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페미니스트 - 불편하고 두려워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9.1






 일련의 명민한 얼개 안에서 집필된 글이라기 보단 '나쁜 페미니스트'라는 화두를 던지고 그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된 작가의 지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하지만 본인이 말하는 것에 비해 작가는 꽤나 좋은 페미니스트 - 내가 보기엔 - 라서 글들이 아주 일관적이지 않더라도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작가 본인이 왜 '나쁜 페미니스트'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페미니스트상象에 얼마나 미치지 못했는지 그닥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 책을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솔직히 이 기억엔 자신이 없다. 최근의 포스팅을 보면 기억이 안 난다는 이유로 제대로 된 감상을 남기지 못하고 있는데 이쯤되면 부끄러운 걸 넘어서 비참할 정도다. 이러려고 학교 과제에 매진했나 자괴감이 든달까?

 요즘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연예인은 참 할 게 못 되는구나 싶다. 휴가 때 페미니즘 저서 한 권 읽었다 하면 달려드는 작태들을 보노라면 우리나라엔 정말이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미개한 남자들이 많다는 것을 느끼곤 한다. 그들의 전제가, 이를테면 페미니스트란 곧 나쁜 년인데 하필 예쁜 여자 연예인들이 페미니스트라니,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는 그들의 모습이 그렇게 역겨울 수가 없다. 난 내가 남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많으며 자신의 성별에 따른 부끄러움은 누구나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 자신이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었음을 깨달을 때? - 이렇게 동성들의 모습 때문에 부끄럽기는 싫다. 싸잡아서 모욕을 당하는 게 얼마나 기분이 나쁜데.


 사람은 누구나 다 다르다. 특별히 동성이라고, 같은 국적이라고, 같은 인종이라고 근본적으로 다 같진 않다. 그 다름을 이해하는 것에서 페미니즘이 비로소 시작된다. 완벽하게 좋은 사람도 없고 완벽하게 나쁜 사람도 없다. 완벽하게 좋은 한국인도, 일본인도 없고 완벽하게 좋은 남자도 여자도 없다. 완벽하게 좋은 페미니스트도 없고 완벽하게 나쁜 페미니스트도 없다. 상황에 따라 입장에 따라 개개인에 따라 좋고 나쁨은 상시 변하는 것일 텐데 여기에 절대적인 기준이랍시고 자꾸 뭘 대입하려고 들면 그것도 참 피곤한 일이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는 특정 신문 기사, 가요,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을 보면서 느낀 여성 폭력의 짙은 그림자를 포착한 1부, 정치계에서 페미니즘의 입지를 다룬 2부, 흑인 페미니스트로서 느낀 매체의 불평등한 흑인 묘사를 다룬 3부로 구성됐다. 1부가 압도적으로 재밌었고 - 내가 미국인이었다면 정말 재밌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국내 서평이 그렇게 격찬 일색인 것이리라. - 2부는 좀 어렵고 3부는 솔직히 잘 와 닿지 않았다. 흑인에 대한 흑인으로서의 시선이라 퍽 신선했지만 다루는 작품인 <헬프>와 <장고>를 너무 평가절하한 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이 부분은 다소의 논란은 있겠으나 의미하는 바는 알겠어서 - 그러니까 매체 속 고정된 흑인에 대한 묘사가 불쾌하단 것인데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게 처음엔 낯설어서 그렇지... 이 낯섦, 이젠 익숙해져야 하겠다! - 그런대로 넘어갈 수 있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난 이 책을 읽는 내내 저자가 그렇게 '나쁜' 페미니스트까진 아니지 않은가 하는 반문이 들었다. 자신을 비판하며 결점을 인정하는 것은 그 인간이 성장하고 있다는 아주 확실한 반증이다. 일단 여기서 저자의 '나쁨'은 상쇄되고도 남는다. 거기다 뿌리 깊은 여성 혐오의 텍스트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과 더불어 고정된 여성 캐릭터 묘사에 대한 의견은 나도 이전부터 생각했던 것이라서 반갑기 그지없었다. 이러한 1부의 글들에선 '페미니스트'하면 떠오르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 답답하고 화를 잘 내고... 거 참 - 별로 느껴지지 않는데 덕분에 페미니즘의 문턱이 상당히 낮춰지는 효과를 낳았다.

 페미니즘과 반대되는 논리는 흑백논리다. 내 편과 네 편으로 이분되는 전근대적 사고로는 요즘의 복잡하면서도 합리적인 논쟁을 이해할 수 없다. 이 포스팅을 쓰는 지금, 책을 읽던 당시엔 예상할 수 없는 감상들이 쏟아지고 있는데... 아무튼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영 낯설었다면 이 책으로나마 해당 개념의 범용성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 삶에 페미니즘이 여러 방식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고 이때 좋고 나쁨의 감상을 내리는 것은 페미니즘 자체가 아니라 받아들이는 당사자의 몫이라는 걸 말이다.




 인상 깊은 구절


 도대체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페미니즘에 비이성적으로 높은 기준을 세워 놓고 페미니즘에게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있어 달라고, 혹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을 내려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만 같다. 페미니즘이 우리 기대에 못 미치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 행동하는 인간들에게 결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페미니즘 자체가 잘못되었다며 정죄한다. - 13p


 어떤 여성이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지 않다면 그 역시 그녀의 권리이기에 존중한다. 하지만 그녀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 또한 나의 의무이며, 나라면 하지 않을 법할 선택을 하는 여성들을 지지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근본 원칙이라고 믿는다. - 16p


 훌륭한 책을 읽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가 책 자체보다 출판에 대해서 많이 떠들수록 정작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잊게 되는 건 아닐까. - 54p


 착한 사람이 되는 건 나쁜 짓을 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 62p


 하지만 훨씬 더 유해한 캐릭터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지루하게 착한 캐릭터다. - 85p


 우리가 좋아하지 못하는 여자들은 그런 여자가 되고 싶은 유혹을 거부한다. 그 대신 그들은 자기 자신이 된다. 그리고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이 세상에는 읽고 싶은 이야기 하나가 더 탄생한다. - 97p


 우리는 그저 어떤 소재를 똑바로 쓰고 재밌게 쓰는 데에만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더 낫게 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143p


 우리 여자들의 기억력이 나쁘지 않다는 것, 수치스럽게도 우리의 권리는 언제나 양도할 수 있는 권리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 221p


 나는 동정과 연민이 한정된 자원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도 않다. - 262p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늘 '열렬한' 보다는 '화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 35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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