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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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레 도미에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판화가로 널리 알려진 귀스타브 도레의 작품을 아주 좋아한다. 도레는 특히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주제로 한 판화로 널리 알려졌는데, 당시 신흥 부르주아 자본가들에게 도레의 작품은 많은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로마인 이야기>에 이어 다시 중세로 돌아간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는 나나미 여사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명쾌한 문장과 함께 귀스타브 도레의 세밀한 판화로 천 년 전 신의 뜻으로 행해진 성전을 되짚어 보는 재미가 있다.

11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성도 예루살렘이 위치한 중동의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어느 정도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했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로 서진하는 무슬림 세력의 비잔틴 공략이라는 국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알렉세이오스 1세가 로마 교황 우르반 2세에게 구조를 요청하면서 천년에 걸친 종교전쟁의 도화선을 당기게 된다. 당시 서유럽 제국 사이에서 최고의 종교권력을 자랑하던 로마 교황은 유럽 각지의 봉건 제후에게 이교도에 빼앗긴 성지 수복이라는 매력적인 화두를 던졌고, 막강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기사 계급이 이에 열렬히 호응하면서 십자군 원정의 대단원의 막이 열렸다.

민간에서도 은자 피에르(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에 그 어벙하게 등장하는 선동가)가 프랑스 전역을 돌며, 성스러운 전쟁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천국행 티켓을 약속하면서 십자군 원정의 열기는 한껏 고조되었다. 하지만, 전략에서 가장 중요한 병참 문제없이 무턱대고 원정에 나선 민중 십자군은 같은 기독교계 국가에서도 약탈과 방화를 일삼다가 동부유럽의 헝가리에서 호된 신고식을 치르기도 한다. 이들의 소문을 들은 비잔틴 제국은 그들과 적당한 타협을 하고 이들을 소아시아 투르크령으로 실어 나른다.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클르츠 아슬란이 이끄는 투르크 전사들과 본격적인 회전을 치르게 된 고드프루아가 이끄는 십자군 전사들은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과시하면서, 이어지는 안티오키아 공방전 그리고 예루살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마침내 기독교 세계의 숙원이던 예루살렘 공략(1099년)에 성공한다. 승리 후, 십자군 기사들은 이슬람교도를 무차별 학살하고, 이슬람 사원을 철저하게 파괴하면서 후세에 두고두고 비판받게 된다.

나나미 여사의 글에 따르면, 이때까지만 해도 이슬람 출신 에미르들은 프랑크인(무슬림들이 서방 십자군을 부르던 표현)들이 팔레스타인에 예루살렘 왕국을 필두로 한 영구적인 국가 건설을 도모할 줄 몰랐다고 한다. 원정 초기 서방 제국의 군세에 일방적으로 밀리고, 적전분열로 자신들에게도 역시 성도였던 예루살렘 공격에 나서지 못했던 이슬람 세계에서도 불세출의 영웅이 등장하게 된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지난 천년의 인물 중 12세기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정한 살라흐 앗 딘, 우리에게는 <킹덤 오브 헤븐>의 그 관대한 이슬람 군주로 알려진 살라딘이 바로 그다.

살라딘이 이끄는 무슬림 군대 역시 십자군 못지않은 종교적 열정으로 무장하고 조상 전래의 땅에 침입한 외세에 맞서 성전을 개시한다.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예루살렘 왕 기 드 뤼지냥이 이끄는 십자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결국 예루살렘 수복(1187년)에 성공한다. 이 부분은 영화 <킹덤 오브 헤븐>에서도 자세히 다뤄져서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언제나 그렇듯, 희대의 영웅에게는 맞수가 있기 마련이다. 무슬림 세계에 살라딘이 있었다면, 십자군 기사 중에는 사자심왕 리처드가 있었다. 3차 십자군 원정에서 비록 리처드는 무슬림의 손에 뺏긴 예루살렘을 탈환하진 못했지만, 이미 승세가 기운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군 원정이 이후에도 수차례나 반복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리처드로 대변되는 서유럽 기사들의 약속을 중요시하는 기사도 정신이 반드시 지켜졌던 건 아니다. 영국 출신의 사자심왕은 포위된 무슬림 전사들에게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주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모두 학살한 좋지 않은 사례를 남겼다.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말이 필요 없으리라. 리처드와는 대조적으로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수복한 후, 기독교들을 살려 주었을 뿐 아니라, 재산까지도 가지고 떠날 수 있는 승자가 베풀 수 있는 최대의 관용을 보여주었다.

십자군 전쟁의 맞수 살라딘과 리처드의 대결을 마지막으로 무슬림 세력으로 둘러싸인 예루살렘을 다시 탈환하겠다는 기독교 제국에 대한 교황의 호소는 공염불로 그치게 된다. 베네치아의 꼬임에 빠져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질 않나, 소년 십자군으로 동원된 소년들을 노예로 팔아 버리는 본래의 순수했던 성전은 세속적 욕망의 현현으로 전락하게 된다. 특이하게도 나나미 여사는 오스만투르크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노플 공방전도 “십자군 전쟁”에 포함시킨다.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라는 차원에서 충분히 이해가 가면서도, 좀 무리가 아닌가 싶다.

십자군 전쟁의 굵직굵직한 사건의 줄거리를 뽑아낸 귀스타브 도레의 일러스트에 나나미 여사의 주석은 금상첨화다. 본격적인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에 앞서 가벼운 몸 풀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나나미 여사가 <로마인 이야기>에서 그랬듯이, 십자군 원정의 정치사적 의미뿐만 아니라 십자군 원정이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에 사회, 문화적 차원에서 미친 영향에 상술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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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요정
김한민 글.그림 / 세미콜론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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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누가 나에게 가장 원하는 게 뭐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공간이동’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침, 저녁으로 길에서 출퇴근하는데 소비되는 시간이 너무 많다. 게다가 피곤하기까지 하고. 그런데 우리에게 공간은 이렇게 단순하게 이동의 대상일 뿐일까? 보헤미안 라이프를 떠올리게 하는 삶의 궤적을 가진 김한민 씨는 공간에 대한 놀라운 상상력을 <공간의 요정>을 통해 독자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림 소설의 주인공 송이는 자기가 좋아라하는 공간인 동물원에서 이 짧으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연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신이 요정이라는 “비밀”을 알게 되고, 요정 사냥꾼 우고의 도움을 받아 ‘도시성형’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요정을 데려다가 애지중지하며 키우는 장면은 참 정겹다. 그 도시성형 전문가는 작금의 무상급식 이슈로 세간의 화제가 된 어느 지방자치단체장을 연상시킨다.

송이네 아버지는 만물 연구가답게 시를 싸대는, 아니 시를 써대는 시지렁이의 도움을 받아 요정의 가축화해서 “기분”을 만들어내는 사업을 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송이의 절친 시지렁이 트라클 녀석은 절필을 선언하고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는다. 자연히 시를 충전받지 못한 요정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하직한다. 아버지의 조수이자 충실한 요정 사냥꾼인 우고는 요정 장례업자로 은밀하게 요정의 시신을 처리한다.

도시성형업자의 난개발로 살 곳을 잃어 무지막지한 수의 난민 요정이 발생하면서 우고의 요정 사냥업은 번창한다. 하지만, 기분을 원하는 송이의 아버지에게 그런 요정들은 귀찮기만 할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날, “꼬인 요정”이 등장하고 그 녀석의 부정적인 영향으로 송이 아버지는 그동안 추진해오던 무모한 사업을 정리하고 아파트로 들어가 살겠다는 폭탄선언을 날린다. 이에 송이는 요정사냥꾼 우고와 아버지에 맞서 반항을 하게 되는데...

김한민 작가가 <공간의 요정>에서 말하는 요정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솔직히 말해서 어려서부터 현실적이었던 나는 요정이나 산타 클로스 같은 존재를 전혀 믿지 않았다. 일찍이 더동화나 이야기 속에 나오는 그런 존재로 인식했던 게 아닐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연애마저 유예당한 오늘날을 사는 이들에게 과연 <공간의 요정>은 어떤 의미일까. 개발과 효율만을 강조하는 수많은 도시성형업자들의 주장으로 우리의 휴식공간인 녹지와 공원이 줄어드는 현상은 또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이 그림소설을 통해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공간의 요정>은 우리의 환경과 생존 공간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열 살배기 송이가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도 함께 다루고 있다. 어려서 믿었던 요정의 존재가 왜 나이가 들면서는 더 이상 와 닿지 않게 되는 걸까. 송이 아버지는 인간인 자신과 요정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송이가 태어났다는 거창한 구라를 친다. 그 정도로 요즘처럼 알 것 다 아는 아이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송이는 요정 어머니의 부재를 과연 어떻게 받아 들였을지 궁금하다.

책의 뒷얘기에 실린 미처 자세히 다루지 못했다는 요정의 프로필이 참 마음에 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정이 가는 녀석은 “산책로요정”이었다. 간식거리와 산책을 즐기는 산책로요정,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그나저나 요정사냥꾼 우고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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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펭귄클래식 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석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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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 위대하다는 윌리엄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당당하게 한 자리를 꿰고 있는 <오셀로>를 다시 읽었다. 굳이 이탈로 칼비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제 고전이라 하면 ‘다시 읽어야’ 한다는 건 식상하기까지 하다. 의심 때문에 아내를 죽인 어느 반편이 같은 남편의 이야기가 원작이 쓰인지 수백 년이 지날 때까지도 계속해서 독자를 유혹한다는 것은 그 이야기의 원형이 아직까지도 우리네 삶 가운데 작동한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셰익스피어의 이 비극을 읽으면서, 제목에 내세운 주인공 오셀로보다 오셀로와 그의 사랑하는 아내 데스데모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희대의 모략가이자 ‘꾼’ 기질이 다분한 이아고가 이 비극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아고는 사이프러스로 부임한 무어인 총독 오셀로의 부관 자리를 내심 노리지만, 자신보다 인격적으로나 실력에서 뛰어난 캐시오를 오셀로가 등용하자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다 부숴 버리겠어’라고 결심한다. 글을 쓰다가 문득 궁금해진 점은 이아고가 과연 비극적 결말을 예상하고 그런 치밀한 음모를 세웠는지였다. 항상 그렇지만 운명이란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한다 하더라도, 어느 순간 손가락 사이를 쓱 빠져 나가듯이 그렇게 되게 마련이지 않은가 말이다.

이아고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자신이 캐시오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열패감에 사로 잡혀 사악한 방법도 마다하지 않게 된다. 베네치아 시절부터 데스데모나를 사랑한 얼뜨기 로더리고를 이용해서 돈을 갈취하고, 어둠 속에서 캐시오를 습격하게 사주한다. 그런데 가만, 돈을 뜯어냈다고? 철저한 상업 국가였던 베네치아에서 권력과 명예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금전이었다. 권력에서 소외된 이아고는 차선으로 돈을 선택한다. 충분한 돈이 있다면, 나중에라도 권부에 다가설 수 있다는 명징한 판단이 들어서였을까, 이아고의 권력을 향한 의지(will to power)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이아고와 함께 비극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스데모나의 “손수건”을 남편 이아고에게 전달한 에밀리아 역시 전통 소설에서 보이는 평면적 인물에서 한참 벗어난 캐릭터로 등장한다. 남편의 성공을 위해서는 연옥에라도 뛰어 들겠다는 그녀의 폭탄선언은 가히 충격적이다. 오쟁이 진 남편은 과연 그런 치욕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남자의 성공을 위해 <은밀한 유혹>까지 시도한다는 건 자유연애주의가 만연한 현대에도 수용하기가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럼 이제 이아고의 모함 때문에 오쟁이 진 남편으로 착각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처참하게 죽인 오셀로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지금도 여전히 일반적이지 않은 국제결혼, 그것도 무어인 출신으로 베네치아의 유력한 가문의 아름다운 데스데모나와 결혼한 오셀로는 이슬람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사이프러스를 지키기 위해 총독으로 부임한다. 베네치아의 최전방 전권을 가진 총독으로 파견될 정도라면, 인종을 떠나 그의 실력이 어떤지 알 수 있다. 군사나 정치면에서는 그렇게 유능하다고 판단되는 오셀로가 의외로 이아고의 거듭된 모략으로 파멸해 가는 과정은 그래서 더 생경하게 다가온다.

과연 오셀로가 그렇게 뛰어난 판단력의 소유자였을까? 왜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스스로 오쟁이 진 남편이라고 확신했을까? 자수성가가 한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그의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감 결여와 자신이 이룬 것을 언제라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린 게 아닐까? 그동안 여러 전쟁터에서 승승장구해온 외적 자신감 내면에는 이런 심리적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었고, 이아고에 의해 촉발된 질투의 광기는 자신과 아내 데스데모나를 파멸로 몰고 간다. 관계자들을 동원한 대질 심문 한 번만 하더라도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시대에 이미 희곡 전문 작가가 등장할 정도로, 문화 소비시장이 있었나 보다. 21세기 한국에서는 먹고 살기에 바빠 연극이나 공연은커녕 책 한 권 읽기가 버겁다고 아우성이다. <오셀로>를 읽으면서 역시 희곡은 무대를 통해 접해야 제 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에 매 여름마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공짜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게으름 때문에 관람하지 못한 게 아쉽다. 물론 고어를 사용하는 셰익스피어 희곡을 제대로 알아들었을 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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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박범신 지음 / 문예중앙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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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선생의 최신작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그의 39번째 장편이라고 하는데, 난 정말 박 선생의 책을 많이 읽지 않은 모양이다. 꼴랑 작년에 <고산자>와 <은교>를 읽은 게 전부니 말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소설이 콜롬비아 출신의 거장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에 나오는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킨다는 말에 잔뜩 호기심이 일었다. 인터넷 연재와 책을 번갈아 보면서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확인할 수가 있었다. 참고로 아쉽게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은 읽기 시작은 했는데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약간 그로테스크한 제목의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는 말굽청년인 “내”가 화자로 등장해서 사건의 전모를 소개하는 구성을 따른다. 소설에서 손이 점점 쇠말굽으로 변해 가는 청년의 물리적 트랜스포메이션에 제목은 초점을 맞춘다. 주인공은 분명 샹그리라라는 현실계에 존재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온갖 비밀과 추문이 숨겨진 명안진사[밝은 눈]라는 속(俗)과 성(聖)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는 캐릭터로 나온다. 그는 동시에 이 쇠말굽이 가진 폭력성도 잘 파악하고 있다. 화상으로 흉측해진 얼굴로, 이제는 시력을 잃은 옛 사랑 여린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불러올 재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청년의 가슴을 시리게 하는 “해맑은 날의 어떤 풍경”은 금세 “포악한 그리움”으로도 치환가능하다.

풍진세상에서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는 청년은 세상을 유랑하다가 검을 휘두르는 이사장에게 발탁되어 마침내 샹그리라에 안착한다. 그리고 소설의 서두에서 밝히듯이, 살인에 관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청년은 광안리의 횟집주인, 자신의 동태를 살피는 이사장의 수하 땅딸보와 노과장을 자신의 통제를 벗어난 쇠말굽으로 가차 없이 처단한다. 오래전부터 몸에 익힌 클라이밍 기술로 샹그리라와 명안진사(일상과 이상)를 오가며 이사장이 한사코 감추려고 하는 비밀의 화원에 도전한다.

연비와 세족식 같이 기성 종교 의식으로 짬뽕이 된 사이비 종교 교주를 찜쪄먹는 실력의 이사장은 작가가 구사하는 주술적 리얼리즘의 중심에 서 있다. 그는 소녀시대의 “Gee"와 슈스케 강승윤의 노래를 흥얼대며 춤추는 애기보살(관음보살)과 눈먼 처녀 안마사 여린을 세지보살, 이 환상의 복식조를 이용해서 대중을 혹세무민한다. 여느 사이비 종교처럼 이사장의 ‘밝은눈’도 결국 물질로 귀착된다. 말기 환자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명안수라는 해괴한 물을 팔고, 단식으로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신자들을 현혹한다. 작가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종교를 비판하는 동시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이비 종교에 매달리는 현대인의 불안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말굽 청년의 아슬아슬한 감정의 통제는 박범신 선생이 전작에서부터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오욕칠정”과 일맥상통한다. 말굽이 가진 “폭력에 대한 추앙과 관성”은 우리가 가진 부질없는 욕망의 형상화다. 사무치는 그리움을 정면으로 해결하지 못한 말굽 청년의 말로는 불가피하게 비극으로 치닫는다. 해피엔딩으로 소설을 마무리하기엔 청년의 연쇄 살인은 너무 멀리 나갔으니까.

인터넷 연재와 소설을 번갈아 읽다 보니 아주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인터넷 연재 때와 단행본으로 나온 책의 소제목이 다른 것도 발견했다. 인터넷 연재 때 보인 오탈자도 단행본에선 거의 개선이 된 것 같다. 기존의 신문 연재 대신 인터넷 연재라는 참신한 시도에 계속적으로 도전하는 노작가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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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를 수 없는 나라
크리스토프 바타이유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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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고백하건대 누구의 추천으로 책 읽는 것을 별로 즐기는 편이 아니다. 그저 책의 더미에서 스스로 힘으로 잡아 올리는 월척이 더 반갑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기에 때로는 타인의 힘에 슬쩍 묻어가고 싶은 마음도 든다. 이번에 만나게 된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빛나는 데뷔작이 그랬다. 신형철 평론가의 추천도서라는 타이틀로 이 책과 파스칼 키냐르의 <로마의 테라스> 두 권을 읽게 됐다. 나의 우선 선택은 바타유의 책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번 놀랐다. 첫 번째는 이 이국적이면서도 성속(성속을 오가는 매력적인 작품이 21살 먹은 청년의 데뷔작이라는 점이 하나였고, 두 번째로는 시하고는 담장을 쌓고 사는 독자가 산문시 같은 아름다움을 행간에서 느꼈다는 점이다. 언제나 흥미진진한 역사 속의 실존 인물들이 뛰노는 매력덩어리 팩션은 그야말로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프랑스 절대왕정 시대의 종언을 알린 프랑스 혁명에 앞서 세계의 끝 동방에 베트남이라는 나라가 있었단다. 농민 봉기로 제위에서 쫓겨난 베트남 황제는 자신의 어린 아들을 프랑스에 파견해서 강력한 프랑스 군주에게 자신이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한다. 하지만, 비등점에 달해 있던 사회적 갈등 봉합이 우선이었던 루이 16세는 세상의 끝에 있는 작은 나라를 도울 겨를이 없었다. 한 마디로 자기 코가 석자였다. 어린 황제는 그렇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가운데 멀리 타지에서 유명을 달리한다.

하지만 일단의 사제들이 선교를 위해 베트남 행을 자원하면서 사위어가던 잉걸불을 되살린다. 사실을 바탕으로 한 팩션의 전반부가 이런 정치적 상황에 대한 묘사였다면, 후반부는 선교에 나선 수도사와 수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흔히 선교사가 제국주의 침략의 첨병으로 활동했다는 지적이 있다. 기독교라는 서양 종교로 동양의 공동체 사회를 재편하고, 서양문물을 전파하는 식민 활동의 전초 역할을 선교사들이 수행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도미니크 수사와 카트린 수녀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을까?

도미니크와 카트린이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조국 프랑스를 떠나 베트남으로 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처음 상륙한 베트남의 바딘에서 평화롭게 현지인들과 공존하는 법을 배웠다. 그들의 후손들이 먼 훗날 식민지에서 그랬던 것과는 달리 그리스도의 인류애를 담아 현지 사람들의 말을 배우고, 그들과 같이 벼농사를 짓고 뻑뻑한 ‘포’ 국수를 즐겨 먹으면서 베트남 사람들에 동화됐다.

지구 반대편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격동의 역사 현장은 선교사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대상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국왕이 기요틴에서 처형당하고,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는 공화국 시대에 프랑스에서 베트남으로 파견된 선교사 일행도 서서히 잊혀져 갔다. 베트남에서의 정변으로 초기 정착지는 쑥대밭이 되지만, 위기에 앞서 바딘을 떠난 도미니크와 카트린은 베트남의 고원지대에 안착하고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한다.

이 짧은 소설을 통해 벽안의 청년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종교라는 엄숙한 테두리에서 벗어나 태초의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간 아담과 이브를 그리고 싶었던가. 아니면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탈식민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베트남을 ‘안남(Annam)'으로 인식하는 못난 제국주의 시선에 사로 잡혀 있는 걸까. 신형철 평론가는 “적요”라는 단어를 이 소설의 화두로 던졌는데, 여전히 서구인들의 사고에서 작동하고 있는 이국적 풍물이 주는 아름다움과 폭력적 야만성의 묘한 공존이 느껴졌다.

역자가 쓴 후기에서 소설의 완성을 위해 실제 역사마저 약간 비튼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대담함이 눈에 띈다. 보통 후기는 거의 읽지 않는 편인데, 베트남 근대사를 관통하는 역자의 후기는 아주 유용했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통해 호치민, 월남전 혹은 포 국수 같은 기억의 편린에 의존해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베트남에 한 발짝 더 다가선 느낌이다. 어디라고 꼭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참 아름다운 책이었다. 곁에 두고 여러 번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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