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6.8





 소설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작풍이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어떤 나라의 작가가 쓰느냐에 따라 암묵적으로 구분되어지기도 한다. 내가 주로 보는 일본, 미국, 프랑스 소설로 예를 들자면 일본은 음침하고 끈적하며 미국은 투박하고 프랑스는 돌아이다. 그래서 같은 장르 같은 키워드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가의 국적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가 될 수 있겠다.

 난 일본의 추리소설, 나아가 대부분의 일본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일본 소설이라고 모조리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소설가가 가지고 있는 작풍에도 으레 그렇듯 장단이란 게 있기 마련이다. 장점은 인간의 이상 심리를 잘 파고든다는 것이고 단점은 이상 심리에 너무 파고들어 읽기 버겁다는 것이다. 거의 맞닿아 있는 이 두 가지 요소는 복어의 독과 같은 것인데 정말이지 정도에 따라서 호불호가 극심히 갈리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추리소설에서 인간의 이상 심리는 제법 잘 어울리는 소재다. 이상 심리를 가진 자가 곧 범죄를 저지른다는 도식은 편협한 발상이긴 하지만 써먹기 쉬운 부분이 있어 곧잘 등장하는 것 같다.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사각>에서는 관음증을 시작으로 여러 이상 심리가 다뤄진다. 그리고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 그렇듯 너무 자폐적인 구석이 짙어 중간부터 억지로 읽고 말았다. 그놈의 서술 트릭 때문에.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을 읽으면 정말이지 누가 뭐라 해도 일본의 소설가란 생각이 든다.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증세를 보면 일본인이 아니면 이런 극단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없을 것만 같다. 차라리 서술 트릭보다 이런 이상 심리 묘사야말로 작가의 장기라고 치켜세우고 싶을 정돈데 몇 번이고 말하지만 도가 지나쳐 인물의 증상 자체에 지대한 관심이 없다면 지루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처럼 서술 트릭을 이용한 반전이 궁금하다면 참고 견뎌낼 만하다.


 작가의 작품 중 <원죄자>라는 작품이 있다. 무려 118회 나오키상 - 수상작은 없었다고 한다. - 의 최종 후보작이었다. 수상을 못한 이유는 추리소설다운 반전에 집착하는 양상이 작품성을 해쳤기 때문이라고. 나도 괜찮게 읽고 있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 고개를 끄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 비판은 오리하라 이치의 다른 작품에도 대체로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오리하라 이치만큼 서술 트릭에 천착하는 작가도 없다. 그래서 기대하고 읽어보면 막상 내용은 서술 트릭 같은 건 없이도 충분히 흥미롭다. <도착의 사각>은 관음증을 가진 번역가인 주인공이 어느 날 맞은 편 집의 창문을 엿보다 여자가 목 졸려 죽은 모습을 보고 정신병이 생기며 시작되는 내용이다. 이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한데 작가는 욕심을 부려 기어코 서술 트릭 반전을 행사한다. 트릭은 트릭대로 놀랍긴 하지만 결국 이런 반전을 위해 풀어냈을 뿐인 이야기라고 하니 읽은 입장에선 맥이 풀려버린다.


 이 책의 경우엔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어 일일이 뜯어서 읽어야 했는데 봉인된 내용이 너무 막장이라 시큰둥했다. 서술 트릭을 시험하기 위해 시작된 작품이었겠지만 노선 자체가 허무한 경향이 있어 범인 - 흑막이라 불러야 옳을까. - 의 동기가 퇴색된 것 같다. 추리소설 중엔 소재가 정말 좋지만 추리소설의 장르적 틀에 갇혀 잠재력이 미처 개화하지 못한 경우가 있는데 이 작품이 그에 해당할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 작품에 실망한 것에 비해 엄청 띄워주고 있는 게 아닌가 반문이 들 정도다.

 '도착' 시리즈의 첫 번째 <도착의 론도>를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 시리즈 2편을 읽었다. 시리즈 3편인 <도착의 귀결>을 언제 읽을지, 아니, 읽긴 할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읽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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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라 불린 남자 스토리콜렉터 58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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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난 사형 제도를 찬성한다. 죽음이 사건 해결의 전부가 될 수는 없고 사형 집행자에게 큰 심적 고통이 뒤따른다 할지라도, 설령 잠정적 범죄를 잠재우는 효과가 그리 뛰어나지 않다 하더라도 나는 사형 제도를 찬성한다. 단 한 명이라도 무고한 사람이 사형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건 사형의 모순이 아닌 경찰 수사상의 실수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선 기막힌 행운아가 등장한다. 부모를 죽인 죄목으로 곧 사형당할 처지의 멜빈에게 '자수한 사람이 있어 집행을 잠정 보류'한다는 통보가 내려온다. 자신이 하지도 않은 일을 자신이 감옥에 들어가기 전은 물론이고 들어오고 나서의 20년 동안에도 한 번도 듣지 못한 이름의 남자가 자신을 구하고 만 것에 멜빈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인 데커에게도 마찬가지다.


 전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 에이머스 데커는 처음 접했는데, 참 불우한 남자가 아닐 수 없다. 가족을 끔찍한 범죄에 의해 전부 잃었는데 하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잊지 못하는' 증상을 앓는 터라 가족이 살해당한 모습을 계속 끌어안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악몽 속을 걷고 있는 이 남자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기막힌 행운아인 멜빈의 이야길 듣고 석연치 않은 무언가를 감지한 데커는 멜빈의 이야기 속에 등장한다.

 보통은 다른 작품의 엔딩이어도 무방할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니 특이했던 작품이다. 처음엔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이려나 싶었는데 막상 읽으니 꼭 그렇진 않았다. 멜빈과 멜빈의 부모에게 닥친 어마어마한 비밀을 파헤치는 이야기로 사형수 이야긴 곁다리에 불과했다. 이 부분은 좀 아쉬웠다. 사형 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논란을 건드리는 사회파적 시선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에서 말한 '단 한 명이라도 무고한 사람이 사형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건 사형의 모순이 아닌 경찰 수사상의 실수에 가깝기 때문이다.' 라는 말에 대한 번복은 다음으로 미뤄둬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 끝날 듯 끝나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에 몰입도가 점점 떨어졌고 전작을 읽지 않은 탓인지 몰라도 주인공인 데커가 그리 인상적으로 다가오진 않았다. 전체적으로 활약은 컸는데 행동의 당위성이랄지 목적의식이랄지 아무튼 약간 뜬구름 잡는 경향이 있었다. 이야기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종 차별 키워드도 아주 심도 있게 다뤄졌던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나쁘지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이야기의 설정과 전개를 위해서 동원된 필연적인 소재란 느낌이 들었다. 딱 서양식 스릴러가 추구하는 수준의 깊이만 갖췄을 뿐이었다. 나라가 다르면 작품이 얼마나 달라질까 싶지만, 바꿔 생각해 일본 작가, 그것도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가 썼다면 어땠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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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수업
아니샤 라카니 지음, 이원경 옮김 / 김영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9.8






 누가 나보고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나는 절대 아니라고 대답한다. 난 지금이 좋다. 지금이란, 대학에 다니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자발적으로 열심히 하는 생활을 일컫는다. 이런 생활은 고등학생, 아니, 중학생인 시절부터 그토록 꿈꾸던 것이었다. 때문에 다시 하릴없이 입시를 위해 원치 않는 공부도 해야 했던 그 시절로는 가급적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당시에 하던 공부가 전부 대학 입시로 귀결되던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부질없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좋아하는 과목 - 대체로 윤리, 역사, 외국어에 속하는 과목들이었다. - 을 제외하면 점수는 간신히 낙제만 면하는 정도였는데 이는 흥미가 동하지 않으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 천성 탓이 크다.


 입시를 위한 성적과 결과 만능주의로 점철된 우리나라 교육계는 정말이지 들여다볼수록 가관인 세계다. 교육이 본래 지녔을 숭고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 보니 그런 교육 환경 아래서 학청 시절을 보낸 나에게 있어서 재밌어서 배운다거나 재밌어서 가르치는 드라마 같은 얘기는 영 낯설게 들리기만 할 뿐이다.

 <화려한 수업>의 주인공 애나는 아이비리그를 졸업하자 자기 평생의 꿈인 교사가 되겠다고 부모에게 선언한다. 명문대를 졸업한 딸이 기껏 한다는 말이  '선생질'을 하겠다는 게 '실망'스러운 그들은 결국 애나의 가출과 더불어 반쯤 의절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후 애나는 운 좋게 명문 사립학교에 교사로 취임하고 그토록 바라던 교육계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부푸는데...


 주인공 애나는 이상을 믿고 나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순진해 빠진 인물을 조롱하듯 현실은 애나에게 환멸을 안긴다. '다이아몬드' 수저인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 랭던홀은 뇌물이나 다름없는 학부모들의 유지비에 적셔진 곳으로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관심사는 오직 좋은 대학으로 갈 수 있는 성적뿐이다. 성적을 좋게 받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되는데 돈이 많은 사람들의 사고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학교 숙제에 가격을 매겨 사람을 매수한다. 이른바 '과외 선생'이라고, 자녀의 숙제를 대신할 사람을 말이다.

 이 작품은 이상주의자 신입 교사 애나가 교육계의 현실에 지쳐 타락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다시 이상을 위해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표지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작풍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칙릿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실제론 교사였던 작가의 경험에 기반을 둔 날카로운 사회 비판 소설이었다. 선진국의 교육계가 이렇게 막장일까 싶은데 상위 1%라고 하니 어쩐지 납득이 갔다. 그 납득엔 절망과 박탈감이 뒤따랐다.


 칙릿 소설 특유의 화려한 작풍은 본편의 참담한 내용을 이완시키는 역할을 해준다. 교육자로서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할수록 학생과 학부모가 반발하는 것을 보고 상처를 받은 애나는 자신의 경제적, 감정적 결핍을 돈과 화려한 생활로 채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즈음, 애나의 충동을 비집고 들어온 과외 선생 제안은 그녀의 타락에 발동이 걸리게 만든다. 놀랍게도 이 타락의 과정이 은근히 유쾌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지는데 점점 무뎌지는 애나의 양심을 의식하며 읽는다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 대목이다.

 무시할 수 없는 돈의 힘으로 자녀들의 학력을 사고 - 모든 성적이 그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과외 선생'을 뒀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면 학력을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렇게 자란 자녀들이 나중에 자기 자식들에게 똑같이 되풀이하는 악순환은 이미 막을 수 없는 흐름인지 모른다. 그 흐름을 거스르려다 상처를 입은 애나는 반작용으로 학생의 숙제를 대신해주는, 양심은 팔려도 막대한 돈이 들어오는 일로 위안을 삼거나 자기 처지를 합리화하기에 이른다.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단순히 사회 비판을 하는 것에 그쳐도 괜찮을 뻔했지만 - 참담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 이 책은 대안을 마련하기까지 해 놀라운 여운을 선사한다. 아이들의 학업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어른들의 가치관과 교육계의 빈틈을 돈으로 파고들어 어처구니없이 좋은 성적을 취득하는 세태에 해결 방안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정말 간단하면서도 괜찮은 방안을 제시해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지식 습득이 다가 아니라 다방면의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이고 인지하는 능력 또한 기르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애나의 성장은 눈여겨볼 만한 것이었다. 순진했어도 학생을 가르치는 보람을 추구했던 애나가 점차 학생들을 등지고 돈과 명품을 쫓는 과정은 교사의 존재 의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과외 선생의 도움 없이 학생들 자체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던 수업 시간 동안의 작문 시험은 애나가 알려고 하지 않은 아이들의 교육 수준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과외 선생이 모든 일을 대신하다 보니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던 아이들은 어떻게 보면 돈의 진정한 피해자라 할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이 허울만 좋게 좋은 학교에 가봤자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어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미성숙한 가치관이 형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로는 아이들이나 그들 부모는 아주 악역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교육계의 부정한 흐름이 낳은 씁쓸한 현상이니까.

 교육의 참된 기능과 그에 종사하는 교육자의 됨됨이에 대해 묻는 이 작품은 비밀스럽고 부정한 사교육을 통해 비판과 교훈을 동시에 취한다. 사교육이 개입하기 어려운 수업 시간 동안의 시험과 공부를 통해 - 숙제는 일절 없다. 따라서 과외 교사는 수업 시간에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학생을 '교육'시켜야 한다. - 교육계의 그늘에 반기를 들며 끝나는 애나의 의야기는 결국 흔한 불가사리 이야기에 불과한지 모른다.


 흔한 불가사리 이야기란, 파도에 휩쓸려 모래사장에 나온 불가사리들이 햇빛에 쪄죽으려고 하는데 이때 한 아이가 불가사리를 바다에 도로 던진다. 아이를 지켜보던 어른이 그래봤자 모든 불가사리를 구할 수 없다고 만류하는데 아이는 '그래도 방금 던진 불가사리는 살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이 불가사리 이야기 덕분에 적잖은 여운과 해피엔딩의 산뜻함을 느끼며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완벽한 해결보다 최선의 행동이 좋은 결말이자 결말 이후의 즐거운 상상으로 이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결과 만능주의가 팽배한 현 교육계의 이념과 대비되는 종류의 결말이라 더욱 남달랐다. 최선의 이야기란 그토록 즐겁고 가슴 벅차게 다가왔다.

내가 이 학교에서 부도덕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학생들과 선생들은 내게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 185p




진짜로 돈밖에 모르는 게 뭔지 말해줄까요? 가정교사를 고용해서 자기 자식한테 숙제에도 가격이 있다고 가르치는 거예요. - 370p




스스로 그만두는 사람을 해고할 수는 없어. - 412p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권리로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기를 기대하는 걸까요? - 433p




‘그만둬라, 꼬마야.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니? 너무 많아. 어차피 전부 돌려보낼 수는 없어.‘

하지만 그 소년이 말하길......

제가 방금 던진 불가사리는 살 수 있죠. - 435~4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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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 어지러이 나는 섬 작가 아리스 시리즈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최고은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7년 1월
평점 :
품절


8.8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을 읽으면 꼭 추리소설의 탈을 쓴 다른 소설을 읽는 기분이 들곤 한다. 분명 틀과 형식은 추리소설이 맞는데, 이를 테면 '범인 찾기' 류의 전형적인 추리소설인데 막상 읽으면 범인의 정체보다 범인이 왜 이런 짓을 했는지 동기를 궁금해하니 어딘지 본격 소설로 느껴지기도 한다.
 '옛날에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적이 있어서' 임상범죄학자가 된 히무라 히데오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작가 아리스' 시리즈는 유독 범인의 심리를 깊이 탐구하는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런 경향을 무척 좋아한다. 동기가 빈약하거나 안일하게 채워넣는 추리소설보다 훨씬 낫다. 난 이런 인간미가 있는 추리소설이 좋다. 설령 추리소설로써 완성도가 떨어진다 느껴질지라도.

 이 작품이 일본 어느 추리소설 랭킹에서 1위를 했다는데 솔직히 많이 의아하다. 나름 괜찮은 작품이긴 하지만 어디서 1위할 정도의 작품은 아니다. 2007년도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에서 1위라... 책 앞표지에 적힌 이 과분한 기록이 이 작품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까마귀 어지러이 나는 섬>은 단순히 형식이나 기록으로 가늠할 수 있는 추리소설이 아니다. 이른바 관점이 다른 추리소설인 것이다. 외딴 섬에 발을 잘못 들인 히무라와 아리스, 그들은 섬의 불청객으로서 먼저 모인 사람들의 모습에 그냥 넘길 수 없는 수상함을 감지한다. 이 수상함은 작품의 메인 미스터리로써 후에 등장할 연쇄 살인을 저지른 범인의 정체보다 궁금증을 낳는다.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이런 외딴 섬에 모인 걸까?

 보통 저런 질문은 큰 궁금증을 안기기 전에 진즉에 드러나기 마련인데 이 작품에선 끝까지 작품을 읽게 하는 원동력으로써 활약한다. 살짝 삐딱하게 말하자면 본말전도라고 해야 할까? 본말전도든 뭐든, 중요한 건 이 작품의 저자가 바로 아리스가와 아리스라는 것이다. 본편인 범인 찾기보다 더 궁금한 미스터리라는 게 있을 수 있는 건가? 다 읽은 지금도 얼떨떨할 지경이다.

 작가 특유의 사유는 이 작품에서도 건재했다. 서브 컬쳐, 복제 인간, 그리고 에드거 앨런 포. 하나의 작품을 쓰기 위해 이 많은 이야기가 들어갈 수 있고, 또 이런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한 작품에 모일 수 있는 건가 싶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그걸 해낸다. 이게 추리소설의 몰입도는 떨어뜨리는 부분일 순 있어도 작가가 지향하는 깊이와 고상함의 측면에선 제 역할을 해낸다.


 다시 말하지만 이 작품은 특이해도 정말 특이한 추리소설이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작품이 대체로 그렇지만 기나긴 분량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하고 신속하게 해결되는 사건의 양상은 몇 번을 생각해도 허무하다. 여기서 웃긴 건 범인의 정체나 동기가 크게 궁금하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은 내 자신과 그런 자신의 반응을 유도한 소설의 짜임새다. 그래서 신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없진 않았다는 것이, 허무한 한편으로 작중에서 오간 이야기들이 아른거린다는 것이.

 취향은 좀 타도 확실히 대체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작가가 아닐 수 없다. 드문드문 신작이 번역되는데 조금만 더 자주 출간됐으면 좋겠다. 크게 재밌다고 하긴 힘들지만 은근히 끌리는 맛이 있다.



 p.s 위에 옮긴 '인상적인 구절'은 본편과 크게 상관은 없지만 참 괜찮은 구절이라 생각한다. 작가의 겸손한 말은 이래저래 공감이 많이 갔다.

불특정다수와 자신을 대치시키며 ‘그 어떤 독자보다 내가 똑똑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작가가 있다면 뇌파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 착각은 자존심이라고 표현할 수도 없다. - 28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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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8.8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유머 단편집을 다 읽었다. <흑소소설> , <독소소설>과 마찬가지로 <괴소소설>까지 두 번 읽었다. 내가 처음 접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인 만큼 두 번째로 읽어도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땐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소설가인 줄 모르고 읽었는데 지금 와서 읽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더군다나 작가의 작품 중 몇 안 되는 '작가의 말'이 수록되기까지 했으니 보다 만족스럽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울컥전차'


 내가 지하철을 안 타는 이유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 소설. 버스도 만원일 땐 끔찍하지만 지하철은 더 삭막하다고 생각한다. 자리에 앉는 것에 그토록 많은 신경전이 있고 다들 속으로 얼마나 남을 헐뜯는지 그 이면을 낱낱이 파헤친 작품. 다루는 군상이 한둘이 아니라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다. 다시 읽어도 참 재밌었고 결말이 특히 예술이었다. 덧붙여서 이번에 한 가지 더 느낀 게 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옛날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이다. 은근히 저평가를 당하는 작가지만 옛날부터 - 이 소설집은 1995년에 출간됐다. - 폭넓은 시야를 갖고 있었다며 감탄했다.



 '할머니 골수팬'


 소위 '덕심'이란 게 이렇게나 무서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 자신의 부모님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작가 특유의 관찰력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가볍지만 때론 오싹하게 읽혔다.



 '고집불통 아버지'


 영화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에서도 자식을 야구 선수로 키우려고 자기 일인양 나서는 아버지가 나오는데 일본엔 이런 아빠가 많은가 보다. 사실 자기 꿈을 자식에게 투영시키는 것은 굉장히 폭력적인 행위인데도 엄연히 사적인 영역이므로 뭐라 건드리지 못하겠는 안타까움이 물씬 베어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막판이 그렇게 짜릿했나 보다.



 '역전동창회'


 작가 본인의 말에 따르면 교사 직업군에 있는 사람을 무척 싫어한다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짧은 글임에도 그 감정의 깊이가 전해졌다. 이 작품은 그런 작가의 기획 동기와는 무관하게 제법 씁쓸해서 웃긴 코미디 소설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동창회 같은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터라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덩달아 땀이 났다.



 '초 너구리 이론'


 지금 보니 나의 과학관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 후에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을 읽으면서 보다 개념이 확립되긴 했는데 그래도 시초는 히가시노 게이고다. 아무리 비과학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다면 그건 과학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법 주문도, 투명 망토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귀신 이야기에도 다 해당이 되는 얘기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따르면 과학자야말로 그런 세상의 과학적 상식이 깨지길 가장 기대하는 사람이란다. 이 소설은 그런 관점에서 작성된 황당하지만 논리적인, 그러나 안쓰러운 작품이었다.



 '무인도의 스모 중계'


 과거의 스모 중계를 통째로 외우는 전문가와 함께 무인도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 유일한 여흥으로 전문가의 스모 중계를 듣는 것이라는 설정이 무척 재밌었다. 결말은 좀 싱거웠지만 표현 방식에는 복선이 있어서 그런대로 웃고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전문가가 주변에 있으면 되게 재밌겠다.



 '하얀 들판 마을 vs 검은 언덕 마을'


 어째 추리소설가가 쓸 법한 코미디 소설이었다. 배드 타운에 드리워진 문제를 꼬집은 것도 좋았고 사람들이 광기에 몰려 서로의 마을에 시체를 넘기는 정치적 움직임이 아주 장관이었다. 나중엔 익히 예상됐지만 처음에 소설의 전개를 보고 의외의 전개라서 헛웃음이 난 기억이 난다.



 '어느 할아버지 무덤에 향을'


 번지수를 잘못 찾은 소설. 하지만 제일 좋았다. 코미디 소설은 절대 아니고 오히려 SF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실험 대상이 되어 젊어졌다가 다시 노인이 된 주인공의 심리를 일기 형식으로 추적하는 내용으로 젊음이 되돌아온 환희와 다시, 그것도 급격히 늙어가는 것에 대한 절망이 아주 흡입력 있게 읽혔다. 작가는 단편으로 썼기에 만족스럽다 했지만 난 생각이 반대다. 장편으로 쓰기엔 약간 심플한 설정이지만 장편이기에 살릴 수 있는 내용도 있을 것이다. <독소소설>에 수록된 '속죄'와 느낌이 비슷했다. 코미디 소설집인데 아이러니하게 코미디 소설이 아닌 작품이 제일 좋았네.



 '동물가족'


 동물로 묘사한 인간상과 붕괴되는 가족의 모습이 융합한 소설. 이것도 웃음과는 거리가 있다. 작가 자신은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는데 충분히 납득이 간다. 시도가 신선하니 많이 접한 이야기도 새롭게 읽힌다. 결말도 인상적이었고. 너무 일본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묘사는 참 좋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블랙 유머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흑소소설>에서 밝혔지만 듣자하니 최근에 또 한 편의 블랙 유머 소설집을 펴냈다고 한다. 이 얘길 언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언제 출간하나 기다리고 있다. 작가 이름을 생각하면 출간되긴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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