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소소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7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8.8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유머 단편집을 다 읽었다. <흑소소설> , <독소소설>과 마찬가지로 <괴소소설>까지 두 번 읽었다. 내가 처음 접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들인 만큼 두 번째로 읽어도 상당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땐 히가시노 게이고가 추리소설가인 줄 모르고 읽었는데 지금 와서 읽으니 느낌이 새로웠다. 더군다나 작가의 작품 중 몇 안 되는 '작가의 말'이 수록되기까지 했으니 보다 만족스럽게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울컥전차'


 내가 지하철을 안 타는 이유를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 소설. 버스도 만원일 땐 끔찍하지만 지하철은 더 삭막하다고 생각한다. 자리에 앉는 것에 그토록 많은 신경전이 있고 다들 속으로 얼마나 남을 헐뜯는지 그 이면을 낱낱이 파헤친 작품. 다루는 군상이 한둘이 아니라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 정도다. 다시 읽어도 참 재밌었고 결말이 특히 예술이었다. 덧붙여서 이번에 한 가지 더 느낀 게 있는데 히가시노 게이고가 옛날부터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았다는 점이다. 은근히 저평가를 당하는 작가지만 옛날부터 - 이 소설집은 1995년에 출간됐다. - 폭넓은 시야를 갖고 있었다며 감탄했다.



 '할머니 골수팬'


 소위 '덕심'이란 게 이렇게나 무서울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작품. 자신의 부모님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는 작가 특유의 관찰력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가볍지만 때론 오싹하게 읽혔다.



 '고집불통 아버지'


 영화 <불량소녀, 너를 응원해!>에서도 자식을 야구 선수로 키우려고 자기 일인양 나서는 아버지가 나오는데 일본엔 이런 아빠가 많은가 보다. 사실 자기 꿈을 자식에게 투영시키는 것은 굉장히 폭력적인 행위인데도 엄연히 사적인 영역이므로 뭐라 건드리지 못하겠는 안타까움이 물씬 베어있는 소설이었다. 그래서 막판이 그렇게 짜릿했나 보다.



 '역전동창회'


 작가 본인의 말에 따르면 교사 직업군에 있는 사람을 무척 싫어한다는데 '작가의 말'에 따르면 짧은 글임에도 그 감정의 깊이가 전해졌다. 이 작품은 그런 작가의 기획 동기와는 무관하게 제법 씁쓸해서 웃긴 코미디 소설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동창회 같은 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터라 등장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덩달아 땀이 났다.



 '초 너구리 이론'


 지금 보니 나의 과학관은,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은 히가시노 게이고에게 영향을 받은 듯하다. 후에 교고쿠 나츠히코의 소설을 읽으면서 보다 개념이 확립되긴 했는데 그래도 시초는 히가시노 게이고다. 아무리 비과학적으로 보일지라도 그게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다면 그건 과학이다.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마법 주문도, 투명 망토도, 우리가 흔히 접하는 귀신 이야기에도 다 해당이 되는 얘기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 따르면 과학자야말로 그런 세상의 과학적 상식이 깨지길 가장 기대하는 사람이란다. 이 소설은 그런 관점에서 작성된 황당하지만 논리적인, 그러나 안쓰러운 작품이었다.



 '무인도의 스모 중계'


 과거의 스모 중계를 통째로 외우는 전문가와 함께 무인도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 유일한 여흥으로 전문가의 스모 중계를 듣는 것이라는 설정이 무척 재밌었다. 결말은 좀 싱거웠지만 표현 방식에는 복선이 있어서 그런대로 웃고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전문가가 주변에 있으면 되게 재밌겠다.



 '하얀 들판 마을 vs 검은 언덕 마을'


 어째 추리소설가가 쓸 법한 코미디 소설이었다. 배드 타운에 드리워진 문제를 꼬집은 것도 좋았고 사람들이 광기에 몰려 서로의 마을에 시체를 넘기는 정치적 움직임이 아주 장관이었다. 나중엔 익히 예상됐지만 처음에 소설의 전개를 보고 의외의 전개라서 헛웃음이 난 기억이 난다.



 '어느 할아버지 무덤에 향을'


 번지수를 잘못 찾은 소설. 하지만 제일 좋았다. 코미디 소설은 절대 아니고 오히려 SF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실험 대상이 되어 젊어졌다가 다시 노인이 된 주인공의 심리를 일기 형식으로 추적하는 내용으로 젊음이 되돌아온 환희와 다시, 그것도 급격히 늙어가는 것에 대한 절망이 아주 흡입력 있게 읽혔다. 작가는 단편으로 썼기에 만족스럽다 했지만 난 생각이 반대다. 장편으로 쓰기엔 약간 심플한 설정이지만 장편이기에 살릴 수 있는 내용도 있을 것이다. <독소소설>에 수록된 '속죄'와 느낌이 비슷했다. 코미디 소설집인데 아이러니하게 코미디 소설이 아닌 작품이 제일 좋았네.



 '동물가족'


 동물로 묘사한 인간상과 붕괴되는 가족의 모습이 융합한 소설. 이것도 웃음과는 거리가 있다. 작가 자신은 이번 소설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라는데 충분히 납득이 간다. 시도가 신선하니 많이 접한 이야기도 새롭게 읽힌다. 결말도 인상적이었고. 너무 일본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묘사는 참 좋았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블랙 유머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흑소소설>에서 밝혔지만 듣자하니 최근에 또 한 편의 블랙 유머 소설집을 펴냈다고 한다. 이 얘길 언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언제 출간하나 기다리고 있다. 작가 이름을 생각하면 출간되긴 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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