘러싼 갖은 모욕과 멸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성매매를 했다고 커밍아웃하게 되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마다 그 사실을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성매매를 한 자신이 아닌 자신의 성을 구매한 남성임을 저자는 책에서 분명히 하고 있다. 착한 성 구매자는 없었으며 저자 나름대로 순화했을 자신의 경험 속 온갖 수난들은 모두 남성이 주도한 결과란 것을 톡톡히 강조한다. 


 누군가는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몸을 판 것이 아니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매매를 시작한 순간 서서히 노예로 전락하고 그 과정에서 노동이란 숭고한 단어는 입에 올리기 힘들 정도로 비루한 대우를 받았음을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보여준다. 몇 분만 지각해도 지각비 50만 원, 업소에서 일한 조건으로 선불금 몇 백에 아가씨를 업소에 소개해준 소개쟁이에게 줘야 할 돈, 홀에서 입을 옷, 다쳤을 때 필요한 치료비 등 모든 돈은 여성들의 돈, 즉 빚으로 달리게 되고 그 안에서 여성들은 도대체 끝이 없는 빚을 갚기 위해 몇 년을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사회와 단절되고 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남자들한테 학대를 당하고 술도 먹어야 하고... 그렇게 몇 년을 일해 돈을 벌어서 업소를 벗어났다고 해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트라우마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그간 사회와 격리된 탓에 세상 물정도 잘 모르고 할 줄 아는 일도 적으니 새로운 일을 배우는 것에 주눅들어 조금이라도 경제적으로 곤궁해지거나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면 업소로 돌아갈까 하는 충동과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는 늪처럼 성매매의 경험은 해당 여성들에게 신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매우 크고 지속적인 상흔을 남긴다. 이 책을 읽기 전엔 어쩌다 20년씩이나 성매매를 하게 됐느냐는 의문이 들었는데, 책을 읽는 내내 이토록 장기간 폭력에 노출되고 격리되면 그 이상의 시간도 순식간에 빼앗기리란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모를 겪고도 자기 파괴 충동이 일지 않고 끝내 업소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응 중인 저자가 진심으로 존경스러워졌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서 내내 절망적인 기분이 들었는데, 이 책의 내용은 전부 실화이며 아직도 비일비재하고 저자처럼 벗어나지 못한 여성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을 착취하는 시스템은 더 교묘해졌고 음험해졌으며 기껏 성매매 현장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길 외치는 이 책의 저자 같은 사람이 나와도 세상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니, 귀를 기울이지 않을 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인 것이, 이미 마음 속 기저에 뿌리 깊게 내려진 '몸 파는 여성에 대한 멸시'가 남아있어 아무리 고통을 호소해도 자업자득이라거나 머리에 똥만 들어서 남자한테 기생한다는 모멸적인 말까지 돌아오는 실정이다. 

 성 구매 경험이 있는 남성은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나처럼 성 구매 경험이 없는 남성도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며 사회에 만연한 성매매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앞으로도 성 구매할 생각은 없고 아마 어지간하면 반대의 입장이 될 일도 없을 것 같아 나와 상관 없는 일이라 선을 긋고 살아왔다. 타인의 문제를 내 일처럼 여기고 몰입하며 분개하기엔 내 앞가림도 버겁고 이런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야길 접하노라면 분노보다 절망이 앞설 뿐이다. 그렇게나 두텁게 체계화된 성매매 시스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예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생각은 들었다. 어떤 기적이 벌어진 덕분이든 탈성매매 여성은 보다 자신감을 갖고 당당히 살아갔으면 했다. 그 긴 시간을 인내하고 살아남았고 눈치 싸움을 벌여왔고 심지어 비위도 좋은 당신들은 그 어떤 일이라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꼭 술이나 몸을 파는 일이 아니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당신들은 견뎌냈고 살아남았을 뿐이라 생각할 수 있어도 내 눈엔 이미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반 이상은 극복한 것으로 느껴졌으니까. 

 내가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대단히 주제 넘은 일일 수 있다. 하지만 그분들은 주제 넘든 아니든 누구에게나 위로와 격려의 말을 들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도 든다. 꼭 그들이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외면당하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조차 없는 일에 몸담은 적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 모두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살아남길 원하고 절망스러우면 울고 과거를 후회하기도 하는 사람들... 그들이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치욕적인 경험을 했다 한들 나는 그분들이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사람 아래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 돈의 유무로 모든 것이 갈리는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공허하게 들리는 말일 수 있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논리가 극한으로 적용된 성매매 업계는 필요악이니 뭐니 하는 말로 정당화될 수 없다. 업계라 불려서도 안 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여 매우 현장감 넘치는 이 책의 내용을 통해 나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성매매는 반드시 없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 아래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어야 하니까, 누군가 행복하면 누군가 고통 받는 것이 아무리 필연적인 일이라 하더라도 그 아이러니함은 점점 사라져야만 하니까 말이다. 

내 경험이 나를 갉아먹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을 폭력이라고 계속해서 말하는 것이다. - 403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