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 -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
김금숙 지음, 정철훈 원작 / 서해문집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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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블라디보스토크의 형무소에서 어느 수감자가 자신이 처형시킨 인물 가운데 죽음 앞에서도 당당했던볼셰비키의 우두머리라는 한인 여성이 있었다는 고백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를 이어 착취 받는 이들을 대변하다.

 

김두서(金斗瑞)는 생존을 위해 고향인 함경북도 경흥을 떠나 북으로 갔다그는 한국중국러시아의 접경지인 지린[吉林]의 훈춘[琿春]에서 잠시 소작농 생활을 하면서 중국어를러시아로 이주 후에는 러시아어를 익혔다.  그러다가 연해주 우수리스크 인근의 시넬니코보[永安坪]에 정착하면서 귀화하여 표트르 김이 되었다그의 어학 능력 때문에 동청철도(東淸鐵道)1) 현장에 파견된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징집되었는데여기서 그는 몸을 돌보지 않고차별 받고 심지어 임금체불마저 당하는 한국과 중국 노동자를 위해 철도관리국에 항의하거나 노동쟁의를 벌여 못 받은 임금을 받게 해줬다이렇게 명성을 떨쳤지만제대하고 나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그의 딸인 김알렉산드라[1885~1918, 본명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애칭은 쑤라]는 아버지의 사망 후 그의 친구였던 폴란드 귀족 출신 러시아인 표트르 스탄케비치의 도움으로 블라디보스토크의 여성사범학교에 입학했다교사가 되면서 표트르 스탄케비치의 아들 마르크 스탄케비치(이하 마르크’)와 결혼을 했다한때 사상적 동지였지만 항만노조 일을 돌보느라 며칠씩 집에 오지 않는 그녀를 의심하고 이해하지 못한 남편은 도박에 빠지고 폭력을 휘둘렀다결국 스탄케비치 가문의 귀신이 되라는 남편의 저주를 뒤로 한 채 그녀를 집을 떠났다.

 

여기에 우랄로 떠난 노동자들이 계약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자그녀는 다시 현장으로 향했다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1914년 우랄의 벌목장에 통역으로 간 것이었다.

 

2월 혁명 전야의 파도는 우랄까지 당도했다.

난 이 문제를 러시아 사회민주당 예카테린부르크 지부에 편지를 보내 우랄 목재소의 지옥 같은 상황을 고발했다(뤄쯔거우[羅子溝무관학교 출신생도들과 한인 노동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전폭적으로 날 지지했고점점 나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그들의 억울함을 자세히 들어주는 일이야말로 수없이 꼬인 문제들을 풀어내는 기초가 되었다.” [p. 174]

이를 기반으로 그녀는 우랄 노동자 연맹을 조직했다.

감격의 순간이군요이제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러시아·중국 노동자일제의 강점에서 독립하고자 투쟁하는 한인오스트리아 포로병그 모두가 우리의 동무입니다노동과 계급의 형제언제 어디서나 서로를 도울 동지입니다얼굴도 다르고 피부색과 국적도 다르지만 일하는 자로서 하나입니다만세!” [p. 185]

나아가 그녀는 2월 혁명 직후 차르 정부가 미지급한 노동자 임금을 받아내서 명성을 얻었다.

 

 

전환점최초의 한인 볼셰비키

 

1917년 그녀는 사회민주당에 가입한다그리고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 1870~1924)을 접견하고그의 오른팔이자 탁월한 조직가인 야코프 스베르들로프(Yakov Sverdlov, 1885~1919)의 요청으로 하바롭스크로 파견되어 극동인민위윈회 조직에 참여한다. 1918년에는 극동인민위원회 외교인민위원(외무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같은 해에 이동휘(李東輝, 1873~1935) 등과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2)을 결성한다다만김알렉산드라가 사회민주당 당원이었기에 직책은 맡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이동휘와 함께 100명 규모의 한인사회당 적위군(赤衛軍)’을 조직러시아 혁명군인 적군(赤軍)에 가담하여 반()혁명세력인 러시아 백위군(白衛軍)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그러다가 그 해 9월 하바롭스크가 함락되자 철수하는 과정에서 러시아 백위군에 발각체포된다.

 

이후 재판관이 그녀에게 만약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고 호소한다면 당신은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다” [p. 225]고 회유했지만,

그녀는 “당신의 표현은 나뿐만 아니라 이 세계 인구의 반을 점하는 모든 여성을 모독했어요당신은 여성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지요.

계급투쟁에 나뿐만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이 참여하고 있어요당신은 그 모든 여성에게 자신의 활동을 뉘우치라고 얘기할 건가요?

잘 들으세요몇 년 뒤에 극동에서조선에서중국에서전 세계에서 여성이 남성과 나란히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참가할 것입니다내가 해오던 일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만 명의 여성 가운데서 전개되어 나갈 것입니다.

만약 내가 당신의 말대로 여성으로서 자신의 범죄를 뉘우친다면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배신하고 전 세계 여성 앞에 죄를 범하는 게 될 것” [pp. 225~226]이라고 반박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갔다.

 

혹시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그녀가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지 못했다고 볼 여지는 있다하지만그녀가 혁명가로서 살아가고또 살아가기로 결정한 것이 결국 아이들이 장차 살아갈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능하고이해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그녀와 같은 이들의 희생 덕분에 지금의 삶이 가능해졌으니까물론 지금도 완벽하게 평등한 세상은 아니다그러나 남성과 여성계급과 지위민족과 인종의 차별 없는 세상에 대한 그녀의 꿈을 지금 우리가 나눠서 꿈꾸면 언젠가는 그런 세상이 오지 않을까?

 

 

옥의 티

 

p. 203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사회당)이 탄생했다.

→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사회당)이 탄생했다.



1) 동청철도헤이룽장성(黑龍江省하얼빈[哈爾濱]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내몽골[內蒙古자치구 만저우리[滿洲里], 동쪽으로는 헤이룽장성(黑龍江省쑤이펀허[綏芬河], 그리고 남쪽으로는 랴오닝성[遼寧省다롄[大連]과 뤼순[旅順]을 잇는 철도 노선이다. 1911년 중화민국이 성립된 후에는 중동 철도(中東鐵道)라고 불렀다.

2) 임시 의장 이동휘(李東輝, 1873~1935), 부위원장 오와실리[한인 2김알렉산드라와 사실혼 관계], 군사부장 유동열(柳東說, 1879~1950), 당 기관지 <자유종주필 겸 출판부장 김립(金立, 1880~1922), 내무부장 겸 선전부장 이인섭(李仁燮, 1888~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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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바타 야스나리 - 설국에서 만난 극한의 허무 클래식 클라우드 10
허연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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雪國에 들어가다.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를 대표하는 소설 <설국(雪國)>의 첫 문장,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境の長いトンネルをけると雪であった]”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그래서 저자도 가와바타 야스나리를 찾아가는 여행을 소설 <설국>의 배경이자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집필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에치고유자와[越後湯]’에서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 아닐까?

 

제대로 된 설국을 보기 위해 일기예보까지 확인한 저자는 열차를 타고 시미즈[淸水터널을 지나환상 속의 마을에 도착한다.

그리고 몇 초 후 터널이 끝났다말 그대로 설국이었다밤 시간은 아니었지만 터널 반대편에 비해 습하고 흐렸으며 눈은 역 구내에까지 높이 쌓여 있었다온통 흰색으로 된 세상설국이었다온도와 습도색깔이 터널 저쪽과는 너무도 다른 세상이었다말 그대로 딴 나라였다.

기차가 천천히 속도를 줄이는 동안 차창 밖으로 플랫폼에까지 날아와 쌓인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청소나 정리를 잘하는 일본인들의 기질로 미루어봤을 때 역 구내에 이만큼 눈이 쌓인 건 몇 시간 만의 일일 것이 분명했다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의 방문에 맞춰 폭설을 내려준 조물주에게 감사했고이제 기차에서 내려 걸어가게 될저 멀리 보이는 시골길의 풍경이 내 마음을 설레게 했다.” [p. 43]

아마 이때 저자의 기분은 해리포터가 9 3/4 플래폼을 지나 호그와트 마법학교로 도착했던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줄거리의 소설이 아닌 이미지의 소설

 

피천득의 <인연>은 피천득과 아사코[朝子] 3차례의 만남과 이별을 그리고 있다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도 어떻게 보면부모의 유산으로 살아가면서 서양무용 평론가를 자처하는 기혼자 시마무라[島村]와 병든 약혼자의 약값과 병원비를 대기 위해 게이샤[藝者]가 된 코마코[駒子] 3차례 만남그리고 코마코의 친구인 요오코(葉子)와의 만남을 주된 이야기로 하고 있다.

줄거리만 보면 불륜을 다루는 로맨스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국>은 노벨 문학상을 받고일본문학 사상 최고의 서정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다행히 저자는 그 이유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설국>을 읽고 실망했다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재미가 없다는 반응에서부터 너무 밋밋하다” “이해하기 어렵다” 등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내 생각에 이런 반응은 <설국>에 대한 잘못된 접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설국>은 인과관계가 분명한 여타 소설과는 조금 다른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우리가 소설에 접근하는 익숙한 방식인 줄거리 위주 독법이나 기승전결을 염두에 둔 흔한 독법으로 읽다 보면 <설국>에 내재되어 있는 여러 가지 암시적 장치를 놓치고 만다.

결론부터 말하면 <설국>은 일종의 '암시 소설'이다. <설국>에는 사건과 그 사건들이 결합해 결말로 향해 가는 뚜렷한 줄거리가 없다게다가 주인공들의 캐릭터와 감정 표현도 애매하기 짝이 없다.

<설국> 줄거리의 소설이 아니라 이미지의 소설이다. <설국>에서 나오는 모든 배경은 일종의 논리가 아닌 이미지다시마무라[島村]가 살고 있는 도쿄라는 현실 세계가 아닌 터널 밖의 세계즉 에치고유자와[越後湯]라는 이미지의 세계에 관한 이야기이다.” [p. 62]

 

결국 <설국>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읽는 방법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국>을 가장 잘 읽는 방법은 한 행 한 행시를 읽듯 이미지를 읽어나가는 것이다읽으면서 소설 전체의 인과관계를 찾거나 그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기 보다는 그냥 나열된 이미지 하나하나를 감상하듯 읽어야 한다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독자 스스로 어떤 종합에 이르게 된다.” [pp. 82~84]

 

 

허무와 체념의 미학

 

그렇다면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왜 이런 이미지의 소설을 썼을까?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1899년 오사카의 부유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하지만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버지어머니를 거의 경험하지 못한 채 자라난다두 살 때 아버지가세 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부모가 사망한 후 이바라키에 있는 조부모 집에서 살았지만 일곱 살에 할머니가열 살 때는 누나가 세상을 떠난다그리고 결국 마지막 보호자였던 할아버지마저 열다섯 살 때 돌아가시면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장례의 명인’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그의 초반 생은 죽음과 이별로 점철되었다.” [pp. 134~135]

뿐만 아니라 도쿄 제국대학 영문학과 재학 시절 사귀게 된 첫사랑의 소녀 이토 하쓰요[伊藤 初代]에게 일방적으로 파혼 당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아마도 이렇게 삶의 환희보다 죽음의 허무그리고 체념을 먼저 배운 그의 삶이 현실에서 한 발짝 떨어진 듯한 글을 쓰게 한 것이 아닐까?

 

1968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자신의 삶과 문학에 관해 “고독과 죽음에 대한 집착으로 삶을 살았고 글을 썼다”고 말한 적이 있다동시에 그는 “작품을 통해 죽음을 미화하고 인간과 자연과 허무 사이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했다”며자신은 “평생 동안 아름다움을 얻기 위해 애썼다”고도 덧붙였다어떤 주장도 힘주어 말하지 않는 습관이 있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말치고는 꽤나 단정적인 발언이었다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철학과 문학적 지향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고백이다그에게 현실은 죽음이었고죽음은 자연과 동일한 것이었으며 허무하고 아름다운 궁극 같은 것이었다이런 세계만을 바라본 그에게 현세에서 통용되는 법칙이나 승패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p. 243]

 

어쩌면 그는 벚꽃이 지듯 스러져 가는 일본식 죽음의 미학을 삶과 글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그래서 저자도 나는 그를 떠올리면 늘 벚꽃이 생각났다죽기 직전의 모습이 이다지도 화려한 꽃이 벚꽃 말고 또 있을까벚꽃은 절정의 시기를 잠시 보여주고 꽃비가 내리듯 소멸을 향해 간다어느새 돌아보면 꽃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푸른 잎만 남는다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는 것을 알려주듯이바라키의 벚꽃도 그렇게 영혼처럼 떨어져갔으리라” [p. 147]고 말한 것이 아닐까?

 

저자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을 허무만으로 얘기하지 않는다아예 직설적으로 체념의 문학이라고 말한다흔히 체념이라고 하면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한다는 것처럼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는데여기서는 반대로 이치나 도리를 깨닫는 마음을 의미한다.

체념이라는 단어는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내내 나를 따라다닌 ‘화두’였다체념한다는 것그리고 그 체념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그것이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체념에는 체념이 주는 힘이 있다깊은 체념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안다체념이 힘이 된다는 것을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내가 원고의 첫 행을 쓰는 것은 절체절명의 체념을 하고 난 다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희망보다 체념을 먼저 배운 자는 잔치가 끝난 다음의 미학이 무엇인지를 안다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그 흔적들만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공간에서 몸을 일으켜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분명 색다른 미학이다모두 다 끝났다고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순간 ‘코피를 쏟는 일’그것은 체념의 도를 깨우친 자만이 찾아낼 수 있는 표현이다.” [p. 138]

절망과 허무를 극복한 긍정적인 그 무엇이 체념인 것이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문학에 대해 잘 모르겠다그저 영상으로 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뿐학창시절에 읽었던 <설국> <천우학(千羽鶴)>을 다시 읽으면 이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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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 a love letter to my city, my soul, my base
유현준 지음 / 와이즈베리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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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고 길들여지다

 

건축가 이상현은 <길들이는 건축 길들여진 인간>(2013)에서 사람은 자신과 관계된 모든 대상을 자연스레 길들이는 속성이 있다관계가 처음과 다르게 점점 변했다면그 대상에 대해 길들이기가 이뤄진 것이다다시 말해 대상을 대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길들이기를 통해 처음에는 어색하고 서툴렀던 관계가 편안하고 익숙한 관계로 변한 것은 길들이기의 결과다.

(이런 방식으로사람은 모든 대상과의 관계에서 길들임과 길들여짐을 반복하고 있다자신에게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를 요구하고거기에 맞춰 스스로 변해가기 때문 [p. 19]이라고 했다.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라는 천문학에 대한 이야기일 것 같은 제목과 달리저자는 이 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사람은 일생 동안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태어난 직후에 만나는 부모님부터 시작해 형제친구애인선생님들과 함께한 기억은 찰흙을 빚는 손처럼 한 사람을 만든다영화음악미술 등 예술도 한 사람을 이루는 모태가 된다.

시간을 보낸 공간도 그 사람을 만든다이 책은 나를 만든 공간에 대한 이야기다.” [p. 13]

어떻게 보면이 책은 그런 길들임이 개인에게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저자가 어린 시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살았거나 특별한 추억이 있는 공간들을 사진과 함께 소개하는 에세이를 모았다보통 이런 글은 대중들이 사생활을 궁금해하는 유명인이 쓴다고 생각했기에 건축가인 저자가 왜?’ 하는 생각도 들었다하지만출판사에서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가 도시를 사랑할 수 있도록 함께 책을 만들어보자고 유현준 저자에게 제안” [p. 421]해서 이 책이 나왔다는 편집 후기를 보고 <알쓸신잡>에서의 얻은 유명세와 <어디서 살 것인가>, <도시는 무엇으로 사는가등의 저서로 어우러진 이미지와 의외로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나만의 특별한 공간


길들여지기 전의 공간은 평범한 열린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하지만그 공간이 나와의 상호작용에 의해 어떤 기억이 떠오르는 공간이 된다면 그 공간은 나만의 특별한 공간이 된다저자인 건축가 유현준의 <당신의 별자리는 무엇인가요> ‘1장 나를 만든 공간들유년 시절에서 소개한 구의동 주택 공간은 그런 공간 중에 하나다.


사실 이 책에서 저자가 늘어놓은 사진과 이야기는 일기장처럼 내밀하면서도 사적(私的)인 부분이다그것은 아마도 각 장마다 저자의 유년 시절 사진과 그림 등이 실려 있어서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이라 생각한다여기에 사진가 양해철이 촬영한 사진들이 묘하게 어울려한 권의 사진집 또는 포토 에세이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물론 저자에게는 이런 것들이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나는 공간을 감정과 연관시켜 기억한다다양한 공간과 그 공간에서 느꼈던 감정들이 한의원 약초 서랍처럼 여러 개 있다디자인을 할 때는 내가 그 공간에서 어떠한 느낌을 받기 원하는지를 먼저 생각한 후 그 서랍에서 필요한 공간을 찾아 대입하는 식으로 작업한다그렇게 대단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기억들이 나를 먹고살게 한다.” [p. 87]

 

 

누군가의 특별한 공간이 될 수 있는 곳들


나를 만든 공간들을 다루는 1장과 2장이 개인적인 공간이라면,  ‘보물찾기를 다루는 3장 이후의 부분은 서울에 살았거나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에 해당한다.

수십 개의 콘크리트 아치 구조로 받쳐져 있는 옥수동 두무개길반포대교부터 동호대교 사이의 강남에 있는 한강시민공원도심에서 가장 좋은 평지 공원에 해당하는 덕수궁과 같은 고궁소녀시대 윤아가 부른 덕수궁 돌담길의 봄”(https://youtu.be/yuCbJykB32M)을 들으며 걷는 덕수궁 돌담길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의 모델인 인왕산 수성계곡의 구름다리연세대의 청송대와 서울대의 버들골배를 타야만 갈 수 있는 남이섬[나미나라], 도심 속 인공의 강을 볼 수 있는 서울역사 옥상 주차장 등이 짧게 스케치 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저자가 한국식 산토리니라고 평가하는 부산의 감천마을처럼 서울 외의 지역을 다루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 보면 무심하게 지나쳤던 공간들인데나만의 기억이 있다면 한번 비교해가면서 읽는 것도 좋을 듯하다나아가 코로나19 광풍이 지나간다면전문가의 사진이 아닐지라도 저자처럼 나만의 특별한 공간들로 내가 지나온 별자리를 엮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잠시 숨을 돌리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일 테니까.

 

p.s. 책을 좌우로 쫙 펼칠 수 있는 노출 제본을 선택한 덕분에 2페이지에 걸친 사진을 제대로 볼 수 있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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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밤 산책자 - 나만 알고 싶은 이 비밀한 장소들
이다혜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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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산책의 즐거움

 

흔히 여행을 떠난다고 하면 주로 낮의 풍경을 즐기려 가는 것을 의미한다하지만 저자의 교토[京都여행은 조금 다르다. <교토의 밤 산책자>라는 제목처럼 저자에게 교토는 햇볕이 쨍한 낮보단 해질녘 늦은 오후의 교토이고여행은 붐비는 인파 속에 사람에 치여 더딘 걸음이 아닌 느긋하고 여유롭게 즐기는 밤 산책이다.

사실 약간의 조명만 있다면초저녁부터 시작된 벚꽃 흩날리는 봄밤의 산책은 낭만적일 수 밖에 없다하늘하늘 춤추며 눈처럼 바닥에 쌓이는 벚꽃의 왈츠를 누구의 방해도 없이 즐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황홀하지 않을까?

 

산책 코스로는 지온인[知恩院]까지 갔다가 큰길을 따라 야사카진자[八坂神社앞으로 와서 시조 거리[?通]를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이 하나아까 간 길을 시라카와[白川]를 따라 거슬러 올라오는 방법 또 하나가 있다일행이 있을 때보다 혼자 이 길을 걷는 게 더 좋은 이유는 쓸쓸하고 운치 있는 밤 산책에 딱 어울려서.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그 소리를 잠재우기 좋은 산책로다너무 길지도 않고너무 외지지도 않으며언제든 꺾어 돌아갈 수 있는조명 자체가 적당히 낮은 조도를 유지한 밤의 기온 뒷골목을 걷다 보면정말 달밤에 단추를 줍는 기분이 든다단추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나 자신에 대한 애틋함을 느끼는 것은 이런 밤의 시간에나 잠깐 허용될 뿐이다해가 뜨면 그런 감정은 소맷부리에 집어넣는다누군가는 버리는 것이지만 나는 버릴 수 없다나는 나를 버릴 수 없다. [pp. 117~120]

 

 

여행자의 게으름을 만끽하는 순간


이 책은 4부분으로 나눠 시간의 미감교토의 꽃과 계절’, ‘혼자여도섞여도 좋은 교토의 정원과 산책로’, ‘마음과 취향을 알아주는 가게와 볼거리’, ‘치장하지 않아 더욱 완벽한 교토의 음식을 소개했다단지 그뿐이다어떤 여행 코스를 소개하거나 추천하는 것도 아니고.

길을 가다 골목을 잘 못 들어가서 헤매는 작은 실수 정도는 가볍게 웃고 지나갈 듯한 분위기가 풍긴다덕분에 집 주위 혹은 회사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커피숍에 가서 무언가를 마시거나 디저트 가게에서 간단한 디저트를 사는 것처럼 부담감없이 저자의 시선을 따라갈 수 있었다.


출처: <교토의 밤 산책자>, pp. 82~83


각 장의 시작에는 위와 같은 지도가 있다그리고 한 장소를 소개하기 전에 꼭 시나 소설을 인용한다.

예컨대기타노텐만구[北野天滿宮]의 매화를 소개하기에 앞서 왕안석(王安石, 1021~1086) <매화>의 일부를 소개하는 것처럼.


눈이 아닌 줄 멀리서 아는 것은[遙知不是雪]

그윽한 향기 덕분이리라 [爲有暗香來]” [p. 24]


중간에 저자의 생생한 경험담도 있고

나는 벚꽃 구경도 단풍 구경도 많이 다녔는데그러다 생긴 요령이라고 하면 ‘낮을 포기하는 것’이다꽃과 단풍이 난리인 교토의 성수기(3월과 9)는 특히 악명 높은데일단 숙박비가 평소의 두 배가 되고 그나마도 빈 방을 찾기 어렵다유명하다는 관광지는 사람에 치여 죽을 것 같고 뒷사람에 밀려 원치 않아도 앞으로 앞으로 이동하게 된다밥 한번 먹으려면 맛집은 고사하고 어느 식당이든 일단 줄을 서야 하는 일이 다반사고절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서는 경우도 적지 않다버스는 당연 만원지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행인 점이라면 교토의 절은 관람 경로를 잘 만들어서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벚나무를 찍을 때 사람들이 바글바글 하게 찍히지 않는다는 것이다사진에는 나무 홀로 요요히 서 있는 것처럼 나와도 실제 상황은 아수라장이라는 말이다. [p. 41]



시센도[詩仙堂]라고 불리는 오우토쓰카[凹凸?]를 소개하는 글에서는 가라오케에 함께 간 일행 중 하나가 부른 우에무라 카나[植村 花菜うえむら かな, 1983~ ]의 <トイレの神樣(화장실의 여신)>(https://youtu.be/Z2VoEN1iooE덕분에 떠올린 할머니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짧은 조언을 곁들인다.

소중한 것을 잃어간다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부였던 시절을믿고 사랑했던 것들을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간다그래야 앞으로 나갈 수 있으니까그런데 가끔은거기 있던 것들이 한꺼번에 찾아오는 때가 있다그런 장소가 있다시센도에 걸려 있는 찰스 황태자와 다이애나 황태자비의 사진처럼 더 이상 그렇지 않은슬픔으로 끝난 관계들이 가장 반짝거렸을 때를 상기시키는 장소가 있다.

그 사람과 같이 방문하지 않았음에도 그런 것들을 깨닫게 하는 장소가 있다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런 장소 찾기의 중독자들이다나에게는 시센도가 그런 곳이다처음 방문했던 때는 혼자가 아니었는데도 그랬다분명 당신에게도 그런 장소가 있을 것이다그러니 아직 찾지 못했다면 찾기를 포기하지 마시길. [p. 147]

 

또한하나의 장소에 대한 소개를 마칠 때마다 해당 장소의 교통편요금입장정보를 제공한다때때로 숨은 그림 찾기처럼 나타나는다혜's PICK(또는 TIP)을 통해 저자만의 여행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이런 점에서 이 책은 교토를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에게 도움이 되는 여행 가이드의 성격도 띄고 있다.

 

무심코 읽다보면 몸은 서울에 있는데마음은 교토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얼마 전에 읽은 하야시야 다쓰사브로 [林屋辰三郞, 1914~1998]의 <교토>도 그렇고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니 언젠가는 꼭 교토에 가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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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 일본 역사학자의 진짜 교토 이야기 이와나미 시리즈(이와나미문고)
하야시야 다쓰사부로 지음, 김효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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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에 대한 역사지리적 가이드

 

이 책은 교토[京都]라는 특정 지역을 다루고 있다그렇다고 해당 지역에 대한 기본 정보하이라이트추천코스지역여행체크 리스트 등이 엮여 있는 일반적인 여행 가이드북이나 정여울의 <헤세로 가는 길> arte의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처럼 한 예술가의 흔적을 따라 그의 생애와 작품을 함께 살펴 보는 여행기도 아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저자 유홍준 교수의 교토 답사 시 길라잡이를 해준 책!이라는 책 소개처럼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와 같은 답사기(踏査記)에 해당하는 글이다또한 이 책이 교토대 사학과 교수였고 교토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한 하야시야 다쓰사브로 [林屋辰三郞, 1914~1998]의 <京都>(1962)를 번역한 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유홍준의 답사기보다 이쪽이 선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책을 펼치면서 약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이 책이 출간된 지 거의 60답사 열풍을 가져온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2011)이 출간된 후로도 약 8년이 지난 2019년에 와서야 이 책을 번역한 이유가 뭘까?

 

아마도 그 이유를 알고 싶다면우선 이 책이 어떤 내용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 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교토[京都]의 문화와 종교사회와 정치에 관한 내용을 15장으로 나눠 각 장마다 시대와 공간의 역사를 서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출처: <교토>, p. 7

 

 1장 교토의 고대인에서 교토의 역사가 최소한 약 7~8,000년 전에 시작되었음을 얘기한다.

쇼와[昭和36(1961) 8월 기타시라카와[北白川북쪽의 이치조지[一乘寺무카이하타 초[向畑町]에서 구획정리공사 중 조몬[繩文] 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었다특히 제표층인 갈색 흙층에서 조몬기에는 드문 주전자가 출토되면서 큰 화제를 모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검은 흙층에서 약 7,000년 전에 해당하는 조몬 초기의 새로운 토기가 발견된 것이라고 했다.” [pp. 31~32]

 

 4장 교토의 신사와 미스리에서는 일반적인 원령(怨靈)의 저주(詛呪)를 물리치는 민간의 풍속이었던 어령회(御靈會)가 정치적 희생양이 된 인물들의 혼령을 위로하는 의식으로 바뀌고이를 포섭하여 신사로 발전시킨 과정을 애기한다.

조간[貞觀11(869) 역병이 유행하자 일본의 66개 지방을 상징하는 66개의 창을 앞세워 우두천왕(牛頭天王)을 모신 가마를 신센엔[神泉苑]으로 보낸 것이 기온 어령회의 시작이라고 한다기온 신사[祗園 神社현재의 야사카[八坂신사]는 이런 어령 신앙의 대세를 교묘히 포착해 성립한 것이다.” [pp. 92~93]

기타노 신사[北野 神社]는 (본래 농업 신인 뇌신(雷神)을 모시던 곳이었는데 헤이안쿄 근교가 도시적 발전을 함에 따라쓰쿠시 지방 다지우후[太宰府]로 좌천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管原道眞, 845~903]의 원령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낸 곳” [pp. 92~93]으로 바뀌었다뇌신이라는 자연신(自然神)에서 스기와라노 미치자네라는 인격신[人格神구체적으로는 학문의 신 혹은 문필의 신]으로 발전한 셈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교토를 15개 지역을 구분해서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각의 지역을 배정하고그 발전사를 조근조근하게 설명하고 있다덕분에 단순히 관광지로만 여기는 이였다면천년 고도(古都)로서의 교토가 지니는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마도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교토국립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한 역사학자라는 점도 있겠지만근본적으로 저자가 교토라는 도시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쨌든 이 책은 저자의 교토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통찰이 돋보이는 진정한 교토 안내서라고 할 수 있다만약 코로나19로 인한 문제들이 해결된 후 교토를 방문할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 볼 필요가 있다유홍준 교수의 말처럼 아는 만큼 보이기에기왕 교토를 간다면 제대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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