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의 사각 - 201호실의 여자 오리하라 이치 도착 시리즈 2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6.8





 소설은 누가 쓰느냐에 따라 작풍이 천차만별이긴 하지만 어떤 나라의 작가가 쓰느냐에 따라 암묵적으로 구분되어지기도 한다. 내가 주로 보는 일본, 미국, 프랑스 소설로 예를 들자면 일본은 음침하고 끈적하며 미국은 투박하고 프랑스는 돌아이다. 그래서 같은 장르 같은 키워드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작가의 국적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감상 포인트가 될 수 있겠다.

 난 일본의 추리소설, 나아가 대부분의 일본의 소설을 좋아하지만 일본 소설이라고 모조리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소설가가 가지고 있는 작풍에도 으레 그렇듯 장단이란 게 있기 마련이다. 장점은 인간의 이상 심리를 잘 파고든다는 것이고 단점은 이상 심리에 너무 파고들어 읽기 버겁다는 것이다. 거의 맞닿아 있는 이 두 가지 요소는 복어의 독과 같은 것인데 정말이지 정도에 따라서 호불호가 극심히 갈리는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추리소설에서 인간의 이상 심리는 제법 잘 어울리는 소재다. 이상 심리를 가진 자가 곧 범죄를 저지른다는 도식은 편협한 발상이긴 하지만 써먹기 쉬운 부분이 있어 곧잘 등장하는 것 같다.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의 사각>에서는 관음증을 시작으로 여러 이상 심리가 다뤄진다. 그리고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 그렇듯 너무 자폐적인 구석이 짙어 중간부터 억지로 읽고 말았다. 그놈의 서술 트릭 때문에.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을 읽으면 정말이지 누가 뭐라 해도 일본의 소설가란 생각이 든다.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증세를 보면 일본인이 아니면 이런 극단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없을 것만 같다. 차라리 서술 트릭보다 이런 이상 심리 묘사야말로 작가의 장기라고 치켜세우고 싶을 정돈데 몇 번이고 말하지만 도가 지나쳐 인물의 증상 자체에 지대한 관심이 없다면 지루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나처럼 서술 트릭을 이용한 반전이 궁금하다면 참고 견뎌낼 만하다.


 작가의 작품 중 <원죄자>라는 작품이 있다. 무려 118회 나오키상 - 수상작은 없었다고 한다. - 의 최종 후보작이었다. 수상을 못한 이유는 추리소설다운 반전에 집착하는 양상이 작품성을 해쳤기 때문이라고. 나도 괜찮게 읽고 있다가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 고개를 끄덕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이 비판은 오리하라 이치의 다른 작품에도 대체로 해당되는 말이기도 하다. 오리하라 이치만큼 서술 트릭에 천착하는 작가도 없다. 그래서 기대하고 읽어보면 막상 내용은 서술 트릭 같은 건 없이도 충분히 흥미롭다. <도착의 사각>은 관음증을 가진 번역가인 주인공이 어느 날 맞은 편 집의 창문을 엿보다 여자가 목 졸려 죽은 모습을 보고 정신병이 생기며 시작되는 내용이다. 이것만으로도 흥미진진한데 작가는 욕심을 부려 기어코 서술 트릭 반전을 행사한다. 트릭은 트릭대로 놀랍긴 하지만 결국 이런 반전을 위해 풀어냈을 뿐인 이야기라고 하니 읽은 입장에선 맥이 풀려버린다.


 이 책의 경우엔 결말 부분이 봉인되어 있어 일일이 뜯어서 읽어야 했는데 봉인된 내용이 너무 막장이라 시큰둥했다. 서술 트릭을 시험하기 위해 시작된 작품이었겠지만 노선 자체가 허무한 경향이 있어 범인 - 흑막이라 불러야 옳을까. - 의 동기가 퇴색된 것 같다. 추리소설 중엔 소재가 정말 좋지만 추리소설의 장르적 틀에 갇혀 잠재력이 미처 개화하지 못한 경우가 있는데 이 작품이 그에 해당할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이 작품에 실망한 것에 비해 엄청 띄워주고 있는 게 아닌가 반문이 들 정도다.

 '도착' 시리즈의 첫 번째 <도착의 론도>를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안 나지만 아무튼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나 시리즈 2편을 읽었다. 시리즈 3편인 <도착의 귀결>을 언제 읽을지, 아니, 읽긴 할 것인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확신할 수 있는 건 작가의 다른 작품은 읽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글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