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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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어려움

 

다른 언어로 쓰여진 글을 읽으려면 그 나라 언어를 할 줄 알면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언어가 존재하고 그 언어들을 한 개인이 다 익히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 언어를 번역해주는 사람, 즉 번역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해당 언어를 아는 것만으로 번역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외국 문물을 ‘적절하게’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번역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일한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원래의 의미는 어떻게든 손실될 수밖에 없다. 번역된 문장은 결국 번역가 자신이 쓴 문장이므로, 번역가 고유의 생각, 가치관, 판단, 개성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더 나아가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이라면 한국어라는 언어가 비롯된 한국적 토양, 사회, 문화, 사고방식이 담길 수밖에 없다.” [p. 7]

 

뿐만 아니다. 거의 잊혀진 단어나 기존에 없던 단어를 번역할 때에도 어떻게 번역하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의 딸은 풀밭에서 린턴과 대화를 나누다 심심해지자 월귤(越橘)을 따 모아서 유모에게 나눠주면 손장난을 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신사 숙녀들은 말린 월귤에 사탕수수 엿물로 단맛을 낸 후식을 즐기고, <초원의 집>에서는 월귤로 파이를 굽거나 거위 구이에 발라 먹을 젤리를 만들고, (<호호 아줌마가 작아졌어요>에서) ‘호호 아줌마’는 남편이 팬케이크 발라 먹을 잼을 만들려고 숲에서 월귤을 따서 양동이에 담는다.” [pp. 252~253]

 

월귤(Lingonberry)



출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p. 250

 

여기서 월귤은 ‘링곤베리(lingonberry)’의 번역어지만, 거의 잊혀진 단어이기 때문에 저자처럼 “월귤이라는 이름에 ‘귤’이 들어가므로 귤과 비슷한 과일이라고 상상”[p. 253]하기 쉽다. 게다가 “블루베리 (blueberry)나 크랜베리(cranberry)같은 열매들은 아예 이렇다 할 번역어가 따로 없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된다. 영한사전 편찬자들은 블루베리나 크랜베리의 한국어 뜻풀이를 ‘월귤의 일종’이라든지 ‘월귤의 사촌’이라고 기재하고, 그걸 본 번역가들이 책에다 블루베리나 크랜베리를 ‘월귤’이라고 뭉뚱그려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한국어 번역서에 월귤이 나오면 그게 원문에서 링곤베리인지, 블루베리인지, 크랜베리인지 알 수가 없다.” [p. 255]

 

하나 더 언급하자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같은 종류의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지만 두 단어가 주는 어감 혹은 분위기는 서로 다른 음식인 것처럼 이질적이다. 그래서 저자도 “‘라즈베리 코디얼’을 마시는 소녀와 ‘산딸기 주스’를 마시는 소녀는 외모도, 성격도, 말투도 다를 것만 같다. 그러므로 진저브레드, 블루베리, 라즈베리 코디얼이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과, 생강빵, 월귤, 산딸기 주스가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훌륭한 책은 번역판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이롭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번역이 나올수록 그만큼 다양한 의미가 생겨나고,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 [p. 6]이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문학 작품 속 음식들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라는 소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책은 온전히 번역에 대한 이야기 혹은 번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에 등장한 음식들에 대한 에세이에 가깝다. 이는 이 책이 전채(前菜, appetizer)에 해당하는 제1부 ‘빵과 수프’, 본 요리에 해당하는 제2부 ‘주요리’, 후식(後食), dessert)에 해당하는 제3부 ‘디저트와 그 밖의 음식들’로 구성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음식 이름을 제목으로 한 각 챕터는 해당 음식이 등장하는 소설의 한 장면과 해당 음식에 대한 아기자기한 삽화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햄과 그레이비(Ham with Gravy)’의 경우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멈의 커다랗고 검은 두 손에 들린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버터 바른 참마 두덩이, 수북이 쌓인 메밀 팬케이크 위로 뚝뚝 흘러내리는 시럽, 그레이비에 둥둥 떠 있는 커다란 햄 한 조각. 어멈이 가져온 무거운 음식상을 보자 스칼렛의 얼굴에 떠올랐던 가벼운 짜증은 고집스러운 독기로 바뀌었다.” [p. 104]

 

그리고 각 챕터 끝에는 최연호 파티시에의 감수를 받아 음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정보를 덧붙였다.

 

꿀벌빵(Bienenstich)


출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pp. 296~297

 

덕분에 이 책은 분명히 번역가의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번역가의 삶 등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소설에 언급된 요리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일종의 ‘문학 작품 속 요리 사전’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낯선 요리에 궁금증이 있는 이에게는 안성맞춤인 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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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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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에 대한 로망

 

버려진 곳’ 혹은 돌아올 수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타를라마칸’ 사막하지만 이 타클라마칸 사막을 포함한 타림 분지에서는 한때 소위 실크로드 문명이 번성했었다하지만 실크로드 문명의 몰락과 이후 생겨난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함께 순식간에 하나의 문명이 소멸되었다는 전설 1)은 수많은 탐험가들이 이 곳을 방문하고여러 이야기꾼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불의 검등으로 유명한 만화가 김혜린(1962~ )이 그녀의 단편 만화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1996)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과 함께 누란(樓蘭)2)이 소멸되는 것처럼 묘사했던 것처럼.

 

한편, ‘’, “꽃을 위한 序詩’, ‘부다페스트에서의 少女의 죽음’ 등으로 유명한 김춘수(金春洙, 1922~2004)도 누란을 기리는 시를 남겼다.

 

누란(樓蘭)

 

                                   김춘수

 

과벽탄(戈壁灘).

고비는 오천리(五千里사방(四方)이 돌밭이다월씨(月氏)3)가 망()할 때,

바람 기둥이 어디선가 돌들을 하늘로 날렸다.

돌들은 천년(千年)만에 하늘에서 모래가 되어 내리더니산 하나를 만들고

백년(百年)에 한 번씩 그들의 울음을 울었다.

옥문(玉門)을 벗어나면서 멀리멀리 삼장법사(三藏法師현장(玄奬)도 들었으리

 

명사산(鳴沙山).


그 명사산(鳴沙山저쪽에는 십년(十年)에 한 번 비가 오고비가 오면 돌밭 여기저기 양파의 하얀 꽃이 핀다.

봄을 모르는 꽃삭운(朔雲백초련(白草連).

서기(西紀기원전(紀元前백이십년(百二十年). ()의 한 부족(部族)

그 곳에 호(천 오백 칠십(千五百七十), (만 사천백(萬四千百),

승병(勝兵이천 구백 이십갑(二千九百二十甲)의 작은 나라 하나를 세웠다.

언제 시들지도 모르는 양파의 하얀 꽃과 같은 나라 누란(樓蘭).

 

 

실크로드의 답사

 

실크로드의 시작은 섬서성(陝西省서안(西安)의 북서쪽 시가지 외곽에 있는()나라 때의 장안(長安)이다이곳을 포함해서 진령산맥(秦嶺山脈북쪽에 서쪽으로는 대산관(大散關), 동쪽으로는 함곡관(函谷關), 남쪽으로는 무관(武關), 북쪽으로는 소관(蕭關)으로 둘러싸인 들판이 있는데이를 4개의 관문[]의 가운데[]라는 의미로 관중평원(關中平原)이라고 한다관중평원은 관중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關中者 得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고대 중국에서 가장 생산력이 높고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렇기에 중국답사기가 서안함양공항아니 관중평원에서 시작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물론권두의 중국답사기를 시작하며에서 저자는 나의 중국 답사기 첫 번째 대상은 역대 왕조의 수도이다한 나라의 문화유산은 뭐니 뭐니 해도 옛 수도에 집중되어 있는 법이다따라서 나의 중국 답사기는 고도순례(古都巡禮)가 대종을 이루게 될 것” [p. 7] 이라고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조금 아쉽기는 하다구체적으로 중국 8대 고도[북경(北京), 서안(西安), 낙양(洛陽), 남경(南京), 개봉(開封), 안양(安陽), 항주(杭州), 정주(鄭州)]를 열거하며, “나의 중국 답사가 여기에 머물리 만무하다내 전공이 미술사인지라 아름다운 문화유산이 있는 미술사적 명소를 즐겨 찾아 다녔지만 실제로 답사의 감동은 오히려 사상사문화사의 고향에서 받은 것이 더 크고 진했다” [p. 10]고 말했다하지만돈황(敦煌)으로 가는 답사여행의 출발지는 서안이 아니라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咸陽)이었으니까따라서 서안을 본격적인 답사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아니기에 다소 아쉽지만단지 그뿐이다.

지난 2000, 2억 위안[ 340억원]을 투입해 영화 세트장 형태로 만화 같은 건물을 짓고 동상 조각을 배치” [p. 39]해서 아방궁 테마파크를 세웠다고 하는데나는 2001년 서안을 방문했을 때 보았던 진시황릉의 진시황 동상이 떠올랐다.

 

아방궁 테마파크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1>, p. 38

 

진시황릉 앞 진시황 동상



 

대륙을 연결하는 회랑처럼 길게 뻗어 있는 협곡이 마치 ‘달리는 회랑’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하서주랑(河西走廊)은 동쪽 오초령(烏?嶺)에서 시작해 서쪽 옥문관(玉門關)에 이르며남으로는 기련산(祁連山)과 아미금산(阿爾金山), 북으로는 마종산(?), 합려산(合黎山및 용수산(龍首山)) 사이 길이 약 900km의 서북-동남 방향으로 늘어선 좁고 긴 평지이다이곳은 한나라 무제가 흉노를 몰아내고 하서 사군[河西四郡무위(武威凉州), 장액(張掖甘州), 주천(酒泉肅州), 돈황(敦煌沙洲)]을 설치한 곳이다고구려의 유민인 고선지(高仙芝, ? ~ 756)가 정벌했던 서역(西域국가들이 존재했던 곳이기도 하다.

 

맥적산(麥積山석굴 답사를 끝내고 왜 우리나라는 이런 석굴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저자는 문화란 그 나라의 자연환경에 맞추어 구현되는 법” [p. 136]이라고 대답한다그리고 어떤 형태의 유무에 우열을 두지 않고굴착이 용이한 사암(砂岩절벽이 많은 인도와 중국에는 석굴 사원이화강암(花崗岩)이 많은 한국에서는 마애불(磨崖佛)과 산사(山寺)일본의 독자적인 정원 예술이 반영된 사찰정원을 공평하게 감상할 것을 주문한다.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은 명()나라 초기에 몽골의 후예를 자처하는 티무르를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관문으로 명나라의 쇄국정책을 암시하는 듯 굳게 닫혀 있었다가욕관을 나와 고비 사막을 질러가면 드디어 돈황(敦煌)에 도착한다.

타임슬립이라는 작품의 형식과 실크로드라는 배경이 유사한 김혜린의 단편 만화 <로프누르잃어버린 호수>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에 저자가 소개한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1907~1991] <돈황>(1959)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진다.

 

하나 덧붙이자면,

처음 이 책을 구입했을 때명사산(鳴沙山명불허전(鳴不虛傳)’이라는 소제목을 보고 놀랐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는 사자성어가 귀에 박혀 있어편집과정에서의 오류로 이름 명[]’이 아닌 울 명[]’이 들어간 줄 알았기 때문이다다행히 책을 펼쳐보니 월아천(月牙泉 3층 누각인 월천각(月泉閣)에 걸린 현판에 그렇게 적혀있었다고 한다그리고 명사산의 명성이 헛되이 전하는 것이 아니다”[p. 332]가 아닌 명사산의 울림은 헛되이 울리는 것이 아니다” [p. 332]에서 오는 울림이 더 컸다고 하니 아마도 그런 이유로 소제목을 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 소위 실크로드 문명이 모래바람으로 순식간에 소멸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전설일 뿐이다이들은 흉노로 대표되는 유목세력과 한()으로 대표되는 정착세력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간신히 생존했다누란의 경우에도 국가가 소멸된 후 도시로서의 기능은 유지했으나 유목민들의 침탈 속에서 인구가 감소하여 소멸했다고 한다.


2) 누란(樓蘭혹은 크로라이나(Kroraina):  누란이 최초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흉노의 묵돌선우[冒頓單于]가 전한(前漢)의 문제(文帝)에게 월지[月氏]에게 이겨 누란 등 26국을 평정했다는 선언이 담긴 편지[B.C. 176]에 의한다이후 누란은 생존을 위해 흉노로 대표되는 유목세력과 한()으로 대표되는 정착세력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했다그 과정에서 B.C. 77년 한나라가 보낸 사신에 의해 누란의 왕인 안귀(安歸)가 암살당하고 나라 이름이 선선(?)으로 개명당했다. 448년에 이르면 독립된 왕국으로서 누란 혹은 선선은 사라진다.


3) 월지(月氏): 타림 분지에서 동서 무역을 독점하던 고대 인도유럽어계 토하라인(Tocharians)의 일파로 추정된다기원전 2세기 흉노에게 멸망한 후 서쪽으로 가서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북부에 있던 그리스계 박트리아를 정복한 세력을 대월지(大月氏)라 하고타림 분지에 남아 누란(樓蘭), 쿠차[龜玆國등의 도시국가를 이루고 살던 세력을 소월지(小月氏)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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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 한국미의 순례자 - 한국의 미를 세계 속에 꽃피운 최순우의 삶과 우리 국보 이야기
이충렬 지음 / 김영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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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곡 최순우는 누구인가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좋아하던 문학소년 최순우(崔淳雨, 1916~1984)의 인생에서 전환점은 우현(又玄고유섭(高裕燮, 1905~1944)과의 만남이었다개성부립박물관(開城府立博物館)에서 관장과 관람객으로 시작된 인연은 최순우가 고유섭의 제자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하지만그는 고유섭의 다른 제자인 메이지대학 정경학부 출신인 수묵(樹默진홍섭(秦弘燮, 1918~2010)이나 도쿄제국대학 경제학부 출신인 초우(蕉雨황수영(黃壽永, 1918~2011)과 달리 송도고등보통학교 출신이었다때문에 진홍섭과 황수영과 함께 개성 3()’로 불리면서도 그는 승진이나 급여에 불이익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그가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의 서기로 있을 때, 2년 연하의 후배인 진흥섭이 개성분관의 관장으로 선임된 것이나 그가 1954년 보급과장(1961년 미술과장으로 명칭이 변경)으로 진급한 후 20여 년 간 만년과장이었던 것도 아마 그 탓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곡(兮谷최순우는 묵묵히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우리나라 문화유산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찾고 알리는 일에 평생을 바친 박물관인이 (되었다왜냐하면,) 그는 선조의 문화와 이 땅의 유산이 총체적으로 모여 있는 박물관이 왜 중요하고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그랬기에 일생을 바쳐 국립중앙박물관을 지켰고 발전시켰다.” [pp. 4~5]

이런 최순우의 삶은 제대로 된 나라라면역사를 기억하는 민족이라면 분명히 기억해야 할 만큼 의미 있다하지만많은 이들이 최순우에 대해 알지 못한다그나마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가 빛을 보지 않았다면그의 이름은 한 장의 깨진 청자 기와조각처럼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외로웠다지금은 우리 문화유산이 아름답고 자랑스럽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일제강점의 후유증인 식민사관과 해방 이후를 휩쓴 서구우월주의에 힘겹게 맞서야 했다오래되고 낡은 것에 볼 게 무엇이 있느냐는 냉소와 비웃음이 난무했다.

그런 시대에 그는 남의 것이 아닌 내 것에 설레고 떨리고 사무치고새것이 아닌 옛것에 홀리고 미치고 취했다수탈과 전쟁을 빼앗기고 무너지고 파괴된 폐허의 시대에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발굴하고 지키고 보존” [p. 5]했을 뿐 아니라우리 문화재가 정당한 대접을 받도록 요구하고 이를 관철했다.

 

 

최순우를 기억하는 키워드

 

첫째한국미의 보존

최순우는 한국전쟁 중에 서울 국립박물관을 점령한 북한군의 문화재 반출 지시를 목숨을 걸고 지연시켜 소장 문화재를 부산으로 안전하게 피난시켰다이후 국립중앙박물관이 이전개관할 때마다 그의 공이 컸다. 1981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을 구(중앙청 청사 건물로 이전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자 그 주역으로서 일하다가 제반 계획과 공사가 한창 진행되는 동안 격무와 신병으로 개관을 눈앞에 두고 세상을 떠났다.

 

또한 그는 1946년 고려의 정궁(正宮)의 터인 만월대(滿月臺)에 미군 막사를 세우는 공사를 막은 후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개발논리에 의해 흩어지고 버려지고 있는 문화재 발굴과 보호에 최선을 다했다강진의 청자기와 가마터인천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광주 무등산 금곡요 등 세월의 흐름 속에 잊혀진 채 쓰러져갔던 국보급 문화재와 유적의 발굴 답사출토유물 정리연구와 전시에 이르기까지 곳곳에 그의 정성이 묻어있었다.

 

나아가 당시 국립박물관에 예산이 없어 구입하지 못한 주요 유물들이 일본으로 밀반출되는 상황을 안타깝게 생각해같은 개성 출신 사업가인 호림(湖林윤장섭(尹章燮, 1922~2016)에게 문화재 수집의 단초를 제공하고훗날 호림미술관을 설립할 때도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둘째한국 문화유산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다.

최순우는 분단과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대한민국을 그저 가난한 신생국이 아니라 오랜 역사와 고유 문화를 가진 국가임을 세계에 알렸다.

1957년 겨울부터 본격적으로 우리나라의 도자기목기회화 등을 해외에 전시하면서 그때마다 호송관과 전시담당 학예사의 역할을 수행했다. 1973년에  ‘한국미술2000년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시작했으나 서울 암사동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가 기원전 3000년 토기임이 밝혀진 이후에는 한국미술의 역사를 수정, ‘한국 미술 5000년전으로 변경해서 전시를 했다이러한 전시를 통해 전 세계에 한국의 서화도자기조각건축물의 독창적이고 찬란한 아름다움을 떨쳤다나아가 한국 미술의 이해와 보존·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1957년 말부터 진행된 한국 국보 전시회관람객 중에는 우리나라 유학생도 많았다사실 유학생 사회에서는 전시회가 열리기 전 “누구 창피를 보이려고 시시한 것들을 가지고 왔느냐”는 뒷공론도 있었지만전시회가 개막되고 <뉴욕타임스등 여러 신문에서 한국 미술의 특색 있는 아름다움을 대서특필하자정말로 그렇게 좋은지 보겠다며 하나 둘 찾아왔다최순우는 훗날 유학생들의 그런 모습에 대해 “말하자면 학생들은 미처 몰랐던 우리 문화의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외국에 와서 비로소 알게 되었고따라서 저절로 우러나는 민족적인 긍지를 체험하게 되었던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p.206]

 

유럽 국가들의 요청으로 한국미술 5천년전을 진행할 때는 한국 국보에 대한 보험액을 국제수준에 비해 절반 정도로 산정하자 그는 보험액을 올리지 않으면 전시를 못하겠다면서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해 정당한 대접을 요구했다그 결과이후 우리나라 국보는 해외전시 때 세계 최고수준의 대접을 받게 되었으니 그의 힘으로 국격(國格)을 올려놓은 셈이다.

어떻게 보면 그의 한국미술 5천년전’ 전시는 한류(韓流)’의 원조라고 볼 수도 있을 듯 하다.

 

 

셋째한국미의 아름다움을 글로 알리다.

아마도 많은 이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읽고 혜곡(兮谷최순우(崔淳雨, 1916~1984)라는 사람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하지만 최순우가 남긴 글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문화재에 대한 척박한 인식 속에서 그는 1947 9월 [서울신문]에 발표한 ‘개성 출토 청자파편’부터 시작해서 한국의 멋과 가치를 문화재 해설 280미술 관련 에세이 205논문 41사료해제 86편 등 모두 600여 편의 글로 남겼다.

또한 1950년부터 서울대고려대홍익대이대 등 여러 학교에 출강하여 미술사를 강의하면서 후학을 많이 길러내었다같은 박물관에 근무했던 진경시대 문화 연구의 대가이자 간송미술관 한국민족미술연구소를 이끌고 있는 가헌(嘉軒최완수(崔完秀, 1942~ ), 불교미술의 권위자 강우방(姜友邦, 1941~ ), 6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역임한 소불(笑佛정양모(鄭良謨, 1934~ ) 등도 그가 길러낸 후학이라 말할 수 있다.

 

오직 박물관과 문화유산만을 생각하고 살아온 삶이지만,

1963년 조선 백자와 반닫이 등 조선시대 목가구 수출을 저지했다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 1966년 석가탑 보수복원공사 때는 내부가 썩은 전보대로 인해 2층 옥개석의 모서리 한쪽이 조금 훼손되자 복원책임자라는 이유로 문화재 보호법 제60조 및 제70(파손과 관리소홀)를 위반했다고 형사 입건되어야 했다심지어 공무원 병가 허용기간이 두 달이라는 이유로 직장암으로 죽어가는 그에게 문화공보부에서는 사람을 보내 사표 제출을 독촉한 일화에 이르러서는 아연실색(啞然失色)할 수 밖에 없었다.

 

최순우 같은 분 덕분에 오늘날 우리가 한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풍납동 토성 보존과 관련된 현실 등을 바라보면 왠지 답답하다심지어 최순우가 한국 전쟁 당시인 1952 1 <민주신보>에 문화재의 수난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아래의 글이 여전히 생명력을 가진 듯해서 씁쓸했다.

우리 스스로의 무지와 무위무책(無爲無策)으로 무참한 파괴가 쉴 새 없이 자행되고 있는 현실을 우리는 더 슬퍼하는 바이다.

중 략 ~

건축 이외의 문화재만 하더라도다행히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주요 문화재는 안전히 소개(疏開)되어 있다고 하나이 방대한 미술품의 보존관리를 담당한 기관에 최소한도의 소요예산과 인원도 배정되어 있지 못하여소개 문화재는 그 중요성에 반하여 현재 너무나 부당한 처우를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 )

무지와 무위무책의 악몽에서 어서 깨어나야 할 것이다무엇이 더 급한지 무엇이 더 소중한지를 가릴 줄 모르는 한모든 연유를 전쟁에만 돌리는 한우리 문화재 보존의 앞날은 암담하다.” [p.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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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완벽한 사업 모델

 

저자들은 디즈니는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적어도 우리의 눈에는 경영방침의 일관성과 전반적인 전략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고객 서비스제품의 창의성직원 교육상대적으로 낮은 이직률눈부신 수익률 등 여러 측면에서 고려했을 때 완벽한 사업 모델로 손색이 없었다.” [p. 18]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디즈니를 완벽하게 만든 것일까?

우선디즈니의 창립자이자 완벽주의자였던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 이하 월트’)의 원칙을 들 수 있다. “꿈꾸고 믿고 도전하고 실행하라수십 년 동안 디즈니가 성공을 거둔 곳에는 어김없이 이 네 가지 원칙에서 발전한 것이다그리고 월트의 삶과 일을 지탱했던 버팀목이었던 이 원칙들은 당연히 회사 경영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가치관이 되었다그래서 이 네 가지 핵심 원칙은 월트 디즈니사가 직원들을 훈련시켜 제 몫을 하게 만들고창의력과 혁신을 관리하고고객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에 모두 영향을 미쳤다.” [p. 16]

 

그렇다면 디즈니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월트의 4가지 원칙을 실천하고 있을까?

1.     조직의 모든 구성원에게 꿈꿀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꿈을 구현할 수 있는 창의성을 자극하라.

2.     자신의 신념과 원칙을 고수하라.

3.     고객을 귀한 손님으로 대하라.

4.     직원을 격려하며 권한을 부여하고 포상하라.

5.     핵심 공급업체 및 협력사들과 장기적인 관계를 구축하라.

6.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예측된 위험을 과감히 감수하라.

7.     폭넓은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조직 문화를 지속적으로 강화하라.

8.     장기 비전에 맞춰 단기 실행 전략을 구상하라.

9.     문제를 해결하고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의사소통을 개선하기 위해 스토리보드 기법을 활용하라.

10.  세부 사항에 깊이 주목하라.

11.  직원과 고객과 제품과 자신을 사랑하라! [pp. 28~29]

 

 

디즈니는 정말 완벽한 기업일까?

 

<디즈니 웨이>에 소개된 것만 보면디즈니는 완벽한 기업이다.

먼저 그들은 사람을 존중한다.

월트 디즈니는 새로운 쇼를 개발하는데 캐스트 멤버를 참여시키면 그들이 맡게 될 프로젝트와 회사조직에 대한 책임감이 생긴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디즈니사의 극도로 낮은 이직률도 보건대 늘 그렇듯 이번에도 월트의 본능이 적중했다고 할 수 있다대부분 테마파크의 평균 이직률을 150퍼센트인데 반해 디즈니 테마파크 일반 직원들의 이직률은 30퍼센트도 안 된다본사 관리직의 경우에는 6퍼센트 미만으로 훨씬 낮다. ” [p. 42]

그리고월터는 저는 어느 분야에서고 권위자가 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제가 만나는 보통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따르고우리 회사의 끈끈한 팀워크에 긍지를 느낍니다.” [p. 117] 혹은 나는 훌륭한 미술가는커녕 결코 훌륭한 애니메이터도 아니다나보다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늘 나를 위해 일해주곤 했다” [p. 314]처럼 캐스트 맴버[직원]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게다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잘 하라너무도 잘 해내어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찾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라사람들이 다시 찾아와 여전히 잘 하는 당신을 본다면 다른 사람들을 데려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할 것” [p. 317]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고객들에 대한 사랑도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로스 펄린(Ross Perlin) <청춘 착취자들>을 보면 얘기가 다르다우선 디즈니랜드에서 일하는 사람의 절반 이상이 인턴이라고 한다거기까지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지나칠 수 있지만그 인턴에 대한 착취를 통해 디즈니라는 회사가 운영된다면 얘기가 다르다.

<청춘 착취자>에 따르면, “디즈니의 인턴십 프로그램은 방학 기간을 이용한 전통적 인턴십이라기보다 실제 회사 운영에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프로그램이다따라서 인턴들은 학교를 휴학하든지아니면 일하면서 학교에서 요구하는 필수 학점을 따야 한다디즈니의 인턴은 엄격한 규율에 따라 회사에서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해야 한다.

휴가나 병가는 달콤한 꿈이고 애로사항에 관한 소원 수리는 다른 세상 이야기일 뿐이다성희롱이나 부당 대우에 관한 적절한 보상 대책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다근무는 대개 12시간 교대제이지만실제로는 오전 6시에 시작하고 자정을 넘겨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pp. 23~24]

이는 고객에 대한 사랑이 값싼 인턴을 갈아 넣어 만든 결과라는 얘기도 된다.

 

뿐만 아니다. “미국 시민단체들의 감시망에 걸려든 대표적인 사례는 게스월트디즈니나이키빅토리아 시크릿 등 대기업 의류제품 생산 공장들이다월트디즈니의 경우 아이티 공장에서 ‘101마리의 강아지’ 옷을 생산하고 있는데, 19달러99센트짜리 옷 한 벌을 불과 6센트의 생산 원가로 만들어낸다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시간당 57센트 48시간 일해야 고작 손에 쥐는 것은 27달러27센트이다. 3인 가족의 최소 생활비 30달러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혹한 노동력 착취다.”1)

 

<디즈니 웨이>에 의하면 디즈니사의 종업원들은 경영진의 오만함을 싫어하며 자신들도 기획과 중요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실질적인 쌍방향 소통을 간절히 원한다.

(디즈니의) ‘꿈 휴양소는 기업들이 필요한 변화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돕는 최선의 수단임이 입증되었다직원들을 전략에 참여시키고 회사가 추구하는 비전과 경영 방침에 대한 직원들의 이해를 촉진시킬 뿐 아니라프로그램 참여자들은 꿈 휴양소의 독특한 환경 덕분에 현안 문제의 혁신적 해결책을 찾아낼 새로운 아이디어의 세계로 빠져든다” [pp. 42~43]라고 한다.

하지만 앞에서 언급한 디즈니의 착취를 고려할 때도대체 그 어디에 <디즈니 웨이>에 적힌 것처럼 꿈 휴양소를 통해 창의적이고 헌신적인 종업원들이 나올 여지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아니 픽사의 에드 캣멀(Edwin Catmull, 1945~ )과 존 레서터(John Lasseter, 1957~ )가 디즈니 출신의 애니메이터라는 점을 고려하면 오히려 디즈니가 창의적인 사고를 억압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뿐만 아니다. 2017 <스타워즈라스트 제다이>의 개봉을 앞두고 시장지배적 위치를 이용극장주에게 영화 흥행수입의 65%를 배분해줄 것과 최대 규모의 상영관에서 최소 4주간 스크린에 올릴 것을 요구하면서 이를 어길 경우 극장주에게 돌아가는 몫에서 5%를 추가로 삭감2)하겠다고 한 적도 있다일반적인 영화사의 수입배분율이 55%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대 70%까지 가져가겠다는 디즈니의 요구는 갑질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세계 최고의 콘텐츠 공룡으로

 

이 책 <디즈니 웨이>에서는 디즈니가 비슷한 경영 이념에 따라 계속 운영된 듯한 느낌을 준다하지만 월트와 그의 형 로이 디즈니(Roy Disney, 1893~1971) 시대와 마이클 아이스너(Michael Eisner, 1942~ , 이하 아이스너’) 시대는 다르고또 아이스너 시대와 그 후임자인 밥 아이거(Robert Iger, 1951~ , 이하 아이거’) 시대도 다르다.

 

디즈니 형제의 사후(死後), “디즈니는 창의성이 고갈된 상태였고 작품도 35년에 한 편 정도만 만들 정도로 효율성이 떨어져 있었다그나마 특별한 히트 작품도 내지 못해 과거의 성공에 기대어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였다(그 결과 디즈니는 전문 기업사냥꾼의 매수 대상으로 전락했다. 1984년 디즈니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 디즈니의 새로운 수장이 된 아이스너는 극장용 만화영화에만 치중했던 기존 비즈니스 모델을 근본적으로 수정했다그는 가정용 시장즉 홈 엔터테인먼트 시장의 성장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다회사 중역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때까지 극장에서 상영했던 만화영화들을 비디오에 담아 팔기 시작했다.

아이스너의 전략은 적중했다불과 몇 년 만에 디즈니의 수익 대부분이 가정용으로 판매되는 비디오와 DVD에서 나왔다아이스너는 사업 다각화를 위해 1995년 또 한 번의 중대한 결정을 했다미국 3대 방송사 중 하나인 ABC 190억 달러에 인수한 것이다이 인수 과정에서 미국의 대표 스포츠 채널인 ESPN을 계열사로 확보했고 디즈니는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한때 성공한 CEO였던아이스너는 점점 회사의 모든 일을 스스로 통제하고 결정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CEO로 변해갔다심지어 사람들은 그를 “아이스너 제왕(Emperor Eisner)”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특히 아이스너는 2000년대 들어 수많은 중역들을 몰아냈다자신에게 위협이 될 만한 사람들을 철저하게 제거해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였다.3)” 드림웍스를 차린 제프리 카젠버그(Jeffery Katzenberg, 1950~ )도 그 중 하나였다. []

 

제왕(帝王)’ 아이스너에 이어 CEO가 된 것은 지금의 디즈니 제국을 만든 아이거 였다그의 CEO 취임 이후 연간 개봉작의 수는 줄이되 소수의 블록버스터 영화에 투자를 집중함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취했으며픽사(2006), 마블(2009), 루카스필름(2012), 21세기 폭스의 엔터테인먼트 부문(2019)을 인수 합병하는 등 아이스너의 전략을 계승하면서도 인수회사에게 자율성을 부여함으로써 월트의 이념도 이어받았다. []

물론 엄격하게 따지자면직접 꿈꾸고 믿고 도전하고 실행했던 월트와는 차이가 있지만 창의적이고 헌신적인 직원들이 디즈니의 가장 큰 자산임을 잊지 않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이 책은 학창시절의 참고서처럼각 단원 마지막 부분에 요약 정리 성격의 생각 나누기’, 핵심 가치를 확인하는 요점 질문’,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제시되는 행동 방침이 실려있다시간이 없거나 14개의 단원에서 하는 이야기가 잘 이해되지 않는 이는 이를 먼저 읽어봐도 괜찮을 것이다.



1) 강제노역-착취 아메리칸 드림은 없다’”, <주간동아> 226(2006.03.08)

2) 디즈니, 영화관에 갑질’… 스타워즈 신작 흥행수입 65% 요구”, <연합뉴스> 2017.11.02

3) 정동일, “위대한 리더십의 완성; 박수칠 때 떠나라’”,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32>, (2013.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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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주순애 옮김 / 이숲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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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는 날마다 축제>

 

<파리는 날마다 축제>을 읽으면서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2011)에서 주연인 길 역을 맡은 오웬 윌슨(Owen Wilson)이 된 기분이었다왜냐하면 이 책은 Lost Generation을 대표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 이하 헤밍웨이’)가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배경과 비슷한 시기[1921~1926]의 파리에 거주하면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회고록이기 때문이다.

,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헤밍웨이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헤밍웨이의 이동경로에 따라 파리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그렇기에 저자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클래식 클라우드 시리즈의 느낌도 든다.

 

 

가난마저도 추억이 되는 도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헤밍웨이는 갓 결혼한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과 함께 파리로 향했다비록 그가 <토론토 데일리 스타>의 해외 통신원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는 있었지만가난하고 미래가 불확실한 작가 지망생 혹은 무명의 작가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다이 무렵의 헤밍웨이가 살던, “카르디날 르무안 거리에 있는 방 두 칸짜리 우리 아파트는 온수도 안 나오고 제대로 된 화장실 시설도 없이 간단한 변기통만 있었지만그래도 미시간의 오막살이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p. 35]

 

불편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베를린의 <데어 크베어슈니트>에서 보내온 원고료 600프랑을 받고 생 제르맹 거리의 리프(Lipp)에서 가졌던 한 끼 식사를 수십 년이 지나도록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면 왠지 짠했다.

이제 어디 가서 식사나 할까나는 리프 Lipp에 가서 한잔하면서 식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중략 ~

맥주는 시원하고 맛있었다올리브유를 뿌린 감자 샐러드는 적당히 짭짤하고쫀득쫀득했으며 올리브유의 향미도 감미로웠다나는 통후추를 가루 내어 감자에 뿌린 다음빵을 올리브유에 적셨다첫 잔을 시원하게 들이켜고 나서그 다음부터는 천천히 마시면서 식사했다감자 샐러드를 다 먹고 나자한 접시 더 주문하면서 세르벨라를 추가했다세르벨라는 굵은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세로로 자르고 그 위에 겨자 소스를 끼얹은 요리다.

올리브유와 소스를 빵으로 깨끗하게 닦아 먹은 다음나는 맥주가 미지근해질 때까지 천천히 다 마시고는 반 리터짜리 맥주를 더 주문하고 웨이터가 맥주통에서 맥주를 뽑아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이번 것은 1리터짜리보다 더 시원했다나는 단숨에 잔을 반쯤 비웠다.” [pp. 83~84]

SNS에 사진을 올리고 기록하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몇 십 년 전이 아니라 1년 전 식사도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하기 힘들다고 생각한다도대체 얼마나 평상시에 제대로 먹지 못했기에 저 한 번의 식사가 그렇게 인상적이었을까?

문득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에 실린 실직한 남편이 직장 다니는 아내를 위해 따뜻한 밥 한 그릇에 간장 한 종지를 마련해서 왕후(王侯)의 밥걸인(乞人)의 찬이라는 메모를 남긴 한 가난한 신혼부부 이야기가 떠오른다.

 

파리에서의 삶은 힘겨웠지만헤밍웨이는 굴복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하다고 스스로 자부했으며부자들을 경멸하고 불신했다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속옷 대신 스웨터를 입는 것이 내게는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그런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부자들뿐이라고 생각했다우리는 값싼 음식으로 잘 먹고값싼 술로 잘 마셨으며둘이서 따뜻하게 잘 잤고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pp. 50~51]고 얘기한다.

 

나아가 그는 파리는 내게 언제나 영원한 도시로 기억되고 있습니다어떤 모습으로 변하든나는 평생 파리를 사랑했습니다파리의 겨울이 혹독하면서도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가난마저도 추억이 될 만큼 낭만적인 도시 분위기 덕분이 아닐까요아직도 파리에 다녀오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렇게 조언하고 싶군요만약 당신에게 충분한 행운이 따라주어서 젊은 시절 한때를 파리에서 보낼 수 있다면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 [p. 361]라고 말했다.

 

 

나는 글을 쓰려고 태어났고지금까지 글을 써왔으며앞으로도 글을 쓸 것이다.

 

이 시절 헤밍웨이의 동료였던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 1896~1940, 이하 피츠제럴드’) 헤밍웨이에게 팔리는 글을 쓸 것을 권유했다헤밍웨이에 따르면, “[피츠제럴드]는 내게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가 원하는 단편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 잘 알고 있다면 그런 잡지사에 팔기에 알맞은 단편 원고 쓰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일단노력을 기울여 좋은 단편을 써놓은 다음잡지사가 원고를 청탁하면 그 잡지사가 원하는 대로 잡지의 판매부수를 올릴 만한 작품으로 다시 수정해서 원고를 넘긴다고 했다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나는 그것은 몸 파는 여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말했다그는 그렇긴 해도좋은 작품을 쓸 돈을 마련하려면 잡지사에서 돈을 벌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고 했다나는 그에게 작가라면 자기 능력이 닿는 데까지 가장 좋은 글을 써야 하면그렇지 않는다면 자기 재능을 파괴하게 되리라고 말했다그는 자기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팔릴 작품을 쓰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것이 자기 재능에 해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진짜 작품을 먼저 써놓았기에 설령 그것을 파괴하고 변형한다 해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pp. 170~171]

 

하지만 가난해도 훌륭한 글과 문장에 대한 헤밍웨이의 신념은 흔들리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피츠제럴드와 달리 나는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절대로 생계의 수단으로 소설을 써서는 안 될 것이다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고다른 선택의 여지가 전혀 없을 때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따라서 나는 더 많은 압박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기다리는 동안은 우선 내가 잘 아는 주제에 대해 긴 글을 써봐야 할 것” [pp. 87]이라고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슬럼프가 와서 새로 시작한 글이 전혀 진척되지 않을 때도 있었다그럴 때면 벽난로 앞에 앉아 귤 껍질을 손가락으로 눌러 짜서 그 즙을 벌건 불덩이에 떨어뜨리며 타닥타닥 튀는 파란 불꽃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그렇지 않으면 창가에서 파리의 지붕들을 내려다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걱정하지 마넌 전에도 늘 잘 썼으니이번에도 잘 쓸 수 있을 거야네가 할 일은 진실한 문장을 딱 한 줄만 쓰는 거야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 한 줄을 써봐.’ 그렇게 한 줄의 진실한 문장을 찾으면거기서부터 시작해서 계속 글을 써나갈 수 있었다.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p. 18]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실린 췌장암에 걸려 복수(腹水)를 빼내고 있던 에반 쉬프맨(Evan Shipman, 1901~1957)과의 대화는 헤밍웨이의 꾸준히 노력하는 글쓰기를 한 마디로 압축시켜 보여준다.

“ “헴글 쓰는 것잊지 않을 거지?

“물론이지.” 내가 대답했다“내가 글 쓰는 걸 잊을 리가 있나.

나는 전화를 걸려고 밖으로 나갔다물론이지하고 생각했다글 쓰는 걸 절대로 잊지 않을 거야나는 글을 쓰려고 세상에 태어났고여태까지 글을 써왔으며앞으로도 다시 글을 쓸 거야.” [p. 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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