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 - 20세기 한국을 읽는 25가지 풍속 키워드
손성진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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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사 기자 출신의 손성진 씨가 지난 우리네 삶의 흔적들을 담은 책 <럭키 서울 브라보 대한민국>의 키워드는 바로 정(情)이었다. 이제는 그 자취조차 찾을 수 없는 쫀드기, 뽑기 같은 불량식품 먹거리에서부터 시작을 해서 박가분-구리모 그리고 흑백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지난 20세기 대한민국 풍속사의 변천을 자세하게 그려냈다.

지난 세기 후반, 당시 지상과제였던 경제발전은 전근대적이었던 우리네 삶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버렸다. 동시에 어쩌면 그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정서들도 그 삶의 모습들과 함께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아무래도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의 불량식품 이야기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책을 보다 말고, 교직에 계셨던 어머니에게 물어 보면서 기억이 나지 않거나 하는 부분들에 대해 보강 설명을 들을 수가 있었다.

가령 쫀드기나 뽑기 같은 불량식품의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직접 체험해 보았으니 안다고 하더라도, 송충이 잡기나 쥐를 잡아서 쥐꼬리 잘라오기 같은 숙제는 알 수가 없었는데 어머니가 상세한 설명을 달아 주셔서 이해가 쉽게 갔다. 풀빵, 붕어빵 그리고 국화빵이 모두 한 형제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두 번째 이야기인 트렌드세터 에피소드들 가운데서는 장발, 미니스커트 그리고 통금이라는 주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70년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가 판을 치던 가운데, 독재의 영속화를 위협한 것은 바로 젊은이들의 자유정신이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억압받아온 젊은 영혼들은 남자들은 장발, 그리고 여자들은 복장으로 자신들의 시대정신을 표현해냈다. 하지만 독재정권 답게, 억압적으로 이런 시대정신을 억누르려는 사고는 공권력을 동원해서 단속해서 결국에는 즉심, 입건 심지어는 구속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면서도, 국민들의 기본권마저 침해하는 전근대적인 사고발상이 애처롭기까지 했다. 통금 역시 미군정과 한국전쟁으로 장장 37년간이나 시민들의 자유를 옥죄어왔다. 유년 시절의 기억을 되돌아보면, 통금 단속에 걸리지 않기 위해 통금 사이렌이 울리면 황급하게 귀가하던 어른들이 담벼락에 찰싹 달라붙어서 마치 스파이더맨마냥 슬금슬금 집으로 향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통기타와 포크송이 주류를 이루던 70년대 음악계 이야기 역시 매력적이었다. 그 시절 오디오는 정말 귀한 아이템이었다. 실용을 추구하던 우리 부모님에게 오디오 컴포넌트는 꼭 필요한 물건이 아니었기 때문에 항상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었다. 아마 그 시절에 지금과 같은 홈시어터 시스템을 구축할 수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봤다. 하긴 그 시절에는 조그만 카세트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하던 시절이었으니까.

금지곡에 얽힌 이야기들은 역시 정치와 관련되어져서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해서 해외의 수많은 명곡들을 접할 수가 없었다. 유신독재 정권 아래 사는 모든 사람들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행복해야만 했는지, 레드컴플렉스 때문에 ‘붉은’이란 단어에 극도의 히스테리컬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었다. 표지에 공산당의 시조라 할 수 있는 마르크스의 얼굴이 들어가 있는 비틀즈 최고의 명반으로 꼽히는 음반도 통째로 금지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은이가 정말 하고 싶은 말들은 그게 아니었다. 비록 가난하고 못 먹고, 못 입고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었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는 사람냄새가 나는 삶이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고도의 경제발전과 더불어 진행된 핵가족화, 개인주의는 기존의 그런 공동체적인 우리 전통의 삶의 형태마저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는 것이다.

없는 것 없이 모두 갖춰진 현대적 삶은 그 시절의 정(情)을 담보하지 않는다. 물질적으로 이렇게 풍요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정신은 날로 피폐해져 가는 것만 같다. 우리보다 반세기 전에 이미 이런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인생에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서구인들의 깨달음에, 우리는 이제서야 조금씩 접근해 가고 있는게 아닐까. 한 세기에 걸친 옛 시절에 대한 풍속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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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고전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소연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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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의천도룡기>에 보면 무당파의 장문인인 장삼봉이 큰 위기 가운데 사랑하는 제자의 아들 장무기에게 태극권의 비결을 알려 주는 장면이 나온다. 장삼봉은 태극권을 시전하고 나서, 장무기에게 얼마나 깨달았느냐고 묻는데 장무기는 시전이 거듭될수록 점점 더 잊어 먹는다는 대답만을 한다. 이제 막 읽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완독하고 나서 든 나의 느낌이 그랬다.

이탈리아가 배출한 뛰어난 문인인 이탈로 칼비노가 자신이 선정한 서양 문학의 고금을 아우르는 작품들에 대해 저술한 다양한 글들을 모은 <왜 고전을 읽는가>는 오늘날 고전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본격적인 책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이 책을 나름 쉽게 보았다가 낭패를 당한 이의 기록이자 개인적으로 그동안 얼마나 고전과 담을 쌓고 살았는지에 대해 처절하게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먼저 칼비노는 책의 머리에서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짧은 에세이에 대해 우리가 읽어야만(물론 전혀 그런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고전들에 대한 개인의 고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는 고전을 “읽는다”가 아니라, 항상 “다시 읽고 있다”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고전에 대한 허풍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오늘날처럼 수많은 신간들과 정보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평생이 걸려도 가능하지 못할 고전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고전(古典)에 대한 정의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기원한 클래식(classic) 즉 다시 말해 무조건 오래되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야겠지만, 전적으로 칼비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다. 개인적으로 근현대에 나온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소중한 경험과 특별한 영향력을 미친 작품이라면 응당 고전의 범주에 무난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작고한 김소진 작가의 “신풍근 배커리 약사” 같은 작품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된다.

그의 주장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의 하나는 바로 고전을 읽으면서, 독자 스스로가 작품 자체를 바꿀 수도 그리고 바꾸어 나갈 수도 있다고 가정한 부분이었다.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라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데자뷰를 제공해 주고, 또 읽었던 책이라면 또 새로운 경지를 제공해 줄 수 있는 특별한 나만의 책을 만들어내는 경험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소중한 독서의 체험이 아니던가 말이다.

고전과의 만남을 통해 그 구조를 파악하고, 인류 역사를 통해 설정되어져온 규정들을 체험하며 언젠가는 그 고전들로 채워진 나만의 서가를 꿈꾸는 것은 독서인 모두의 꿈이 아닐까 상상해 볼 수가 있었다.

그 외에 모두 해서 35편의 글들을 통해 호메로스의 인류 시초의 원초적 모험기 <오디세이아>로 시작을 해서 현대 작가인 체사레 파베세의 인류학과 민속신화학을 아우르는 인간 희생 제의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 군들을 만나게 된다. 칼비노의 인류의 문화사 전반에 걸친 예리한 분석과 시공을 초월하는 공력 앞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독서를 해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시샘마저 들었다.

사실 그가 이 책 <왜 고전을 읽는가>를 통해 소개해 주는 많은 고전들을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미처 내가 모르고 있는 방대한 양의 고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 어떤 책들은 예전에 읽었어도 채 망각 속으로 사그라지어 버린 책들이 많았으며, 대부분의 책들은 국내에 소개가 채 되지 않아 접하고 싶어도 접할 수가 없는 책들도 있었다. 특히 그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 중에서 최고로 꼽았던 <우리 서로의 친구>의 경우에는 번역되어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다.

칼비노가 흠모해 마지않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는 현대 영화가 가시는 가시성과 영화편집의 요소들을 들어가며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더 나아가 중세를 지배해 왔던 프톨레마이오스적인 닫힌 우주관에 반대해서, 열린 시공간을 지향하는 패러다임에 대한 분석은 경이와 찬사를 보낼만하다. 물론 매력적인 이야기와 플롯의 구성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어렴풋이 들었던 갈릴레오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에서는 보다 심오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알파벳이라는 기호를 통해 인류의 귀중한 정보들을 동시대인들과 소통할 수 있고 또 후세에도 전달할 수 있는 창조물이라는 그의 주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의 정수였다. 또한 알파벳은 운동과 변화의 근본 요소로서도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다시 인식하게 된 스탕달, 발자크 그리고 디킨스의 작품들과의 조우는 최근의 독서를 하는 가운데 느꼈던 최고의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비롯된 뜨거운 혁명의 기운이 대륙에 가득했던 시기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스탕달과 발자크의 작품들에 대한 진정한 매력들에 대해 희미하나마 맛을 보면서 원전을 읽고 싶다는 의욕을 칼비노는 사정없이 고취시키고 있었다. 디킨스는 발자크가 촉발한 공간적 서술 대상으로 도시가 지니고 있는 요소들에 더해, 입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인물 군을 추가하면서 산업사회로 전진해 나가고 있던 19세기 영국 사회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최근에 이 책에 소개된 고전들과 만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우연히, 이 책을 읽던 중에 마크 트웨인의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란 단편소설과 접하게 됐다. 칼비노의 쓴 적용을 통해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와 그 책의 저자 마크 트웨인을 재발견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됐다. 19세기 청교도적인 도덕률로 무장한 ‘정직한’ 미국 시민사회의 위선과 탐욕을 사정없이 까발려 내면서, 자신의 조국이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던 가치들을 조롱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마크 트웨인의 적당한 중립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칼비노는 해들리버그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진짜 죄악은 어디에 있었는지 묻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 있다.

물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작품 설명과 레몽 크노의 철학을 다룬 글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한 것도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의 내공이 칼비노의 그것에 한참 미치지 못함을 말이다.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는 올해 내가 읽은 160번째 책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책도 칼비노의 책처럼 나에게 이렇게 책읽기, 특히 고전에 대해 도전을 던져주었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책읽기를 배운 소감이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왜 어느 상황에서 세부묘사가 필요한가, 어느 특정한 공간의 설정이 어떤 상황에서 중요한가, 여전히 부족하지만 어떤 철학적 접근이 필요한가 등은 정말 소중한 체험이었다. 나도 칼비노가 말한 대로, 나만의 소중한 경험과 특별한 영향력을 가진 고전들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나의 이 첫 걸음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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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소여
타카하시 신 지음 / 미우(대원씨아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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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해 마지않던 다카하시 신의 <톰 소여>가 어제 막 도착을 했다. 그리고 부랴부랴 다 읽고 나서 정말 오래 전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마크 트웨인이 창조해낸 그 유명한 캐릭터들에 대한 향수에 빠졌었다.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 아마 어려서 이 두 캐릭터에 대한 이름을 들어 보지 않고 자란 이가 없을 것 같다. 나도 그들처럼 해적이 되어,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허무맹랑한 공상에 빠졌던 적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바다도 그리고 나무집을 지을 만한 나무도 없었다.

다카하시 신은 원작에 대담한 각색을 감행했다. 허클베리 핀은 도쿄에서 살다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이 만화의 배경이 되는 작은 어촌 마을을 찾은 미대생 하루로 대체가 된다. 그리고 우리의 꼬마 영웅이자 말썽꾸러기 주인공 톰 소여 역은 타로에게 돌아간다. 만화에서 타로는 계속해서 외쳐댄다, 어른들은 우리들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이다. 그 어른의 범주에 하루도 포함되어 있는게 아닐까. 원작의 큰 줄거리를 따라 가면서, <톰 소여>는 진행된다.

원작에 나오는 최고 악당 인디언 조는 마을의 불한당 오다기리로 바뀌고, 하루와 타로는 죽은 검정고양이를 묻으러 공동묘지에 갔다가 오다기리의 살인을 목격하게 된다. 역시 트웨인식 비밀, 살인과 미스터리라는 장기가 유감없이 펼쳐진다. 히루와 타로 일행은 해적놀이를 위해 찾은 어촌 마을 앞에 있는 무인도에서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보물들과 명화 그림들을 발견하게 된다.

원작에서는 아마 소년들의 모험이라는 주제에 보다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하지만 다카하시 신과 그의 스탭들이 다시 창조해낸 21세기 <톰 소여>에서 작가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것 같다. 톰 소여/하루에게 누구 하나 다가오지 않는 마을에서, 타로와 그 친구들만이 유일하게 도시에서 온 하루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한다. 역시 여름에만, 마을에 와서 지내곤 하는 타로 역시 타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위기상황에서 마을 공동체는 역시 끈끈한 유대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미국에서 태어난 <톰 소여>의 일본화 과정이라고 해야 할까.

역시 어른이면서도 여전히 유년의 기억 속에 사로 잡혀 있는 하루의 캐릭터는 참 매력적이었다. 성장 과정에서의 어두운 면들을 가지고, 결국 마을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하루의 캐릭터를, 계속해서 캔 맥주를 마시고 줄담배를 피워대는 주인공을 여성으로 치환시키면서, 고전에 관한 충실한 재해석을 시작한다.

그리고 만화에서 몇 컷 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하루와 타로에게 많은 것을 알려 준 겐조 할아버지의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비밀 엄수와 신분노출이라는 위험 때문에, 정말 좋아하는 이를 구해 주지 못해 괴로워하는 주인공들의 고뇌를 비주얼로 멋지게 형상화시키는데 성공한 것 같다.

역시 고전 원작을 만화화하는데 있어서 정수는 바로 작가의 유머감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심각하고, 거의 데생에 가까운 터치를 보여 주다가도 일러스트 스타일의 간소화로 ‘결정적 순간’들을 잡아내는 다카하시 신의 미학이 눈부셨다.

후기에 실린 작가의 말대로, 다시 여름이 되면 하루와 타로가 빚어내는 <톰 소여>를 다시 찾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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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 - 마크 트웨인 걸작선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문학수첩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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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 현대 미국 문학의 대가라고 하지만 왠지 나에게는 어린 시절 톰 소여와 그의 절친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만 각인되어 있는 작가였다. 그리고 20년도 넘게 그의 작품들과는 담을 쌓고 지냈다. 그러다가 이번에 우연한 기회에 그의 단편 걸작선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이라는 책과 만나게 됐다. 125년 동안이나 어둠 속에 묻혀 있다가 다시 빛을 보게 된 책의 제목의 동명의 타이틀을 제목으로 뽑았다.

이 책에는 모두 5개의 중단편들이 실려 있다.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가 그 첫 번째 이야기인데, 정직함을 삶에서 가장 우선순위로 삼고 있는 한 마을 해들리버그가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고찰이다. 우선, 그 마을 사람들에게 개인적 원한을 지닌 사나이가 현금 4만 달러에 상당하는 금화가 든 돈 자루를 에드워드 리처즈 집에 맡기면서 시작이 된다.

그리고 같이 동봉된 편지 한 장으로 하여금, 마을에 있는 모든 이들이 그 돈에 대해 욕심을 갖게 만들어 버린다. 그 사나이가 그전에 마을의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은 적이 있는데(20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도박으로 딴 돈으로 하여금 그에게 은혜를 갚고자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모르고, 암호 같은 말을 기억하는 이가 주인공이라는 거다. 그가 의도한 대로 마을에 사는 19가구의 가장들은 모두 자신들이 그 행운의 주인공이라고 하면서, 일의 집행을 맡은 버지스 목사에게 편지를 보낸다. 해들리버그를 파멸시키려고 하는 사나이의 교묘한 덫에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해들리버그 사람들은 걸려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공개적인 망신.

마크 트웨인이 여기서 고안해낸 장치들은 참으로 교묘하기 그지없다. 물질에 대한 개인적 탐욕에 대한 스케치는 그야말로 너무나 정교하다. 사람이라면 가지고 있는 불로소득에 대한 욕망은 정직함으로 ‘무장한’ 해들리버그 개인들의 위선적인 가면을 남김없이 발가벗기고 만다. 왜, 그들은 처음에 그 선행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작고한 바클리 굿슨에게 돌리지 않고, 자신들이 그 돈 자루를 챙기려고 했을까. 아마 이 이야기를 통해 마크 트웨인은 한창 자본주의적 성과가 고도로 발달하기 시작한 19세기 미국의 모습을, 쁘띠 부르주아들이 가지고 있던 위선의 탈을 벗기려고 했던 것 같다. 이야기의 결말은 너무나 교훈적이다.

두 번째 이야기 <100만 파운드 은행권>은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것 같은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이미 잘 알려진 마크 트웨인의 이야기를 재확인하는 느낌이랄까. 주인공 헨리 애덤스가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요트를 타다가 조난이 되어서, 런던으로 하는 범선에 구조를 받고 런던으로 흘러 들어가게 된다. 역시 황당하면서도 매혹적인 설정이다,

그리고 어느 영국의 내기라면 사족을 쓰지 못하는 두 노인네들의 제안에 휘말려서 30일 간 실제로 영국 정부에서 발행된 100만 파운드 은행권을 건네받고 생활하게 된다. 내기의 쟁점은 총명함과 정직함을 두루 갖춘 외국인이라는 조건에 부족함 없이 딱 들어맞는 헨리 애덤스가 제격이었다. 영국의 두 후보 형제 신사들은 고약하게도, 단돈 한 푼 없는 주인공이 30일 동안 굶어 죽느냐 그렇지 않냐를 가지고 내기를 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헨리 애덤스가 원하는 일자리를 제공해준다는 조건이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모든 것을 움직인다고 하지만, 이런 고약한 제안에 쓴 입맛이 다셔졌다. 하지만, 주인공으로서는 그 제안을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당장 자신은 손해 볼 일이 없으니 말이다.

주인공이 가진 100만 파운드 은행권은 그야말로 카드 판에서 조커 같은 역할을 한다. 우선 허름한 식당에 가서 문자 그대로 배가 터지게 음식을 먹고, 예의 지폐를 제시한다. 그 주인이 거스름돈을 거슬러 줄 수가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삶의 방식을 터득한 그는 옷도 거저 입게 되고, 호화판 호텔에 머무르면서 외상을 지게 된다. 그리고 상류 사회의 인사들과도 어울리게 되면서 유명인사가 된다. 물론 빠지지 않고 자신의 평생의 반려자도 만나게 된다. 현대판 신데렐라 스토리다.

예상된 대로 파멸보다는 유쾌한 결말로 매듭이 지어지지만, 역시 부르주아 자본주의의 정점에서 삶에 모든 것들이 내기로 귀결되는 영국식 삶의 방식에 대한 마크 트웨인 식의 신랄한 비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으로 화폐가 가진 지위와 힘으로 해결이 되는. 현대 유럽에서는 물질에 근거한 소비주의가 행복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회 전반에 걸친 의식이 형성되었지만, 당시 19세기 폭발하는 자본주의의 힘은 상류사회로의 진입도, 친구와의 관계도 그리고 심지어는 사랑마저도 맘모니즘(Mammonsim)의 위력 앞에서는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1865년에 발표가 돼서 마크 트웨인에게 비로소 전국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는 <캘러베러스 군의 악명 높은 개구리>와 맨 마지막에 나오는 <귀신 이야기>는 전형적인 단편의 구성을 가진다.

역시 이 책의 백미는 타이틀인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이었다. 마크 트웨인 작품의 주 배경을 이루는 미주리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이야기 속에 예의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이라는 인간의 욕망들을 드러나는 주제들이 담뿍 배어져 있다. 가난한 농장주 존 그레이는 자신의 딸인 메리를 휴 그레고리라는 부유한 집 자제와 결혼시켜 한 몫 잡아 보려는 엉큼한 속셈을 가지고 있다.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라고 생각되는 결마저도 금전적인 욕망과 결합되어 있다는 서글픈 현실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메리가 존 그레이의 형인 데이비드 그레이의 상속녀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존 그레이를 경악한다. 왜냐하면, 메리를 사랑하는 휴 그레고리는 데이비드와는 앙숙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둘이 결혼한다고 한다면 데이비드는 자신의 상속 유언을 철회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여기서 존 그레이는 냉철하게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한다. 휴 그레고리가 상속받을 재산보다 몇 갑절이나 더 많은 돈을 가진 형의 재산이 탐이 난다.

이 때, 조지 웨인/휴버트 디 폰테인블로 그리고 장 메르시에라는 이름을 가진 미스터리한 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는 메리에게 청혼을 하기도 하고 포기하기도 하는 그야말로 오락가락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와중에 데이비드는 누군가에게 살해를 당하고, 휴 그레고리가 유력한 살인용의자로 몰리게 된다. 이야기는 독자들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마크 트웨인의 <살인, 미스터리 그리고 결혼>은 확실히 읽기에 재밌다. 과연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이 정말 100여 년 전에 쓰인 것인가 할 정도로 현대의 그것들과 많은 유사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팽배한 물질주의 가운데 하루가 다르게 그 자취를 감춰 가고 있는 휴머니즘에 대한 통렬한 마크 트웨인의 지적이야말로 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된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유머와 재치가 넘치면서도, 그의 장끼인 ‘인간의 탐욕과 위선의 가면’을 사정없이 폭로해 버리고야 마는 그의 필력에 존경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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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기행 2
후지와라 신야 지음,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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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에서 분노와 금욕이 지배하는 광물적 세계인 이슬람의 바다를 헤쳐 나온 후지와라 신야는 이번에는 신의 세계인 티베트를 찾는다. 지금도 티베트를 여행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당시에 캐슈미르 분쟁으로 인해 아마 국경이 개방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도 그는 티베트 기행에 있어서 선구자적인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하늘의 테두리에서 그가 찍은 <하늘, 구름, 바위산, 흙, 초목, 물, 집, 사람, 절>(18-9페이지) 사진처럼 티베트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사진도 없을 것 같다. 하늘과 구름의 광활한 배경을 뒤로 하고, 바위산이라는 공간 안에 담겨 있는 흙-초목-물-집 그리고 사람. 마지막으로 티베트 정신세계의 지주라고 할 수 있는 사원에 이르기까지 티베트가 보여 주는 모든 것의 집합체였다.

이 인도령 티베트에서 작가는 라다크라는 지역에 있는 심산의 사원을 찾는다. 엄격하게 기도와 수양을 위한 공간인 예의 사원에서 후지와라 신야는 21일간의 수도에 들어간다. 역시 사원에서의 경험을 원하는 이와 사원에서 삶을 사는 이들 간의 차이는 그가 말하는 흙덩이와 야채즙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에게 21일은 최대한 그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시간과 공간이 멈춰 버린 듯 그 사원 속에서 그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후지와라 신야가 만나는 이들과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그가 그렇게 그 나라 말들에 정통했던 걸까? 아니면 자기임의 대로의 생각을 적은 걸까, 풀리지 하는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의 다음 목적지는 이제는 미얀마라는 익숙하지 않는 이름으로 불리는 버마였다. 이슬람권-힌두권을 거쳐 드디어 불교의 나라에서 다시 한 번 식물적 세계에서 만나는 기습적 폭우, 스콜을 대하는 현지인들의 자세를 관찰하는 작가. 많은 관찰을 통해서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고 했던가. 주홍색 법복이 인상적이었던 비오는 날의 수채화가 절로 그려졌다. 버마식 카레로 식사를 하는 가운데, 자신에게 응달을 만들어주는 자기희생에 감복하는 모습은 <동양기행>을 읽으면서 느낀 최고의 감동이었던 것 같다.

역시 불교의 나라지만 버마의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 주는 태국의 치앙마이로 무대는 바뀐다. 다시 한 번 유곽을 찾은 작가의 광화(狂花) 에피소드는 책에서 소개된 여느 이야기보다 싱겁기만 하다. 회색빛 상하이의 통제된 관광 스토리도 역시 다를 게 없었다. 홍콩에서 우연하게 만나게 된 리콴-유콴 브라더스의 이야기는 역시 개인적 관계가 있어야 흥미를 가지게 된다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불변의 사실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책을 접하기 전에 우리나라에도 들렸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했었는데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었다. 후지와라 신야의 눈에 비친 우리나라의 이미지들은 택시 안에서 들은 판소리와 시장 좌판에 둔기를 맞고 죽은 돼지머리 정도였던 것 같다. 당시 일 년 전의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이야기는 하면 안 되는 거였고, 여전히 통금이 실시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왠지 모를 서글픈 생각도 들었다. 다시 한 번, 복잡하기 그지없는 정치 이야기에 대해서는 외면해 버리고 마는 작가가 그 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돌아간 작가는 오사카 근처의 고야산에서 402일 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자신을 다시 찾고, 되돌아보기 위해 이런 대단한 모험으로 가득한 여행을 시작하고 마무리 지은 작가에 대해 경의를 표한다. 책을 통해 간접경험을 한다고 보았을 때, 작가 후지와라 신야와 더불어 일희일비가 교차하는 많은 순간들을 경험했던 것 같다. 눈발이 내리는 이스탄불의 황량한 거리에서, 지중해 태양과 장미향이 깃든 안탈리아에서, 지상에서 가장 더럽다는 캘커타의 숙소에서, 시간과 공간이 멈춰버린 라다크의 이름 모를 사원에서, 사람 응달을 만들어 준 버마의 노천식당에서의 그 특별한 경험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서양의 물질세계와 동양의 정신세계라는 아마도 서양에서 유래한 그의 도식적인 이분법적 분류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여행자는 결국엔 타자의 시선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다.

근 30년 전에 ‘동양기행’이라는 이런 멋진 기획을 하고, 실천에 옮긴 한 사나이의 열정에 마냥 부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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