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안부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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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렇기에 남에게 보여지는 ‘나’에 대해 신경을 쓸 수 밖에 없다. 이 소설 <눈부신 안부>의 화자(話者)인 이해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가스 폭발 사고로 친언니 이해리를 잃었기에 그 상실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의 시선을 더 의식했는지도 모른다


부모를 잃은 자식의 슬픔도 크지만, 뜻하지 않는 사고로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은 더 클 것이다. 그렇기에 모범생이던 큰 딸 이해리를 가스 폭발 사고로 잃은 해미의 부모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해 별거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서로를 볼 때마다 그 아픔을 상대방에게 돌리고 싶은 마음이 들 테니까.

그런데 자식을 잃은 부모만 힘겹고 언니를 잃은 해미는 괜찮을까? 해미는 언니에게 “땡땡이 치지 못하는 범생”이라고 놀렸기 때문에 언니가 조퇴하고 거리를 거닐다 사고를 당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게다가 아직 어리고 언니에 대한 기억도 적을 여동생 해나까지 의식하면서, 그녀는 멀쩡하다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면서 괴로움을 삭혀야 했다.


살아 있는 게 내가 아니라 언니였다면 언니는 틀림없이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해주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면 참을 수 없이 괴로웠다. “좋아요.” 나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큼이나 낯선 나라로 가는 것이 싫었지만, 엄마 아빠를 위해 그렇게만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때로 체념이 필요했다. [p. 30]


엄마를 따라 해나와 함께 옮겨간 곳은 독일 중부의 G시였다. 수많은 장소 가운데 G시를 선택한 것은 엄마의 언니인 ‘행자 이모’[오행자]가 정착한 곳이라는 점도 한몫 했다. 갑자기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의 도시에서 살게 되었지만, 해미는 가족을 의식해서 잘 적응하고 있는 것처럼 가장했다. 바둑에서 훈수 두는 이처럼, 제3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고독과 불안이 잘 보이는 것일까? 간호조무사로 건너가 의사로 정착한, 행자 이모는 그런 해미의 거짓말을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진짜 친구를 소개시켜 준다. 바로 그녀보다 한 살 위인, 마리아 이모[최말숙]의 딸 ‘레나’였다. 이렇게 만난 레나와 친해진 후 해미에게 가상이 아닌 현실의 친구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그 아이들과 있을 때면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나라에서 이주해온 이방인도, 언니를 사고로 잃은 아이도 아니었으니까. 그곳에서 나는 그저 온전한 나였고, 레나는 온전한 레나였으며, 우리는 온전한 우리였다. 그런 시간은 이모가 시장에서 떨이로 사온 무른 산딸기나 살구로 만들어주던 잼처럼 은은하고 달콤해서, 나는 너무 큰 행복은 옅은 슬픔과 닮았다는 걸 배웠다. [p. 40]


선의의 거짓말이라지만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다 보니 자신의 얘기가 모순되지 않도록 해미는 자신의 말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어디서나 노트를 들고 다니며 거짓말을 할 때마다 기록을 하는 해미를 보고 사람들은 그녀가 작가가 되고 싶어한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이를 알게 된 레나는 해나에게 뇌종양에 걸린 선자 이모[임선자]의 아들 ‘한수’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레나와 해미는 선자 이모가 기억을 잃기 전에 그녀의 첫사랑을 만나기를 원하는 한수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아이들은 첫사랑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찾기 위해 선자 이모의 일기를 몰래 읽어나갔다. 일기 속에는 선자 이모가 1973년 독일로 떠나온 후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간직해온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흩어져 있다. 하지만 그 첫사랑이 누구인지를 명확하지 않았다. 단지, 확실한 것은 그 첫사랑의 이니셜이 ‘K.H.’라는 사실뿐이었다.


석사학위까지만 받기로 아빠에게 약속하고 독일로 건너왔던 엄마는 학위를 따게 되면 박사과정까지 진학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해나는 한국의 기억을 잃어버린 것처럼 독일어로만 말했고, 나는 도시를 조금씩 좋아하게 되었으며, 그곳이 내 자리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마침내 우리 가족도 행복에 거의 가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언니가 떠오르면 죄책감이 느껴질 만큼의 행복이었다. 죄책감이 가슴을 쿡쿡 찌를 때마다 속으로 언니에게 말을 걸어야 했을 만큼의 행복. “언니, 사람의 마음엔 대체 무슨 힘이 있어서 결국엔 자꾸자꾸 나아지는 쪽으로 뻗어가?” [p. 109]


그러나 자신이 있을 곳을 드디어 마련했다는 따스한 안도감도 잠시, 한국에 외환위기가 닥친 1997년, 해미의 가족은 갑자기 한국, 정확히는 아빠가 사는 부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어느새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경계인(境界人)이 된 해미는 타인과의 깊은 교류를 자제하게 된다. 심지어 대학 시절 문학 동아리에서 만나 미묘한 감정을 주고 받던 ‘우재’와도 친구와 연인 사이의 선(線)을 넘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만난 우재는 해미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간다. 그 과정에서 해미는 상자에 담아 묻어두었던 선자 이모의 일기와 편지를 떠올리고, 늦었지만 그녀의 첫사랑 K.H.를 다시 한번 찾아본다.


나는 네 마음을 그저 짐작하고 내 마음을 조심스레 암시하면서 두려워만 하다가 너를 잃었다. [p. 299]


선자 이모에게 들은 힌트로 그 사람의 이름이 K.H.로 시작되는 수학시간에 쓰는 용어와 같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린 시절의 해미는 K.H.를 ‘기호(記號)’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해미는 K.H.가 ‘근호(根號, 제곱근)’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끝내 K.H.를 찾아 선자 이모의 일기와 편지를 전할 수 있었다. 비로소 오랫동안 고스란히 묻어두었던 상처를 들추어 실패로 남겨두었던 지난 일들을 바로잡은 셈이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한 가정을 이루지 못했고, 늘 동경했던 시인이 되지도 못했고, 뼈아픈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어. 하지만, 내 삶을 돌아보며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아. 나는 내 마음이 이끄는 길을 따랐으니까. 그 외롭고 고통스러운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있는 한 내가 겪은 무수한 실패와 좌절마저도 온전한 나의 것이니까. 그렇게 사는 한 우리는 누구나 거룩하고 눈부신 별이라는 걸 나는 이제 알고 있으니까. [pp.303~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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