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전을 읽는가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소연 옮김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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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의천도룡기>에 보면 무당파의 장문인인 장삼봉이 큰 위기 가운데 사랑하는 제자의 아들 장무기에게 태극권의 비결을 알려 주는 장면이 나온다. 장삼봉은 태극권을 시전하고 나서, 장무기에게 얼마나 깨달았느냐고 묻는데 장무기는 시전이 거듭될수록 점점 더 잊어 먹는다는 대답만을 한다. 이제 막 읽은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를 완독하고 나서 든 나의 느낌이 그랬다.

이탈리아가 배출한 뛰어난 문인인 이탈로 칼비노가 자신이 선정한 서양 문학의 고금을 아우르는 작품들에 대해 저술한 다양한 글들을 모은 <왜 고전을 읽는가>는 오늘날 고전을 읽고자 하는 이들에게 많은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본격적인 책에 대한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우선 이 책을 나름 쉽게 보았다가 낭패를 당한 이의 기록이자 개인적으로 그동안 얼마나 고전과 담을 쌓고 살았는지에 대해 처절하게 반성을 하게 되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먼저 칼비노는 책의 머리에서 <왜 고전을 읽는가>라는 짧은 에세이에 대해 우리가 읽어야만(물론 전혀 그런 당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는 고전들에 대한 개인의 고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의 의견에 의하면 우리는 고전을 “읽는다”가 아니라, 항상 “다시 읽고 있다”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고전에 대한 허풍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지적한다. 사실 오늘날처럼 수많은 신간들과 정보가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평생이 걸려도 가능하지 못할 고전들을 “다시”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고전(古典)에 대한 정의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에서 기원한 클래식(classic) 즉 다시 말해 무조건 오래되서 좋은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물론 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어야겠지만, 전적으로 칼비노의 의견에 동의하는 바다. 개인적으로 근현대에 나온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소중한 경험과 특별한 영향력을 미친 작품이라면 응당 고전의 범주에 무난하다고 생각을 한다. 그런 면에서, 개인적으로 작고한 김소진 작가의 “신풍근 배커리 약사” 같은 작품은 충분히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이 된다.

그의 주장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의 하나는 바로 고전을 읽으면서, 독자 스스로가 작품 자체를 바꿀 수도 그리고 바꾸어 나갈 수도 있다고 가정한 부분이었다. 미처 읽지 못한 책들이라도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데자뷰를 제공해 주고, 또 읽었던 책이라면 또 새로운 경지를 제공해 줄 수 있는 특별한 나만의 책을 만들어내는 경험이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소중한 독서의 체험이 아니던가 말이다.

고전과의 만남을 통해 그 구조를 파악하고, 인류 역사를 통해 설정되어져온 규정들을 체험하며 언젠가는 그 고전들로 채워진 나만의 서가를 꿈꾸는 것은 독서인 모두의 꿈이 아닐까 상상해 볼 수가 있었다.

그 외에 모두 해서 35편의 글들을 통해 호메로스의 인류 시초의 원초적 모험기 <오디세이아>로 시작을 해서 현대 작가인 체사레 파베세의 인류학과 민속신화학을 아우르는 인간 희생 제의에 이르는 다양한 작품 군들을 만나게 된다. 칼비노의 인류의 문화사 전반에 걸친 예리한 분석과 시공을 초월하는 공력 앞에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독서를 해서 그런 능력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는 시샘마저 들었다.

사실 그가 이 책 <왜 고전을 읽는가>를 통해 소개해 주는 많은 고전들을 간접적으로 접하면서 미처 내가 모르고 있는 방대한 양의 고전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또 어떤 책들은 예전에 읽었어도 채 망각 속으로 사그라지어 버린 책들이 많았으며, 대부분의 책들은 국내에 소개가 채 되지 않아 접하고 싶어도 접할 수가 없는 책들도 있었다. 특히 그가 찰스 디킨스의 작품 중에서 최고로 꼽았던 <우리 서로의 친구>의 경우에는 번역되어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웠다.

칼비노가 흠모해 마지않는 아리오스토의 <광란의 오를란도>는 현대 영화가 가시는 가시성과 영화편집의 요소들을 들어가며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더 나아가 중세를 지배해 왔던 프톨레마이오스적인 닫힌 우주관에 반대해서, 열린 시공간을 지향하는 패러다임에 대한 분석은 경이와 찬사를 보낼만하다. 물론 매력적인 이야기와 플롯의 구성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어렴풋이 들었던 갈릴레오의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의 두 가지 주요 세계관에 관한 대화>에서는 보다 심오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알파벳이라는 기호를 통해 인류의 귀중한 정보들을 동시대인들과 소통할 수 있고 또 후세에도 전달할 수 있는 창조물이라는 그의 주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의 정수였다. 또한 알파벳은 운동과 변화의 근본 요소로서도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통해 다시 인식하게 된 스탕달, 발자크 그리고 디킨스의 작품들과의 조우는 최근의 독서를 하는 가운데 느꼈던 최고의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비롯된 뜨거운 혁명의 기운이 대륙에 가득했던 시기의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스탕달과 발자크의 작품들에 대한 진정한 매력들에 대해 희미하나마 맛을 보면서 원전을 읽고 싶다는 의욕을 칼비노는 사정없이 고취시키고 있었다. 디킨스는 발자크가 촉발한 공간적 서술 대상으로 도시가 지니고 있는 요소들에 더해, 입체적이면서도 다양한 인물 군을 추가하면서 산업사회로 전진해 나가고 있던 19세기 영국 사회의 초상을 그려내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최근에 이 책에 소개된 고전들과 만나지 못했음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우연히, 이 책을 읽던 중에 마크 트웨인의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란 단편소설과 접하게 됐다. 칼비노의 쓴 적용을 통해 <해들리버그를 타락시킨 사나이>와 그 책의 저자 마크 트웨인을 재발견하는 소중한 경험을 하게 됐다. 19세기 청교도적인 도덕률로 무장한 ‘정직한’ 미국 시민사회의 위선과 탐욕을 사정없이 까발려 내면서, 자신의 조국이 그렇게 자랑해 마지않던 가치들을 조롱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마크 트웨인의 적당한 중립주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칼비노는 해들리버그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진짜 죄악은 어디에 있었는지 묻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 있다.

물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작품 설명과 레몽 크노의 철학을 다룬 글들은 거의 이해하지 못한 것도 부끄럽지만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의 내공이 칼비노의 그것에 한참 미치지 못함을 말이다.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는 올해 내가 읽은 160번째 책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책도 칼비노의 책처럼 나에게 이렇게 책읽기, 특히 고전에 대해 도전을 던져주었던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다시 책읽기를 배운 소감이다. 단편적이긴 하지만 왜 어느 상황에서 세부묘사가 필요한가, 어느 특정한 공간의 설정이 어떤 상황에서 중요한가, 여전히 부족하지만 어떤 철학적 접근이 필요한가 등은 정말 소중한 체험이었다. 나도 칼비노가 말한 대로, 나만의 소중한 경험과 특별한 영향력을 가진 고전들을 갖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나의 이 첫 걸음은 발자크의 <고리오 영감>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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