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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 ㅣ 북멘토 그래픽노블 톡 2
박건웅 지음, 최용탁 원작 / 북멘토(도서출판) / 2015년 5월
평점 :
[리딩데이트] 2015년 6월 2일 오후 1시 32분
우리에게는 만화로 알려진 그래픽노블의 리얼리티를 믿는가? 그렇다면 당장 박건웅 작가의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을 봐야할 것이다. 북멘토 출판사에서 시리즈로 발표 중인 역사물 2탄인 이 작품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국민보도연맹’ 사건을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인류 역사에서 좋은 전쟁이 있었나 묻고 싶다. 충청도 어느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비극을 보면서 왜 우리에게 어떤 방식의 전쟁도 필요하지 않고, 오로지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어느 물푸레나무의 기억>은 어느 형제가 사이좋게 산으로 나무를 하러 와서 나누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형은 이제 막 사내아이를 얻은 형편이고, 도회로 나간 동생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 대학에 간 동생이야말로 집안의 기둥이라고 말하는 형과 장손이라며 형님을 깍뜻하게 대하는 동생의 우애가 정겹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모두 곧 이어질 비극의 전초전일 따름이다. 그래픽노블의 전개는 바로 제목에서 말하는 반세기도 더 넘게 산을 지켜온 물푸레나무의 재미난 ‘구경거리’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간다.
무더운 여름으로 접어드는 7월 초순의 어느 날 저녁, 이백 여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경찰들의 오라에 묶여 줄줄이 골짜기로 접어드는 것이 아닌가. 산속에서만 있어온 어린 물푸레나무에게는 진기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모두 남자들로, 손은 철사로 포박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한 무더기가 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자신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깨닫고, 손에 총과 탄창을 든 경찰들에게 이승만 대통령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복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마냥 평범해 보이는 농투성이 모습의 아저씨들을 계곡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창주경찰서의 국민의 안녕과 치안을 책임진 책임자가 나서서 일장연설을 하며, 여기 모인 3개면의 보도연맹원들에게 그들만 죽는 것이 아니니 억울해 할 것 없다는 말과 함께 일제사격 명령을 내린다. 그 다음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그런 살육의 현장이었다. 그렇게 확인사살까지 마치 경차들이 물러가자, 산속의 온갖 집파리, 쇠파리, 똥파리, 종벌레, 총채벌레 같은 생령들이 벌이는 포만의 축제가 벌어졌다고 어린 물푸레나무는 증언한다. 그 뒤로는 몇 차례나 같은 일들이 반복되었고, 600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골짜기에서 죽어갔다. 시쳇말로 ‘골로 간다’는 표현이 있는데, 어디선가 이 시절의 사건에서 비롯된 거라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난다.
비극의 마무리는 생떼 같은 아들을 잃은 노파가 며느리와 이제 막 태어난 손자를 데리고 자신의 아들을 시체 더미에서 찾기 위해 나선 장면이다. 그야말로 생지옥에서 오로지 억울하게 죽은 자식을 찾기 위해 염천 가운데 부패하가는 시취도 마다하지 않고 사투를 벌이는 장면은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훗날 미국의 기밀문서 해제로 세상에 공식적으로 알려지게 된 한국전쟁 당시 국군과 경찰에 의해 자행된 보도연맹원 학살 사건은 공산군에게 패퇴하기 직전, 공산군에게 협력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양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인 사건이다. 물론 죽은 사람 가운데는 좌익사상을 가지고 공산군에게 협력할 가능성을 가진 이들도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좌익이 무언지도 모르는 무고한 농투성이들이었노라고 어린 물푸레나무는 증언하고 있다. 작가가 구현한 판화 스타일의 그림체는 색채를 입힌 것보다 더 비극적으로 사실에 접근을 시도한다. 과연 컬러였다면 그 충격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반세기도 넘어 65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산하는 물푸레나무가 그랬던 것처럼 허리가 동강나 있는 상태다. 여전히 준전시상태에서 우리는 하루를 살고 있다. 그래픽노블로 재현된 비극을 읽으면서 어떠한 형태의 전쟁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