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피
강희진 지음 / 나무옆의자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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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으로 뽑은 ‘사설을 시작할게요’는 소설 <포피>의 화자이자 자신을 이주 여성(migrated female)이라고 불러달라고 말하는 혜진이 청자인 소설가에게 쓴 표현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서 이렇게 쓰는 글 역시 사설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예의 선택이 오묘하기 짝이 없구나 싶다. 또 다른 사설이긴 하지만, 이 책의 저자 강희진 작가의 전작을 모두 읽었다. 이러다 이 작가의 팬이 되는 건 아닐까.

 

소재가 언제나 필요한 소설가는 키스방에서 “포피”라는 이름의 매니저로 활동하는 화자를 찾아 그녀가 들려주는 고달픈 과거와 현재를 사냥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 중의 하나는, 독자는 청자인 소설가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전혀 모르면서도 오로지 포피의 구술에만 의존해서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유추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대한민국 국민이고,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불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다시 심리학 석사 과정에 있는 그녀지만 생래의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매매특별법(소설에서는 흘레금지법이라고 조롱한다)의 치외법권에 위치한 키스방 매니저로 일하면서 돈을 벌고 있다. 혹자는 그녀에게 왜 과외 같은 비교적 건전한 아르바이트를 하면 안되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었던 그녀에게 이 질문은 가혹하기만 하다. 과외를 받는 아이들이 첫 번째 과외를 받은 뒤에 바로,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고 뒤엣말로 그것을 들은 우리의 포피는 또 하나의 생채기를 가슴에 추가한다.

 

어지간히 평범한 이야깃거리로는 만족할 수 없던 소설가에게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해서, 중국에서 공안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대한민국에 안착해서 정규대학 교육을 받고 있으면서 동시에 키스방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는 포피야말로 안성맞춤의 타깃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인간과 인간 사이의 정상적인 관계가 아닌 탈인간화된 관계는 화자(포피)와 청자(소설가)의 관계뿐만 아니라 키스방을 찾은 손님과 매니저라는 관계로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간다. 서사의 초장부터 이럴진대 과연 강희진 작가는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지 자못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기근과 그에 따른 아사가 북한을 휩쓸던 시절, 죽음의 공포는 늘 주인공 포피에 근처에 서식하고 있었고, 중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안착하고 나서도 예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없었노라고 그녀는 소설가에게 고백한다. 하지만 물질적 풍요가 넘쳐흐르는 자본주의 천국이라 불릴 만한 공간에서의 삶은 과연 축복이었을까. 한국에서 갈고 닦은 심리학 전공과 타고난 말발로 엘리트 워너비들을 격파할 만한 실력이지만, 그녀의 내면에 자리한 부끄러움과 초라함을 극복하기란 난망하기만 하다. 그리고 포피(책을 읽으면 알 수 있겠지만 양귀비/아편을 뜻하는 poppy란 단어다)는 구순기 시절부터 진행된 어머니의 편애에 기인한 결핍과 이루어질 수 없는 막내삼촌과의 사랑 때문에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는 상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포피는 엘리트 여성답게 키스방에 장식되어 있는 명화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선보인다. 키스방과 왠지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의 구스타프 클림트가 그린 <키스>가 의미하는 남성성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 살바도르 달리의 늘어지는 이미지가 주는 죽음의 공포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에곤 실레 도발적인 그림에 이르기까지 순결하면서 퇴폐적인 이미지의 조합을 곁들인다. 자신의 닉네임이 의미하는 포피(양귀비)라는 소재 역시, 포피 가족이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중국으로 탈출해서 한국에 정착하기까지 절대적인 도움을 준 기표에 해당한다. 그리고 닉네임이 가진 또 다른 사전적 의미도 되새겨 볼 만하다.

 

소설 <포피>에서 강희진 작가는 마치 요즘 대세인 쿡방에 출연하는 마스터 쉐프처럼 이주 여성, 북한의 아사, 키스방 매니저, 구순기 시절의 결핍, 명화에 등장하는 상징들이라는 맛깔스러워 보이는 구비된 소설 재료를 가지고 현란한 요리 솜씨를 보여준다. 그런데 결말로 향하는 어느 순간, 음식의 맛(결정적 서사)이 실종되어 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소설의 특성상 무언가 획기적인 결말이나 반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모한 독자의 심리는 쉽게 그동안 목도한 흥미진진하고 쫄깃한 전개에 따른 기대의 방향전환에 실패한 걸까. 어떤 점에선 작가가 제시한 이슈들에 대해 당신(독자)의 입장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다른 것들은 모르겠고 오로지 리니지 서버의 내복단 투쟁만 기억에 남은 <유령>으로 출발해서, 시대물이었던 <이신>을 거쳐 다시 현재로 귀환해서 오늘을 사는 우리, 그 중에서도 이주 여성이라는 소수에 대한 예민하면서도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강희진의 작가의 소설적 진화를 기대하며 소설 <포피>에 대한 부족한 감상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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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식스 카운티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제프 르미어 글 그림, 박중서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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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문 기사의 추천을 보고 지난 주에 읽게 됐다. 그런데 책의 실물을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그냥 그런 그래픽 노블이라고 생각했는데, 보너스 자료까지 해서 자그마치 500쪽이 넘는 분량의 대작이었다. <농장 이야기>, <유령 이야기> 그리고 <시골 간호사>라는 기본 세 가지 스토리라인에 그래픽 노블의 번외편에 해당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더해 모두 5개의 이야기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건 마치 대하소설을 보는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이 모두 과거와 현재를 매개로 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등장인물 간의 관계가 나처럼 좀 복잡하게 느껴진다면 먼저 책의 447페이지에 나온 가계도를 참조하면 좋을 것 같다. 물론 제프 르미어 작가의 의도대로 순서대로 읽으면서 등장인물을 만나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그래픽 노블은 어머니 클레어가 죽은 뒤, 켄 삼촌의 농장에 얹혀사는 레스터 파피노의 상상으로 시작된다. 문득 왜 <에식스 카운티>에 나오는 이들은 하나 같이 상처 입은 영혼들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먼저 레스터는 병상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우리 영웅’이라는 말에 슈퍼히어로 코스튬을 포기하지 못한다. 죽어가는 누이동생이 유언으로 부탁한 레스터를 돌봐 달라는 말을 거절하지 못한 삼촌 케니 역시 마찬가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기를 달리고 있는 레스터를 다룰 줄 몰라 쩔쩔 매는 중년 남자의 고민이 그대로 묻어 있다.

 

그리고 한 세대를 뛰어 넘어 <유령 이야기>에서 비로소 그들 삶의 비밀이 조근조근하게 소개된다. 아이스하키에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이스하키에 대한 캐나다 사람들의 사랑이 바로 루와 빈스 르뵈프 형제 간의 이야기에서 재현(representation)된다. 후기에서 제프 르미어 작가가 썼듯이 형제애, 배신 그리고 아이스하키가 루의 회상으로 시작되는 두 번째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소재다. 한 때 도시에서 날리던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루와 빈스 형제의 부침을 제프 르미어는 잔잔하게 그려냈다. 그들은 한때 죽고 못 살 정도로 우애가 깊은 형제였지만 루가 저지른 단 한 번의 실수 때문에 형제간에 의절하고 사반세기를 떨어져 지냈게 되었다. 촉망 받는 아이스하키 선수였던 빈스는 고향 에식스 카운티로 내려가 농사를 짓고, 루는 부상으로 아이스하키에서 은퇴하고 전차 기사로 살아왔다. 다시 그들을 하나로 묶어준 것은 끔찍한 교통사고였다(삶의 반전을 가능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을 교통사고라는 클리셰이로 처리한 것이 좀 아쉬웠다). 교통사고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동생 빈스와 조카 손주 지미를 돌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루. 르뵈프 형제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어떤 의미에서 가족은 세상의 풍파를 헤쳐가게 만들어주는 울타리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애증이 교차하는 갈등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인 <시골 간호사>에서는 독자는 몰랐지만, <에식스 카운티>의 병들었거나 죽어가는 사람의 곁을 지킨 시골 간호사 앤 번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간호사 앤은 루 르뵈프를 돌보고 있으며, 그의 조카 손주 지미 르뵈프를 알고 있으며, 레스터의 어머니 클레어를 간호하기도 했었다. 어머니를 잃고 방황하는 레스터를 위로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렇게 이타적인 삶을 사는 그녀이지만, 남편 더글라스 켄빌을 잃고 하나 있는 아들 제이슨과도 소원하다. 그녀를 지탱해주는 건 할머니 마거릿 앤 수녀가 전해준 신앙심 정도가 아닐까. 그녀가 에식스 카운티에서 최고령자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자신의 할머니를 찾아가 나누는 대화에서 다시 두 세대를 점프해서 이야기의 시원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이 정도로 시공을 초월한 정밀한 이야기 서사 구조와 탄탄한 스토리라인을 가공해낸 제프 르미어 작가의 내공에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밀하다기 보다 조금은 거친 톤의 제프 르미어 작가의 그림과 서사에는 울림이 배어 있다. 삶의 상처를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보통의 삶 속에도 그렇게 깊은 비밀이 자리 잡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긴 여정 끝에 만나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이 너무 인상적이었다. 내 삶에서 어느 순간 놓쳐 버린 시간과 다시 재회하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언제나 그렇듯 피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와의 대면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랑으로도 덮을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런 우리네 삶이 품은 내면의 이야기를 제프 르미어 작가는 <에식스 카운티>의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처음에 등장하는 <농장 이야기>에서 하늘을 나는 레스터의 모습을 보고 흔해 빠진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전형적인 마벨 코믹 스토리가 아닌가 하는 나의 우려는 서사에 얽힌 주인공들이 차례로 나오면서 저절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검은색과 흰색의 여백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제프 르미어 작가가 야심차게 준비한 밀도 높은 서사로 이루어진 에피소드들이 차례로 채워지면서 <에식스 카운티>는 비상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삶의 진실들과 마주하게 됐을 때, 과연 우리는 그 사실을 선뜻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가. 역시 고수 답게 작가는 사전에 그런 떡밥들을 모처에 조심스럽게 심어 두었다. 그리고 수확기에 농부가 그동안 정성 들여 키운 작물을 거둬들이듯, 작가는 아름답게 영근 이야기들로 대미를 장식한다.

 

<에식스 카운티>가 보여주듯, 우리네 삶은 마치 비포장도로를 운전하는 느낌일지도 모르겠다. 울퉁불퉁한 그런 길을 가듯, 살다 보면 우리네 삶에는 예상치 못했던 상처도 있을 수 있고 배신과 모략을 비롯해서 상상할 수 없는 그 모든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다. 생전 아이라고는 보지도 못한 중년의 남자가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십대 소년을 두고 어쩔 줄 몰라 하듯이 말이다. 바로 그런 순간에 짜증을 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런 일탈과 예상하지 못한 삶의 변수야말로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삶의 진실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느끼게 되는 재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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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었던 모든 것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변선희 옮김 / 박하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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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작가의 표절문제로 문학판이 어수선하다. 답답한 심정에 블로그에 글을 쓰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타고난 게으름 탓에 미루다가 결국 쓰지 못했다. 나 같은 보통의 독자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역시나 독서였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이라는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작가의 짧은 소설 <사랑이었던 모든 것>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목에서 들어나는 사랑은 과거 시제이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소설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이제 막 13년을 만난 여자 친구와 극적인 이별을 앞두고 있는 우리의 주인공(아마도 40) 다니는 이제 막 자신이 아니면 안되는, 자신이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도 그 일보다 여자 친구와의 관계 개선이 우선이 아닐까 하는 독자의 노파심은 다니의 과거를 들여다 보며, 자연스레 관심사에세 멀어진다. 왜소증을 앓는 주인공의 핸디캡은 불의의 사고로 돌아가신 다니의 어머니가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 의식적으로 불렀지만, 세상은 그의 외모를 결코 용서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자신을 돌볼 생각이 전혀 없던 형 때문에 가출을 결심하는 열세 살의 다니. , 그전에 더 극적인 만남이 하나 더 있었구나.

 

열 살 때 편도선 수술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다니는 향후 자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마르틴과의 숙명적 만남을 갖는다. 그리고 그가 남긴 유산을 가지고 3년 뒤, 카프리 섬으로 가는 페리에서 이번에는 조지라는 자신보다 딱 반세기를 더 산 남자와 만나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운명에서 진주 같은 아니 다이아몬드 같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소년이 자라 실종된 아이들을 찾는 일을 하는 전문가가 되었다. 과연 삶에서 다이아몬드 같은 보석보다 더 중요한 게 바로 그런 만남과 인연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마르틴과의 첫 만남으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다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과연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사는지, 나의 행복의 현재 좌표에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됐다. 다니가 마주한 연인과의 이별 문제 그리고 당장 자신에게 맡겨진 실종된 아이를 찾아야 하는 긴박감 속에서 과거와 현재는 교차되며 독자를 사유의 미로 속으로 인도한다.

 

다니에게 왜 사랑은 모두 현재가 아닌 과거의 일로 간주되는 걸까 하는 생각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내내 궁금했다. 오래 전에 어른이 되었지만, 박탈당한 유년 시절의 추억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싶었던 일도 많고, 가보고 싶은 곳도 많았고, 먹고 싶었던 것도 많았던 그 시절을 가능하게 해줄 수 있는 부모님이라는 존재의 부재 탓은 아니었을까. 그래 사랑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 일들이 있을 수 있겠지. 그렇다고 해서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다니에게 얼치기 심리 분석을 시도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그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친 이유들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타인의 삶에 견주어 나의 그것을 반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어느 정도 없었다고 한다면 거짓이겠지.

 

십 수 년 전에 들렀던 카프리 여행에서 고생도 단단히 했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카프리 섬에 갔었지 하며 미소를 지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다니처럼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촘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는 없었지만, 여전히 그 때 시간이 너무 없어서 사지 못한 수제 샌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곱씹어 봤다. 그 때 만약에 그 수제 샌들을 샀다면 아직까지도 가지고 있으려나. 소설처럼 세상만사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념이 꼬리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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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북멘토 그래픽노블 톡 2
박건웅 지음, 최용탁 원작 / 북멘토(도서출판)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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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딩데이트] 2015년 6월 2일 오후 1시 32분

 

우리에게는 만화로 알려진 그래픽노블의 리얼리티를 믿는가? 그렇다면 당장 박건웅 작가의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봐야할 것이다. 북멘토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발표 중인 역사물 2탄인 이 작품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좋은 전쟁이 있었나 묻고 싶다.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을 보면서 왜 우리에게 어떤 방식의 전쟁도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어느 형제가 사이좋게 산으로 나무를 하러 와서 나누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형은 이제 막 사내아이를 얻은 형편이고, 도회로 나간 동생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대학에 간 동생이야말로 집안의 기둥이라고 말하는 형과 장손이라며 형님을 깍뜻하게 대하는 동생의 우애가 정겹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곧 이어질 비극의 전초전일 따름이다. 그래픽노블의 전개는 바로 제목에서 말하는 반세기도 더 넘게 산을 지켜온 물푸레나무의 재미난 ‘구경거리’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무더운 여름으로 접어드는 7월 초순의 어느 날 저녁, 이백 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경찰들의 오라에 묶여 줄줄이 골짜기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산속에서만 있어온 어린 물푸레나무에게는 진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로, 손은 철사로 포박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무더기가 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깨닫고, 손에 총과 탄창을 든 경찰들에게 이승만 대통령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복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평범해 보이는 농투성이 모습의 아저씨들을 계곡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창주경찰서의 국민의 안녕과 치안을 책임진 책임자가 나서서 일장연설을 하며, 여기 모인 3개면의 보도연맹원들에게 그들만 죽는 것이 아니니 억울해 할 것 없다는 말과 함께 일제사격 명령을 내린다. 그 다음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살육의 현장이었다. 그렇게 확인사살까지 마치 경차들이 물러가자, 산속의 온갖 집파리, 쇠파리, 똥파리, 종벌레, 총채벌레 같은 생령들이 벌이는 포만의 축제가 벌어졌다고 어린 물푸레나무는 증언한다. 그 뒤로는 몇 차례나 같은 일들이 반복되었고, 6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골짜기에서 죽어갔다. 시쳇말로 ‘골로 간다’는 표현이 있는데, 어디선가 이 시절의 사건에서 비롯된 거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비극의 마무리는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노파가 며느리와 이제 막 태어난 손자를 데리고 자신의 아들을 시체 더미에서 찾기 위해 나선 장면이다. 그야말로 생지옥에서 오로지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찾기 위해 염천 가운데 부패하가는 시취도 마다하지 않고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훗날 미국의 기밀문서 해제로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된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은 공산군에게 패퇴하기 직전, 공산군에게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양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사건이다. 물론 죽은 사람 가운데는 좌익사상을 가지고 공산군에게 협력할 가능성을 가진 이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익이 무언지도 모르는 무고한 농투성이들이었노라고 어린 물푸레나무는 증언하고 있다. 작가가 구현한 판화 스타일의 그림체는 색채를 입힌 것보다 더 비극적으로 사실에 접근을 시도한다. 과연 컬러였다면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반세기도 넘어 65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산하는 물푸레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가 동강나 있는 상태다. 여전히 준전시상태에서 우리는 하루를 살고 있다. 그래픽노블로 재현된 비극을 읽으면서 어떠한 형태의 전쟁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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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일 5Mile Vol 1. - 창간호, Made in Seoul
오마일(5mile) 편집부 엮음 / 오마일(5mile)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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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테마, 여행 그리고 음식이라는 주제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사진을 전면에 배치한 <5 Mile>의 창간호와 만날 수가 있었다. 그의 너무나 유명한 캠벨 수프 작품만 있다는 게 아니라는 것도 이 매거진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마릴린 먼로 작품은 1967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런데 마릴린 먼로가 죽은 게 언제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1962년이라는데, 한 시대를 풍미한 대스타가 죽고 나서 5년이나 지난 뒤에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은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녀의 이미지에 그렇게 변형을 준 걸까. 궁금하기만 하다. 그리고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은 또 어떻고. 어쩌면 이 시대의 모든 변형은 피카소와 앤디 워홀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도 들었다.

그 다음 이야기 <당신이 몰랐던 서울>에서는 내가 아는 익숙한 모습의 서울이 등장하기도 하고, 또 제목 그대로 전혀 몰랐던 모습의 서울에서 거리감을 느끼기도 했다. 문득 사진가들에게 서울의 하루라는 제목으로 특정한 하루를 정해서 우리가 몰랐던 이모저모를 담는 기획도 재밌지 않을까 싶다. 위치를 알 수 없는 골목길, 도회의 노인이 사라져 가는 모습, 번화가의 모습들 그리고 상업화의 상징처럼 내겐 다가온 쌈지길의 모습들이 오늘의 서울이구나 싶었다.

책쟁이인 나의 시선을 가장 사로잡은 기사는 바로 <Hidden book stores: 숨겨진 동네 서점여행>이었다. 물론 초반에 나온 10가지 질문은 가볍게 패스 했으니, 당근 이 여행에 동참하고 싶다. 오늘 오후에도 중고서점에 들러 꼭 필요한 책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사야 하지 않나 하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았던가. 사실 김영하 작가의 추천 책인 오에 겐자부로의 <만엔원년의 풋볼>을 사려고 했지만. 모두 세 곳이 소개되었는데 제목부터 범상치 않다. <스토리지 북 앤 필름>, <일단멈춤> 그리고 마포 상수동 부근의 <베로니카 이펙트>가 그 주인공들이다. 요즘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 뜨는 장소라는 염리동 소금길에 있다는 <일단멈춤>에도 한 번 가보고 싶고(요즘처럼 바빠서는 내년에나 가볼 수 있을까 싶다), 파올로 코엘료의 책 제목을 떠올리게 하는 <베로니카 이펙트>에도 들러 보고 싶다. 짧은 인터뷰로만도 이 서점들이 내가 주로 찾는 그런 일반 서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다. 그냥 책은 사지 않고 들러서 사진만 찍어도 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업주 입장에서는 아마 귀찮은 헛손님이겠지만. , <베로니카 이펙트> 내부의 조명 배치는 진짜 멋져 보인다.

리넨이나 천 같은 직물에 직접 그린 무늬를 프린트한다는 장인, 마이스터징거라고 불러야 하나,의 이야기에도 호기심이 생긴다. 얼굴을 공개하고 싶지 않은지, 묘하게 가린 주인공의 한땀한땀 어린 작업 순서도가 인상적이다. 진짜 천연의 풀이나 나뭇잎들을 재료로 사용하는 점이 신기하기만 하다. 어린 시절, 나뭇잎으로 종이에 물감을 묻혀 찍던 시절의 그 재미지던 시간들 말이다. 서울의 소소한 100가지 오브제 역시 주르르 넘기다 보면, 어떤 것들은 사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물론 딱히 필요는 없지만, 한가로운 여행길에서 만난 소품들이 그렇듯이 말이다. 내가 베를린의 벼룩시장에서 7유로 주고 산 솝스톤(soap stone)으로 만든 오렌지 컬러 하마가 아버지의 문진으로 쓰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어떤 물건이든 다 쓸모가 있는 법이다.

여행과 푸드를 주제로 삼은 만큼 요리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다만 난 만드는 것보다 먹는 것을 더 좋아하니 사진만으로는 당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사실 사진만 보면 다 맛있어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역시 맛을 봐야 하는데, 그럴려면 시간과 노력 그리고 돈이 필요하다. 그러니 매거진에 실린 사진만으로 나의 흔들리는 식욕을 달래려면 상당한 내공이 소용될 것이다. 마지막의 바르셀로나 컷은 정말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접고 달려가고 싶은 충동일 생길 정도다. 몇 년 전에 여름휴가 때 바르셀로나에게 가볼까 하는 헛된 꿈에 젖어 직항편을 알아보다가 어마무시한 가격에 당장 포기했던 추억도 떠오른다. 그땐 그랬지.

뭐니뭐니 해도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5 Mile>에서 창간호를 맞이하여 독자들에게 야심차게 준비한 감사의 선물이다. 말미에 실린 두 개의 선물이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는 앤디 워홀 전시회 티켓과 5 Mile 네 잔의 레드비어다. 난 볼 것 없이 두 번째 선물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부욱~ 하고 해당 페이지를 찢어 가면 되는 게 아니라 꼭 창간호 책을 통째로 들고 가야 한다고 한다. 그 정도 수고야 감당할 수 있지 뭐. 그런데 유효기간은 언제지? 난 과연 네 잔의 레드비어를 마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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