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수업
아니샤 라카니 지음, 이원경 옮김 / 김영사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9.8






 누가 나보고 어렸을 때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으면 나는 절대 아니라고 대답한다. 난 지금이 좋다. 지금이란, 대학에 다니며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자발적으로 열심히 하는 생활을 일컫는다. 이런 생활은 고등학생, 아니, 중학생인 시절부터 그토록 꿈꾸던 것이었다. 때문에 다시 하릴없이 입시를 위해 원치 않는 공부도 해야 했던 그 시절로는 가급적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 당시에 하던 공부가 전부 대학 입시로 귀결되던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부질없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좋아하는 과목 - 대체로 윤리, 역사, 외국어에 속하는 과목들이었다. - 을 제외하면 점수는 간신히 낙제만 면하는 정도였는데 이는 흥미가 동하지 않으면 몸이 움직이지 않는 천성 탓이 크다.


 입시를 위한 성적과 결과 만능주의로 점철된 우리나라 교육계는 정말이지 들여다볼수록 가관인 세계다. 교육이 본래 지녔을 숭고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 보니 그런 교육 환경 아래서 학청 시절을 보낸 나에게 있어서 재밌어서 배운다거나 재밌어서 가르치는 드라마 같은 얘기는 영 낯설게 들리기만 할 뿐이다.

 <화려한 수업>의 주인공 애나는 아이비리그를 졸업하자 자기 평생의 꿈인 교사가 되겠다고 부모에게 선언한다. 명문대를 졸업한 딸이 기껏 한다는 말이  '선생질'을 하겠다는 게 '실망'스러운 그들은 결국 애나의 가출과 더불어 반쯤 의절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후 애나는 운 좋게 명문 사립학교에 교사로 취임하고 그토록 바라던 교육계에 종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감이 부푸는데...


 주인공 애나는 이상을 믿고 나아가는 인물이다. 그런 순진해 빠진 인물을 조롱하듯 현실은 애나에게 환멸을 안긴다. '다이아몬드' 수저인 자녀들이 다니는 사립학교 랭던홀은 뇌물이나 다름없는 학부모들의 유지비에 적셔진 곳으로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관심사는 오직 좋은 대학으로 갈 수 있는 성적뿐이다. 성적을 좋게 받으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면 되는데 돈이 많은 사람들의 사고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학교 숙제에 가격을 매겨 사람을 매수한다. 이른바 '과외 선생'이라고, 자녀의 숙제를 대신할 사람을 말이다.

 이 작품은 이상주의자 신입 교사 애나가 교육계의 현실에 지쳐 타락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다시 이상을 위해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표지를 비롯하여 전반적인 작풍이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같은 칙릿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는데 실제론 교사였던 작가의 경험에 기반을 둔 날카로운 사회 비판 소설이었다. 선진국의 교육계가 이렇게 막장일까 싶은데 상위 1%라고 하니 어쩐지 납득이 갔다. 그 납득엔 절망과 박탈감이 뒤따랐다.


 칙릿 소설 특유의 화려한 작풍은 본편의 참담한 내용을 이완시키는 역할을 해준다. 교육자로서 열정적으로 수업에 임할수록 학생과 학부모가 반발하는 것을 보고 상처를 받은 애나는 자신의 경제적, 감정적 결핍을 돈과 화려한 생활로 채우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즈음, 애나의 충동을 비집고 들어온 과외 선생 제안은 그녀의 타락에 발동이 걸리게 만든다. 놀랍게도 이 타락의 과정이 은근히 유쾌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지는데 점점 무뎌지는 애나의 양심을 의식하며 읽는다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 대목이다.

 무시할 수 없는 돈의 힘으로 자녀들의 학력을 사고 - 모든 성적이 그들이 생각하는 '훌륭한 과외 선생'을 뒀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면 학력을 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그렇게 자란 자녀들이 나중에 자기 자식들에게 똑같이 되풀이하는 악순환은 이미 막을 수 없는 흐름인지 모른다. 그 흐름을 거스르려다 상처를 입은 애나는 반작용으로 학생의 숙제를 대신해주는, 양심은 팔려도 막대한 돈이 들어오는 일로 위안을 삼거나 자기 처지를 합리화하기에 이른다. 이건 어쩔 수 없다고. 자신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단순히 사회 비판을 하는 것에 그쳐도 괜찮을 뻔했지만 - 참담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을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 이 책은 대안을 마련하기까지 해 놀라운 여운을 선사한다. 아이들의 학업에 지나치게 무게를 두는 어른들의 가치관과 교육계의 빈틈을 돈으로 파고들어 어처구니없이 좋은 성적을 취득하는 세태에 해결 방안이 있을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정말 간단하면서도 괜찮은 방안을 제시해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지식 습득이 다가 아니라 다방면의 문제를 해결함은 물론이고 인지하는 능력 또한 기르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애나의 성장은 눈여겨볼 만한 것이었다. 순진했어도 학생을 가르치는 보람을 추구했던 애나가 점차 학생들을 등지고 돈과 명품을 쫓는 과정은 교사의 존재 의의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과외 선생의 도움 없이 학생들 자체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던 수업 시간 동안의 작문 시험은 애나가 알려고 하지 않은 아이들의 교육 수준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과외 선생이 모든 일을 대신하다 보니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던 아이들은 어떻게 보면 돈의 진정한 피해자라 할 수 있다. 그런 아이들이 허울만 좋게 좋은 학교에 가봤자 얼마나 대단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어른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의해 미성숙한 가치관이 형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어떤 의미로는 아이들이나 그들 부모는 아주 악역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이건 교육계의 부정한 흐름이 낳은 씁쓸한 현상이니까.

 교육의 참된 기능과 그에 종사하는 교육자의 됨됨이에 대해 묻는 이 작품은 비밀스럽고 부정한 사교육을 통해 비판과 교훈을 동시에 취한다. 사교육이 개입하기 어려운 수업 시간 동안의 시험과 공부를 통해 - 숙제는 일절 없다. 따라서 과외 교사는 수업 시간에 시험을 잘 볼 수 있도록 학생을 '교육'시켜야 한다. - 교육계의 그늘에 반기를 들며 끝나는 애나의 의야기는 결국 흔한 불가사리 이야기에 불과한지 모른다.


 흔한 불가사리 이야기란, 파도에 휩쓸려 모래사장에 나온 불가사리들이 햇빛에 쪄죽으려고 하는데 이때 한 아이가 불가사리를 바다에 도로 던진다. 아이를 지켜보던 어른이 그래봤자 모든 불가사리를 구할 수 없다고 만류하는데 아이는 '그래도 방금 던진 불가사리는 살 수 있다'고 대답한다. 그런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이 불가사리 이야기 덕분에 적잖은 여운과 해피엔딩의 산뜻함을 느끼며 책장을 덮을 수 있었다. 완벽한 해결보다 최선의 행동이 좋은 결말이자 결말 이후의 즐거운 상상으로 이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는 결과 만능주의가 팽배한 현 교육계의 이념과 대비되는 종류의 결말이라 더욱 남달랐다. 최선의 이야기란 그토록 즐겁고 가슴 벅차게 다가왔다.

내가 이 학교에서 부도덕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학생들과 선생들은 내게 존경과 찬사를 보냈다. - 185p




진짜로 돈밖에 모르는 게 뭔지 말해줄까요? 가정교사를 고용해서 자기 자식한테 숙제에도 가격이 있다고 가르치는 거예요. - 370p




스스로 그만두는 사람을 해고할 수는 없어. - 412p




그렇다면 우리는 무슨 권리로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기를 기대하는 걸까요? - 433p




‘그만둬라, 꼬마야.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니? 너무 많아. 어차피 전부 돌려보낼 수는 없어.‘

하지만 그 소년이 말하길......

제가 방금 던진 불가사리는 살 수 있죠. - 435~43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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