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체온증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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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아이슬란드 추리소설가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읽어봤다. 작품 얘기를 하기에 앞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난 이 작품을 계기로 아이슬란드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됐다. 처음 듣는 이름의 나라는 아니었지만 정확히 어디 있는 나라인지는 몰랐었다. 그런 외딴 곳에 그렇게 큰 섬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여러모로 생경한 점으로 가득한 작품이었다. '밀레니엄' 시리즈나 요 네스뵈 등 북유럽 추리소설을 종종 접하긴 했으나 북유럽이란 무대는 여전히 낯선데 그 중에서도 변방이자 외진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섬 나라의 소설은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인명도 지명도 문화도 분위기도, 지금까지 읽은 그 어떤 소설보다도 신선한 느낌을 줬다.


 하지만 이 작품이 특별한 이유가 단지 아이슬란드 소설이기 때문은 아니다. 처음 접하는 작가였는데 제법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북유럽권 스릴러에서도 좀 알아주는 작가라고 한다. 업계 최고의 추리소설상인 유리열쇠상을 최초로 두 번 연속 수상했다나. 그 기록이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다니 흠칫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살한 여자를 발견하면서 시작하는 소설은 주인공인 에를렌뒤르 형사에게 어딘가 석연치 않은 자살의 낌새를 전하며 전개에 박차를 더해간다. 지인들은 피해자가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우울해 했다지만 자살할 정도는 아니었다며 입을 모은다. 이윽고 생전에 피해자가 강령 의식을 치른 것을 알게 된 에를렌뒤르는 홀로 조사하기에 이른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살로 '마무리'된 이 사건을 진정으로 '해결'하기 위해.


 '에를렌뒤르 형사' 시리즈를 처음 읽어서 원래 이런 작풍인가 싶었는데, 일단 분위기가 여느 추리소설 - 비교적 같은 문화권인 북유럽 추리소설과 더불어 서구권이나 영미 추리소설까지 가리킨다. - 과 사뭇 달랐다. 내가 추리소설하면 느끼곤 했던 피비린내 나고 도덕적 해이가 의심되는 쾌락적인 묘사와는 정반대의 지점을 그린 작품이었던 것이다. 이런 양식은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 - 일본도 어둡고 피비린내나는 소설이라고 하면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잘 쓰긴 하지만 꼭 그렇지 않은 소설도 잘 쓴다는 이미지도 강하다. - 에 가까울 정도였다. 예를 들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가가 형사' 시리즈에 가깝다고나 할까.

 자살은 범죄가 아닌 터라 추리소설 속에서 좀처럼 중심 사건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기껏 다뤄지면 자살 같은 타살이었다든가 아니면 어마어마한 사연이 있었다는 식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자살은 역시 범죄가 아니라서 여타 요소를 넣어서 전개시킨다는 창작자들의 공통된 발상이다. 그렇다면 자살은 정말 범죄가 아닌 걸까?


 사전적인 의미에서 자살은 범죄가 아닌 것이 맞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약간 다르지만 죄라고 부르기는 한다. 이 작품은 이 두 가지 의미로도 자살을 규정하지 않는다. 이는 작중 주인공인 에를렌뒤르의 지난 시절 겪은 일에서 기인한 듯하다. 그리고 나는 그가 겪었을 일들을, 한마디로 전작도 읽고 싶어졌다. 이번 작품에서처럼 정적이지만 상당히 의미 있는 여정을 전작들도 그리고 있다면 말이다.

 자살은 본인에게 있어서 마지막이지만 남겨진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다. 그들에겐 후회와 허망함이 남는다. 그런 사람들을 두고 처벌할 대상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자살의 이유마저 파악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해결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가치 전도 현상을 에를렌뒤르는 범하지 않기 위해 자살의 진상에 다가서려고 한다.


 제목은 <저체온증>이고 배경도 아이슬란드고 인명과 지명도 낯설어 차가운 느낌을 가지기 쉽지만 실상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따뜻한 추리소설이었다. 어지간한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보다 더 확고하고 인간미 넘치는 주제의식으로 무장한 이 소설은 후반부가 다소 예상되는 면이 있음에도 남다른 기분으로 몰입할 수 있었다. 완전한 사건 해결을 위한 에를렌뒤르의 여정이 과연 끝나긴 할 것인지, 이 사건 아닌 사건이자 해결되지 않은 문제의 본질에 다가섰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슷한 문화권의 추리소설들에 비하면 심심한 작품처럼 보일 것이다. 이 말은 맞는 말일 수도 있고 틀린 말일 수도 있다. 기존의 추리소설 작법과는 달리 자극적인 요소도 적고 제법 감정적이다. 하지만 한 사람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파동에 대한 작가의 통찰은 정말 진지했고 자극만이 추리소설의 전부라는 생각이 아주 지엽적인 것이었구나 하고 깨닫게 해준다. 익숙한 이야기 전개는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상과 가장 밀접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서 읽는 맛이 상당했다.


 찾아 보니 작가의 작품이 몇 개가 국내에 소개된 적이 있었다. 작가 이름이 좀 다르게 표기됐던데... 그보다 문제는 다 절판 도서라는 건데 열심히 찾아봐야겠다. 이 작품이 어떻게 잘 알려져서 작품 몇 개가 더 소개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북유럽 추리소설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었던 만큼 다른 만남도 적잖이 기대된다.

자살 역시 실종 사건이야. - 239p




우연이란 비와 같아서, 바르게 사는 사람에게도 바르지 않게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내린다.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때로는 소위 운명이라는 것을 형성하기도 했다. 우연이란 난데없이 등장했다. 예상치 못하게, 기이하게, 설명할 수 없게. - 2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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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야행 3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정태원 옮김 / 태동출판사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10








어떤 책을 두 번씩이나 읽는다는 것은, 그 두 번 읽기까지의 시간 동안 스스로 얼마나 변했는가를 확인하는 일일 터다. 책은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그러니 똑같은 책이 다르게 읽혔다면 그건 내가 변했다는 뜻이겠지.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은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은 책이다. 당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에 아주 빠져 살았을 때였는데 유일하게 이 책은 그저 그랬다. 료지와 유키호를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기존의 시원시원한 작가의 작법과 이질적이서 그랬는지, 예상과 달리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되지 않고 인물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여러 사건을 다뤘기 때문인지, 아니면 작품의 마무리가 비교적 느닷없는 탓이었는지 다 읽고서 당혹스럽기만 했다. 작가의 최고 작품이라는 세간의 평가에 납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이 작품을 완독한 지금에 이르러서야 나는 작가의 최고작이라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또 다른 재미가 있었던 것일까? 이번 재독은 흥미진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료지와 유키호의 연결고리, 그 둘에 휘말려 인생이 변화하는 - 대체로 망가지는 - 사람들, 흑과 백의 선명한 대조를 통한 작풍의 완급 조절, 당시 일본의 시대상을 자연스럽게 녹인 잔재미,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일생을 살펴보는 대서사시... 이제 와 말하지만 확실히 히가시노 게이고의 역작이자 단연 문학적인 작품이었다.

 문학적이라는 단어만큼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으리라. 그는 타고난 이야기꾼이긴 하나 빠르고 분명하게 읽히는 문장과 남다른 주제의식으로 승부를 보는 대중 소설가일 뿐, 문학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와는 분명 거리가 있었다. 이는 다른 장르의 소설가도 아닌 같은 일본 추리소설가의 작품을 조금만 접해도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최근 출판사들이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름만 믿고 신작을 무작정 비싸게 파는 무리수를 보이고 있는데 - 그만큼 작가의 몸값이 어마어마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 문제는 작가의 작품이 항상 재밌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출판사는 물론이고 괜히 다작을 하는 작가한테까지 반감이 들곤 했다. 그런 즈음에 읽은 <백야행>은 작가에게 품던 애먼 불만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래도, 누가 이 작품을 두고 몇 년에 한 번씩이라도 좋으니 이 작품 같은 퀄리티를 유지해달라고 하던데 나 역시 동의한다. 꾸준히 많이 쓰는 것도 좋지만 이런 길고도 좋은 작품을 쓰는 게 훨씬 좋은 일이지 않은가.

 한 여자를 위해 그림자에서 헌신하는 남자와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자. 처음엔 이 둘의 행보를 지켜보기가 썩 달갑지 않았는데 작가가 긴 시간을 공들인, 이른바 범죄자의 탄생이자 나아가서는 일그러진 심리의 기원에 대한 기술은 정말 눈을 뗄 수 없는 몰입도를 자랑했다. 유키호의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서 실로 이해타산적으로 벌어진 연쇄 범죄의 속내에는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보통의 추리소설이라면 이 범죄의 연쇄를 파헤쳐 인과를 분명히 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만 이 작품은 모든 것을 불분명하게 냅두면서도 범죄의 연쇄와 두 주인공에 대한 연민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범죄를 미화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 누군가란 과거에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나다. 사실 그 심정엔 변화가 없다. 하지만 한편으론 보다 불쌍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어쩌면 일본 소설 특유의 감성일 수 있는데 이런 요소 때문에 이 작품을 문학적이라고 느끼는 게 아니었을까. 일본에서 드라마화와 영화화, 우리나라에서 손예진과 한석규 주연의 영화화까지 이뤄진 <백야행>이 이토록 많이 영상화된 이유는 작품 특유의 드라마와 이미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흑과 백이 정확히 맞닿은 백야 속에서 선악을 함부로 규정짓기 어려운 행동거지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니까. 이러한 역설 속에서 문학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임에도 인지되는 경지가 탄생한다고 보는데 그런 의미에서 상당히 인상적이기 그지없는 작품이었다.

 히가시노 게이고와 그의 모든 작품에 대한 인상이 확실히 바뀌는 작품이었다. 지금까지 두 번 읽은 모든 책 중에서 가장 반전의 감상을 남긴 작품이기도 하다. 읽느라 2주 이상이 걸렸지만 여러모로 정말 의미있는 독서가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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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미나토 가나에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9.8








 미나토 가나에의 <망향>을 두고 '<고백>의 그늘에서 벗어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데뷔작에 가려져 후속작이 빛을 보지 못하는 아주 대표적인 작가인 미나토 가나에에게 있어 아주 의미 있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위 얘기에 동의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고백>과 어깨를 견주는 후속작을 읽었기 때문이다. 7년 전에 읽은 <소녀>는 다시 읽은 지금도 그렇게 느껴졌다.

 <고백>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해서 이후 작가의 후속작 또한 거의 대부분 출간됐다. <속죄>, <야행관람차> 등 여러 작품을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접할 수 있었는데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고백>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부터 드는 작품들이었다. <소녀>는 그 중에서 유일한 수작으로 다시 말하자면 <고백>에 준하는 완성도를 자랑했다.


 작가 특유의 독기가 살짝 빠진 대신에 소녀들의 우정을 그린 점, <고백>과 다르지 않게 1인칭 화자 두 명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점, 민감하고도 민감한 일본의 서브 컬쳐인 '소녀' 설정이 한껏 차용된 점이 이 작품이 평가절하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반대로 말하면 방금 언급한 3가지 점을 특별히 개의치 않는다면 꽤나 볼거리가 풍성한 작품이다. 여름방학 전에 학교에서 영화를 시청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유키와 아쓰코, 두 인물의 소개와 더불어 각각의 시점에 따른 심리 묘사까지 완벽하게 해내 안정적인 도입부를 선보인다. 두 주인공이 '사람이 죽는 순간을 보고싶다'는 아무리 터부시해도 모자랄 기막힌 바람을 품는 것도 개연성 있었고 다음과 같은 바람을 여름방학 동안 이루고자 행동에 옮기는 일련의 전개는 전혀 예측불허해 상당히 긴장하면서 읽어나갔다.


 일본에서 '소녀'를 다룬 소설가라고 하면 <내 남자>로 유명한 사쿠라바 가즈키가 먼저 떠오른다. 미나토 가나에의 <소녀>는 그 작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녀를 묘사하는데 허상에 젖지 않고도 치기 어리다가도 깨달음을 얻는 모습을 그려내는 게 전혀 오그라들지 않았다. 지독한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둔 유키, 유망한 검도 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진로가 좌절된 아츠코를 통해 어렸을 때 입은 상처가 얼마나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치는가 확실히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설정은 순전히 호기심이긴 해도,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죽는 순간을 목격하고 싶은' 두 소녀의 바람을 생각만큼 가볍지 않게 다루는 조화를 부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작품 근간에 도사린 긴장감과 복선들 - 비록 그 전말을 무난하게 예측할 수 있었지만 각각의 요소가 교묘히 이어진 점은 읽을수록 감탄스러웠다. - 이 종잡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하는데 그럼에도 '시크릿 청춘 소설'이라는 출판사의 홍보 문구가 무색하지 않게 실제로 청춘 소설적인 작풍과 잘 어울려 색다른 감상을 이끌어낸다. 다름 아닌 미나토 가나에가 시도할 법한 독한 청춘 소설로서 그 위치는 잔혹한 복수극인 <고백>과는 판이한 구석이 있다.


 개인적으로 충격적이고 슬픈 경험으로 하여금 뭔가 으스대고 싶은 심정은 정말 공감이 갔다. 그 심정은 나 역시 유키와 아쓰코처럼 학생 시절에 유독 심했었는데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하면 미나토 가나에의 솔직한 묘사는 아주 인상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가식도 허구도 없이 그 나이대 소녀들의 실상을, 원조 교제나 가짜 성추행을 구실로 어른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는 등 착잡하고 악독한 모습도 서슴지 않고 들춰내 괜한 판타지를 꿈꾸는 것을 원천 봉쇄해버린다.

 바로 여기까지만 얘기했더라면 <고백>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소설이었겠으나 이 작품은 우정이란 요소를 도입해 감동을, 하지만 신파와는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연출한다. '요루의 외줄타기'라는 가상의 소설로 하여금 친구를 위하는 진심 어린 마음을 생각함과 동시에 그 마음이 엇나가 오해를 사고 일이 꼬여 자기 틀에 더욱 갇히는 비극적 전개를 덧붙여 이 작품만의 남다른 목표의식을 설정해낸다. 이 설정은 분명 차가움과는 거리가 멀어 작가에 대해 신선한 인상으로 이어진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단편집인 <망향>도 나쁘지 않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작가의 잠재력을 보여준 작품은 <소녀>라고 생각한다. 끝을 달리는 독한 작풍에 그치지 않고 플러스 알파적인 우정과 화해가 그려져 뒷맛이 비교적 깔끔했다. 인과응보적 마무리도 상쾌하면서도 섬뜩하기 그지없었는데 이 아이러니야말로 이 작품의 매력 그 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p.s 유키가 쓴 '요루의 외줄타기'는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작가가 글을 잘 쓰긴 하지만 '요루의 외줄타기'의 일부 내용은 읽자마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니 말이다.

벼랑 끝에 몰린 자기 실상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가 바로 같은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란 걸, 그 중에서도 또래 친구들이란 사실을 어른들은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 7~8p




네가 그렇게 불행하다고 한다면 나와 너의 인생을 지금 송두리째 바꾸어 줄게. 그 제안에 일말의 저항이라도 느낀다면 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아닌 거야. - 2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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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의 테이프 스토리콜렉터 57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6.6








 호러 장르를 자주 접하지 않는다. 특히 영화로는. 무서워서... 라기 보단 특유의 잔인한 묘사가 싫은 것이다. 제아무리 '심리적 공포'를 표방한들 피가 터지는 폭력이나 죽음은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잖아. 나는 이런 요소들을 적어도 시각적으론 접하고 싶지 않은 대신 활자는 선호하는 편이다. 어떻게 보면 활자가 호러 본연의 맛인 상상에 뒤따르는 공포를 잘 살려주는 면이 있으니까. 그마저도 잘 안 읽긴 하지만. 전엔 기시 유스케의 호러 소설을 읽기라도 했는데...

 로맨스, 추리소설, SF, 그리고 호러는 아주 대표적인 장르 소설 중에 호러는 유달리 전형적인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귀신이나 사이코패스, 그게 아니면 불가사이한 것과의 만남, 공포... 처음에 말했듯 자주 접하진 않지만 '호러'란 얘기를 들었을 때 떠오르는 이미지란 대개 이렇다. 가끔씩이나마 접하는 호러 작품이라고 해서 내가 가진 이미지를 벗어나거나 하진 않았던 것 같다. 이 작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추리소설과 맞닿아 있는 듯하면서도 엄연히 다른 호러 장르는 초자연적 현상이나 괴기를 다룸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 추리소설에서 등장하는 초자연 현상이나 괴기는 인과 관계가 분명하다고 간주하고 그를 논리적으로 파헤치려 - 대체로 귀신의 소행이라고 하면 알고 보니 인간의 트릭이었다고 하는 식으로. - 든다. 반면 호러는 현상에 대한 공포의 체험, 그 심리를 낱낱이 묘사할 뿐이다. 그래서 호러 작품은 사건 해결과 같은 결말과는 결을 달리하는 마무리로 끝맺어지는데 이게 아주 찝찝하다.

 미쓰다 신조의 <괴담의 테이프>를 읽으니 호러의 경향 중 하나를 알게 됐다. 바로 작가 개입. 작중 소설가가 아닌 실제 저자가 주변에서 들었거나 아니면 직접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이 호러에서 애용되는 것 같다. <잔예>도 비슷했는데 이 작품은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묘사하는 암시가 있어서 참 신경 쓰이게 만든다. 이게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소름 끼치는 상상으로 발전할 수 있으니 살짝 각오가 필요한 부분일 것 같다.


 내 경우에는 이러한 작가 개입 요소가 다소 난잡하게 느껴졌다. 의도는 알겠는데 - 혹시 진짜였는지도 모르지 - 그게 너무 티나니까 문제인 것이다. 공포에 대한 감상과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그다지 신용할 수 없는 얘기일 순 있음을 명심하길 강조하고 말하건대, 작품은 괜히 무서움을 억지로 쥐어짜내려는 듯 군더더기를 붙이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다.

 출판사의 의뢰를 받은 작가가 6편의 호러 단편 소설을 집필하고 그걸 엮어 책으로 펴내려고 한다. 그때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는 막간에 기존 단편 소설을 둘러싼, 작가와 편집자에게 닥친 기묘한 일을 그리고 있다. 이 막간의 이야기를 다른 소설 6편과 별개의 이야기로 읽는가, 아니면 연관 지어서 읽어 새로운 차원의 공포를 느낄 것인가. 소설은 구성적인 면에서 풍성함을 추구하고 있지만 솔직히 본편인 단편 소설들이 시시한 내용이라 잔재주를 부린 게 아닌가 싶다.


 첫 번째 단편인 '죽은 자의 테이프 녹취록'은 신선하고 좋았다. 자살을 앞둔 사람들이 남긴 녹취 테이프는 적잖이 공포를 자극했다. 특히 각각의 테이프의 내용에 공통된 미스터리가 있는 게 오싹했다. 하지만 공포 소설 특유의 허무한 결말은 사람 맥빠지게 만들었고 이 결말이 나중에 막간과 이어진다는 게 드러났을 땐 놀랍지 않고 지겹기만 했다. 나머지 단편은 솔직히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범작이라 언급할 기운도 나지 않는다.

 작가 개입 형식의 호러 소설은 나름 괜찮은 설정이라 생각하지만 이 책에서는 너무 기운 빠지고 싱거우면서도 다소 헐겁게 다뤄진 것 같다. 차라리 첫 번째 단편만 집중적으로 살려서 가령, '자살을 결심한 주인공이 우연히 죽은 자의 녹취 테이프를 듣는데 그게 최근 자신을 둘러싼 기이한 현상에 대한 힌트로 이어지면서...' 라는 식으로 풀어나가도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다양한 괴담과 그에 얽힌 미스터리, 그리고 괴담을 다루는 작가와 편집부에 닥친 위기가 읽기 지겨운 만큼 보다 본격적인 장편 호러가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귀신 이야기에 그닥 흥미가 없어서 작품의 매력이 덜 와 닿은 것인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나는 집단에서의 개인이 겪는 소외감, 자아의 말살, 아니면 사이코패스의 태동 등 현실적인 차원의 일들에 공포를 느끼는 편이라 미쓰다 신조의 이 소설이 나와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미쓰다 신조의 추리소설은 어떨까? 그걸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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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로봇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우리교육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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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최근에 '3대 SF 거장' 중 한 명인 하인라인의 <여름으로 가는 문>을 읽었는데 이번엔 3명의 거장 중 다른 한 명인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을 읽었다. 윌 스미스 주연의 SF 영화로 유명한 <아이, 로봇>의 원작 소설인데 내용은 전혀 다르다. 영화는 소설의 중요 소재인 '로봇의 3원칙'을 바탕으로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를 만들었을 뿐, 로봇에 대한 다양한 사유로 점철된 소설엔 미치지 못한다. 물론 사람마다 감상은 다르겠지만, 무려 50년의 세월이란 차이가 있는 소설과 영화 중 나는 소설 쪽이 훨씬 혁신적이고 신선해마지않았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정립한 '로봇의 3원칙'은 너무나 유명해 후대의 SF 작가가 로봇을 등장시키는 모든 창작물에서 대놓고 사용할 정도라고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원칙 :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인간을 모른 척해서도 안 된다.


 제2원칙: 제1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제3원칙: 제1원칙과 제2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로봇은 로봇 자신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많은 로봇 소설을 읽은 건 아니지만 만화 <플루토>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확실히 영향력 있고 유명한 3원칙이라 보자마자 반가울 정도였다. <아이, 로봇>은 3원칙 아래에 놓인 인공지능 로봇들이 등장하는 연작소설로 수잔 캘빈 박사와 로봇 조사관인 파웰과 도노반의 로봇 관찰기를 그리고 있다. 내용의 주된 패턴은 특이한 행동을 보이는 로봇이 등장하고 그 로봇들의 행동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특이한 행동은 위의 3원칙 중 두 개 이상이 서로 충돌해 보이는 오류에서 기인한 만큼 소설만의 독특한 재미를 보장해 참 기발하게 읽혔다.

 SF 소설의 하위 장르에 속할 로봇 소설을 이 작품으로 처음 접한 셈인데 아마 이 작품이 정수를 보여주지 않았나 싶다. 이 작품의 모든 놀라운 점은 전부 60년 전 작품이란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 특유의 유머나 감성은 물론이거니와 추리나 반전의 형식을 띤 서사도 아주 반색하게 만들었다. 듣자 하니 아이작 아시모프는 SF 소설말고도 <흑거미 클럽>이라는 추리소설도 집필했다는데 이 작품만 읽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자 스스로가 만든 '로봇 3원칙'이란 규칙 안에서 황당하면서도 의외의 반전을 이끌어내는 동시에 당초 노렸을 인공지능에 대한 고찰도 부족함 없이 그려내는 등 균형감이 상당했다.


 하인라인의 작품도 참 좋았지만 난 아시모프의 작품을 읽고 비로소 SF에 빠져든 것 같다. 몇 번이나 하는 얘긴지 모르겠는데 이제야 SF의 매력에 반했다. 아니면 아시모프의 매력에 반했는지도 모르지. 특유의 미래를 상상하는 세계관과 기존 윤리에 대한 끈임없는 질문이 하나부터 열까지 내 뇌를 자극시키는 느낌이 든다. SF를 찾는 이유로 이보다 더한 것이 필요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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