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미나토 가나에 지음, 오유리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9.8








 미나토 가나에의 <망향>을 두고 '<고백>의 그늘에서 벗어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데뷔작에 가려져 후속작이 빛을 보지 못하는 아주 대표적인 작가인 미나토 가나에에게 있어 아주 의미 있는 얘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위 얘기에 동의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고백>과 어깨를 견주는 후속작을 읽었기 때문이다. 7년 전에 읽은 <소녀>는 다시 읽은 지금도 그렇게 느껴졌다.

 <고백>의 파급력은 어마어마해서 이후 작가의 후속작 또한 거의 대부분 출간됐다. <속죄>, <야행관람차> 등 여러 작품을 비교적 빠른 시일 안에 접할 수 있었는데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고백>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부터 드는 작품들이었다. <소녀>는 그 중에서 유일한 수작으로 다시 말하자면 <고백>에 준하는 완성도를 자랑했다.


 작가 특유의 독기가 살짝 빠진 대신에 소녀들의 우정을 그린 점, <고백>과 다르지 않게 1인칭 화자 두 명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진행되는 점, 민감하고도 민감한 일본의 서브 컬쳐인 '소녀' 설정이 한껏 차용된 점이 이 작품이 평가절하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반대로 말하면 방금 언급한 3가지 점을 특별히 개의치 않는다면 꽤나 볼거리가 풍성한 작품이다. 여름방학 전에 학교에서 영화를 시청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유키와 아쓰코, 두 인물의 소개와 더불어 각각의 시점에 따른 심리 묘사까지 완벽하게 해내 안정적인 도입부를 선보인다. 두 주인공이 '사람이 죽는 순간을 보고싶다'는 아무리 터부시해도 모자랄 기막힌 바람을 품는 것도 개연성 있었고 다음과 같은 바람을 여름방학 동안 이루고자 행동에 옮기는 일련의 전개는 전혀 예측불허해 상당히 긴장하면서 읽어나갔다.


 일본에서 '소녀'를 다룬 소설가라고 하면 <내 남자>로 유명한 사쿠라바 가즈키가 먼저 떠오른다. 미나토 가나에의 <소녀>는 그 작가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녀를 묘사하는데 허상에 젖지 않고도 치기 어리다가도 깨달음을 얻는 모습을 그려내는 게 전혀 오그라들지 않았다. 지독한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둔 유키, 유망한 검도 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진로가 좌절된 아츠코를 통해 어렸을 때 입은 상처가 얼마나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치는가 확실히 깨닫게 해준다. 이러한 설정은 순전히 호기심이긴 해도,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죽는 순간을 목격하고 싶은' 두 소녀의 바람을 생각만큼 가볍지 않게 다루는 조화를 부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작품 근간에 도사린 긴장감과 복선들 - 비록 그 전말을 무난하게 예측할 수 있었지만 각각의 요소가 교묘히 이어진 점은 읽을수록 감탄스러웠다. - 이 종잡을 수 없는 재미를 선사하는데 그럼에도 '시크릿 청춘 소설'이라는 출판사의 홍보 문구가 무색하지 않게 실제로 청춘 소설적인 작풍과 잘 어울려 색다른 감상을 이끌어낸다. 다름 아닌 미나토 가나에가 시도할 법한 독한 청춘 소설로서 그 위치는 잔혹한 복수극인 <고백>과는 판이한 구석이 있다.


 개인적으로 충격적이고 슬픈 경험으로 하여금 뭔가 으스대고 싶은 심정은 정말 공감이 갔다. 그 심정은 나 역시 유키와 아쓰코처럼 학생 시절에 유독 심했었는데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하면 미나토 가나에의 솔직한 묘사는 아주 인상적이기 이를 데 없었다. 가식도 허구도 없이 그 나이대 소녀들의 실상을, 원조 교제나 가짜 성추행을 구실로 어른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는 등 착잡하고 악독한 모습도 서슴지 않고 들춰내 괜한 판타지를 꿈꾸는 것을 원천 봉쇄해버린다.

 바로 여기까지만 얘기했더라면 <고백>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소설이었겠으나 이 작품은 우정이란 요소를 도입해 감동을, 하지만 신파와는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연출한다. '요루의 외줄타기'라는 가상의 소설로 하여금 친구를 위하는 진심 어린 마음을 생각함과 동시에 그 마음이 엇나가 오해를 사고 일이 꼬여 자기 틀에 더욱 갇히는 비극적 전개를 덧붙여 이 작품만의 남다른 목표의식을 설정해낸다. 이 설정은 분명 차가움과는 거리가 멀어 작가에 대해 신선한 인상으로 이어진다.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 단편집인 <망향>도 나쁘지 않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작가의 잠재력을 보여준 작품은 <소녀>라고 생각한다. 끝을 달리는 독한 작풍에 그치지 않고 플러스 알파적인 우정과 화해가 그려져 뒷맛이 비교적 깔끔했다. 인과응보적 마무리도 상쾌하면서도 섬뜩하기 그지없었는데 이 아이러니야말로 이 작품의 매력 그 자체란 생각이 들었다.


 p.s 유키가 쓴 '요루의 외줄타기'는 한 번 읽어보고 싶다. 작가가 글을 잘 쓰긴 하지만 '요루의 외줄타기'의 일부 내용은 읽자마자 눈이 번쩍 뜨일 정도니 말이다.

벼랑 끝에 몰린 자기 실상을 가장 보이고 싶지 않은 상대가 바로 같은 집단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란 걸, 그 중에서도 또래 친구들이란 사실을 어른들은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 7~8p




네가 그렇게 불행하다고 한다면 나와 너의 인생을 지금 송두리째 바꾸어 줄게. 그 제안에 일말의 저항이라도 느낀다면 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아닌 거야. - 2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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