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생물학 - 엉뚱하고 기발한 질문에 생물학이 대답합니다
후쿠오카 신이치 지음, 이규원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0월
평점 :
절판


2.0






 생물학에 관련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한마디로 썰을 푸는 정도의 책이다. 목차를 살펴보면 제법 구미가 당기는 질문이 많이 있는데 가령 '바퀴벌레를 죽이는 나, 잘못된 생각인 걸까요?' 라든가 '스테이크를 좋아하면서 동물 애호를 말할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 아이는 피망이라면 질색하는데 자라면서 음식을 가리지 않게 될까요?' 등 자질구레하면서도 궁금하기 짝이 없는 질문에 저자가 생물학자로서 나름의 의견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낸다. 각 질문에 약 5페이지 정도 할애하면서 진행되기에 가독성은 상당한데... 내용물이 다채로운 것에 비해 은근히 내실이 없었다. 질문에 대한 답보다는 작가가 독자에게 생물학에 근거한 시야 넓히는 것에 주력하기라도 한 모양인지 정작 질문에 대해선 어딘지 아리송한 말만, 이른바 동문서답을 쏟아낸다. 입심은 인정하지만 그러다 보니 논점을 저 스스로 잊어버린 느낌이다.

 특히 압권은 '방사선을 많이 발산하는 라듐이 전국 곳곳에서 발견되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요?' 란 질문에 대한 작가의 답이었다. 라듐 얘기하니까 퀴리 부인의 일생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대답을 끝내는데 질문의 요지는 방사선을 발산하는 물질이 왜 전국(일본)에서 발견되느냐 하는 것이지 않은가. 생물학자가 아니라서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외국인 입장에선 명확히 설명할 수 있는 일인데 - 차마 입에 담기도 귀찮다. - 그걸 돌려 말하는 걸 넘어서 아예 다른 소리만 하고 있으니까 어이가 없었다. 이 질문 전에도 이런 느낌이 강해서 건성건성 읽었지만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이 정도면 거의 책임 회피가 아닐까.


 혹여 책의 제목과 목차의 질문에 흥미가 돋아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한테 말하는 거지만, 그냥 관심 있는 분야의 생물학 책을 읽는 게 더 나을 테니 시간 낭비를 자처하지 않았으면 한다.

유전자는 우리에게 자손을 남기라고 지령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네 마음대로 해라. - 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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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9.1






 일련의 명민한 얼개 안에서 집필된 글이라기 보단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화두를 던지고 그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작가의 지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하지만 본인이 말하는 것에 비해 작가는 꽤나 좋은 페미니스트 - 내가 보기엔 - 라서 글들이 아주 일관적이지 않더라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작가 본인이 왜 '나쁜 페미니스트'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페미니스트상象에 얼마나 미치지 못했는지 그닥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 책을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솔직히 이 기억엔 자신이 없다. 최근의 포스팅을 보면 기억이 안 난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감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데 이쯤되면 부끄러운 걸 넘어서 비참할 정도다. 이러려고 학교 과제에 매진했나 자괴감이 든달까?

 요즘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연예인은 참 할 게 못 되는구나 싶다. 휴가 때 페미니즘 저서 한 권 읽었다 하면 달려드는 작태들을 보노라면 우리나라엔 정말이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미개한 남자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들의 전제가,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란 곧 나쁜 년인데 하필 예쁜 여자 연예인들이 페미니스트라니,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다. 난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많으며 자신의 성별에 따른 부끄러움은 누구나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 자신이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음을 깨달을 때? - 이렇게 동성들의 모습 때문에 부끄럽기는 싫다. 싸잡아서 모욕을 당하는 게 얼마나 기분이 나쁜데.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다. 특별히 동성이라고, 같은 국적이라고, 같은 인종이라고 근본적으로 다 같진 않다. 그 다름을 이해하는 것에서 페미니즘이 비로소 시작된다. 완벽하게 좋은 사람도 없고 완벽하게 나쁜 사람도 없다. 완벽하게 좋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없고 완벽하게 좋은 남자도 여자도 없다. 완벽하게 좋은 페미니스트도 없고 완벽하게 나쁜 페미니스트도 없다.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개개인에 따라 좋고 나쁨은 상시 변하는 것일 텐데 여기에 절대적인 기준이랍시고 자꾸 뭘 대입하려고 들면 그것도 참 피곤한 일이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는 특정 신문 기사, 가요,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을 보면서 느낀 여성 폭력의 짙은 그림자를 포착한 1부, 정치계에서 페미니즘의 입지를 다룬 2부, 흑인 페미니스트로서 느낀 매체의 불평등한 흑인 묘사를 다룬 3부로 구성됐다. 1부가 압도적으로 재밌었고 - 내가 미국인이었다면 정말 재밌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내 서평이 그렇게 격찬 일색인 것이리라. - 2부는 좀 어렵고 3부는 솔직히 잘 와 닿지 않았다. 흑인에 대한 흑인으로서의 시선이라 퍽 신선했지만 다루는 작품인 <헬프>와 <장고>를 너무 평가절하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 부분은 다소의 논란은 있겠으나 의미하는 바는 알겠어서 - 그러니까 매체 속 고정된 흑인에 대한 묘사가 불쾌하단 것인데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게 처음엔 낯설어서 그렇지... 이 낯섦, 이젠 익숙해져야 하겠다! -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그렇게 '나쁜'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 않은가 하는 반문이 들었다. 자신을 비판하며 결점을 인정하는 것은 그 인간이 성장하고 있다는 아주 확실한 반증이다. 일단 여기서 저자의 '나쁨'은 상쇄되고도 남는다. 거기다 뿌리 깊은 여성 혐오의 텍스트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과 더불어 고정된 여성 캐릭터 묘사에 대한 의견은 나도 이전부터 생각했던 것이라서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1부의 글들에선 '페미니스트'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 답답하고 화를 잘 내고... 거 참 - 별로 느껴지지 않는데 덕분에 페미니즘의 문턱이 상당히 낮춰지는 효과를 낳았다.

 페미니즘과 반대되는 논리는 흑백논리다. 내 편과 네 편으로 이분되는 전근대적 사고로는 요즘의 복잡하면서도 합리적인 논쟁을 이해할 수 없다. 이 포스팅을 쓰는 지금, 책을 읽던 당시엔 예상할 수 없는 감상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아무튼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영 낯설었다면 이 책으로나마 해당 개념의 범용성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삶에 페미니즘이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이때 좋고 나쁨의 감상을 내리는 것은 페미니즘 자체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몫이라는 걸 말이다.




 인상 깊은 구절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페미니즘에 비이성적으로 높은 기준을 세워 놓고 페미니즘에게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 달라고, 혹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내려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만 같다. 페미니즘이 우리 기대에 못 미치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행동하는 인간들에게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페미니즘 자체가 잘못되었다며 정죄한다. - 13p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할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 16p


 훌륭한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책 자체보다 출판에 대해서 많이 떠들수록 정작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잊게 되는 건 아닐까. - 54p


 착한 사람이 되는 건 나쁜 짓을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 62p


 하지만 훨씬 더 유해한 캐릭터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지루하게 착한 캐릭터다. - 85p


 우리가 좋아하지 못하는 여자들은 그런 여자가 되고 싶은 유혹을 거부한다. 그 대신 그들은 자기 자신이 된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이 세상에는 읽고 싶은 이야기 하나가 더 탄생한다. - 97p


 우리는 그저 어떤 소재를 똑바로 쓰고 재밌게 쓰는 데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143p


 우리 여자들의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 수치스럽게도 우리의 권리는 언제나 양도할 수 있는 권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 221p


 나는 동정과 연민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 262p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늘 '열렬한' 보다는 '화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 3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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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함께 박스 세트 - 전8권 - 개정판, 저승편 + 이승편 + 신화편 신과 함께 개정판 시리즈
주호민 지음 / 애니북스 / 2017년 7월
평점 :
품절


9.5






 웹툰으로 저승편까지만 봤고 그것만 봐도 대강의 세계관 파악은 물론 완결성 있게 마무리된 참이라 그 후속편은 부러 찾아보지 않았다. 그 다음의 이야기는 사족이라 생각했기 때문인데 - 이승편만 봤을 때까지만 해도 명백한 사족이라 생각됐다. - 신화편까지 보니 사족이 아닌 진정한 완결이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토속 신앙을 차용했다는 점만으로도 의의가 있는 이 성공작은 누구도 밟지 않은 흰 눈밭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과 같은 경이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저승편은 동명의 영화의 성적을 말해주듯 그 자체로써 거의 완벽하고 이승편은 전편의 인상을 흐릿하게 만들어 약간 실망스러웠고 신화편은 그 전편의 인상을 뒤짚었다.


  <신과 함께>는 착하게 살면 저승에서 대접받고 나쁘게 살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전통적 가치관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사후 세계에서의 보상과 심판은 우리가 살면서 한 번쯤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인데 이 작품에선 그걸 분명히 차용해 삶에 대해 다시 마주보게 만든다. 여기서 '착함'과 '나쁨'의 기준이 입체적이지 않고 다소 보편적이고 익히 알고 있는 기준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 아쉬우나 - 특히 저승편이 법정물의 형식을 띄고 있는 것에 비해 그 묘미가, 이른바 상황에 따른 '선과 악의 불분명한 경계'가 부각되지 않은 건 아쉽다. 약간 절대적인 기준을 제시한 셈인데 이건 경우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 교훈과 여운이 좋고 무엇보다 전개 방식이 재밌어 자연스런 몰입이 가능해 과연 흥행하는 작품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이승편은 현대의 문제를 들고 와 보다 사회 비판적으로 이야길 끌고 가는데 작가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듯 제법 지루했다. 우리나라의 토속적인 사후관에 따른 설정이 압도적으로 부각되지 않았고 세계관만 따온 별개의 작품이라 여겨도 무방할 정도다. 전개도 지지부진하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지만 마지막 반전도 비교적 뜬금없던 터라 이래저래 아쉽기만 하다.


 신화편은 작중에서 비중있던 캐릭터와 이름이 한 번 언급되기만 했던 모든 캐릭터들의 번외격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본격적으로 '신화'를 다루기 때문에 흡사 <만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작가의 조사와 연구가 빛을 발한 부분인데 읽고나서 우리나라에 이만한 독자적 신화가 있음에도 지금까지 모르고 지냈다는 게 신기하고 아까울 정도였다. 도대체 다른 사람들은 뭘 한 건지... 이건 만화가 재밌고 어떻고 떠나서 굉장히 의미있는 작업이라 할 수 있었다. 만화로 하여금 이 정도로 공공의 가치를 그리다니 - 만화를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 그야말로 만화 그 이상의 성과를 이룩한 게 아니냐며 감탄했다.

 토속적인 저승의 이야기부터 다양한 종류의 신화와  설화까지 다루면서 우화적이고도 섬뜩한 작풍을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는 것을 보고 내가 주호민이란 만화가를 은근히 저평가했단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 <짬>이나 <무한동력>도 좋은 작품이지만 <신과 함께>는 가히 역작이다. - 개인적인 얘기지만 작가가 이 작품의 엄청난 흥행에 안주하지 않고 더 뛰어난 작품을 그려주길 희망한다. 그게 쉽지 않을 걸 알지만...

착하게 살 걸 그랬네요.

저승에서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겁니다. - 저승편 2권 17화




사람들은 언제나 책임을 뒤집어 씌울 누군가가 필요한 게 아닐까... 자신의 죄를 대신 뒤집어 써줄 만한 누군가 말이지. - 신화편 1권 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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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고전 세계 단편 명작선 인디고 아름다운 고전 시리즈 25
알퐁스 도데 외 지음, 김지혁 그림, 정윤희 외 옮김 / 인디고(글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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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여러 고전 작가의 단편이 수록된 선집. 몇 개는 새로 읽은 것도 있지만 어떤 건 두 번째 읽기도 하고 어떤 건 몇 번 읽었는지 셀 수도 없을 정도인 작품도 있다. 그런 작품은 학교 교과서에도 실리는 작품이라 이제 질릴 법도 한데 워낙 분량이 짧고 번역마다 조금씩 느낌도 다른 것 같아 - 그리고 팬심도 있어 - 그렇게 지겹지 않았다.


 알퐁스 도데


 집에 이 작가의 단편집이 있던데 아예 그걸 읽어야 할 것 같다. '별'과 '마지막 수업'이 이렇게 서정적이고 감동적인 작품이었나 싶었다. 일러스트도 큰 역할을 했겠지.



 오 헨리


 작년부터 오 헨리의 작품을 꾸준하게 읽어서 이제 '마지막 잎새'나 '크리스마스 선물'말고 다른 작품도 읽고 싶다.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기 위해서 얼른 단편집을 사야 할 듯하다.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은 영화로도 유명한데 이참에 영화도 꼭 봐야겠다.나이에 맞게 살기에 외양이 따라주지 않아 생기는 기이한 희극과 비극을 다룬 이야기가 생각보다 참 재밌었다. 게다가 이렇게나 뭉클하다니, <위대한 개츠비>가 통 안 읽혀서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일단 단편집부터 먼저 읽어야겠다.



 기 드 모파상


 '목걸이'는 정말 셀 수 없이 많이 읽었는데 '보석'은 처음 읽어봤다. 별로 인상에 남진 않았는데 집에 현대문학에서 나온 큼지막한 - 자그마치 800쪽을 훌쩍 넘는! - 단편집이 있으니 그걸 읽어야겠다. 근데 단편 하나 하나가 다 짧아서 다 기억할 수 있으려나?



 오스카 와일드


 '행복한 왕자'는 전에 한 번 읽었을 때보다 더 감동적이었고 '캔터빌의 유령'은 유일하게 이 선집에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작품이었다. 작가에 대한 관심이 생기는데 '행복한 왕자'만으로 충분했는데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문득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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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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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







 선입견이란 건 무섭다. <붉은 손가락>은 갖은 선입견을 깨는 작품이란 말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다. 개인적인 얘기부터 하자면, 이 작품은 추리소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깨뜨린 최초의 소설이다. 범인 찾는 탐정의 이야기가 곧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나에게 그건 선입견이라고 말하는 듯 사뭇 다른 양상으로 가득했던 작품이었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고 내가 이토록 추리소설을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작품 내적으로도 선입견은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다.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가족이 어떤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겪고 절대 평범하지 않은 뒤처리를 한다. 치매에 걸린 노모와 아들을 일그러진 모정으로 키운 아내, 그런 엄마 때문에 어딘가 많이 결여된 아들과 그림으로 그린 듯한 가부장적인 아빠인 아키오의 이야기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붕괴된 가족과 사회의 모습을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족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을 아주 비웃듯이 뒤흔든다. 갑자기 텐도 아라타의 <가족사냥>이 떠오르는데 그 작품이 1,500페이지 넘게 풀어낸 것보다 이 작품, <붉은 손가락>이 훨씬 집약적이다. 가독성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고.


 아내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내키지 않지만 집에 돌아온 아키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들이 화를 참지 못해서 죽여버린 여자아이였다. 소아성애가 있는 아들이 흑심을 품고 초대한 소녀가 자기 뜻대로 굴지 않자 뒷일 생각 않고 죽였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사태에 아키오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한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는데 아내는 자기 목을 가위로 찌르는 시늉을 하며 결사 반대한다. 이 아이는 반드시 지킬 거라고. 이 아이가 살인범으로 낙인 찍혀 인생이 끝나는 꼴은 절대 못 본다고. 이 광기 어린 행동에 여느 때처럼 질려버린 아키오는 고심 끝에 차선책을 강구한다. 시체 유기, 그리고... 가가 형사의 존재와 어떤 예상치 못한 요소가 없었으면 성공했을지 모를 방법을 말이다.

 <붉은 손가락>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이자 - 처음으로 읽은 작가의 소설은 코미디 소설인 <흑소소설>이다. - 지난 9년 간 읽은 작가의 어떤 작품보다 심리 묘사가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사람들이 작가를 두고 문장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난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어휘력이 참신하진 않으나 정말 필요한 수준의 묘사는 물론이거니와 날카로운 문제 제기가 동반돼서 읽다보면 굉장히 알차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읽은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데, 정말이지 아키오의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이 너무 잘 전달돼서 짜증이 나는 한편으로 결말까지 빠르게 읽어나갔던 것 같다. 때때로 짜증은 독서의 지대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도대체 이 짜증이 어떤 방식으로 해소가 될 것인지 못내 기대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처음에 범인이 드러나는 도서 추리물이자 가가 형사의 개인사가 가장 잘 부각되는 시리즈물이기도 하다. 가가의 아버지와 사촌 동생인 마츠미야가 가가라는 캐릭터는 물론이고 아키오 가족의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는데 반전이며 결말 등이 작위적인 부분이 있긴 했지만 이 특유의 따뜻함 때문에 처음 읽었을 때 꽤나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제목이 '붉은 손가락'이라 어딘가 자극적일 것이란 선입견을 지울 수 없었지만 막상 내용은 이보다 슬플 수 없을 정도라 인상이 많이 달라지는데, 여담이지만 작가의 작품 중 제목이 가장 멋들어지게 달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악의>, <용의자 X의 헌신>, <성녀의 구제>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이 제목의 이미지 반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아,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 있구나. 그 제목도 대박인데.

 다시 읽어서 그런 건지 후반부의 전개가 비교적 쉽게 예상이 가는 작품이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감정이 폭발하는 '그 장면'에선 마치 처음 읽은 것처럼 숨을 삼키게 됐다. 고령화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효를 언급한다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지 않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겠는데 작가가 세련되지 않지만 - 추리소설적으론 중요하나 사족 같은 부분이 있긴 했다. - 진정성 있게 그려서 도무지 비판할 여력이 나질 않는다. 신파라고 낮춰 부르고 싶지 않은 신파라고나 할까. 아니, 어떤 식으로든 폄하하고 싶지 않다.


  최근 '가가 형사' 시리즈를 다시 읽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캐릭터인 만큼 작품 하나 하나가 참 남다른 울림을 주는데 탐정 캐릭터를 잘 내세우지 않는 작가이기에 더욱 독자한테도 남다른 작품들이지 않나 싶다. 특히 <붉은 손가락>에서부터 안착된 시리즈의 작풍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초대형 베스트 셀러 작가로 만든 요소이기도 하니 더더욱 그렇다. 혹자는 <붉은 손가락>을 작가의 엑기스가 집약된 작품일 뿐이라 하지만 나는 만약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못 받았으면 이 작품으로 받았을 것이란 생각까지 든다.

 <신참자>도 좋은 작품이지만 <붉은 손가락>은 드라마까지도 정말 완벽한 작품이었다. 드라마 포스팅을 하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풀도록 하겠다.

형사라는 건 사건의 진상만 해명한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게 아냐. 언제 해명할 것인가, 어떤 식으로 해명할 것인가, 그것도 아주 중요해. - 2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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