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7 - 시오리코 씨와 끝없는 무대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1부 7
미카미 엔 지음, 최고은 옮김 / 디앤씨미디어(주)(D&C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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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시리즈가 후속편이 나오면서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독자로서 반가운 한편으로 처음 느꼈던 감동이 이전만 같지 않다는 이중적인 시선이 생김을 부정할 수 없다. 창작자 입장에서도 하나의 시리즈에 얽매여 창작의 재능을 소비하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닌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닌 듯하다. 문제는 박수치는 때는 알겠는데 떠날 때는 언젠지 애매하다는 것.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시리즈는 적절한 타이밍에 떠난 것 같다. 1권을 접한 게 5년 전인데 5년 동안 7권에 걸쳐 이야길 풀었으니 그간 벌려놓은 걸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고 떠난 셈이다. 솔직히 말하면, 5권에서부터 식상함 이전에 이해를 포기하게 되는 수집가들의 세계가 그려지면서 슬슬 완결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에 느껴졌던 시리즈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맛이 바래지는 것 같아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애정이 점점 식어갔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상 마지막 권을 다 읽으니 아쉬움은 감출 수 없었다.


 급결말은 아니고 말 그대로 깔끔하게 끝냈다. 시오리코와 다이스케 사이의 관계도 확실하게 결실을 맺었고 해피엔딩 특유의 여운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물론 그 해피엔딩에 이르는 과정에서 사건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 사건이 마지막 사건인 것에 비해 해결이 비교적 손쉽게 된 게 좀 허무했지만 그래도 작가가 우려한 것에 비해 이야기가 상당히 잘 풀리지 않았나 싶다.

 작가는 처음 이 시리즈를 구상할 때 고서점과 고서를 추리소설의 소재로 적합한가, 수수께끼 풀이 중심의 이야기에 적절히 활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들었다고 한다. 확실히 이전까진 이런 소설이 없긴 했으니까 작가 입장에선 참고 대상 없이 써내려간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블루 오션을 개척하려 한 사람의 도전은 역으로 피를 볼 때도 있지만 이 시리즈는 그야말로 블루 오션을 개척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비슷한 시리즈물이 많이 나왔지만 - 이를 테면 커피, 시계... 많기도 하다.;; - 이 시리즈만큼 소재가 전문적이고 또 미스터리와 자연스럽게 어울린 작품도 없던 것 같다. 게다가 라이트 노벨도 아닌 일반 소설의 영역 안에서 봐도 하자가 없다는 점을 주목한다면 이 시리즈가 사뭇 대단한 성과를 이룩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시오리코와 다이스케의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작가는 이 시리즈의 틀 안에서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도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그 생각이 담긴 결과물인 시리즈의 외전격인 책이 일본에선 출간됐다는데 아직 우리나라엔 소식이 없다. 하지만 별로 큰 걱정은 안 된다. 아마 올해 안에 번역 출간될 것 같으니까. 그 외전까지 읽고 1권부터 재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외전이 나오기 전에 재독을 시작할 것인가... 전자를 택할 확률이 높지만 아무튼 시리즈가 괜찮게 완결이 나 그저 다행이고 아쉬울 따름이다.



p.s 여행을 다녀오느라 읽은 지 3주가 넘도록 포스팅을 못 했는데 그렇다 보니 내용이 가물가물해 어딘가 미흡한 감상만 남기고 말았다. 쓰고 보니 묘하게 디스하는 글이 된 것 같은데... 재독할 땐 이런 우를 범하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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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냥 - 하 - 개정판
텐도 아라타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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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4






 과작이지만 내놓을 때마다 어마어마한 분량을 자랑하는 텐도 아라타의 작품을 읽는 건 거의 도전에 가까운 일이었다. 상권과 하권 총 합쳐서 1,560 페이지인데 2주간 힘겹게 읽어냈다. 다 읽고 난 지금에 와서야 하는 말이지만 이후에 읽은 3, 400쪽 책들이 너무 빨리 읽히고 있다.

 텐도 아라타의 작품이 힘겹게 읽히는 건 비단 분량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분량에 비하면 빨리 읽히는 편에 속한다. 하지만 가독성이 좋으냐고 물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아 고개를 좌우로 저을 것이다. 이 작가는 흔히 말하는 작가적 사명감을 안고서 집필에 임하는 작가라 다루는 내용이 하나같이 무겁다. 그런 작가 특유의 접근이 분량을 떠나서 독자의 호불호를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나는 처음엔 압도적인 불호였다. 너무 부담스러운 데다 오글거리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은 있는 대로 긁어 모아 퍼붓는 직설적인 문장들은 차라리 인문학에 가까웠는데 엄연히 소설의 형식을 띄고 있으니 불협화음처럼 느껴졌다.


 <영원의 아이>, <애도하는 사람> 때도 느꼈지만 이 작가는 큰 흐름 속에 존재하는 갖은 인생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커다란 결론으로 달려가는 글쓰기가 능하다. 중간에 산으로 가지 않고 끝장을 보는 끈기는 확실히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가 발견하고 고찰해낸 주제의식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교훈적이거나 동의를 강요하는 느낌을 주곤 해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는 스타일의 작가는 아니다.

 이 작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설은 아동 보호 센터의 직원 히자키 유코, 직업의식이 없는 교사 스도 슌스케, 힘든 가정사를 외면하기 위해 막장어린 짓에 손을 댄 형사 마미하라, 이렇게 세 명의 시점에서 진행된다. 일가족 살해 및 자살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중에 이들 세 주인공의 얘기가 진행되는데 도대체 각 이야기가 언제 접점을 이룰지 몰라 읽는 내내 답답했다. 평화니 전쟁이니 가족이니 폭력이니 아픔이니 하는 것들은 알겠으니까 제발 구체적으로 이야길 좀 진행시키자는 생각이 몇 번 들었는지 모른다.


 작가의 방대하고도 서서한 접근은 처음엔 가독성이 떨어졌고 중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차츰 작가가 원하는 바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묘하게도 계속 읽게 됐다. 단란할 줄 알았던 한 가정이 어떻게 망가지고 끝내 일가족 살해 및 자살로 치닫는지 살펴보기엔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으로써 괜찮은 진행이지 않았나 싶다. 등장 인물의 입을 빌린 작가의 설명이 어느덧 디테일한 심리 묘사로 발전해 사람을 참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히자키 유코나 스도의 부모님 같은 사람을, 특히 후자 같은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히자키 유코는 행동력에 있어 다소 무모한 경향이 있어 주위의 반감을 사는 인물이다. 그가 가진 사명감과 도덕적 기준이 바람직하다곤 생각하나 그런 신념 하나 믿고 독선적으로 밀고 나가는 건 안일한 사고방식이 아닌가 싶던 것이다. 자의식이 강하다거나 다른 사람을 깔보는 유형은 아니지만 의도치 않게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든다. 나의 이런 느낌엔 논란이 있을 듯하지만 섬세하긴 커녕 오그라드는 말이 앞서는 인물 묘사를 보노라면 입만 살았다고 반감을 가지는 등장인물들의 심리가 그렇게 와 닿을 수 없었다. 스도의 부모 같은 경우엔 난감할 정도로 융통성도 없고 독선적이기까지 해 내심 그 가치관, 꼭 실패하고 불행해지길 바라기도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작품이 단순히 입바른 소리만 해댔으면 애초에 완독하려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들이 가족에 대해 갖는 전근대적 가치관은 우리나라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 가치관에 전면으로 도전하는 듯 스도와 마미하라가 내면적 성장을 이루는 전개가 이뤄져 점점 몰입됐다. 작중에 그려지는 가족의 유형이 한둘이 아니라 뭐 하나 예로 꼽기가 쉽지 않은데... 어쩌면 균열이 일 운명이었을지 모를 가족상에 대해 작가가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는 터라 결말의 여운이 산뜻하게 다가왔다.

 반드시 이만큼 길었어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분량의 값어치는 뒤로 갈수록 해내고 있어 인내심을 갖고 읽길 추천한다. 뛰어난 서스펜스 드라마를 기대했다면 너무 진지한 이야기만 하는 내용을 보고 실망하는 건 당연한 일일 텐데 그래도 제법 갖가지 가족/소년 범죄를 총망라하고 있으니 사회파 추리소설의 틀을 벗어났다고도 하진 못하겠다. 아무튼 정서가 살짝 맞지 않아도 작가의 정성 하나만큼은 무지하게 티가 나기에 - 이제 와 말하긴 그렇지만;; - 작품을 이 이상 폄훼하기가 주저된다. 뛰어나게 문학적이진 않지만 방대한 전문성이 인문학 서적에 필적하는 만큼 관심 있는 사람은 읽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인생의 의미를 진지하게 묻지 않은 채 취직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부모가 되고...... 진정한 정신적 자립을 이루었다고는 말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렇게 부모가 된 사람은 가정을 자신의 인생을 긍정해 주는 곳으로써 원하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 상 583p




이유도 모르면서 그냥 불안해하거나 재미있어 하거나 나 몰라라 하는 건 어른이 할 짓이 아니지. - 상 693p




도저히 답이 안 보이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고민들을 당신도 짊어져 봐, 이 나라 구석구석에 있는 약자들의 고통을 자기 일처럼 짊어지고 걸어 보라고. 그러고 나서, 하지만 나는 이것밖에 할 수 없다고...... 조심조심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나는 좋아. - 하 528p




누군가한테 심각하게 생각해라, 생각하지 마라, 라는 소리 듣는 거, 너라면 받아들일 수 있겠니? - 하 6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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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크로스 미래과학 - 질주하는 상상 + 새로운 시선 + 위험한 논쟁
김보영 외 지음, 허정은 그림 / 우리학교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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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SF 소설, 혹은 해당 소재를 갖고 뭔가 소설을 쓰려고 하면 의외로 관련 자료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 어느 정도로 과학적 고증이 있어야 할 것인가, 일리가 있는 미래상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입 밖에 꺼내는 것만으로도 골치 아픈 일이다. 재밌는 일이기도 하지만 맨땅에 해딩하는 것만큼 무모한 짓도 없다.

 이 책은 SF 장르에 일가견이 있는 4명의 저자가 참여해 다양한 미래상과 과학 기술이 제시된다. 소설의 형식을 띄긴 했는데 간단하게 설정만 푼 창작 노트에 더 가깝다. 여담이지만 곽재식 작가의 경우엔 같은 주인공을 연달아 등장시키는 형식을 취해서 상당한 잔재미를 추구했는데 개인적으로 재밌게 읽었다.


 기본적으로 이 책에 나오는 설정들은 깊이보단 다양성에 초점을 두고 있어 기대에 비해 가볍단 느낌이 들었다. 어디까지나 기대에 비해서. 일부 눈에 들어온 소재의 경우엔 다른 책을 더 참고하는 수밖에 없겠다. 이 책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 도서관에서 청소년 도서로 분류돼 있었다. - 책이라 흥미를 돋우는 목적으로 쓰인 경향이 있는데 제법 성과가 쏠쏠할 듯하다. 적어도 베르나르 베르베르 못지않으니.

 유전자 결합 아기, 건강 보험 칩, 인공지능 포비아, 인공지능 센서의 정밀함, 로봇 도우미, 빅 데이터, 가상 세계, 우주 통로... SF는 정말 무수한 소재로 가득한 장르구나 싶었다. 작가의 역량, 상상력에 따라서 다채로운 작품이 등장하는 건 두말하면 입 아프고. 과학 기술이 하나의 종교 같은 위상으로써 우리 미래에 부상한다면 기존 인간의 삶의 규칙을 정했던 윤리가 어느 정도 변화를 맞이할 것인지, 이때 마주할 새로운 문제에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묻는 엔딩이 대부분이었다. 기본적이고 궁극적인 질문이이리라.


 어떻게 보면 참 설레는 장르가 아닌가 싶었다. SF에서 제시되는 미래란 대체로 어둡기 마련인데 그건 하나의 상상일 뿐, SF 작가나 과학도들은 어떠한 미래를 꿈꾸며 그려가는 사람들이란 생각이 읽는 내내 들었던 것이다. 미래로 가는 길엔 시항착오가 있을 테지만 그를 상상하고 글로 풀어내는 일은 그 자체로써 충분히 즐거운 일일 수 있다. 일반 독자로서가 아닌 소설가 지망생으로서도 의미 있는 독서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차피, 지금 일본이랑 미국에서 규정이 안 나왔기 때문에 실제 규정은 아직 만들지 않을 거야. 일본 규정이 나와야 한국 공무원들 규정을 만드니까. 한국 규정이라는 게 다 그렇잖아. 일본 규정 따라 하고, 너무 이상해 보이면 미국 규정도 좀 집어 넣고. 좀 민감한 거면 유럽 것도 참고하고. - 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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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건 아니겠지? 1 - 어느 만화가의 시코쿠 헨로 순례기
시마 타케히토 지음, 김부장 옮김 / 애니북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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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저번 학기 때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방학 동안 여행이라도 많이 가자고 다짐했었다. 현재 포스팅을 올리고 있는 말레이시아가 첫 번째 여행지, 그리고 두 번째 여행지는 2주 뒤에 갈 예정인 마츠야마다. 그래, 무려 11번째 일본이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색다른 곳이다. 일본을 이루는 주요 4개 섬 중 가장 작은 시코쿠 섬에 있는 도시 중 한 곳인데 이번엔 마츠야마와 근교, 한마디로 에히메 현을 여행하는 일정을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도 잘 다녀와야지.

 어쩌다 시코쿠 섬에 관심이 가게 됐는지 계기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아무튼 여러 매체에서 시코쿠에 대한 얘길 접해서 자연스레 관심이 가게 된 것 같다. 이번에 읽은 이 만화의 경우는 시코쿠에 대한 얘기를 할 때 간혹 언급이 된 작품인데 이번 여행을 핑계 삼아 드디어 읽게 됐다.


 시코쿠엔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헨로'라고 하는 순례길이 있다고 한다. 시코쿠에 있는 총 88개의 절을 도는, 자연스레 시코쿠도 한 바퀴 도는 순례길로 원래는 불교 수행이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관광의 일종으로, 자아 성찰을 위해, 혹은 방황하거나 도망을 오는 사람들이 순례길에 오른다고 한다. 실제로 이 만화의 저자도 에로 만화를 그리다 '자신이 정말 이 길을 가도 되는 것일까?' 하는 자괴감이 눈앞을 가로막아 순례길에 올랐다고 한다. 이때 경험에서 느낀 바를 정리해 순례기로 만화를 그렸는데 이걸 듣고 사람의 일생이란 참 알 수 없는 것이구나 싶었다. 벼랑까지 몰려 도망친 것이나 다름 없는 길에서 만화적 영감을 얻었다니, 어떻게 보면 부러운 일이다.

 이 작품 덕에 시코쿠 헨로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탑승하는 것과 더불어 나의 버킷 리스트에 오르게 됐다. 물론 낭만적이지도 않고 녹록치 않은 길이란 건 작품을 보면서도 충분히 느껴졌다. 이야기는 저자의 분신인 남자 한 명과 퇴사하고 방황하는 여자 한 명의 시점으로 번갈아가며 진행되는데 작가가 걷는 동안 참 많은 얘길 들었는지 에피소드가 상당히 방대했다. 순례자에게 베푸는 호의인 '오셋타이'를 노리고 시코쿠 전역을 어슬렁거리는 '직업 헨로'와 매일 잘 곳을 걱정하는 순례자들을 노리는 사람들 등 부정적이고도 감상에 젖지 않은 이야기가 많이 수록돼 작가가 작품을 그리면서 자신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사전 조사에도 공을 들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건 아니겠지? 지금 이렇게 걷는다고 인생이 뭐 크게 달라지기라도 하겠어? 걷는 동안 작가의 머릿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이 오갔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작품 내내 떠다닌다. 그 질문에 한 스님이 주인공한테 이렇게 말한다.

 어떤 인생을 산다 해도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다.

 만화가가 되기 전 경찰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던 주인공은 만약 경찰이 됐더라면 '그때 만화가를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을 것이다. 다른 직업도 마찬가지. 우리는 반드시 후회를 달고 산다. 이는 당연하지만 헛되지 않은 괴로움이다. 긴 걸음 속에 계속 반복되는 이러한 후회는 결실을 맺을 수도 혹은 비참하게 침잠될 수도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순례기를 만화로 그리겠다는 목표가 세워졌고 좌절도 많이 겪었지만 88번 절까지 완주하고 결실을 냈다.


 모두가 주인공 같지는 않다. 완주해도 얼떨떨해 하는 사람도 있고 88번까지 찍고도 다시 반대 방향으로 절을 도는 사람도 있고 끝없이 시코쿠 섬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도 있다. 모두 다 자의지만 그 결과가 항상 같진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각각의 순례에 가치나 무게를 달리 두어선 안 되리라. 물론 악용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있지만, 종교적인 목적 의식이 없는 사람이 꽤 되지만, 이 고행이 명쾌한 답을 주지 못허거니와 답을 얻기란 쉬운 일도 아니지만 각자가 내딛는 걸음은 함부 특정할 수 없을 이야기가 있는 법. 어딘지 작가의 인생관이 엿보였다. 허울만 좋은 소릴 내뱉지 않는 게 무척 좋았다.

 생각보다 식상하지 않았고 진지했으며 실용적이었다. 언제가 될는지 모르겠지만 헨로를 하게 된다면 이 책을 참고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헨로를 이야기하는 내용의 책들이 몇 권 있던데 그 책들도 한 번 찾아봐야겠다.

자네는 지금 이대로 이 길을 계속 가도 되는지... 불안한 게 아닌가? 그럼 자네가 편해질 수 있는 말을 해주지.

자네는 어떤 인생을 산다 해도 반드시 후회하게 되어 있어! - 1권 14번 ‘코스 아웃‘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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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나지 않음, 형사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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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생소하기 그지없는 중화권 추리소설이 잇달아 우리나라에 출간되기 시작한 것은 전적으로 찬호께이의 공이 크다. 그의 <13.67>은 그야말로 홍콩 출신 작가이기에 담을 수 있는 요소가 가득해 신선했고 단순히 신선함을 넘어 추리소설적 완성도도 뛰어나 어떻게 보면 중화권 추리소설 출판이 약동해진 건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찬호께이의 몇 안 되는 장편으로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수상하며 작가가 본격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해준 작품이다. 시마다 소지는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유명한 일본 추리소설계의 대가인데 중화권을 비롯한 신진 추리소설가들을 위해 그의 이름을 붙인 국제적인 추리소설상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작품으로 상을 받은 작가에게 시마다 소지는 '무한대의 재능'이라고 평했다는데...


 신참 형사로서 부부 살인사건 수사를 맡은 주인공 쉬유이가 강렬한 두통과 함께 잠에서 깨니 시간은 이미 6년은 흘러가 있었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주변 풍경은 변했고 자신의 조직 내 위치도 변한 듯하다. 무슨 연유에선지 상당한 기억 상실이 의심되는 상황에 자신을 인터뷰하러 온 기자가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마지막 기억이었던 부부 살인사건이 곧 영화화되는데 당시 수사를 맡았던 장본인으로서 물어볼 것이 있다고. 마침 자신 또한 사건의 마무리가 궁금했던 차라 기억 상실에도 불구하고 인터뷰에 응한다.

 사건 당시 유일한 피의자였던 남자에 대해 알 수 없는 의심, 이 남자가 범인이 아닐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게 마지막 기억인데 사건은 그 남자가 범인이고 도주하다 무고한 사람을 사살하고 만 비극으로 막이 내려졌다는 사실에 주인공은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후 사건의 관계자를 만나면서 새로운 의심을 품게 되자 단독으로 수사를 진행한다. 자신이 6년 동안 이미 해봤을지 모를, 때늦은 것인지도 모를 수사를.


 느닷없으면서도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소재와 전개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몇 겹에 걸친 반전을 연이어 터뜨리며 끝난다. 사건 내막은 비교적 단순한데 꼬아놓기를 되게 많이 꼬아놓아서 신선했다...기 보단, 약간 난잡하고 작위적이었다. 전체적으로 말은 되는데 반전을 위해 상당 부분 우연의 일치에 기댔다는 게 좀 거슬렸다. 물론 우연의 일치는 생각보다 자주 활용할 수밖에 없는 장치이기도 하나 이 작품에서 그 정도가 살짝 과했다고 - 그나마 복선은 괜찮았다. - 본다. 그리고 작품에서 기억 상실을 비롯해 해리, PTSD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 다양한 심리적 개념을 도입했는데 그게 핵심 반전에까지 다 적용시키니 이 또한 과하다고 느껴졌다. 좋게 말하면 신인의 패기인데 내가 봤을 땐 욕심이 지나쳤다.

 물론 기억을 상실한 특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한 논리적으로 접근하려고 하는 상황 자체는 몰입이 잘 됐고 후반에 들어서는 책장을 덮지 못하게 만들었던 건 좋았다. 하지만 이야기의 소재, 혹은 그리 길지 않은 분량 - 300쪽으로 작가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짧다. - 탓인지 전개가 뭐든 급박하게 돌아가서 다 읽고 나서 그리 개운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쉽게도 이 작품에서 <13.67>에서 느낀 분위기, <스탭 S.T.E.P>의 두 단편에서 느낀 참신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시마다 소지의 '무한대의 재능'이란 말에도 아주 동의는 못하겠다. 그러나 과하고 급박한 한편으로 처음부터 결말까지 자기가 벌려놓은 이야기를 수습하는 책임감을 다해서 완성도는 무시할 수 없었다. 대표작이나 수작은 아니지만 무난함 그 이상을 보여준 건 분명했다. 작가에게 관심이 있다면 아주 후회할 독서는 아닐 것이다.

 자, 이제 최근에 출간된 <망내인>을 읽을 차례인가.



 p.s 작가의 다른 작품처럼 이 작품도 홍콩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준다.  홍콩... 별로 관심 없었는데 한 번 검색해봐야겠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규칙이든 깨진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규칙이 아름답게 깨졌는가, 그리고 깨진 후에 새로운 발전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 29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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