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의 디테일 - 고객의 감각을 깨우는 아주 작은 차이에 대하여
생각노트 지음 / 북바이퍼블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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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정체를 밝히지 않는, ‘생각노트’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기록활동가’ 혹은 ‘인플루언서’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책 <도쿄의 디테일>은 ‘도쿄’라는 말이 들어가있지만, 도쿄[東京]라는 도시의 여행을 위한 가이드북도, 도쿄에서 유행하는 최신의 트랜드를 전해주는 책도 아니다. 굳이 이 책의 성격을 정의하자면, 누구나 알 만하거나 들어 봄직한 ‘도쿄’라는 도시의 곳곳을 경험하고, 도시의 면면을 살피면서 기록하고 생각한 것을 공유하는 수단이다.

 

이 책에서 기록한 디테일은 2017년 12월의 도쿄의 디테일이다. 먼저 집중하기 힘든 기내 안전 수칙을 네이버 웹툰의 주요 캐릭터가 설명하는 방식으로 극복한 ‘에어 서울’, 항공여행객의 캐리어 보관에 대한 고민이 담긴 ‘나리타 익스프레스’의 ‘캐리어 셀프 잠금 시스템’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본격적인 소개는 100년이 넘게 일본 문구류 시장을 선도하는 ‘이토야(Itoya) 문구점’부터 시작한다. 저자가 방문한 이토야 본점은 1층부터 12층까지 각 층마다 다른 카테고리와 콘셉트로 구성되어 있다. 고급스러운 만물상의 지향하는 독특함이 이토야를 ‘문구 덕후의 성지’로 꼽히게 하는 것이 아닐까?

다음에 소개하는 곳은 도쿄중앙우체국을 쇼핑몰과 백화점을 결합한 복합 문화 쇼핑몰로 재탄생시킨 ‘키테(KITTE)’ 쇼핑몰이다 어떻게 보면 도시재생사업의 결과물인데, 일본 전국의 시니세[老鋪]에게 쇼핑몰의 자리를 먼저 내주는 정책에 의해 전통과 현대의 성공적인 결합도 이루어냈다.

도쿄의 번화가인 오모테산도[表參道]에 있는 독특한 점포들도 소개되어 있다. 자신이 느낀 바를 현장에서 기록하고, 다른 관람객이 어떤 점을 느꼈는지 방명록을 통해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인 ‘디자인 페스타 갤러리’, 푸드트럭도 고정적인 위치에서 운영하는 식당, 나아가 복합 문화 공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커뮨 세컨드(COMMUNE 2)’ 등이 그것이다.

롯폰기 미드타운을 대표하는 ‘21_21 디자인 사이트는 전시회마다 색상이 바뀌는 둥근 스티커 입장권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단어와 문장으로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디렉터의 메시지, 관람을 마친 후 건물에 대한 호기심을 간직할 수 있게 한 굿즈 등이 돋보인다.

 

이런 디테일들이 저자를 매혹시킨 것이 아닐까?

 

일본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소한 디테일 때문입니다. 그 디테일이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부분일 수 있지만 저에겐 도쿄행 티켓을 끊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p. 24] 

 

사실 이런 특성은 우리가 ‘일본인’하면 떠올리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자가 도쿄 구석구석의 디테일한 물건들과 장소들에 얘기하고, 삶을 편하고 효율적으로 만드는 기획과 디자인에 대해 얘기해도 오히려 친숙함을 느끼게 된다. 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아는 도쿄’ 혹은 ‘안다고 생각하는 도쿄’의 시시한 이야기라고 느낄 수도 있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지행합일(知行合一)하지 않고, 공리공론(空理空論)에만 몰두했다고 비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비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이는 많아도, 그것을 제대로 알아채고, 적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오히려 우리들은 ‘대충’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디테일한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이 생활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 깜빡할 뻔 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디테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사용하는 ‘디테일’과 다소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디테일은 많은 의미를 포함하는 단어입니다. 한 점의 오류도 없이 완벽한 상태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디테일이 잘 살아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자칫 놓칠 수 있는 사소한 부분까지도 신경을 썼다고 느껴질 때 그렇게 말하죠. 또한 세부 사항을 의미할 때도 디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 내용을 조금 더 디테일하게 알려줘”라고 말할 때처럼요.

중략 ~

<도쿄의 디테일>에서는 완벽한 상태 또는 세부 사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고객 입장에서 체감하는 감동의 순간을 ‘디테일’로 정의했습니다.  [p. 325]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도쿄의 디테일>은 도쿄의 디테일한 물건을 보고,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효과를 주는지에 대해 생각하고, 이를 우리가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저자의 아이디어를 보면서 영감을 얻거나 습관을 기르기를 권유하는 책이다. 손질된 생선을 먹기 좋게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라는 얘기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발견한 것을 기록하는 ‘성실함’과 생각한 것을 공유하는 ‘전달의 힘’을 가지고 ‘나의’ 아이디어를 만들면 된다. 처음에는 시원찮은 결과만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이에 실명하지 않고 반복하다 보면 이런 방식이 체화(體化)되어, 어느 순간 디테일에 강한, 그러니까 고객의 마음을 울리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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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의 답안지 - 시권 고전탐독 3
김학수 외 지음 /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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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과거제 인가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베스트 셀러가 된 이후, ‘공정(公正)’이라는 말은 우리 사회의 화두(話頭)가 된 듯하다. 그런다면 ‘공정’이 현실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례는 어떤 경우가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두드러지고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분야는 ‘취직’과 이를 위한 ‘입시’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특히 양반을 자처하는 지식인에 있어서는 이 것이 둘이 아닌 하나였다. 게다가 그들에게 있어서 관리가 되는 길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기도 했다.

 

먼저, 조선시대 지식인의 가장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던 관료 선발 제도부터 살펴보자. 관료를 선발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중국 수(隋)나라의 과목선거(科目選擧, ‘선거제’)에서 시작된 과거제도만큼 고위 관료를 능력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선발하는 방법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대한민국의 공무원 제도도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한다는 점에서 제도 그 자체만 본다면 과거제보다 공정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아마 그래서 과거제를 고위 공무원 선발에 있어서 제대로 시행한 국가가 중국(587~1905), 한국(958~1894), 베트남(1075~1919)1)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선비의 답안지]는

 

이 책은 조선 시대 선비의 모습을 과거제, 보다 정확하게는 과거 시험의 답안지인 시권(試卷)을 통해 보여준다. 13개의 논문을 엮어 3부 13장으로 구분했다. ‘1부 시권을 살펴보다’에서는 시권이라는 과거 시험 답안지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과거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행되는지를 살펴본다. ‘2부 조선의 과거를 이해하다’에서는 장원 급제 비결, 합격자 발표인 방방(放榜)과 과거급제자의 시가행진이라 할 수 있는 삼일유가(三日遊街) 등 사회 풍속 및 여기에 얽힌 비화 등을 알려준다. ‘3부 시권의 행간을 읽다’는 과거 시험에 나왔던 문제, 특히 책문(策問)을 통해 당대의 지식인인 선비의 눈에 비친 사회상을 들여다 본다.

이 중 3부는 조선시대 성리학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교정해주는 측면도 있다. ‘책문’이라는 시험방법과 그 답안들을 통해 왠지 현실 문제에 관심이 부족하고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을 듯한 조선의 선비들이 어떻게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있고, 또 실제로 어떤 해결책을 제시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시권(試卷)이란?

 

과거 시험의 답안지를 시권(試卷)이라고 하는데, 시험의 방식 혹은 내용에 따라 제술(製述), 강서(講書), 사자(寫字), 역어(譯語)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라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제술(製述) 방식은 글을 짓는 능력과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능력 등을 살피는 시험으로 시(詩), 시와 산문의 중간 형태를 띤 부(賦), 어떤 인물의 공적이나 업적을 찬양하는, 전아(典雅)하고 장중(莊重)한 운문인 송(頌), 국왕의 물음에 대해 응시자가 해결 방안 등을 진술한 대책(對策),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는 논(論) 등을 제출한다. 주로 문학적 능력을 살피는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책(對策)처럼 응시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요구하는, 일종의 논술시험에 해당하는 부분도 있어 그런대로 관료 선발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다고 할 수 있다.

 

강서(講書)는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경전을 보면서 물음에 답하는 임문(臨文) 형식과 경전을 시험관 앞에 펴 놓고 외우거나 책을 보지 않고 물음에 답하는 배강(背講)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과(文科)에서 많이 쓰이나 무과(武科)나 잡과(雜科)에서도 사용하는 시험방식이다. 이런 방식의 시험에는 답안 작성을 위한 시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험절차상 시험문제를 내고, 채점내용을 기록해야 했기 때문에 시권을 작성한다. 즉, 강서 시권이란 시험출제 내용과 점수를 기록한, 일종의 구두(口頭)시험 채점표라고 할 수 있다.

 

역어(譯語)는 <경국대전>을 외국어로 번역하는 형식이고, 사자(寫字)는 몽골어, 왜어(倭語), 여진어(女眞語) 등으로 된 출제부분의 내용을 외워서 베껴 쓰는 형식이다.

 

 

시권, 무엇을 기재하나

 

시권에 기재되는 내용은 크게 응시자 본인이 기록한 것과 시관(試官) 등이 기록하거나 확인하는 것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가장 시권이 많이 남아 있는 제술의 경우, 응시자는 먼저 본인과 사조(四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기재한다. 그리고 과목마다 정해진 양식에 따라 답안을 작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시제(試題)가 짧을 경우는 문제를 그대로 쓰고, 긴 경우에는 ‘문운운(問云云)’ 등으로 문제를 생략한다. 그리고 시험명은 시(詩)나 부(賦)는 시제의 아래쪽, 대책(對策)과 경의(經義)는 대(對), 서의(書義), 예의(禮義), 역의(易義), 시의(詩義)라고 써서 시제의 위쪽에 각각 기록한다. 시나 부는 운자(韻字)를 맞춰야 하고, 경의나 대책의 답안에는 첫 부분과 끝 그리고 서술 중에 우(于), 근대(謹對), 신복유(臣伏惟), 신복독(臣伏讀), 공유(恭惟) 등의 자구를 삽입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답안의 글자 수도 최저 하한선이 있어 그 이상을 써야 했다.

 

응시자가 답안지를 제출하면 시관은 먼저 인적 사항 부분의 근봉(謹封) 여부를 확인한다. 그리고 시권을 연결시킨 부분이나 틀린 곳을 수정한 곳에 도장을 찍는다[착인(着印)]. 그리고 나서 시권을 관리하기 위해 답안지를 10장씩 묶어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연번호(連番號)를 기재한다[자호(字號)]. 그 다음 점수를 붉은 글씨로 굵게 기록하고, 과차(科次) 즉 등수를 표시한다.

 

어쨌든 과거제가 공정을 강조했기 때문일까? 아무리 훌륭한 실력을 갖추고 뛰어난 내용을 담았다고 해도 시권의 규정된 형식을 지키지 못하면 합격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다소 억울하다고 느낄 사례도 발생한다.

오늘날 시험에서도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데,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1681년 강경에서 15분(分)2)이라는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은 주항도(朱恒道)는 시권에 이름과 나이를 써 넣지 않아 불합격으로 처리됐다. 얼마나 긴장했기에 사조(四祖;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외할아버지)의 인적 사항을 기재해놓고 정작 본인의 인적 사항을 누락했을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웃으면 얘기할 수 있지만, 나에게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속이 터져 미칠 것 같을 것이다.

 

 

시험 부정을 막기 위한 노력

 

우리가 ‘과거’라고 할 때 떠올리는 대과(大科)는 문관 임용 ‘자격’ 시험으로 소과(小科)에 합격하지 않아도 응시가 가능했다.  1차 시험인 초시(初試)에서 240명, 2차 시험인 복시(覆試)에서 33명을 각각 뽑는다. 3차 시험인 전시(殿試)는 복시에서 선발된 33명의 순위 결정전인데, 여기에서의 순위에 따라 처음 임관되는 품계가 달라진다. 즉, 갑과 1등인 장원(壯元)은 종6품, 갑과 2등인 아원(亞元) 혹은 방안(榜眼)과 3등인 탐화랑(探花郞)은 정7품, 을과 7명은 정8품, 병과 23명은 정9품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현관서용(顯官敍用)과 한품서용(限品敍用)의 임용원칙 때문에 4등 이하의 을과나 병과 합격자들은 사실상 전직관료나 명문가의 자제가 아니면 임용이 어려웠다. 그래서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부정행위에의 유혹도 강해질 수 밖에 없었다.

 

시제(試題)의 사전 누설, 붓에 커닝페이퍼를 숨기는 협서(挾書), 남의 답안을 베껴 쓰는 차술(借述), 답안을 대신 작성해주는 대술(代述), 응시자들이 하나의 접(接, team)을 이뤄 과장에 함께 입장하여 한 자리에 앉아 서로 돕고 의논하여 답안을 작성하는 공동제술(共同製述) 등의 부정행위는 입시부정이 오늘날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도 부정행위를 막으려는 노력은 계속 되어 왔다.

 

첫째, 봉미법(封彌法)이 있다. 응시자의 사조, 나이, 성명, 거주지 등 신원이 기재된 부분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말아올려, 말아올린 부분의 상단·중단·하단 세 곳에 구멍을 내고 끈으로 묶은 다음 ‘근봉(謹封)’이라는 글을 써 넣거나 도장을 찍어 두는 방법이다.

 

둘째는 역서법은 응시자가 작성한 문장의 필체를 시관이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방법이다. 즉, 서리를 시켜 시험내용을 다른 지면에 옮겨 쓰게 한 뒤, 이를 보고 채점하는 것이다.

 

셋째는 시관과 응시자 사이에 장막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는 강경에 있어서 시관이 응시자를 알아보고 공정하지 못하게 채점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TV프로그램 [복면가왕]과 비슷한 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행위는 끊이지 않고 발생했다. 아마도 사람 사는 곳은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비슷한가 보다.

 

 

옥의 티

 

p.27

③ 과시(科試): 고사나 시문 중의 문구를 시(詩)의 제목으로 제시하고 ~ 한시의 일종이다.

⇒ ③ 과시(科詩): 고사나 시문 중의 문구를 시(詩)의 제목으로 제시하고 ~ 한시의 일종이다.

 

 

1) 18세기 후반 대월(大越)의 떠이선[西山] 왕조의 꽝 쭝[光中, 재위 1788~1792] 황제는 베트남 고유의 문자체계인 쯔놈[字喃]을 공식문자로 지정하고, 나아가 과거시험에 이를 사용하여 답안을 작성하라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내놓기도 했다.

2) 강경(講經)의 각 과목마다 통[2분], 약[1분], 조[0.5분]의 점수를 부여하므로 원칙적으로 7과목 합산 최고 점수는 14분이 된다. 단, [주역(周易)]이나 [춘추(春秋)]를 선택했을 경우에는 2배의 점수를 부여하기에 주항도의 사례처럼 15분이 나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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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3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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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하는 인간]


프랑스령 알제리 출신인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1960, 이하 카뮈’) <이방인>과 같은 삶의 부조리에 대한 의식을 투영한 작품으로 부조리 문학의 대표 작가로, <시지프 신화> <반항하는 인간> 같은 철학적 에세이로 실존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지칭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의 문학세계는 어떤 것일까? 번역자인 김화영에 의하면 카뮈는 부정(부조리), 긍정(반항), 사랑의 발전 단계를 전제로, 작품 세계의 체계적 청사진을 세웠다고 한다. 이를 보여주듯이 그는 1943년부터 약 15년 동안 두 번째 층위에 해당하는 반항과 테러리즘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소설 <페스트>(1947)와 이를 각색한 희곡 <계엄령>(1948), 희곡 <정의의 사람들>(1949), <반항하는 인간>(1951) 등이 이런 반항의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책 <반항하는 인간>의 첫 장을 보면,


반항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non, 부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거부는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그는 또한 반항의 첫 충동을 느끼는 순간부터 (oui, 긍정)’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p. 31]


아무리 봐도 막연하고 형이상학적인 얘기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실제 사례를 보면 보다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인지 <반항하는 인간>에서는 반항을 극단으로 몰로 간 이들, 카인의 후예라고 부를 수 있는 이들을 먼저 살펴본다.



반항하는 인간들


<소돔의 120>, 아니 사디즘으로 유명한 사드 후작(Marquis de Sade, 1740~1814)는 세계의 질서와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을 통해 절대적인 (non, 부정)’을 이끌어 낸 최초의 이론가라고 한다.


잔혹함과 철학적 사색으로 가득 찬 그 10여 권의 저술은 불행한 고행을, 전적인 으로부터 절대적인 로의 환각에 사로잡힌 이행을, 그리고 마침내 죽음에의 동의 모든 것과 만인의 살해를 집단 자살로 탈바꿈시키는 를 요약한다. [p. 89]


어떻게 보면 사드의 후예라 할 수 있는,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와 같은 낭만주의적 반항인은 증오의 원리로서의 신()’과의 결별을 추구했다.


도전하고 거부하는 힘에 역점을 두다 보니 반항은 이 단계에서 그것이 지닌 긍정적 내용을 망각한다. 신이 인간 내면의 선을 요구하므로 그 선을 조롱하고 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과 불의에 대한 증오는, 악과 살인의 실천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악과 살인의 옹호로 이어지게 된다. [p. 92]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evsky, 1821~1881)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보면,


이반 카라마조프는 인간들의 편을 들고 인간들의 무죄에 강조점을 둔다. 그는 인간들을 무겁게 짓누르는 죽음의 형벌은 부당하다고 잘라 말한다. 적어도 그 첫 충동에 있어서 그는 악을 변호하기는커녕 신성보다 더 위에 있다고 여기는 터인 정의를 옹호한다. 따라서 그는 절대적으로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도덕적 가치의 이름으로 신을 공박한다.

~ 중략 ~

설령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설령 신비가 진리를 품고 있다 할지라도, 설령 조시마 장로가 옳다 할지라도, 죄 없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악과 고통과 죽음이 그 진리의 대가로 치러지는 상황을 이반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반은 구원의 거부를 몸으로 구현한다. 신앙은 영생으로 가는 길이다. 그러나 신앙은 신비와 악을 받아들이고 불의를 감수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pp. 106~107]


이반이 마침내 마음속으로 제기하는 질문, 즉 도스토옙스키가 이 반항인으로 하여금 이룩하게 만드는 참된 진보의 핵심인 질문, 그것이야말로 여기서 우리가 관심을 가지는 유일한 것이다. 즉 인간은 반항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가, 또 반항 속에서 계속 버틸 수 있는가?

이반은 이에 대한 대답을 이렇게 내비친다. 인간은 오로지 반항을 궁극까지 밀고 나감으로써만 반항 속에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형이상학적 반항의 극단은 무엇인가? 형이상학적 혁명이다. 이 세계의 주인은 그의 정당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된 이상, 타도되어야 마땅하다.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신도 영생도 존재하지 않으므로 새로운 인간이 신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모든 것이 다 허용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 자기 자신의 법 이외의 모든 법을 거부하는 것이다.  [pp. 111~112]


이처럼 인간이 신을 도덕적으로 심판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서부터 신을 죽이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신을 죽인 것이 아니라 그는 이미 죽어 있는 신을 발견한 것일 뿐이다.


니체와 더불어 반항은 신은 죽었다라는 명제에서 출발한다. 반항은 그 명제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간주한다. 반항은 그리하여 사라져버린 신을 당치 않게 대신하려 드는 모든 것, 비록 정해진 방향은 없어도 여전히 제신들의 유일한 도가니인 한 세계를 욕되게 하는 모든 것에 대항하여 맞선다. 그에 대한 몇몇 기독교측 비판자들의 생각과는 반대로 니체는 신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운 바 없다. 그는 자기 시대의 영혼 속에서 이미 죽어 있는 신을 발견한 것이다.

~ 중략 ~

그러므로 니체는 하나의 반항 철학을 부르짖은 것이 아니라 반항이라는 기초 위에 하나의 철학을 구축했던 것이다. [p. 127]



반항이란 무엇인가


살인의 정당화를 거부하는, 반항과 폭력에 관한 연구서라고도 할 수 있는 <반항하는 인간> 서론에서 카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근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천착하는 일이 아니라, 그보다는 눈앞의 세계가 곧 현실이기에, 먼저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아는 일이다. [p. 15]


, 카뮈에게 중요한 것은 반항론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와 같은 삶에 대한 구체적인 성찰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카뮈의 반항은 테러리즘이나 폭력 행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반항 속에 폭력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반항은 형이상학적 시각에서나 역사 속에서의 기능에 있어서나 폭력에 안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반항이 본래의 순수함을 잃게 되어 온통 폭력에 쏠려 버릴 경우, 특히 그 폭력이 정당하다고 보게 될 경우 그 반항은 허무주의와 살인에 이른다. 있는 그대로의 것에 대한 전적인 거부, 즉 절대적 을 신격화할 때마다 반항은 살인을 한다. 있는 그대로의 것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일 때, 즉 절대적인 를 외칠 때마다 반항은 살인을 한다.

~ 중략 ~

어쨌든 그 어느 경우에 있어서든 반항은 살인에 이르게 되어 반항이라 불릴 권리를 잃고 만다. [p. 565]


, 카뮈는 반항과 폭력에는 반드시 한계가 있으며, 어떤 대의(大義)로도 무고한 사람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진정한 반항은 폭력에 대한 부정이자 가치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 토대.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p. 47]


바야흐로 역사와 씨름하고 있는 반항은,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와 형이상학적 반항의 ‘그리고 우리는 외롭다.’에 추가하여, 우리 자신이 아닌 존재를 생산하기 위해 죽이고 죽을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을 창조하기 위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들도 살게 해야 한다고 덧붙여 말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p. 434]


반항에 있어서 정치란 이러한 진리에 복종하는 것이라야 한다. 결국 반항은 역사를 전진시키고 인간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할 때, 그 폭력 없이라고는 아니라 해도 테러를 동원하는 일은 없이, 그리고 가장 다양한 정치적 조건들 속에서 그 일을 수행한다. [p. 513]


앞에서 인용한 문구들을 살펴보면, <반항하는 인간>은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악순환이 이어지는 폭력의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이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제시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반항에 있어서 폭력은 불가피한 것일지라도 그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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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잃어버린 프로이트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정채연 옮김 / 북하이브(타임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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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프로이트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가 생겨났을까?

 

어떤 이유로 시작했든 누군가를 연구한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상을 긍정적으로 혹은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게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신이 잃어버린 프로이트>를 쓴 저자가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 이하 ‘프로이트’)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따뜻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먼저 저자가 프로이트를 보는 시각을 살펴보자.

 

프로이트 저작의 영역본들은 중요한 부분을 심각하게 오해석하고, 프로이트라는 사람뿐만 아니라 심리분석에 대해서도 잘못된 결론을 내리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p.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역본에 대한 비판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는 저자에 따르면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는 대부분의 영어 번역본이 프로이트 생전에 프로이트에게 수용 혹은 허용되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영어 표준번역본의 편집장이 생전에 프로이트의 인정을 받아 그의 저작을 몇 권 번역했던 사람이고, 그의 딸이자 후계자인 안나 프로이트(Anna Freud, 1895~1982, 이하 ‘안나’)가 그 영역본의 공동편집자라는 점이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자기자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평생 고군분투했다. 그는 우리가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더는 알지 못하는 힘에 얽매여 불만족스럽거나 끔찍하기까지 한 삶을 살지 않게 됨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비참하게 만들거나 우리 스스로를 해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p. 33]

 

그렇다면 도대체 독일어 원본과 영어 번역본의 차이가 뭐기에 저자가 이렇게까지 나서는 것일까?

 

프로이트 저작의 영역본들은 원본에 스며있는 심리분석의 본질인 인본주의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p. 18]

 

다시 말해, 영역본은

 

프로이트가 독자 자신과 인간의 내면 세계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것과 달리, 추상적 개념을 사용하여 오히려 독자가 자신의 무의식으로부터 거리를 두도록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영역본이 말하는 심리분석은 다른 이에게 적용하는 지적 구성체계 같은 것이 되었다. 그 영향으로 심리분석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심리분석을 개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고, 스스로의 무의식을 비롯해 내부에 있는 가장 인간적인, 하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모든 것에 접근하지 않으려고 하게 되었다. [p. 20]

 

 

개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한 프로이트 다시 읽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용어는 상징적이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저작에서 사용한 모든 은유와 같이, 이 용어도 풍부한 관계성과 연상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명시적인, 또 암묵적으로 나타나는 은유를 담고 있기에 다양한 수준에서 의미를 가진다. 프로이트는 이 용어를 통해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개념까지 생생하게 나타내고자 했다. 내가 만난 많은 학생들이 그랬듯,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단순히 소년이 자신의 아버지라 알고 있는 남성을 죽이고 자신의 어머니라 알고 있는 여성을 얻기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이는 신화에 담긴 의미를 빼고 극단적으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오이디푸스나 라이오스를 죽이고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집을 떠나 방랑을 시작한 이유는 자신의 친부모라고 생각한 사람들을 스스로 해치는 일이 불가능하도록 자신을 그곳에서 떼어놓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번역된 개념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부친살해 소망과 근친상간 소망을 갖는 것에 대한 아동의 불안과 죄책감으로 이해하게 만들었다.

중략 ~

오이디푸스는 부모에게 거절당했기 때문에 이런 비극적인 행동을 했다. 이를 뒤집어보면, 어떤 아동도 부모 모두가 거절하지 않는 한 오이디푸스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이디푸스적 소망과 오이디푸스적 죄책감의 관계에 관한 프로이트의 생각은 우리의 성격을 형성하는 갈등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약 아버지가 갓난아기인 우리를 실제로 죽이려 했다면, 그를 죽이고 싶다는 소망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만약 어머니가 실제로 우리를 버렸다면, 어머니의 사랑을 되찾아 영원히 독점적인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소망에 죄책감을 느껴야 할 필요가 있을까?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 부모에 대한 사랑, 부모를 보호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소망만이 부모를 향한 부정적이고 성적인 감정을 억압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pp. 42~44]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개념은 우리가 스스로의 무의식을 자각해야 한다는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면, 삶에서 길을 잃었을 때, 아버지처럼 보이는 무언가가 길을 막고 섰을 때에도 통제되지 않은 분노와 좌절 속에서 주먹을 휘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을 자각할 수 있다면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무의식에게 잠식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p. 45]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아동의 오이디푸스적인 소망과 불안이 아동에 대한 부모의 감정과 대응관계에 있다는 심리분석적 발견의 기반이다. [p. 50]

 

한마디로 고장난명(孤掌難鳴), 즉 한 손으로 박수칠 수 없다[Nobody can clap with one hand]는 얘기다.

 

 

뿐만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번역자들은 프로이트가 빈번하게 사용하는 영혼(die Seele)에 대한 언급을 누락하거나 그가 오직 인간의 마음에 관한 이야기만 한 것처럼 번역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다양한 곳에서 ‘영혼의 구조(die Strukturdes sellischen Apparats)’와 ‘영혼의 조직(die seelische Organisation)’에 관해 말했다. 이 용어는 거의 언제나 ‘정신구조’ 혹은 ‘정신조직’으로 번역된다. 이는 특히 잘못된 번역이다. 독일에서 Seele와 seelisch는 오늘날 미국인이 쓰는 영혼(soul)보다 더욱 명확하게 영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이 영혼을 대체하여 사용한 ‘정신(mental)’이라는 단어는 geistig라는 독일어와 같은 말이다. 이는 ‘마음의(mind)’ 혹은 ‘지성의’라는 뜻이다. 만일 프로이트가 영혼이 아닌 geistig를 의미하고자 했다면 굳이 다른 단어를 썼을 이유가 없다. [p. 102]

 

이는 영역본에 심리분석을 포함한 정신분석학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입증 가능한, 과학 그 중에서도 의학의 한 전문분야로 보고자 하는 입장이 반영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프로이트의 다른 글에도 이런 부분이 잘 나타나 있다.

 

프로이트는 <심리분석 개요>의 초기 원고인 <심리분석 입문강의>에서 “심리분석은 영혼과학에 헌정된 심리학의 일부이다”라고 말했다. 프로이트에게 심리학은 광범위한 분야이면서 영혼과학의 부분이다. 그리고 심리분석은 영혼과학의 특수 분과이다. 이보다 더 심리분석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영혼과 관련되어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진술을 생각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표준판은 이를 “심리분석은 심리과학의 정신과학 중 한 부분이다”라고 번역했다. [pp. 106~107]

 

프로이트의 <심리치료>라는 논문의 경우에도

독일어 원본 해석

영어 번역본 해석

프시케’는 그리스어이며 독일어 번역은 ‘영혼’이다. 이런 이유로 심리치료는 ‘영혼의 치료’를 의미한다. 따라서 어떤 이는 심리치료가 의미하는 것이 영혼에 발생한 병리적 현상을 치료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심리치료의 의미가 아니다. 심리치료는 영혼으로부터의 치료, 영혼에 직접적으로 작용하여 정신적이고 신체적인 장애를 치료하는 것을 말한다. [p. 104]

프시케’는 그리스어이며 마음’으로 번역될 수 있다. 따라서 ‘심리치료’는 ‘정신치료’를 의미한다. 그런 이유로 이 용어는 ‘정신적 삶에서의 병적인 현상의 치료’로 정의된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심리치료의 의미가 아니다. ‘심리치료’는 오히려 마음 속에서 시작하는 치료를 가리키며, (정신이든 신체장애이든) 치료는 인간 마음에 우선적이고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방법을 뜻한다. [p. 105]

 

이런 식으로 아예 엉뚱하게 번역한 것은 아니지만, 의역(意譯)의 과정에서 원래 프로이트가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뉘앙스를 풍기게 해서 잘못된 해석을 유도했다는 얘기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심리분석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몇 개의 오역을 바로잡고, 프로이트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는지 보여주고자 했다고 한다.

독일어도 모르고 원서도 보지 않았기에 저자의 주장이 옳은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오역 부분은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지만 나와 저자가 ‘인간적인 사람’에 대한 관념이 다른 것일까? 저자에게는 아쉽게도 나는 프로이트가 인간적인 사람이었다는 부분은 그렇게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리뷰는 북하이브로부터 받은 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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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인 (양장) 소설Y
천선란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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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다는 것

 

외(外)’지인, ‘외(外)’계인, ‘이(異)’종족 등이 등장하는 소설, 영화, 만화들은 많다. 그런 작품에서 그들은 종종 나와 ‘다른’ 시선을 보여주는 도구로 활용된다. 유명한 영화 <아바타>의 나비족처럼. 동시에 이런 ‘다른’ 존재는 작가의 의도를 보여주는 도구의 역할도 한다.

 

이 소설 <나인>을 읽다가 문득 영화 <슈퍼맨>이 떠올랐다. 평범한 지구인처럼 키워진 클라크 켄트(Clark Kent)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히어로(Hero)로 활동하는 영화 말이다. <나인>의 주인공 ‘유나인’도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자라왔다.

 

평범하게 살던 주인공이 어느 날 자신의 힘을 깨닫고 모험을 떠나는 이야기나, 옆집의 친절한 이웃이 사실 영웅이었다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이유는 그것이 삶에 일어나지 않을 판타지를 대리 만족 할 수 있어서였다. 나인도 한때 자신이 밤에는 세상을 구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면 지난 새벽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영웅이라 믿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게 사실이 아니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주 자연스럽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가 천천히, 자연스럽게, 은밀하게, 자신은 영웅이 아니라는 걸,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다는 걸, 아주 평범하거나 혹은 평범하기 위해 아등바등 헤엄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듯이. [pp. 238~239]

 

그런데 어느 날부터 나인에게 식물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손톱 사이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이상현상이 발생했다. 심지어 환영(幻影)처럼 보이는 소년마저 등장한다. 당연히 자신을 평범한 지구인이라고 여기고 살아왔던 나인은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이때 헛것인줄 알았던 소년, ‘해승택’이 그녀가 인간이 아니고 식물이라고 얘기한다. 여기에 나인의 이모로 살아왔던 ‘유지’, 즉, 지모(유지 이모의 약칭, 이하 ‘지모’)는 이제 와서 그녀가 멸망위기의 행성에서 탈출한 누브족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안 그래도 질풍노도의 사춘기인데, 자신의 정체성 문제까지 겹치니 얼마나 황당하고 당황스러울까?

 

 

진실을 밝힌다는 것

 

“이거 하나는 약속해 주라. 아무리 답답하고 화가 나도 네 능력을 발설하지 않겠다고. 절대.”

“어렵지는 않은데……. 우리 종족이 위험해져서?”

“아니. 그 말 한마디로 인간들은 네가 뱉은 모든 말을 거짓말로 여길 테니까.”

나인은 이런 말들을 뼈에서 나온 말이라 표현했다. 깊은 상처는 뼈에도 흔적을 남기는 법이니까.

인간들은 그래. 믿을 수 없는 게 하나 생기면 모든 걸 다 가짜로 만들어 버려.” [p. 144]

 

누브족의 식물과 교감하는 능력을 통해 나인은 2년 전 자취를 감춘 학교 선배 ‘박원우’ 실종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다. 문제는 진실을 안다고 해도 나인과 그 친구들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라는 점이다. 게다가 나인이 누브족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고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나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쉬운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진실을 외면하는 것이지만, 그들이 누브족이라는, 외계인이라는 좋은 핑계거리가 있었다.

 

다른 존재가 이 행성의 생태에 관여하면 안 된다고 했어. 우리는 바깥에서 온 존재들이니까. 그리고 곧 떠날 테니까. 나는 그래서 그게 맞는 줄 알았어. 관여하지 않는 거. 우리는 처음부터 이 행성의 법칙에 끼어 있지 않았으니까. [p. 142]

 

다음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수사가 종결된 사안을 당사자도 아닌, 고등학생 몇 명이 나선다고 진지하게 받아들여 재수사할 리 없다는 점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박원우 실종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것이 중심이 된, 일종의 스릴러 소설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의 진실은 박원우 실종사건과 관련된 것 하나가 아니다.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가 희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들의 입장을 우리는 ‘공리주의(功利主義)’라고 한다. 구체적인 예시를 한 번 들어보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는

 

치 큰 사람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려 선로를 이탈한 전차를 막는 행위를 꺼렸던 일은 떠올려보라. 그 사람의 삶은 그에게 속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를 밀기가 꺼려지지 않았던가? 그 덩치 큰 남자가 자기 목숨을 던져 철로의 인부를 구했다면, 그 행동에 반대할 사람은 거의 없다. 어쨌거나 그의 삶이니까.

하지만 명분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의 목숨을 우리 마음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라는 얘기가 있다. 공리주의 원칙에 따르면, 보다 많은 이들을 살리기 위해 덩치 큰 사람을 다리 아래로 밀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최선일까?

 

외곽 도로에 쓰레기를 몰래 버리고 가는 사람들을 지모가 전부 신고했을 때 신고 당한 사람들이 내뱉은 말이었다. 남의 집 앞도 아니고 차만 다니는 길에 쓰레기 좀 버린다고 누가 피해 보는 것도 아닌데 가만히 좀 있지, 꼭 저렇게 본인만 정의롭다는 식으로 굴어야 속이 편한가. 지모의 등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리던 아저씨의 말을 나인은 십 년이 지나도록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뿐이 아니다. 특수 학교 설립에 찬성했을 때도 대부분의 주민이 지모를 그런 눈초리로 흘겼다. 가만히 좀 있지. 애도 없는 아가씨가 뭘 안다고 자꾸 말을 얹어. 땅값 걱정할 일이 없으니까 그러지. 모르면 말을 말든가.

중략 ~

소수가 다수를 이기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겹고, 지긋지긋하고, 진절머리 나게 구는 것이라고. [p. 138]

 

이 이야기에서 누가 다수이고, 누가 소수인가? 직접적으로 관계된 사람의 숫자가 아닌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사람의 숫자까지 따지면 오히려 지모가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아닐까?

 

“…… 우리가 멸종할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어떻게 그것만 멸종일 수 있니?”

나인의 목소리가 커졌다.

저 선배는 세상에 딱 저 선배 하난데 사라졌잖아.”

말을 할 때마다 비를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비를 다 마시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은 말해야 했다.

중략 ~

“…… 근데 내가 들었어. 저기 있다는 거 내가 알았는데 나야말로 그걸 어떻게 모르는 척해. 사람 한 명이 지구에서 멸종했는데.” [pp. 140~141]

 

한 명의 사라짐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멸종’이라고 얘기하며 그 또한 엄청난 일이라고 말하는 나인의 관점은 사소한 것을 사소하지 않게 여기고 있다. 그런데 단기적인 최선, 최대의 행복이 아닌 장기적인 최선, 최대의 행복을 구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나인의 시각이 옳은 것이 아닐까?

 

누브족이 자신들이 살던 행성, 리겔리에서 떠나 지구로 이주하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더욱 나인의 생각이 옳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주선의 정원을 맞추기 위해, 식량의 확보를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었으니,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The war of all against all)’이 현실에서 구현된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까?

 

세상의 모든 일에는 중요도가 있다. 누구든 소중하지만 어떤 죽음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죽음은 살인자의 한 끼보다도 보잘것없다. 그렇게 어떤 일은, 죽음은, 억울함은, 호소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밀려 세상 밖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걸, 그렇게 사라지지도 분해되지도 해결되지도 않은 상태로 우주를 떠돌게 된다는 걸 미래는 아직 모른다. 영원히 몰랐으면 좋겠지만 조금씩 알게 되겠지. 그걸 알아 가는 게 살아가는 것이고, 나이를 먹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것도 알게 됐으면 한다.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더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p. 376]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여기고, 다른 것을 틀린 것이 아니라 여기고, 다름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그냥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야 복잡해지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신 다름을 인정하고 그 다름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진짜 어른이 아닐까? 물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 힘든 일이라고 포기해버리면 그건 어른이 아니다. 나이를 먹어 생물학적으로 어른이라고 보아야 하더라도.

 

1)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 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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