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시르와 왈츠를 - Waltz with Bashi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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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참 공교롭다. 어제 레바논 내전의 참상을 그린 라지 하위의 <드니로의 게임>을 읽었는데 오늘은 역시 같은 주제를 다룬 아리 폴만 감독의 <바시르와 춤을>이란 이스라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을 봤다. 장장 4년에 걸친 긴 시간과 이스라엘, 프랑스, 독일 그리고 미국 4개국 공동 작업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는 질주하는 수많은 개들을 비추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영화의 감독이자 화자인 아리 폴만은 20년 전 기억을 되찾기 위해 당시 동료들을 찾아 기억의 퍼즐 조각들을 맞추기 시작한다. 때는 1982년, 19살의 아리 폴만은 이스라엘 보병 소속으로 소위 레바논 전쟁에 투입된다. 그에게 당시의 기억들을 악몽이었고, 아무 것도 기억해낼 수가 없다. 아마도 의도된 선택적 기억상실이라고 해야 할까. 그 중심에는 같은 해 9월에 벌어진 ‘사브라와 샤틸라 학살’이 자리하고 있다.

배를 타고 시돈 해안에 내리자마자 폴만과 동료들을 사방에서 총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보이지도 않는 적들을 응사를 해댄다. 그들의 갈겨대는 소총의 사격 소리는 마치 사방에 적들에게 둘러싸인 그들의 조국 이스라엘이, 그 나라의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단발마적 비명처럼 들린다.

애니메이션은 그렇게 자신의 기억을 되찾기 위해 옛 동료들을 찾아 인터뷰를 진행하는 아리 폴만과 함께 전개된다. 탱크 병으로 레바논 전쟁에 투입되었던 로니로부터 당시의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들은 마치 소풍가는 행렬처럼 탱크에 올라타고 레바논에 들어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뜨거운 소총세례와 연달아 폭발하는 RPG 공격이었다. 그 와중에서 동료들과 함께 도망치던 로니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게 되고, 내내 비겁하게 동료들을 내버리고 자신만 살아남게 되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다음에 등장하는 인물은 항상 파출리라는 향수를 뿌리고 다녔다는 프렌켈. 그들은 레바논 테러분자들을 색출해서 공격한다는 미명 아래, 민간인들이 살고 있는 거주지를 오폭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들을 오인사격으로 빼앗는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투입된 폴만과 그의 동료들은 도시의 도처에서 레바논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암살당한 바시르 게마엘의 사진들을 보게 된다. 저격병들에게 노출된 폴만 그룹이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있을 때, 프렌켈은 동료의 기관총을 빼앗아 들고 뛰쳐나가 왈츠를 추듯 그렇게 난사를 해댄다. 광기에 사로잡힌 전쟁 가운데, 온 정신을 유지하는 게 미친 일이지도 모르겠다.

자신들의 지도자의 암살에 격분한 기독교계 민병대인 팔랑헤당원들은 사브라와 샤틸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난입을 해서 9월 16일에서부터 18일까지 3일 동안 테러리스트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난민촌을 파괴하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양민들을(최대 3,500명) 학살한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이들의 행동을 묵인한 이스라엘이 자리 잡고 있다. 이스라엘의 저명한 언론인인 론 벤-이샤이가 이스라엘 사령관에게 항의를 해보지만 별무소용이다. 그리고 영화는 그간의 애니메이션 대신 당시의 실제 필름들을 보여 주면서 조용히 막을 내린다.

이 영화를 보면서 계속해서 나치가 2차 세계대전 중에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팔랑헤당원들과 이스라엘의 합작으로 자행된 사브라-샤틸라 학살이 중첩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1948년 건국 이래, 자신들은 언제나 희생자였다고 주장해 왔지만 그들에게 삶의 터전을 잃고 타국으로 쫓겨난 신세의 팔레스타인들에겐 그들이야말로 폭압적인 침략자가 아니었던가. 그런 이스라엘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중부유럽의 죽음의 캠프에서 대대적인 홀로코스트가 진행되고 있을 때, 서방국가들이 외면했다는 비난을 자신 있게 할 수가 있을까.

마치 베트남전에서 무엇 때문에 타국에서 싸우고 있는지조차 모른 채, 무수히 죽어갔던 미군 병사들처럼 1980년대 이스라엘 병사들은 레바논에서 그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의 적이 누구인지, 왜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내놓고 싸워야 하는지에 대해 <바시르와 왈츠를>에서는 그 어느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폴만들에게 유일한 삶의 목적은 아수라장 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것 뿐이다. 물론 그것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다.

건국 이래 계속해서 전시 상황 아래 있어온 이스라엘은 마치 병영국가 같은 모습으로 보인다. 총탄이 빗발치는 레바논 전쟁에서 휴가를 받아 돌아온 폴만은, 자신을 빼고서는 너무나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자신을 걷어찬 애인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으며, 나이트클럽에서 그 또래의 젊은이들은 무아지경에서 몸을 흔들고 있다. 그를 빼놓고서는 너무나도 정상적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바로, 레바논의 어느 농장을 순찰 중이던 폴만그룹에게 RPG 공격을 한 소년들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바흐의 하프시코드 협주곡 중 그 유명한 <라르고> 선율이 조용하게 흐르는 가운데, 매복한 두 명의 소년들은 이스라엘 장갑차에 대한 RPG 공격을 감행한다. 모든 것이 슬로 모션으로 처리되면서, 본능적으로 응사를 해대는 이스라엘 병사들. 이처럼 평화스러운 광경 속에서 자행되는 무자비한 폭력과의 대비는 너무나 비극적이었다.

유대인들은 지난 2천년 동안, 자신들의 잃어버린 팔레스타인 땅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아마 그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긴 팔레스타인 민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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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니걸스
최은미 지음 / 디오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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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서 나중에 북글을 쓸 적에, 제목에 들어간 “horny"가 주는 노골적이면서도 도발적인 의미를 미국출신의 랩밴드 2 Live Crew의 유명한 곡에 대한 소개를 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결말을 다 알게 된 지금의 감정은 전혀 그럴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책의 표지에 나온 대로 “호니걸스”를 발정난 처자들 정도에 비유하는 출판사의 문구가 현대판 어느 자유처자의 엽색행각을 유머러스하게 다룬 책이 거려니 하는 생각을 했다. 너무나 예상을 벗어나는 충격적인 결말 때문에 북글의 전개가 도무지 자연스럽지가 않다.

9번째이자 마지막 에피소드를 읽기 전까지 참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는데 모두 공중으로 휘발되어 날아가 버린 느낌이다.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치밀한 구성과 캐릭터들의 배치가 아주 마음에 들었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친 한 마디가 나중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반전을 불러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어쨌든 다시 정신을 차리고 북글을 써 보자.

<호니걸스> 클럽 멤버이자 주인공/화자인 지정인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커플 상담을 전문으로 하는 올해 33살의 독신녀이다. 그녀의 친구이자 호니걸스 클럽 멤버로 라니와 재순이 등장한다. 각자 커리어 우먼과 페미니스트의 삶을 사는 그녀들의 소소한 일상이 자그마치 다섯 명이나 되는 남자들을 그야말로 요일팬티 돌려 입듯 둘러메치는 정인의 일상과 오버랩 된다.

그리고 남녀 간의 밀고 당기는 관계를 라니가 다니는 성당의 마인마 신부가 걸쭉한 입담으로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어디 그것뿐인가, 특이한 캐릭터들은 차고 넘친다. 뉴욕의 할렘에서 원조 춤을 배운 세계적인 댄스 테라피스트 닥터 크림빵도 등장을 한다. 출중한 미모와 뛰어난 머리를 자랑하는 정인의 고모 지라경도 한 수 거든다.

정인의 남성편력을 읽으면서 입버릇처럼 등장하는 5명의 남자들이 모두 소개될 줄 알았다. 작가의 친절함을 너무 기대했던 걸까? 미스터 그레이와 미스터 블랙으로 정인의 낚시소개는 끝이 난다. 여성작가답게 역시 세심한 여성들의 심리묘사를 하는데 있어서, 뛰어난 발군의 실력을 보여 준다. 집요하게 우리 사회의 NO 1 규범으로 결혼제도를 지목하면서, 집요한 공격을 감행한다. 그에 비하면 모노가미에 대한 그녀의 냉소는 차라리 귀엽기까지 하다. 물론 이것조차 결말의 반전을 위한 예비겠지만 말이다.

작가가 책의 곳곳에 심어 놓은 암시와 복선들을 잘못 해석한 내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책을 보면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 나오는 요란 법석한 4총사가 벌이는 파티와 멋진 남자들이 끊이지 않는 판타지 세계가 떠오른다고도 생각했지만, 그것조차 결말 앞에선 부질없는 한낱 신기루에 불과했다.

어느 노래 한 곡으로 정인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도발시킨 공기사는 그녀의 내담자가 되는 순간, 급작스럽게 소설의 궤도에서 이탈한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말이다.

가벼운 칙릿 소설 같은 분위기를 기대했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결말로 트라우마에 빠져 버린 느낌이 들었다. 더 할 말이 없다. 작가가 책의 어디에선가 표현한 대로, 사랑은 영원한 불협화음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고통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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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잔의 차
그레그 모텐슨.데이비드 올리비에 렐린 지음, 권영주 옮김 / 이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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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으면서 중앙아시아협회(CAI: Central Asia Institute)의 공동설립자인 그레그  모텐슨의 꿈을 이뤄 나가는 과정이 마치 현대판 우공이산(愚公移山)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든 시작은 힘든 법이다, 더더욱 우리네 삶과는 동떨어진 이역만리 외딴 산골에 학교를 짓겠다는 이 책의 공동저자 그레그 모텐슨의 비전은 우리 현대인들이 보기에 허황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선교사 출신의 부모로부터 불굴의 투지와 비전이라는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레그 모텐슨에게 자신의 신념과 약속에 충실한 삶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였다.

이야기의 시작은 이 책의 화자인 전 산악인 그레그 모텐슨이 세계에서 가장 등반하기 힘들다는 K2 등정에 실패하면서 시작된다. 어려서 탄자니아에서 선교사로 일했던 부모님과 함께 성장한 그레그의 손아래 여동생이 뇌막염과 간질로 죽게 되면서 그녀를 추모하고자 그레그는 K2 등정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불의의 사고들로 등정에 실패하고, 발토로 빙하 밑의 브랄두 계곡에 위치한 작은 마을 코르페에서 머물게 되면서 그레그의 10년간에 걸친 고난의 대장정이 시작된다.

K2 등정 실패로 심신이 만신창이가 된 그레그를 정성껏 돌봐준 코르페 마을 사람들과 촌장 하지 알리에게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그레그. 독실한 시아파 이슬람교도인 하지 알리는 평생 이슬람의 경전 코란의 가르침과 기도로 살아 왔지만 정작 자신은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에,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의 장인 학교의 건립을 원한다.

기력을 회복하고 샌프란시스코 베이에이리어 돌아간 그레그는 간호사로 일하면서 돈을 모으고 여가시간에 미국 각처의 유력인사들에게 자신의 취지를 알리는 내용을 담은 580여 통의 편지들을 쓴다. 하지만 그의 노력에 비해 그가 받은 기부금은 미취학 아동들의 교육이라는 대사업을 시작하기엔 미비한 금액이었다. 그러던 중, 스위스 출신의 공학자 장 회르니로부터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그레그의 비전을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파키스탄 정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발티스탄 그 중에서도 스카르두를 거쳐 코르페까지 학교를 지을 자재들을 구입해서 운반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레그는 학교 건립이라는 큰 꿈 때문에 코르페 마을의 장애물인 브랄두 강을 가로 지르는 다리가 더 필요하다는 계산을 넣지 못한다. 학교를 짓기 위해선, 먼저 다리부터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레그의 이런 초기의 오류들은 훗날 그가 일을 하는데 있어서 순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아울러 자신의 사업을 진행시키기 위해선 거의 독립적인 단위로 활동을 하는 부족의 유력자들의 도움과 이슬람 신앙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도 체험을 통해 배우게 된다. 물질적인 어려움에 더해서, 무슬림 아이들을 서구식 학습방법으로 ‘타락’시키지나 않을까 하는 전통주의자들이 반발 또한 무시할 수가 없는 요인이었다. 결국 어느 물라의 “파트와” 선언으로 인해, 이란 시아파 최고 회의에까지 자신이 추진하는 사업의 정당성을 추인 받아야 했다. 이 또한 그레그의 학습의 과정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종교지도자들의 승인도 다른 요소들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 번은 파키스탄 서부의 와지리스탄에까지 지평을 넓혀서 학교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추진하러 갔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장단체에 억류되는 경험도 하게 된다. 게다가 파키스탄의 이웃한 아프가니스탄의 정세가 친소 나지불라 정권과 탈레반의 내전으로 격화되면서 수많은 아프간 난민들이 파키스탄 국경으로 몰려들면서 닥터 그레그를 찾는 손길은 늘어가기만 한다.

그런 와중에 그레그는 평생의 반려자이자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해 주는 타라 비숍을 만나, 단 6일 만에 결혼하는 로맨틱한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는다. 하지만 책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일 년에 수개월씩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변경에서 일하는 남편을 내조하는 타라가 진정한 영웅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이 갔다.

그레그의 비전이 조금씩 이루어져 가고 있는 가운데, 9-11 사건이 터지고 난 뒤 급격하게 반 이슬람 정서가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확산되고, 테러와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파키스탄과 아프간에서 반미주의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는 과정이 상세하게 그려진다. 미국의 부시정부는 군사적 방법을 (이슬람) 테러를 근절시키려고 하지만, 이것은 이슬람 정신의 핵심인 정의, 관용 그리고 사랑에 대한 몰이해로 시작된 잘못된 전쟁이었다.

미국의 헤게모니를 좌지우지하는 군산복합체에게 천문학적인 이익을 가져다 줄 이런 군사행동보다 차라리 그레그가 인도하는 중앙아시아협회 같은 민간단체의 방법이 훨씬 낫다는 주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학교에서 교육을 통한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계몽이 오늘날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에 대한 적절한 대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키스탄과 아프간 산간마을에 대한 교육의 부재를 틈 타, 사우디아라비아의 출신의 부유한 셰이크들이 오일달러를 퍼부으면서 만들어낸 모스크와 마드라사가 이슬람 청년들을 그릇된 지하드로 내몰고 있는 현실이다.

물론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미명으로 민간인들에 대해 저지른 범죄행위 또한 비판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인도주의에 근거해서 파키스탄과 아프간의 오지 마을들에 학교를 세우려는 그레그와 그의 동료들의 노력이 폄하 되서는 안 될 것이다. 책을 읽다 보니, 그레그 개인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음을 볼 수가 있었다. 서구인들에게는 익숙한 개념인 시간약속과 같은 사업상의 절차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발티족 코르페 마을의 촌장인 하지 알리에 의하면 소위 문명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그들의 입장으로 보면 불교에서 말하는 시간의 최소 단위인 찰나에 불과했다. 학교세우기에 조급해 하는 그레그를 보고, 작고한 하지 알리가 남긴 “바람의 소리를 듣게”라는 말이 떠올랐다.

처음에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그레그 모텐슨에게 자신의 비전의 첫 발자욱을 내딛게 해준 것은 바로 그의 어머니 제런이 학교장으로 있는 학교에서 파키스탄의 어린 학생들을 위해 미국 초등학생들이 모은 1센트의 힘이었다.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그 아무도 줍지 않는 하찮은 1센트 짜리 동전이 바로 산을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레그 모텐슨이 K2를 정복했다면, 위대한 산악인으로 기억됐을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실패가 전화위복이 되면서 산에 오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위대한 일을 해낸 사람으로 기억되게 되었다.

*** 그레그 모텐스의 <세 잔의 차>에 대해 더 알고 싶으신 분들은 아래의 사이트를 찾아보세요. 영문 사이트입니다. http://www.threecupsoftea.com/

*** 내가 찾은 오탈자
1. 마드라스 -> 마드라사 (352페이지)
2. 이슬라마바다 -> 이슬라마바드 (353페이지)
3. 우르자 -> 우즈라 (407페이지)
4. 스카루드 -> 스카르두 (475페이지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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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의 프랑스 일기 - 봉주르! 무지갯빛 세상에 건네는 인사 소담 여행 2
미미 글.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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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나라에 대해 현지에 살았던 이들이나 혹은 현재 살고 있는 이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재밌는 이야기도 없는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미미의 프랑스 일기>의 지은이인 미미(송경아 씨)의 귀여운 일러스트와 갖가지 다양한 경험들이 들어 있는 이 책은 볼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지은이와 비슷한 시기를 보낸 탓인지 어려서 사브레(글을 다 쓰고 나서 오탈자 검색을 돌려 보니 저절로 사블레라고 정정해주려고 한다!) 과자를 즐겨 먹으면서 프랑스를 꿈꾸었다는 이야기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미미는 장 자끄 상뻬의 만화를 무진장 좋아한다고 했었는데 아마 그 때문인지 그녀의 일러스트에서 상뻬의 그림자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자세한 디테일의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잡아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펜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채색을 하는 기법에서도 상뻬의 분위기가 났다.

역시 프랑스에 관한 이야기답게 바게트와 에스프레소 커피에 대한 이야기가 뒤따른다. 프랑스를 이해하기 싶다면 바게트와 친해져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지은이에 의하면 그만큼 바게트 빵과 커피는 우리에게 있어서 김치와 밥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에게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먹거리 이야기가 빠지지 않듯이 미미 역시 민생고 해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 <아멜리에>에 나오는 정원 난쟁이의 세계일주가 그냥 영화감독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실제로 로렌 지방에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했다는 이야기에 놀랐다. 역시, 이렇게 무언가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 다만 그 글을 읽는 이들이 <아멜리에>를 봤다는 가정 아래서 말이다. 그리고 아마 이런 자세한 이야기들은 프랑스나 혹은 파리, 프로방스를 여행하는 뜨내기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가 없는 이야기들일 테지.

두 번째 장인 <미미, 무지갯빛 프랑스>에서는 본격적인 미미의 유학생활을 곁들인 신변의 이야기들이 소개가 된다. 여행하는 이들이라면 여행지에서 만난 현지인들과 대화도 무언가 색다른 경험을 기대하지만, 아쉽게도 언어상의 문제나 혹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 때문에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현지인들과 대화를 나누고, 끈끈한 교류에 대한 뒷이야기들이야말로 이 책의 백미가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챔피언 가족으로 소개가 되는 파트릭네 테권도 패밀리 이야기와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22살 난 무슈 가토, 케이크쟁이 줄리앙의 이야기는 마냥 부럽기만 하다. 나도 절로 나도 그런 케이크 한 번 얻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더군다나 지은이가 직접 그려서 적절하게 배치한 일러스트 그림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재미 또한 여간 쏠쏠치가 않다.

그 배우기 어렵다는 불어를 배우는 과정에서 고군분투하는 유학생의 면면이 엿보이는 이야기들 또한 흥미진진했다. 근검과 절약이라는 단어로 축약이 되는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지은이의 불어 배우기 작전은 차라리 눈물겹기까지 하다. 유학이라는 뚜렷한 목적성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미미의 모습을, 휴식과 색다름을 경험하기 위해 프랑스나 혹은 파리를 찾은 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말미에 등장하는 간단한 프랑스식 먹거리 소개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 떡뽂이 식으로 흔히 거리에서 접할 수 있는 크레이프 만들기, 양파 수프 그리고 토마토 팍시(Tomate farcie) 등은 지금다시 생각해 봐도 군침이 입에서 자르르 돈다. 마지막으로 보너스인 파리 일주를 위한 미미식 지침서는 파리의 상징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에펠탑, 센 강 위의 바토무슈, 퐁피두 센터, 푸앵 제로(Point zero) 그리고 파리의 지하를 가로 지르는 메트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네들의 모습을 멋지게 담아내고 있었다.

전반적으로 봤을 때, 프랑스 유학생활에서의 소소한 일상들을 담아낸 글에 만족한다. 하지만 작년에 신이현 작가의 <에펠탑 없는 파리> 그리고 <파리의 스노우캣> 등의 프랑스와 파리에 대한 개성 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책들을 기존에 접해서 그런진 몰라도 독특한 미미 자신만의 칼라가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혹평을 한다면, 자신의 유학생활이 담긴 어느 블로그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자신이 지내고 있는 곳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곳도 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핏 봐서는 로렌 지방 정도가 되는 것 같은데, 지방자치가 유달리 발달되어 있는 프랑스에서 그 지방 특색들이 제각각이 아니던가.

어쨌든 여전히 현재 진행 중에 있는 그녀의 여정(Voyage)이 순항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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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느끼는 낙타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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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이 출간되자마자 바로 샀는데, 이제야 다 읽게 됐다. 지난여름 막내집게 출판사에서 재출간된 싼마오의 <사하라 이야기>를 접하게 되면서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싼마오 아줌마의 열혈 팬이 되어 버렸다. 사막의 모래 한 알까지 사랑해서 모국인 대만을 떠나 사하라 사막에까지 흘러든 싼마오 아줌마의 이야기가 어느 샌가, 가슴 속에 자리 잡은 모양이다.

<흐느끼는 낙타>에서는 <사하라 이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싼마오와 그의 평생의 파트너 시멘트 머리 털보 호세가 사막생활을 하는 동안 보고 느끼고 경험한 8가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네 보통의 삶과는 전혀 동질성 없는 그런 환경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관심이 갔을까? 그건 아마도 싼마오와 호세의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과 박애 그리고 휴머니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핍박받는 사하라위 여성들과 벙어리 노예, 그리고 나중에 사하라 독립운동으로 인해 카나리아 제도로 이주를 해서 알게 된 스웨덴 이웃 카를을 보살피려는 싼마오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녀의 지고한 사랑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다. 혹자의 눈에는 오지랖 넓은 여인네의 지나친 간섭으로도 보일 수가 있겠지만, 휴머니즘이라는 인류 본성의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백만 가지로 이유로 실천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보다 용기 있는 그녀의 실천력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개인적으로 아주 어려서 중앙아시아 일대를 탐험한 헤딘의 전기를 읽고서 언젠가 꼭 한 번 광활한 사막에 가보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됐다. 그런데 왜 다른 곳도 아니고 사막을 꿈꾸었을까? 마치 절대고독을 담보하고 일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그 도도함 때문에? 도대체 사막의 무엇이 싼마오를 비롯한 많은 이들을 끌어당기는 마력 같이 작용하는지 궁금해졌다. <흐느끼는 낙타>를 읽으면서 싼마오가 기술한 글에서 어느 정도 그에 대한 해답을 본 것 같다. 사하라는 단지 그를 사랑하는 이에게만 자신의 아름다움과 부드러움을 드러낸다고 했던가(125쪽). 이 얼마나 매력적인 선언이던가.

싼마오의 카메라에 얽힌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는 <영혼을 담는 기계>는 사진을 찍는 이로써 충분히 공감이 가는 글이었다. 개인적인 욕심만 앞세웠더라면, 어렵게 찍은 사하라위 여인네들의 사진을 버리지 않았을 텐데, 자신들의 영혼을 싼마오에게 빼앗기고 곧 죽을 거라고 생각한 그들을 위해 조금의 주저 없이 필름을 뽑아내 버린다. 이 이야기는 초반에 등장하는 <벙어리 노예>에서는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주의자로서 싼마오의 면모와 은은한 공명을 이루고 있었다.

튼튼한 시멘트 머리를 한 호세와의 결혼 생활에 대한 싼마오의 기술 역시 솔직 담백하면서도 근 40년 전의 진보적인 그녀의 결혼관을 엿볼 수가 있었다. 상대방을 구속하려다 보면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는 그녀의 말은 명언이었다(216쪽). 카나리아 군도 고메라 섬의 휘파람 말에 얽힌 이야기도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흐느끼는 낙타>에서 가장 마음을 사로잡는 이야기는 바로 타이틀로 정한 <흐느끼는 낙타>였다. 1970년대 중반, 사하라의 독립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비화되는 동안 싼마오는 현지에서 예의 사건들을 직접 목격한다. 폴리사리오 민족해방전선(책에서는 유격대로 표현한다), 인근의 모로코와 모리타니 그리고 알제리까지 개입이 되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국제분쟁이 시작된다. 7만 명 남짓 하는 사하라위 인들은 민족자결을 주장하면서 독자적인 국가 건설을 꿈꾼다.

이 와중에 스페인 본국에서 유학한 파시리와 그의 아내 샤이다 그리고 오피뤼아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리고 사막을 사랑한 이방인에게도 정치적 분쟁과 그에 수반된 전쟁은 피해갈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온다.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아주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됐다. 이 이야기는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디서?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읽어본 듯한 기시감이 전율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어느 순간 깨닫게 됐는데, 어려서 죽어라 모으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발췌돼서 실린 글에서 이미 <흐느끼는 낙타>를 읽었던 것이다. 정말 놀라웠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이달의 명작다이제스트’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책들에서 알짜배기만을 뽑아서 실어 주곤 했던 것이다. 아마 근 이십년 전의 일이라 제목도 그 저자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사막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이 비극적 로맨스는 어린 나이에도 잊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어린 시절의 감동과 재회하는 그 순간의 감동이란…….

삶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흐느끼는 낙타>가 주는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싼마오는 언제나 사막인으로 살고 싶어 했었지만, 그녀도 결국 진짜 사막사람들인 사하라위 사람들에겐 이방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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