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ㅣ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평점 :
죽음과 고독한 삶, 뭉크 작품의 원천
‘절규’로 유명한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삶을 보면 마치 죽음이라는 향기가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다섯 살 때[1868년] 어머니[Laura Bjolstad]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열세 살 때는 (가족 중 가장 각별했던) 누이 소피에(Sophie)마저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뭉크의 아버지[Christian Munch]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매달렸다. 그리고 뭉크에게 엄격한 종교적 생활 방식을 강요했다. 병약하기까지 했던 뭉크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 학습을 받았기 때문에 교우 관계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는 더욱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게 된다.” [p. 21]
그러한 사실만 보면 그의 앞에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와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 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과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뭉크의 “어린 시절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 집착했다. 비극적 이별과 좌절을 겪고, 병마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다. 공황 장애, 우울증,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불행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p. 14]
청춘, 사랑과 방황
21살이었던 1885년, 뭉크는 보레(Borre)에서 가족들과 여름 휴가를 보내다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밀리 타우로브(Milly Thaulow), 이미 한 남자의 아내였다. 하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두 자유로운 영혼들의 앞에서는 그런 제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뭉크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녀가 자신이 고른 이와 두 번째 결혼을 했을 때, 그녀의 옆에 선 사람은 뭉크가 아니었다. 그렇게 뭉크의 첫사랑은 성냥개비의 불꽃처럼 확 피었다가 화상만 남기고 사그라졌다.
<이별>
출처: <뭉크>, p. 43
뿐만 아니었다. “1889년 11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뇌졸증으로 마비가 와 곧 세상을 뜨고 만다. 화가가 되기로 한 뒤부터 아버지와 마찰이 잦았던 뭉크는 아버지에게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죽음 후 뭉크 가족의 불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버지의 수입에 의존하던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랐고, 곧이어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이 발병하여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게 된다. 카렌 이모가 부업을 하고 막냇동생 잉게르가 피아노 레슨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지만 집안의 맏이로서 뭉크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화단에서 인정받고 화가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뭉크를 짓눌렀다.” [pp. 44~45]
아이러니하게도 뭉크의 이러한 20대의 방황은 혁신적인 예술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고,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 대표작 <절규(The Scream)>를 비롯하여 <마돈나(Madonna)>, <불안(Anxiety)>, <아픈 아이(The Sick Child)>, <이별(Separation)>, <키스(Kiss)> 등의 모티프를 그는 몸소 겪은 경험에서 가져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p. 14]
뭉크의 혁신적인 예술
뭉크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시도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첫째, “뭉크는 하나의 모티프를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번 그리는 것을 즐겼다.
<절규> 또한 4개의 버전과 판화본이 존재한다. 동일한 제목에 같은 모티프를 가졌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4개의 버전이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p. 68]
<절규>(1893)
출처: <뭉크>, p. 12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알려진 버전이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서 보관하는 1893년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절규>의 얼굴은 대부분 이 버전에서 기인한다. 판지에 템페라와 크레용으로 그린 이 그림은 잘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 화면 오른쪽에 덧붙여 확장시킨 부분이 그것이다.” [p. 68]
또 다른 <절규> 가운데 2개를 뭉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뭉크 박물관은 판지에 크레용으로 그린 1893년 작과, 판지에 템페라와 유채로 그린 1910년 작의 두 가지 버전을 소장하고 있다. 1893년 작은 크레용의 터치가 거칠고 건물과 배가 없다. 디테일이 약해 아마도 연습 버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1910년 작은 템페라와 유채로 그려져 색이 선명하고 형태가 비교적 견고하다. 특징은 중심인물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pp. 68~70]
<절규>(1895)
출처: <뭉크>, p. 70
마지막으로 독일의 미술 수집가 유진 폰 프란케트의 주문으로 1895년 제작된 판지에 파스텔로 그린 버전이 있다. 이 버전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다른 버전에서는 배경의 길이 자유롭게 채색되어 있는데 반해, 이 그림에서는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배경의 두 남자를 주목해볼 만하다. 다른 버전에는 두 인물이 모두 서 있다. 그러나 이 파스텔 버전에서는 두 인물이 좀 더 섬세하게 표현되고 있다. 한 명은 서서 고개를 돌려 피오르를 바라보고 있고, 조금 뒤쪽의 다른 한 명은 난간에 기대어 있다.” [pp. 70~72]
덧붙이자면, <절규>에 앞서서 그 토대가 된 <절망(Sick Mood at Sunset: Despair)>(1892)과 <절망(Despair)>(1894)라는 작품도 있다.
<절망(Sick Mood at Sunset: Despair)>
출처: <뭉크>, p. 60
영원한 습작이 된, <아픈 아이>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 이처럼 같은 작품을 조금씩 다르게 반복적으로 그림으로써,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형상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닐까?
소설가 최인훈(崔仁勳, 1936~2018)이 그의 대표작인 <광장(廣場)>(1960)을 10여 차례 개정과 개작(改作) 했던 것과 비슷한,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마음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뭉크가 남긴 많은 글 가운데 그의 예술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문구이다. 뭉크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풍경이나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 다시 말해, 대상을 관찰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 본 것, 자신의 기억을 그리려고 했다.
기억이란 감정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이 화가의 뜻대로 ‘해석’되고, ‘편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13]
둘째, 작품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을 지에 관심을 가졌다.
뭉크 예술과 인생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생의 프리즈>는 인간 삶의 여러 모습을 주제별로 엮어 보여주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작 아이디어로 작품의 배치 및 전시에 관한 뭉크의 관심이 빚은 결실이었다.
그가 <태양>과 같이 따뜻한 희망이 넘치는 그림도 그렸다는 점을 알게 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절규> 하나만 알고 있던 화가 뭉크가 불행한 삶을 살면서 겪은 고독과 죽음을 그림을 통해 승화시키는 과정을 보는 것도 감동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