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비 Young Author Series 2
크리스 클리브 지음, 오수원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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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들어보는 작가인 크리스 클리브의 이력이 궁금해서 인터넷을 통해 그에 대해 알아봤다. 런던에서 태어나 카메룬과 버킹엄셔에서 자란 그는 2005년 데뷔작 <인센디어리>를 발표하면서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리틀비>는 그의 두 번째 작품이자, 원래 제목은 <The Other Hand>였으나 올해 1월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우리나라에 소개된 제목처럼 <리틀비>로 출간이 됐다.

소설 <리틀비>는 영국 런던 서리 지역의 킹스턴 어폰 템스와 나이지리아 남부의 이베노 해변 사이의 5,000마일을 넘나드는 공간적 체험을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템스 강 위의 킹스턴도 그렇지만, 나이지리아의 이베노 해변은 정말 천국보다 낯선 느낌이다.

제목에 나오는 리틀비는 이 소설을 이끌어 가는 두 명의 여주인공 한 명으로, 오일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고향 나이지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떠나왔지만, 밀항 도중 난민으로 경찰에게 잡혀서 지난 2년간 난민수용소에서 여왕의 언어를 배우며 지내온 경력의 소유자다. 한편, 또 다른 여주인공인 새라 서머스/오루크는 삼십 대 초반의 잡지사 편집자로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다. 다만, 왼쪽 가운뎃손가락의 부재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크리스 클리브는 리틀비와 새라, 이 두 주인공의 시선에서 동일한 사건을 바라보는 구성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저자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전혀 다른 삶의 배경을 가진 여성들의 목소리로 서사구조를 이끌어 간다는 점이 특이하게 다가왔다. 새라와 새라의 남편인 유명 칼럼니스트는 2년 전 나이지리아 이베노 해변에서 경험한 끔찍한 사건에 대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크리스 클리브는 그 사건을 매개로 해서, 독자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양손에 들고 저글링 묘기를 보여준다. 궁금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리틀비의 전화를 받은 앤드루가 끔찍하게 자신의 삶을 끝장냈단 말인가! 하긴 꼬리를 물고 밝혀지는 사건의 진상은 점입가경이다.

사지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해서, 영국으로 도망친 리틀비는 언제나 ‘그들’에게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 언제 어디서고 자살할 방법을 찾는다. 서구사회에 풍요를 안겨준 검은 황금 석유는 리틀비와 그녀의 가족에게는 재앙과 동일어로 작용한다. 소설에서도 나오는 것처럼, 영국은 리틀비로부터 미래를 앗아가고, 그 대가로 리틀비들에게 과거를 돌려주었노라고. 여전히 그 해결점을 찾을 수 없는 지난 세기의 탈식민주의 논의와 새로운 삶을 찾아 신세계를 찾은 이들에게 상륙조차 허용하지 않는 옛 종주국 영국의 모습은 모순 그 자체다.

한편,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자부해 왔지만, 막상 예의 위기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앤드루와 새라 부부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황이었다. 식민주의와 석유자원을 둘러싼 광의의 투쟁은, 부부간의 심각한 소통 단절을 겪고 있던 오루크 가족의 파멸로 대치된다.

소설의 2/3 정도 분량까지는 놀라운 집중력을 가지고 책을 읽을 수가 있었다. 마치 한 편의 미스터리 영화를 보는 듯한 구성과, 리틀비와 새라가 교차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이 도대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거지? 라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소설은 구멍 난 타이어마냥 그 동력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그건 아마도 리틀비의 희망과 분노에 대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노라는 독자로서의 무기력감 때문이었을까.

<리틀비>는 전작 <인센디어리>에 이어 영화로 제작될 계획이라고 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타인의 생명에 책임을 지게 된 새라 역을 니콜 키드만이 맡을 예정이라고 하는데, 과연 어떤 식으로 연출이 될지 무척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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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망가 섬의 세사람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19
나가시마 유 지음, 이기웅 옮김 / 비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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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시마 유 작가와 두 번째로 만나게 됐다. 우선 제목 한 번 그럴싸하게 뽑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태평양 바누아투 공화국에 실재하는 에로망가(현지 발음은 이로망고 섬이 맞겠지만)라는 섬으로 에로 만화를 보러 간다는 어느 게임 잡지사의 기획으로 세 명의 남자가 여정에 오른다는 타이틀 단편을 위시해서, 모두 5편의 글들이 실려 있다.

역시 같은 제목의 타이틀인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에는 각박한 도시 생활을 하던 중에 정말 황당한 기획으로, 남태평양의 섬을 찾아가는 세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로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토, 오타쿠의 성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구보타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공의 냉철한 직관으로 볼 때 조금은 음산한 기운을 발산하는 협력업체 직원인 히오키가 그들이다.

나가시마 유 작가는 참 다양한 캐릭터들을 잘 만들어냈다. 조금은 냉정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사토를 중심으로 해서 한편으로는 개그를 담당하는 구보타라는 인물을 그리고 그 좌측으로는 왠지 불협화음이 연상되는 히오키라는 인물을 배치하면서 일단 주인공들의 균형을 맞춘다. 섬에 도착하고 나서, 허리케인으로 그들이 원래 묵으려고 했던 숙소가 단박에 날아가 버렸다는 말에, 사토 일행은 가이드 겸 숙박업자라고 할 수 있는 존 존의 집에 묵게 된다. 유람을 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일을 하러 온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들은 에로망가 섬에서 에로 만화를 보겠다는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타이틀 단편에 가장 관심이 있었는데, 정말 재밌게 읽은 건 <알바트로스의 밤>이었다. 도주 중인 두 명의 남녀가 심야에도 오픈을 하는 심야골프장에서 골프를 친다는 이야기다. 골프 코스를 돌면서, 남자는 어려서부터 프로 골퍼가 되라는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억지로 골프를 치게 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자신이 과외를 하던 주먹의 딸 미사토와 도망을 치던 중에 골프장에 들른 것이다. 자신의 오래된 트라우마를 이겨내면서, 주인공이 결말에 가서 독자들에게 안겨 주는 짜릿한 반전이 일품이었다.

<새장, 앰플, 구토>편에서는 어느 희대의 바람둥이에게 느닷없이 날아온 이메일 한통으로 자신의 연애 행각을 되짚어 보는 쓰다 미키히코라는 남자의 이야기를 작가는 들려준다. ‘선수’ 쓰다는 자신의 흥망성쇠 앞에서 수없이 스쳐간 여자들과의 인연을 재구성하면서 도대체 자신에게 이메일을 보낸 이가 누구일까 하는 회상에 젖는다.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얽혀 있으면서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던 이기적이었던 어느 남자의 넋두리 정도라고나 할까.

역시 하이라이트는 맨 끝에 거의 부록 수준으로 들어 있던 <청색 LED>였다. 마치 순환되는 이야기처럼 처음의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들에 등장했던 인물 중의 한 명을 다시 등장시켜 섬에 다녀오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왜 그 섬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준다. 나가시마 유 작가의 글을 통해 자신의 기존의 작품에 등장했던 인물을 우려먹는 “스핀오프” 소설 장르라는 것도 한 수 배우게 됐다.

제목에 나오는 것처럼 에로 만화에 대해 야한 상상을 했거나 혹은 남국의 정취를 듬뿍 느낄 수 있는 오쿠다 히데오 식의 재미를 기대했다면 <에로망가 섬의 세 사람>은 적합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반전과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에 대한 짜임새 있는 글에 목말랐다면 한 번 도전해 볼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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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탐험가 - 뉴욕에서 홍대까지
장성환.정지연 지음 / 북노마드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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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조금 실망스러운 카페 탐험기였다. 책의 부제로 달린 ‘뉴욕에서 홍대까지’라는 제목에 기대를 많이 했었는데(물론 뉴욕보다는 홍대에!) 책의 2/3 이상이 뉴욕에 있는 멋진 카페들에 대한 이야기들이었고, 나머지 채 100페이지가 되지 않는 홍대 부분도 뉴욕 이야기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구성의 불균형과 “아이 러브 뉴욕”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작가의 문화 사대주의적인 느낌이 나의 책에 대한 몰입을 저지하고 있었다.

<카페 탐험가>의 작가도 커피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고백했듯이, 나도 그다지 커피를 즐기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작가처럼 카페의 분위기는 좋아한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처럼 선뜻 카페 탐험에 나설 정도는 아니지만, 어디에 좋다는 카페에 있다고 하면 한 번 정도는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홍대 파트에 기대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뉴욕에 몇 번 가보긴 했지만, 나의 관심사는 카페가 아니라 뮤지엄이라서 작가가 소개해 주는 그런 멋진 카페들을 방문할 기회가 없었다. 요즘 커피에 대한 책들이 그야말로 봇물 터지듯이 나오는 터라, 커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아마 로스트 커피 정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으리라.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 카페의 정수를 맛보려면 블렌드 커피를 마셔야 한다고 했던가. 커피 맛을 잘 모르는 나로선 난망하기만 태스크다.

어쨌든 밀레니엄 캐피탈 뉴욕을 동경해 마지 않는 작가의 뉴욕 카페 탐험기는 나름 인상적이었다. 역시 관광객의 시선보다는 그 지역에 사는 ‘로컬 피플’의 입장에서 만나게 되는 카페가 좀 더 푸근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아무래도 책을 즐겨 있어서 그런지 여러 카페 중에서 책도 팔고, 커피도 즐길 수 있는 그런 아늑한 공간인 북카페에 대한 소개에 눈길이 갔다. 게다가 요즘에는 프리 인터넷 액세스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카페들이 늘어나는 터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이메일도 보고 기타 여러 가지 일들이 카페에서도 가능하다고 하니 예전의 PC통신 시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기도 했다.

좀 더 비판적인 잣대를 들이대자면, 유난히 비싼 카페의 커피 값을 그 예로 들 수가 있겠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 구내식당의 밥값이 3,500원인데 며칠 전에 좋아하는 할리스 커피에 들러서 마신 고구마 라테는 무려 4,500원이나 했다. 아니 밥값보다 후식 정도로 마시는 커피가 더 비싸다니... 게다가 그 돈에 2,000원 정도만 더 투자하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도 살 수가 있는 가격이다.

미국에서도 요즘 불경기와 고유가 행진으로 예전에 스타벅스 커피를 즐기던 이들이 조금 저렴한 던킨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렌트하는 셈치고 커피 값을 아끼지 말라는 주장을 펴는데 과연 얼마나 많은 수의 독자가 공감할지 의문이 갔다. 책을 읽으면서 뉴욕에 있는 멋진 카페들을 보면서 기회가 되면 나도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과 나랑은 조금 거리감이 있다는 양가적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미국이고 우리나라고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개척한 공간, 예를 들어 뉴욕 브루클린의 윌리엄스버그나 대학로 홍대입구 같은 공간들이 자본과 상업논리에 잠식당하면서 원주민들이 치솟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원거리로 내몰리고 있다는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일종의 해방구로서 작용하고 있던 공간들이 돈벌이의 수단으로 전락해 가는 일련의 세계화 과정이 아주 찐한 에스프레소 맛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마 책에서는 ‘장’으로 등장하는 작가의 짝지가 그린 일러스트와 그의 페르소나처럼 활동하는 “까칠돼지”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일러스트로 나도 한 번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멋진 뉴욕의 카페들을 순례했고, 지금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나가서 로스팅 커피를 즐길 수 있는 공간에 서식하고 작가가 마냥 부러웠다. 이번 주말에 홍대에 갈 계획인데, 작가가 가볼 만한 카페로 꼽아준 로스팅 (커피) 카페에 한 번 들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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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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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기에 앞서, 책 표지에 실린 “뉴욕 타임스 선정 올해의 소설 1위”, “2008 퓰리처상 수상” 등의 화려한 미사여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연히 이 책에 관해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주노 디아스라고? 처음 들어 보는 작가 이름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작가이기에 하는 생각으로 위키피디아의 도움으로 이 책의 저자 주노 디아스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주노 디아스는 1968년생으로 우리 나이로 치면 올해 42세라고 한다. 카리브 해의 소국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 출신으로, 미국에서 일하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1974년 미국으로 가족들과 함께 이주해 뉴저지에 둥지를 튼다. 5형제 중 3번째였던 주노 디아스는 아버지가 집을 떠나고, 맏형마저 백혈병에 걸리면서, 가난한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어려서부터 <혹성탈출> 같은 SF영화들과 책을 좋아했던 그는 6km 거리도 마다하지 않고 걸어서 공공도서관의 책들을 빌려다 보는 책벌레였다.

러트거스 대학에 진학해서는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이때 그에 영향을 미친 작가로는 토니 모리슨과 같은 라틴 계열의 작가인 <망고 스트리트>의 산드라 시스네로스가 있다. 대학에서 학업을 하면서, 접시닦이, 주유원 그리고 철공소에서도 일하는 등 그야말로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이비리그의 명문 중의 하나인 코넬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주노 디아스는 도미니카 사람들의 공동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보스턴에 소재한 MIT에서 ‘창조적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자, 그럼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주노 디아스는 데뷔작 <드라운>을 발표한 지 11년 만에 드디어 자신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독자들에게 돌아왔다. 이 매혹적인 이민 2세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는 다음의 세 가지로 구분될 수가 있겠다. 성장소설, 디아스포라 그리고 도미니카 출신으로 희대의 깡패 독재자 트루히요에 얽힌 사연들이다.

소설의 가장 처음에 등장하는 푸쿠(Fuku)는 어느 이탈리아 출신 탐험가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래, 그 대륙에 사는 민중들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저주와 동격이란다. 저주인 동시에 금기로, 입에 올리는 것조차 꺼릴 지경이다. 하지만, 등장인물들과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내내 따라다니는 트루히요의 푸쿠.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의 주인공이자 화자가 돌보는 오스카 데 레온(일명 와오)은 주노 디아스의 어린 시절의 페르소나처럼 들린다. 6살에 물 설고 낯선 미국에 이민 와서, 뉴저지 패터슨의 적대적인 환경에서 자라난 작가의 분신인 오스카 와오는 어려서 총기 어리고, 도니미카 남자 특유의 매력을 실종시켜 버린 채 겁나게 뚱뚱하고, DC코믹스와 비디오게임에 미쳐, 스타일 구린 청소년기를 보낸다. 물론 그런 오스카가 멋진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리가 없다. 반면, 또 다른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오스카의 친누나인 롤라는 매력 그 자체다. 그리고 그 롤라를 사랑하는 화자 유니오르. 한 번에 적어도 스물 댓 명의 아가씨들과 데이트를 하는 인기남이다.

하류층 이민가정의 모습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이는 데 레온 가족의 전투를 통해(여느 도미니카 모녀처럼 그들의 엄마 벨리시아와 롤라는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그들의 신산한 삶을 스케치해낸다. 그들의 생활무대인 뉴저지 패터슨은 게토고, 데 레온 가족은 산산이 부서진 삶의 편린들로 그려진다. 주노 디아스는 시공의 빈틈을 파고들어, 한 세대 전 오스카와 롤라의 엄마인 벨리시다 데 카브랄의 끗발 나던 시절로 독자들을 이동시킨다.

2부에서 “가련한 아벨라르”라는 제목으로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라는 실패한 소도둑이자 두목(엘 헤페:El Jefe) 혹은 쌍판(Fuckface)이라고 불리는 전무후무한 희대의 독재자로 데 레온 가족의 모국이자 뿌리인 도미니카 공화국을 장장 32년에 걸쳐 사기와 폭압으로 지배한 독재자, 그리고 주노 디아스 자신이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유튜브에서 구글 작가 시리즈 비디오 중에 주노 디아스 편을 구해서 보았는데 작가는, 누구나 트루히요의 이야기를 하지만 막상 그 진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이 도미니카인들의 트라우마 저편에 드리워져 있는 어둠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던가.

1930년부터 1961년에 이르는 32년 동안 비밀경찰조직을 앞세운 실패한 소도둑 트루히요는 도미니카의 모든 국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자신에 반대하는 이들을 가차없이 잡아다가 고문하고 아무도 모르게 처형을 시키며, 도미니카의 아름다운 여성들은 모두 제 것인 양 행동했다. 엘 헤페는 103%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웃 아이티에서 도미니카로 일하러 온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지른 끝에 결국 일단의 반대파들에게 암살당하지만, 그의 ‘푸쿠’는 국가 도미니카를 그리고 ‘도미니카누스’들에겐 잊히지 않는 상흔처럼 남았다. 이런 엘 헤페의 후안무치한 행각은 또 다른 남미 출신의 작가 바르가스 요사의 <독재자의 향연>이라는 책을 통해 매우 구체적으로 다루어졌다고 한다. 아직 국내에서 출간되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 들어선 것처럼 보이던 오스카는 방학을 이용해 온 가족과 자신의 뿌리인 산토도밍고를 찾는다. 그리고 평생의 사랑이라 믿는 여인인 이본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푸타고 온 집안 식구들이 나서서 그의 사랑을 말린다. 푸타가 뭔지 모르겠다고? 책을 읽어 보라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시시각각 오스카를 죄여오는 운명에 그는 굴복하지 않고, 평생 처음으로 당당하게 맞선다.

한 때 인종의 도가니로 불렸던 미국은 더는 이민자들의 천국이 아니다. 물론 미국으로 향하는 이민자들의 행렬은 계속되고 있지만, 건국 이래 미국의 목표였던 휘날리는 성조기 아래 동화(同化)는 ‘이상한 나라’에나 나올법한 이야기가 돼 버렸다. 자신들의 뿌리를 잊지 않는 이들은, 꿈에 그리던 미국에서 자신들의 게토 커뮤니티를 형성해 스팽글리쉬를 쓰며 뼛골이 빠지게 일하면서 난방도 되지 않는 거주지에서 하루하루를 버틴다. 미국은 그들의 지향점이 아니다. 그들 마음속에는 이 신산한 삶을 청산하고, 언제라도 돌아갈 ‘산토도밍고’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미국의 현실에 동화하지 못하는 유색인종 아이들은 만화책과 <던전 앤 드래곤> 같은 비디오게임 속에 자신들만의 가상공간으로 탈출을 감행하고, 무지막지한 독서와 날적이를 한다. 이민 2세대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갈구하지만, 모두가 부질없는 짓거리들이다. 반면 그들의 부모들은 세 가지 일자리를 가지지 않는 인간들은 모두 게으름뱅이로 치부해 버린다. 그들이 자신들의 자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사고에 기초한 세대 간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부모들의 뇌리 속에서는 바티스타에(쿠바의 독재자), 악랄한 소모사 부자에(니카라과의 독재자), 그리고 우리의 ‘푸쿠’ 엘 헤페에 대한 지울 수 없는 무시무시한 트라우마가 자리 잡고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배신할지 모르고, 쥐도 새도 모르게 존재 자체가 지구 상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이 악당들의 지배가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도 그들의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저주이다. 자신들의 조국에서 살 수가 없어, 디아스포라를 감행한 이들도 여전히 자신들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간다. 도대체 그 끝을 알 수 없는 순환적 악몽을 주노 디아스는 라티노 특유의 구수한 입담과 유머로 풀어나간다.

책을 읽을 적에는 실패한 소도둑 엘 헤페의 말도 안 되는 작태가 마냥 우습기만 했는데, 작가의 대담을 보면서 그리고 여타의 자료들을 접하게 되면서 “이건 푸쿠가 빚어낸 비극이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렌지를 먹다가 껍질을 길에 버렸다고 해서,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비밀경찰이 감옥으로 끌고 가 10년이나 갇혀 있다고 상상을 해보라. 정말 SF하고 ‘도미니카’스럽지 않은가.

유튜브에서 본 작가와의 대담에서 주노 디아스는 독자강연회에 모인 이들에게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의 몇 페이지를 읽어 주었다. 199-202페이지에 나오는 글이었는데, 자신의 과거에 대한 엑기스처럼 느껴졌다. 자신의 강의시간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를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F가 들어간 말을 스스럼없이 뱉어내는 그의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오스카 와오의 짧은 삶 속에 녹아든 인생의 애환을 다룬 주노 디아스가 다음번에는 또 어떤 멋진 이야기로 우리를 찾아올지 벌써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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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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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만난 폴 오스터의 책이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램프의 요정 중고샵을 통해 폴 오스터의 책들이 직접 판매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어지간한 책 한 권 값에 폴 오스터의 책 세 권을 살 기회여서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그때 산 책이 바로 <브루클린 풍자극>, <빵굽는 타자기> 그리고 <뉴욕 3부작>이었다. 이 세 권 중에서 지인의 추천으로 <브루클린 풍자극>을 가장 먼저 읽게 됐다.

소설의 배경은 뉴욕의 5개 보로(borough) 중의 하나라는 브루클린으로, 뉴욕이면서 동시에 뉴욕이 아닌 곳이라고 하던가. 그리고 보니 오래전 어느 추운 겨울날,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떠올리며 선배형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 다리를 건너갔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갔던 브루클린을 무대로 한 소설이라고 하니 더 정감이 갔다.

우리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바로 폐암으로 조기 은퇴한 전직 보험설계사로 죽은 자리를 찾아 브루클린으로 흘러들어온 네이선 글래스다. 그리고 브루클린에서 우연히 재회한 자신의 조카 톰 우드는 시카고 앤아버에서 문학박사를 꿈꾸다, 뉴욕의 택시기사로 추락한 인물로 동네 사는 유부녀를 짝사랑한다. 톰의 여동생으로 나오는 오로라는 전직 포르노배우로 인간이 얼마나 방탕하고 타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전범을 보여준다. 해리 브라이트먼(둥켈)은 톰이 일하는 헌책방 주인으로 한 때 재벌 상속녀와 결혼해서 잘 나가던 갤러리 오너로, 죽은 화가의 위작을 팔아먹다가 결국 교도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렇게 브루클린에 사는 다양한 캐릭터만으로도 무언가 재밌는 이야기가 펼쳐지리라는 예감이 들지 않는가?

작가 폴 오스터는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해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과거사를 들추어냄으로써 독자에게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게 흠뻑 빠지게 한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작가가 구상한 틀에 맞게 다양한 사건과 이야깃거리들을 물어온다. 무슨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아닌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 예를 들어 주인공 네이선은 자신이 즐겨 찾는 식당에서 일하는 유부녀 웨이트리스 마리나 훔쳐보기를 즐긴다. 네이선의 호의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뻔하지 않은가? 오지랖 넓은 네이선은 조카 톰이 짝사랑하는 BPM(Beautiful Perfect Mother)에게 직접 말을 거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 참, 그리고 네이선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하여>라는 무척이나 자전적인 글을 쓰기도 한다. 이점은 아마 브루클린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폴 오스터 자신을 모델로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브루클린 풍자극>은 로리(오로라)의 딸인 루시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위기로 치닫는다. 그 존재조차도 몰랐던 루시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네이선과 톰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잠자고 있던 가족애를 자극한다. 이어지는 전형적 미국 스타일의 짧은 로드무비 스타일 에피소드, 해리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로리의 구출 잔잔한 호숫가를 걷다가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그런 극적인 점층적인 구조가 ‘씩’하는 미소와 함께 자태를 드러내는 느낌이다.

미국의 파편화한 가정에 대한 묘사는 참 인상적이었다. 자유연애주의와 높은 이혼율이 만연해 있는 나라로 알려졌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가족의 중요성은 그 어느 가치보다도 우선시 되고 있다. 역시 연장자로서 주인공 네이선은 가족들의 갈등을 봉합하고 조정하는, 다시 말해서 부서진 곳은 수리하고 비용이 들어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그런 역할을 스스로 맡게 된다. 거창한 타이틀을 가진 문학박사가 되기보다는 평범한 고등학교 교사가 되는 꿈을 가진 조카를 격려하고,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조카 손녀에게 옷가지와 운동화를 사주는 맘씨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작가가 원하는 이상적인 미국인의 모습이 아닐까.

사실 이미 굳어져 버린 구조적인 시스템의 문제는 폴 오스터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기에, 삶의 경륜이 느껴지는 작가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 사는 인종의 도가니탕 브루클린에서 (어쩌면 가족 간의) 사랑과 희망이야말로 삶의 원칙이라는 메시지를 조용하게 읊조린다. 저명한 작가와의 첫 만남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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