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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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빵[pain]이 없으면 케이크[brioche]1)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치스럽고 생각 없는 여인을 상징하는 이 말은 불행히도 그녀가 한 말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몽사상가인 장 자크 루소의 <고백록> 제6권의 한 구절2)을 인용해서 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리고 왜 그런 누명을 써야 했을까? 먼저 이 책,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을 쓴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가를 살펴보자.

 

진실이란 대개 그렇듯이 중용에 가까이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권주의의 위대한 성녀도 아니었고, 혁명의 ‘매춘부’도 아니었으며, 중간적인 성격에 유난히 영리하지도 유난히 어리석지도 않으며불도 얼음도 아니고, 특별히 선을 베풀 힘도 없을뿐더러 악을 행할 의사 또한 없는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인일 뿐이었다. 마성(魔性)을 과시할 소양도 없고 영웅적인 행위를 이룰 의지도 없으며, 따라서 비극의 대상이 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인물이다. [p. 10]

 

그러면서

 

그렇지만 평범한 혹은 아주 나약한 천성의 인물이 엄청난 운명의 수렁에 빠져들었을 때, 또 무시무시한 개인적인 책임에 몰릴 때에도 비극은 발생한다.

중략 ~

마리 앙투아네트야말로 그러한 역사의 분명한 증거이다. 38년이라는 생애의 초반 30년 동안 이 여인은 무심한 길을 간다. 적어도 눈에 띄는 범위 안에서는, 그녀는 한 번도 선이든 악이든 평균치를 넘지 않았다. 미적지근한 인생이요 평범한 성격이며, 역사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엑스트라에 불과하다. 쾌활하고 구김살 없는 그녀의 유희 세계 안으로 혁명이 밀어닥치지 않았더라면, 미미한 이 합스부르크가(家)의 여인은 모든 시대의 수많은 여인들처럼 그저 그렇게 무심히 살아갔을 것이다. [pp. 10~12]

 

저자의 평가처럼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가 평범한 보통사람, 우리 주변의 소시민과 같은 마인드를 가졌기에 비극의 대상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신성로마제국의 사실상의 황제였던 그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나 나폴리와 시칠리아 왕국의 왕비인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52~1814) 같은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운명에 희롱 당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갔을 테니까. 어쩌면 그녀가 겪은 비극은 아무런 준비 없이 왕비가 된 그녀가 받아야 할 업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의 머리 위에 얹혀진 왕관의 무게를 어떻게 느끼고 반응해야 하는지 그녀가 결혼하기 직전까지 제대로 알려주지 않은 부모의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제대로 왕권을 쓴 자의 역할을 배우지 않은 탓인지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 차례의 징조를 그냥 넘기고 만다. 만약 루이 16세와 그녀가 그 징조들을 보고 제대로 대처했다면 혁명과 공화정이라는 루트 대신 개혁과 입헌군주정이라는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흔히 소시민적인 평범한 사람이 격변기에 권력의 정상에 위치하게 되면, 그가 선량하고 좋은 사람일수록 그의 삶은 비극으로 끝나거나 그가 속한 조직이 나락으로 향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선량한 아버지이나 무능한 지도자가 되기 쉽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淸)나라를 동네북으로 만든 시기의 황제였던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0~1850), 로마노프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재위 1894~1917) 등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슈테판 츠바이크도 이 책을 통해 평범한 여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역사의 커다란 비극 앞에서 어떻게 극적으로 변화하는지 그려내고 싶었는지 모른다.

 

생각 없이 경솔하게 살아온 15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왕비라는 것은 오로지 궁중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애교 있고, 가장 옷을 잘 입고, 가장 버릇이 없고 또 무엇보다고 가장 잘 노는 여자라는 찬사를 받는 것아르비테를 엔레간티아룸, 즉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지나치도록 고상하게 훈련된 사교계의 지도적인 사교부인임을 뜻했다.

중략 ~

혁명이 그녀를 이 좁디좁은 로코코의 무대에서 완력으로 거세게 끌어내려 세계사라는 위대한 비극의 무대 위에 올려놓았을 때에야 비로소 운명이 자기에게 영웅적인 역할을 맡을 힘과 강한 영혼을 주었는데도, 지나간 20년 동안 너무나 보잘것없는 시녀의 역과 살롱 귀부인의 역만을 해왔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이런 잘못을 깨달았지만 그것은 이미 너무 늦어버린 후였다.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 왕비의 역을 맡는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진정한 모습을 보였다[p. 118]

 

비록 그것이 뒤늦은 노력이었다고 할지라도 그녀의 시도와 도전은 그녀를 진정한 프랑스 왕비로 만들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더욱 그녀에 대해, 그녀의 비극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번역가들도 이 책에 대해  

 

프랑스 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지만 이 소설은 역사소설이라기보다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평범한” 인물에 대한 심리소설 쪽에 가깝다. 쇤브룬 궁의 철없는 소녀가 프랑스 왕비가 되고 결국은 단두대에서 사라지기까지의 내면적 성숙을 그린 작품이다. [p. 552]

 

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 책도 고귀한 태생의 주인공이 운명의 사슬에 얽매여 몰락하는 고전 비극을 따라가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저자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여기에 다소 변형을 가해 태생은 고귀하지만 평범한 소시민 같은 성격의 주인공을 등장시켰을 뿐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에게 잘못이 있다면 국왕과 왕비가 된 것이 아닐까?

 

1) 서민들이 주식으로 먹던 빵[pain]과 부자들이 먹던, 버터와 달걀을 넣어 맛을 돋운 고급 빵[brioche]을 대조하는 말인데, 영어나 한국어 등에서는 ‘브리오슈(brioche)’가 ‘케이크’로 번역되었다고 한다.

2) 드디어 나는 한 지체 높은 공주가 제안했던 임시방편을 기억해 냈다. 사람들이 그 공주에게 “농민들에게 빵이 없다”고 말하니, 그 공주는 “브리오슈(brioche)를 먹게 하세요”라고 대답했다. [Enfin je me rappelai le pis-aller d’une grande princesse a qui l’on disait que les paysans n’avaient pas de pain, et qui repondit : Qu’ils mangent de la brio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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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 - 한 권으로 독파하는 우리 도시 속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함규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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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수도들

 

<30개 도시로 읽는 한국사>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30개 도시에 고구려의 수도인 평양과 지안[集安 혹은 輯安, 국내성], 백제의 수도인 공주, 신라의 수도인 경주, 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락(駕洛) 혹은 금관가야[김해], 발해의 수도인 닝안[寧安, 상경용천부],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完山州) 혹은 전주(全州), 고려의 수도인 개성, 조선의 수도인 서울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다만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부여가 빠진 것이 의외였고, 후기 가야연맹의 수장인 가라(加羅) 혹은 대가야[고령]은 포함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옛 수도들 가운데서 아무래도 시선이 가는 곳은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지안]과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닝안]다. 먼저 지안[集安 혹은 輯安]은 졸본(卒本) 혹은 홀본(忽本)에 이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國內城)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424년이나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지만, 당대(當代)의 사서(史書)가 전해지지 않은 탓에 그 위치에 대해 여러 학설이 있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지안설이 대세이며, 이 책에서도 지안을 두고 국내성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유적 때문이다. 국내성 유적과 환도성 유적 외에 구 외곽에 있는 태왕릉, 장군총, 무용총, 각저총, 광개토대왕릉비 등 오늘날 고구려 문화유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안의 유적들은 수백 년 동안 잊혀 있다가, 20세기 초 뒤덮은 나무와 잡초, 흙 등을 제거하고 무너진 부분을 복원하고 나서야 제 모습을 드러냈다. [p. 636]

 

<신당서>에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 고려에 더부살이하던 것들로서, 성은 대씨다[渤海 本 粟末靺鞨 附高麗者 姓大氏)]’이라는 기록 때문에 중국에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가 아닌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 그들은 발해를 ‘당(唐))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粟末靺鞨)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적인 연호1)와 고구려라는 정체성2)을 가졌으며, <신당서>보다 앞선 <구당서>에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려 별종이다[渤海靺鞨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라는 표현 등을 감안하면 발해는 한국사의 일부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가장 장기간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즉 닝안[寧安]에 대해 저자가 어떻게 서술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지안에 이어 닝안 부분을 펼쳐봤다.

 

오늘날 발해 상경 유적지는 보하이진[渤海鎭]에 있다. 그곳에 가면 상경유지(上京遺址) 박물관이 있어서 1930년대 이래 발굴되고 조사된 발해 유적지의 실체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진열실 첫머리부터 발해를 설명하는 문구는 “당나라의 속국 중 하나. 속말말갈 중심의 지방 민족 정권”이라고 되어 있다. 고구려계가 왕실을 구성하며 고구려의 후계국가로 존립했다는 진실과 당에 형식적으로 조공했더라도 결코 속국이라 할 수 없는 독립국가 해동성국이었다는 사실, 보다 나아가 발해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정체성을 깡그리 부정하는 문구인 것이다. 이는 동북공정이라는 말 자체가 나오기 전부터 중국의 일관된 입장이었다. 따라서 이곳을 들르는 한국 연구자와 관광객들의 항의가 끊이지 않고, 발해 관련 국제학술대회가 열릴 때마다 ‘발해사는 한국사인가? 중국사인가?’를 두고 두 나라의 학자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거듭 벌어지고 있다. 최근에는 엉뚱하게도 러시아 쪽에서 두 나라의 과도한 민족주의적 시각을 중재한다며 발해사는 중앙아시아 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는 관점을 제시하기도 했다.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와 만주의 삼림 지대는 생활환경, 문화환경이 모두 판이하건만, 그렇게 주장하는 까닭은 중앙아시아의 맹주가 러시아라는 의식 때문이다. 한반도를 비롯해 만주 땅 전부가 일본의 터전이라 여긴 일본의 만선사관처럼 말이다. [pp. 685~686]

 

거란, 즉 요(遼)나라는 926년 발해를 멸망시키고 928년 상천용천부의 주민을 이주시켜 상경용천부가 급격히 쇠락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발해의 마지막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다가 수만 명의 백성과 함께 고려로 망명했다. 이런 가운데 발해 유민들은 점차 응집력을 잃어버렸고, 이들을 대신해서 흑수말갈의 후예, 그 가운데서도 건주 여진이 이곳을 그들의 발상지인 ‘닝구타[寧古塔]’로 기억한다.

 

옛 수도이지만 우리가 가기 힘든 도시로는 평양과 개성도 있다. 여기서 가장 흥미 있는 도시는 ‘붉은 워싱턴’, 평양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폭격을 훨씬 뛰어넘는 무지막지한 폭격으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의 주요 도시들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하여 휴전 뒤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새로운 평양이 건설될 수 있었다.

오늘날의 평양과 비슷한 도시를 꼽는다면 어디일까? 서울? 아니다.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자 혈맹인 중국의 수도 베이징? 그렇지 않다. 지구상에서 평양과 가장 비슷한 도시는 미국의 워싱턴이다.

누군가 워싱턴을 “죽은 사람들을 위한 도시”라고 폄하했었다. 과언이 아니다. 이집트 파라오의 오벨리스크를 본뜬 워싱턴 기념탑을 중심으로 넓고 긴 도로가 마름모꼴을 그리고, 마름모의 꼭지점마다 국회의사당, 백악관, 링컨 기념관, 제퍼슨 기념관이 있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은 말할 것도 없이 미국 정치권력의 두 정점이며, 링컨과 제퍼슨 기념관은 건국의 아버지와 현대 미국의 아버지이자 노예 해방자를 모신 신전이다. 고고한 백색으로 빛나는 건물을 넓고 푸른 잔디밭과 포토맥강이 둘러싸고 있다. 전후 평양시를 재건할 때 이 워싱턴을 참고했는지는 모르지만, 대동강이 도는 도시 공간을 일정하게 구획하고 거대 기념물들을 배치한 점에서 이만큼 짝을 이루는 도시도 없다. [pp. 553~554]

 

 

이 곳도 한국사에 등장하는 30개 도시인가요?

 

이 책에 소개된 ‘30개 도시’ 가운데 가장 의아했던 곳은 ‘제주’와 ‘대마도’다.

우선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볼 수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이 책, 아니 이 시리즈가 숱한 세월 속에서도 그 자리에 남아 축적된 도시 속 숨은 이야기를 통해 한국사를 풀어내고자 하는 의도라고 알고 있는데,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라고 밀어 넣은 것은 다소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제주도’와 ‘대마도’를 도시로 본다고 하더라도 ‘대마도’의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바로 대마도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다. 만약 대마도의 역사를 한국사의 일부라고 한다면 독도(獨島)를 다께시마[竹島]라고 하면서 일본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발 혹은 극우적인 사고 방식의 산물이라고 여길 수 밖에 없다. 저자도 여기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는지, 11장 대마도 편에 들어가기에 앞서

 

대마도를 이 책의 일부로 넣는 일은 많이 망설여졌다. 지안이나 단둥 등은 한때는 분명 한국의 영토였지만, 대마도는 ‘확실히’ 영토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자칫 이 책이 ‘낭만적 민족주의’를 부추긴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어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불확실하게’ 영토였던 적은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비롯해 한일관계사, 한국이 일본과 겪은 여러 애증의 역사에서 대마도가 중심에 있었던 적이 많았다. 그래서 이 장을 썼다. [p. 287]

 

라고 서술했다. 도대체 언제 대마도가 ‘불확실하게’나마 한국의 영토였을까?

 

대마도가 신라 땅이었다는 말은 조선 초에도 상식처럼 여겨지고 있었던 듯하다.  바로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 당시, 대마도주에게 보낸 유시문(諭示文)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대마도는 우리나라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해 있던 섬이니, 본래 우리나라 땅이란 것이 문적(文籍)에 실려 있어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느니라. 다만 그 땅이 매우 좁고 바다 가운데 있어서 오가기 힘든 관계로 백성들이 살지 않았다. 이에 왜노 중에 본국에서 쫓겨나 오갈 데 없는 자가 죄다 이곳으로 모여들어 소굴을 만들어놓고, 수시로 약탈을 자행하면서 약한 백성의 처자식을 잡아가거나 백성의 살림을 분탕질하기도 하니, 그 흉악한 만행이 여러 해 이어져 오고야 말았다.

 

종합해서 추정해 보면, 신라가 대마도를 내륙의 고을처럼 세를 거두고 법을 집행하며 중앙집권적으로 통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지방관도 주재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군사적 거점 같은 것은 있었을지 모르며, 백성이 살지 않거나 별로 없지만 우리 땅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그런 모호한 영토권은 왜의 입장에서도 주장할 만했다. [pp. 296~297]

 

1246년 백제계 아비루[阿比留] 가문에서 일본계 소[宗] 가문으로 대마도의 지배자가 교체되었고, 일본에서 ‘분에이[文永]의 역(役)’이라 부르는 여몽연합군의 1차 일본원정(1274년)을 계기로 모호한 경계선에 있던 대마도인들은 일본인이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아예 일본의 한 지방으로 확정되었다.

 

왜란 이전까지 일본 지도나 일본 행정 체제에 대마도는 없었다. 그러나 왜란 이후로는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인정된다. [p. 308]

 

이 책에는 조선시대 8도를 대표하는 도시 가운데 독일풍의 도시로 재건된 함경도의 함흥, 평안도의 평양, 황해도의 해주, 전라도의 전주, 경상도의 경주, 강원도의 강릉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사라는 요소만 고려한다면, 고려 왕건을 지지하면서 후백제 견휜(甄萱)의 배후를 노리는 비수 역할을 했으며 전라도의 또 다른 대표도시였던, 나주도 포함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제외되어 아쉬웠다.

 

독일 태생으로 북한에 유학해 북한 연구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빈 대학의 뤼디거 플랑크 교수는 현대의 함흥을 “독일풍의 도시”라고 말한다. 그렇게 된 데는 까닭이 있다. 잿더미가 된 도시의 전후 복구 과정에 동독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기원전 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진 이 동양의 고도(古都)는 근대 서구의 도시처럼 바둑판처럼 반듯하게 정리된 도시로 재탄생했고, 동독에서 유행하던 노란색 타일을 붙인 건물이 즐비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새로 닦은 가로의 이름을 빌헬름피크대로로 붙이기도 했으나, 지금은 슬그머니 그 이름을 바꾸고, 전후의 재건도 천리마운동 등 자체 노력의 산물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pp. 592~593]

 

어쨌든 이렇게 28개의 도시와 2개의 섬을 둘러보면서, 단순히 무슨 왕이 어떤 일을 했느냐 혹은 **년에 무엇이 일어났느냐를 외어야 했던 한국사에서 벗어나 여행하듯이 각각의 도시들이 간직하고 있는 얘기들을 듣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지면의 10% 이상을 서울이 차지하고 있고, 30개 도시라는 제한으로 한국사에서 한 몫 했던 도시 모두가 포함되지 못해 다소 아쉬운 점은 있지만 한번쯤 읽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가 직접 가기 힘든 북쪽 땅과 잃어버린 영토에 있는 도시들의 경우에는 이런 경우가 아니면 쉽게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이 리뷰는 다산북스로부터 무료로 책을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1) 2대 무왕(武王) 대무예(大武藝)때의 인안(仁安)부터 왕호가 전해지지 않는 11대 대이진(大彛震)때의 함화(咸和)까지는 중국측 사서에도 발해의 독자적인 연호가 전해진다.


2)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스스로 ‘고려(=고구려)’를 칭했다고 한다.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고려국왕 대흠무[大欽茂, 발해의 3대 국왕 문왕]가 말합니다.”라는 표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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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운데이션 파운데이션 시리즈 Foundation Series 1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옥수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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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의 3대 거장 중 하나인 아이작 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 시리즈는 은하 제국의 흥망성쇠를 다루고 있는 대하 소설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영감을 얻어 집필된 작품이라서 그런 것일까? 특정한 주인공이 없고 시대 혹은 역사 그 자체가 주인공이라는 느낌이 드는 기묘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권인 <파운데이션>은 인류 문명의 암흑기를 단축하기 위해 ‘파운데이션’을 설립한 심리역사학자 해리 셀던의 계획부터 시작한다. 그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려고 변방에서 온 가알 도닉을 비롯한 한 무리의 과학자들과 그 가족들을 은하계 끄트머리에 있는 ‘터미너스’라는 별에 추방의 형식으로 보낸다. 이들은 표면적인 목적인 백과사전 편찬에 전념한다.

50년의 시간이 흐른 뒤 이들은 은하 제국의 영향력에 벗어나 독자세력화를 시도하는 이웃들의 압력 속에서 파운데이션이 설립된 진실된 목적을 알게 된다. 이때 백과사전 편찬만을 우선시 하는 위원회로부터 초대 시장인 샐버 하딘이 파운데이션의 실권을 탈취하고, 주변 세력들 간의 세력 균형을 이용해서 위기를 극복한다.

다시 30년이 흐른 뒤에는 샐버 하딘이 아나크레온 왕국의 파운데이션에 대한 공격을 종교를 이용해서 물리친다.

파운데이션이 건설되고 150년이 지난 후, 종교와 교역이 결합된 영토 확대를 꾀하는 기득권 세력을 물리치고 시장이 된 무역상인 출신의 호버 말로가 교역을 이용해서 코렐 공화국과의 전쟁에 승리한다. 이렇게 <파운데이션>에서는 3차례의 각기 다른 ‘셀던 위기’로 표현되는 시대의 과제를 해결한다.  

 

언뜻 보면 할리우드의 히어로 영화처럼 위기가 다가오면 영웅이 등장해서 손쉽게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래서 어렸을 때 읽고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심리 역사학’에 흠뻑 빠져, 실제로 가능하다면 한번쯤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심리 역사학’에 의한 미래는 조지 오웰의 <1984>와 비슷한 디스토피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 해리 셀던은 시간 유품관에서 이렇게 말했네. 위기가 닥치는 순간마다 우리가 누리는 행동의 자유는 단 한 가지 행동만 취할 수 있도록 범위를 제한시켜야 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계속 좁은 길만 따라가야 한다 말씀입니까?”

곁길로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하네. ……” [p. 131]

 

이처럼 <파운데이션> 시리즈에서 ‘심리 역사학’은 새로운 제국 수립을 위한 설계도이자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동시에 이것은 ‘파운데이션’의 시민들, 나아가 은하 제국의 신민들에게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주어진 미래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삶이 예정되어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물론 많은 심리학 실험이 그렇듯이 대상자가 실험의 의미를 알 경우 결과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기에 변수를 줄이기 위해 사람들에게 알릴 수 없는 것은 이해한다. 그래서 해리 샐던도 변방의 행성 ‘터미너스’에 ‘파운데이션’, 즉 제1 파운데이션을 설립하면서 심리학자를 제외시켰을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통제는 ‘암흑시기의 축소’라는 대의(大義)를 위해 우리가 감수해야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통제 받는지도 모르고 다른 이가 규정한 삶을 자신이 선택한 삶이라 여기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노예의 삶이 아닐까? 자신의 의지로 행동했다고 믿었던 것이 누군가의 의지에 의해 통제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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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으로는 첫 번째, 전체로는 두 번째 [이달의 당선작]에 선정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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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 익숙하고 낯선 도시가 들려주는 일본의 진짜 역사 이야기 30개 도시로 읽는 시리즈
조 지무쇼 지음, 전선영 옮김, 긴다 아키히로.이세연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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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크게 서일본의 규수[九州], 시코쿠[四國], 주고쿠[中國], 간사이[關西]와 동일본의 주부[中部], 간토[關東], 도호쿠[東北], 후카이도[北海道], 그리고 1872년 1차 류큐 처분을 통해 일본에 편입된 오키나와[沖繩]까지 9개 지역으로 나뉜다. 오키나와는 규수-오키나와 지방으로도 표기되지만, 엄연히 독립국가였던 류큐(琉球) 왕국의 터이기에 이 책에서도 하나의 지역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 9개 지역에서 30개 도시를 선별해서, 위의 그림처럼 첫 장에 해당 도시가 어느 지역에 해당하는지, 2020년 기준 도시 인구가 얼마인지, 도시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열거하고 있다. 이어 해당 도시의 핵심적인 특징과 간략한 역사 등을 통해 작게는 해당 지역, 크게는 일본을 드러내려고 시도한다.

 

가장 먼저 나오는 홋카이도[北海道] 지방에서는 우리에게 ‘눈의 도시’로 유명한 삿포르[札幌]와 쓰가루[津輕] 해협을 사이에 두고 혼슈[本州]와 마주보고 있어 초기 훗카이도 개척의 거점이 되었던 하코다테[函館]가 선정되었다. 삿포르는 ‘훗카이도 개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시마 요시타케[島 義勇, 1822~1874]에 의해 교토를 본뜬 바둑판 모양의 계획도시로 구상되었다는 점이, 하코다테는 최초이자 최대의 서양식 성곽인 고료카쿠[五稜郭]이 인상적이다.

 

고료카쿠[五稜郭] 고지도

출처: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A%B3%A0%EB%A3%8C%EC%B9%B4%EC%BF%A0#/media/%ED%8C%8C%EC%9D%BC:GoryokakuPlanLarge.jpg)

 

고료카쿠

출처: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p. 32

 

도호쿠[東北] 지방에서는 한때 번영했다가 몰락한 교역 도시 도사미나토[十三溱], 금채굴 등으로 얻은 재원으로 번영했던 히라이즈미[平泉], 다테 마사무네[伊達 政宗, 1567~1636]의 도시인 센다이[仙臺등이 선정되었다. 센다이에는 스페인 대사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Sebastian Vizcaino, 1548?1624)가 ‘일본에서 가장 우수하고 가장 견고한 성’이라고 평가했던 센다이성[仙臺城]이 있었다. 아쉽게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으로 성(城)의 정문 등이 소실되었다. 다행히 도시의 경관(景觀)은 유지되어, 숲 속의 거리를 보는 듯한 조망에서 유래된 ‘숲의 도시’라는 애칭은 남아있다. 따지고 보면 이것도 다테 마사무네의 지시에 의한 것이니 센다이를 ‘다테 마사무네의 도시’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듯하다.

 

마사무네가 기근 대책으로 복숭아 나무와 감나무, 배나무 등을 심게 하고, 이웃과의 경계를 명확하게 할 목적으로 삼나무를 심게 했으며, 바람과 화재를 막기 위한 목적으로 나무를 심도록 장려한 결과이다. [p. 70]

 

간토[關東] 지방에서는 도쿄[東京], 1859년 개항한 이후 일본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한 요코하마[橫浜], 막부 정치를 시작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 賴朝, 1147~1199]가 거점으로 삼은 가마쿠라[鎌倉등이 선정되었다.

 

주부[中部] 지역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라는 스와 대사[諏訪 大社]가 있으며 시계, 카메라, 의료기기 등 정밀 기계 공업과 산이 깊은 지형으로 ‘동양의 스위스’라고 불리는 스와[諏訪], 서회항로(西廻航路)의 개설로 인해 쌀 교역항으로 번성했던 국제 무역항 니가타[]. 일본 3대 정원 중 하나인 겐로쿠엔[兼六園]와 일본 금박 생산량 98%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가나자와[金澤], 코산케[御三家]의 으뜸인 오와리 도쿠가와[尾張 德川] 가문의 터전으로 예인(藝人)과 상인을 중시한 7대 번주(藩主)인 도쿠가와 무네하루[德川 宗春, 1696~1764]의 영향으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상술이 뛰어나다는 기질이 형성되었다는 나고야[名古屋등이 선정되었다.

 

가나자와 역

출처: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p. 186

 

간사이[關西] 지역에서는 도시의 1/4 이상을 신궁(神宮)이 차지하고 있어 ‘신(神)의 도시’로 불리는 이세[伊勢], 당(唐)나라의 장안(長安)을 모델로 세워진 고도(古都) 헤이조쿄[平城京]였던 나라[奈良],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경제도시로 계획된 ‘천하의 부엌’ 오사카[大阪], 도시의 상공업자인 조닌[町人]들의 조직인 에고슈[會合衆]에 의한 자치가 이루어져 ‘동양의 베니치아’라고 불리던 사카이[], 천년고도(千年古都)인 교토[京都], 외국인 거류지에 건설된 이진칸[異人館]으로 대표되는 이국적 낭만과 1995년 고베 대지진의 아픔이 공존하는 국제도시 고베[神戶등이 선정되었다.

 

헤이조쿄[平城京]의 도시 구획

출처: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p. 219

 

중세 일본의 도시 중에서 당시 유럽 사회에 가장 이름이 알려져 있었던 도시는 도쿄도 하카타도 아닌 사카이였다. 1556년 일본을 찾은 포르투갈 선교사 가스파 빌레라는 사카이를 ‘동양의 베네치아’로 자신의 저서에 소개했으며, 당시의 세계 지도에도 그 이름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p. 256]

 

주고쿠[中國] 지역에서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발전을 이룬 탓에 원폭투하의 대상이 된 히로시마[廣島],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 위의 포노>에게 영감을 준 작은 어촌인 도모노우라[?の浦], 무로마치[室町] 시대 교토 문화를 동경했던 오우치[大內] 가문에 의해 독특한 오우치 문화가 꽃피워 서쪽의 교토’라고 불렸던 야마구치[山口등이 선정되었다

 

조선의 국왕이 에도에 파견한 조선 통신사 일행도 도모노우라를 중계지로 이용했다. 겐로쿠 연간인 1690년 무렵, 도모초토모에 있는 후젠지에는 본당에 접하여 객전이 지어져 조선 통신사 일행의 영빈관으로 쓰였다. 1711년에 일본을 찾은 조선 통신사 종사관 이방언은 세토 내해에 떠 있는 벤텐섬과 센스이섬이 내려다보이는 객전의 전망을 ‘일본에서 으뜸가는 명승’이라 칭송했으며 1748년에 통신사 정사로 일본을 찾은 홍계희는 이 객전에 대조루(對潮樓)라는 이름을 붙였다. [pp. 314~315]

 

일본을 구성하는 4개의 섬 가운데 하나인 시코쿠[四國] 지역에서는 나쓰메 소세키[夏目 漱石, 1867~1916]가 쓴 <도련님>의 배경이 된 온천 마을인 마쓰야마[松山]가 선정되었다.

 

규수[九州] 지역에서는 한반도와 대륙과 가까워 1세기 무렵부터 교역의 창구가 되었던 후쿠오카[福岡], 포르투갈인의 교역과 포교를 위한 개항지로 시작되어 서양문화 수입의 창구가 된 나가사키[長崎],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고향이라는 가고시마[鹿兒島] 등이 선정되었다

 

우리에게는 이국적인 휴양지가 떠오르는, 오키나와[沖繩] 지역에서는 류큐(琉球) 왕국의 수도이자 옛 왕성이 있던 슈리[首里]가 그 외항이었던 나하[那覇]에 합쳐져서 소개되었다.

 

슈리성

출처: <30개 도시로 읽는 일본사>, p. 389

 

총 30개 도시를 다룬 30편의 글인 만큼 본격적으로 일본사를 파고 들어가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관심 가는 도시부터 하루 한 도시씩 역사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읽기에 괜찮은 편이다. 역사를 테마로 하는 일본 여행 가이드북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을 듯하다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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