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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내가 처음으로 만난 폴 오스터의 책이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램프의 요정 중고샵을 통해 폴 오스터의 책들이 직접 판매되고 있는 것을 알게 됐다. 어지간한 책 한 권 값에 폴 오스터의 책 세 권을 살 기회여서 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그때 산 책이 바로 <브루클린 풍자극>, <빵굽는 타자기> 그리고 <뉴욕 3부작>이었다. 이 세 권 중에서 지인의 추천으로 <브루클린 풍자극>을 가장 먼저 읽게 됐다.
소설의 배경은 뉴욕의 5개 보로(borough) 중의 하나라는 브루클린으로, 뉴욕이면서 동시에 뉴욕이 아닌 곳이라고 하던가. 그리고 보니 오래전 어느 추운 겨울날, 영화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를 떠올리며 선배형과 바닷바람을 맞으며 그 다리를 건너갔던 기억이 났다. 그렇게 갔던 브루클린을 무대로 한 소설이라고 하니 더 정감이 갔다.
우리의 주인공이자 화자는 바로 폐암으로 조기 은퇴한 전직 보험설계사로 죽은 자리를 찾아 브루클린으로 흘러들어온 네이선 글래스다. 그리고 브루클린에서 우연히 재회한 자신의 조카 톰 우드는 시카고 앤아버에서 문학박사를 꿈꾸다, 뉴욕의 택시기사로 추락한 인물로 동네 사는 유부녀를 짝사랑한다. 톰의 여동생으로 나오는 오로라는 전직 포르노배우로 인간이 얼마나 방탕하고 타락할 수 있는가에 대한 전범을 보여준다. 해리 브라이트먼(둥켈)은 톰이 일하는 헌책방 주인으로 한 때 재벌 상속녀와 결혼해서 잘 나가던 갤러리 오너로, 죽은 화가의 위작을 팔아먹다가 결국 교도소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이렇게 브루클린에 사는 다양한 캐릭터만으로도 무언가 재밌는 이야기가 펼쳐지리라는 예감이 들지 않는가?
작가 폴 오스터는 플래시백 기법을 사용해서, 등장인물들에 대한 과거사를 들추어냄으로써 독자에게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게 흠뻑 빠지게 한다. 이렇게 잘 만들어진 캐릭터들은 작가가 구상한 틀에 맞게 다양한 사건과 이야깃거리들을 물어온다. 무슨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아닌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들, 예를 들어 주인공 네이선은 자신이 즐겨 찾는 식당에서 일하는 유부녀 웨이트리스 마리나 훔쳐보기를 즐긴다. 네이선의 호의가 나중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뻔하지 않은가? 오지랖 넓은 네이선은 조카 톰이 짝사랑하는 BPM(Beautiful Perfect Mother)에게 직접 말을 거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 참, 그리고 네이선은 <인간의 어리석음에 관하여>라는 무척이나 자전적인 글을 쓰기도 한다. 이점은 아마 브루클린의 일상을 스케치하는 폴 오스터 자신을 모델로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브루클린 풍자극>은 로리(오로라)의 딸인 루시가 갑자기 등장하면서 위기로 치닫는다. 그 존재조차도 몰랐던 루시의 갑작스러운 등장은 네이선과 톰의 일상에 파문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잠자고 있던 가족애를 자극한다. 이어지는 전형적 미국 스타일의 짧은 로드무비 스타일 에피소드, 해리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로리의 구출 잔잔한 호숫가를 걷다가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는 듯한 그런 극적인 점층적인 구조가 ‘씩’하는 미소와 함께 자태를 드러내는 느낌이다.
미국의 파편화한 가정에 대한 묘사는 참 인상적이었다. 자유연애주의와 높은 이혼율이 만연해 있는 나라로 알려졌지만, 여전히 미국에서 가족의 중요성은 그 어느 가치보다도 우선시 되고 있다. 역시 연장자로서 주인공 네이선은 가족들의 갈등을 봉합하고 조정하는, 다시 말해서 부서진 곳은 수리하고 비용이 들어가는 부분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는 그런 역할을 스스로 맡게 된다. 거창한 타이틀을 가진 문학박사가 되기보다는 평범한 고등학교 교사가 되는 꿈을 가진 조카를 격려하고, 어느 날 갑자기 ‘짠’하고 나타난 조카 손녀에게 옷가지와 운동화를 사주는 맘씨 좋은 할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작가가 원하는 이상적인 미국인의 모습이 아닐까.
사실 이미 굳어져 버린 구조적인 시스템의 문제는 폴 오스터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기에, 삶의 경륜이 느껴지는 작가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몰려 사는 인종의 도가니탕 브루클린에서 (어쩌면 가족 간의) 사랑과 희망이야말로 삶의 원칙이라는 메시지를 조용하게 읊조린다. 저명한 작가와의 첫 만남이 대단히 만족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