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9.9







 선입견이란 건 무섭다. <붉은 손가락>은 갖은 선입견을 깨는 작품이란 말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다. 개인적인 얘기부터 하자면, 이 작품은 추리소설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깨뜨린 최초의 소설이다. 범인 찾는 탐정의 이야기가 곧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고등학생 시절의 나에게 그건 선입견이라고 말하는 듯 사뭇 다른 양상으로 가득했던 작품이었다. 어쩌면 이 작품을 읽고 내가 이토록 추리소설을 좋아하게 됐는지 모르겠다.

 작품 내적으로도 선입견은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한다. 겉으론 평범해 보이는 가족이 어떤 말도 안 되는 사건을 겪고 절대 평범하지 않은 뒤처리를 한다. 치매에 걸린 노모와 아들을 일그러진 모정으로 키운 아내, 그런 엄마 때문에 어딘가 많이 결여된 아들과 그림으로 그린 듯한 가부장적인 아빠인 아키오의 이야기는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붕괴된 가족과 사회의 모습을 아주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족이라면 모름지기 이래야 한다는 선입견을 아주 비웃듯이 뒤흔든다. 갑자기 텐도 아라타의 <가족사냥>이 떠오르는데 그 작품이 1,500페이지 넘게 풀어낸 것보다 이 작품, <붉은 손가락>이 훨씬 집약적이다. 가독성은 당연히 말할 것도 없고.


 아내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내키지 않지만 집에 돌아온 아키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들이 화를 참지 못해서 죽여버린 여자아이였다. 소아성애가 있는 아들이 흑심을 품고 초대한 소녀가 자기 뜻대로 굴지 않자 뒷일 생각 않고 죽였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는 사태에 아키오는 지극히 상식적인 행동을 한다.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는데 아내는 자기 목을 가위로 찌르는 시늉을 하며 결사 반대한다. 이 아이는 반드시 지킬 거라고. 이 아이가 살인범으로 낙인 찍혀 인생이 끝나는 꼴은 절대 못 본다고. 이 광기 어린 행동에 여느 때처럼 질려버린 아키오는 고심 끝에 차선책을 강구한다. 시체 유기, 그리고... 가가 형사의 존재와 어떤 예상치 못한 요소가 없었으면 성공했을지 모를 방법을 말이다.

 <붉은 손가락>은 내가 처음으로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이자 - 처음으로 읽은 작가의 소설은 코미디 소설인 <흑소소설>이다. - 지난 9년 간 읽은 작가의 어떤 작품보다 심리 묘사가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사람들이 작가를 두고 문장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난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어휘력이 참신하진 않으나 정말 필요한 수준의 묘사는 물론이거니와 날카로운 문제 제기가 동반돼서 읽다보면 굉장히 알차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읽은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는데, 정말이지 아키오의 답답하기 이를 데 없는 심정이 너무 잘 전달돼서 짜증이 나는 한편으로 결말까지 빠르게 읽어나갔던 것 같다. 때때로 짜증은 독서의 지대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도대체 이 짜증이 어떤 방식으로 해소가 될 것인지 못내 기대돼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처음에 범인이 드러나는 도서 추리물이자 가가 형사의 개인사가 가장 잘 부각되는 시리즈물이기도 하다. 가가의 아버지와 사촌 동생인 마츠미야가 가가라는 캐릭터는 물론이고 아키오 가족의 이야기에 몰입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는데 반전이며 결말 등이 작위적인 부분이 있긴 했지만 이 특유의 따뜻함 때문에 처음 읽었을 때 꽤나 감동을 받았던 것 같다. 제목이 '붉은 손가락'이라 어딘가 자극적일 것이란 선입견을 지울 수 없었지만 막상 내용은 이보다 슬플 수 없을 정도라 인상이 많이 달라지는데, 여담이지만 작가의 작품 중 제목이 가장 멋들어지게 달린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 외에도 <악의>, <용의자 X의 헌신>, <성녀의 구제>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이 제목의 이미지 반전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아,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 있구나. 그 제목도 대박인데.

 다시 읽어서 그런 건지 후반부의 전개가 비교적 쉽게 예상이 가는 작품이구나 싶었지만 그래도 감정이 폭발하는 '그 장면'에선 마치 처음 읽은 것처럼 숨을 삼키게 됐다. 고령화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효를 언급한다는 것은 너무 상투적이지 않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겠는데 작가가 세련되지 않지만 - 추리소설적으론 중요하나 사족 같은 부분이 있긴 했다. - 진정성 있게 그려서 도무지 비판할 여력이 나질 않는다. 신파라고 낮춰 부르고 싶지 않은 신파라고나 할까. 아니, 어떤 식으로든 폄하하고 싶지 않다.


  최근 '가가 형사' 시리즈를 다시 읽고 있다. 작가에게 있어서도 소중한 캐릭터인 만큼 작품 하나 하나가 참 남다른 울림을 주는데 탐정 캐릭터를 잘 내세우지 않는 작가이기에 더욱 독자한테도 남다른 작품들이지 않나 싶다. 특히 <붉은 손가락>에서부터 안착된 시리즈의 작풍은 히가시노 게이고를 초대형 베스트 셀러 작가로 만든 요소이기도 하니 더더욱 그렇다. 혹자는 <붉은 손가락>을 작가의 엑기스가 집약된 작품일 뿐이라 하지만 나는 만약 <용의자 X의 헌신>으로 나오키상을 못 받았으면 이 작품으로 받았을 것이란 생각까지 든다.

 <신참자>도 좋은 작품이지만 <붉은 손가락>은 드라마까지도 정말 완벽한 작품이었다. 드라마 포스팅을 하며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마저 풀도록 하겠다.

형사라는 건 사건의 진상만 해명한다고 해서 다 끝나는 게 아냐. 언제 해명할 것인가, 어떤 식으로 해명할 것인가, 그것도 아주 중요해. - 23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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