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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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 아주 유명한 작가가 있었다. 개성적인 문체와 유명 문학상을 받기도 한 작가의 경력에는 빛나는 레지스탕스 활동 경력은 물론 외교관으로의 영예도 빠지지 않았다. 무엇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던 작가는 권총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그의 사후, 그가 익명으로 발표한 책의 실제 작가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세상은 경악했다.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짐작하셨으리라. 그의 이름은 로맹 가리, 하지만 나는 그를 <그로칼랭>과 <자기 앞의 생>의 작가 에밀 아자르로 기억하고 싶다.

공쿠르상은 프랑스 문학계를 대표하는 상으로 절대 같은 작가에게 두 번 주어지지 않는 불문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규칙은 깨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듯이 공쿠르상 역시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1956년 <하늘의 뿌리>로 첫 번째 공쿠르상을 받았던 로맹 가리는, 딱 20년 만인 1976년에 <자기 앞의 생>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의 영예를 안았다. “열렬한 포옹”을 뜻하는 <그로칼랭>은 로맹 가리의 아바타 에밀 아자르의 데뷔작이다. 


 


<자기 앞의 생>으로 에밀 아자르와 만났던 나는 왜 이렇게 <그로칼랭>이 우리 곁에 도착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곰곰 생각해 봤다. 그건 아마도 가리-아자르 소동 탓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로맹 가리의 이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지만, 또 어떤 이들은 대작가의 장난질이라고 폄하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은 상대적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로칼랭>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로맹 가리가 아닌 신예 작가의 글이라 초판에서 편집부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을 해서 원래의 ‘생태학적 결말’과는 사뭇 다르게 출판이 되었단다.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그로칼랭>은 원래 나온 판본과 훗날 다시 출간된 에밀 아자르가 구상했던 결말이 고스란히 실려 있어서 비교해 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책에 얽힌 이야기가 풍부해서 그런지 서두가 길었다. 자, 이제 중고인구 천만 명이 복작거리며 사는 파리 시내에 사는 미셸 쿠쟁과 비단뱀 “그로칼랭”을 만나 보자. 이 소설의 화자는 37살의 독신남 쿠쟁이다. 쿠쟁이 말했다시피, 이 책은 동물학 개설서이다. 그런데 어떤 동물? 바로 길이 이 미터 이십 센티미터의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아프리카산 파충류 비단뱀 “그로칼랭”이다. 쿠쟁은 즐겨 만나는 친구나 애인도 없이 그로칼랭과 침대에서 뒹구는 것을 좋아한다. 아, 그렇다고 너무 앞서나가는 에로틱한 상상은 하지 마시길! 쿠쟁은 ‘미국적 잉여’ 상태에 빠져서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애정을 비단뱀 그로칼랭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는 중이다. 독자는 이 애정결핍에 빠진 불쌍한 중년 남자에 대한 동정과 상상만으로도 흉측한 비단뱀 그로칼랭에 대한 혐오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로칼랭을 위해 허가증을 받고 완벽한 준비를 한 쿠쟁이지만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바로 그건 그로칼랭에게 무얼 먹일 것인가 하는 생존을 위한 본질적 문제다. 살아 있는 먹이만을 먹여야 하는 그로칼랭을 위해, 꼬마 생쥐 블롱딘을 사들이지만 그 녀석에 애정을 느끼는 바람에 결국 그로칼랭의 밥으로도 사용하지 못하고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한편, 쿠쟁은 자신의 직장인 인구 통계학 연구소인 STAT에서 같이 동료로 일하는 드레퓌스 씨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 기아나 출신으로 흑인인 그녀를 가젤 영양처럼 조심스러운 존재로 묘사한다. 자신만의 상상 속에서 그녀와 사랑을 하고, 엘리베이터의 그 짧은 접점을 통해 그는 행복해한다. 그로칼랭과 동거하는 아파트의 벽에서 이 기묘한 동거를 내려다보는 레지스탕스 영웅 장 물랭과 피에르 브로솔레트의 시선은 파시즘을 반대하면서도 사랑의 파시스트를 자임하는 쿠쟁의 이중적 모습에 대한 냉소라고나 할까.  


 

자발적으로 고립되고 외로운 도시인의 전형으로 재현된 캐릭터 쿠쟁은 사랑의 강을 넘기 위해 교구 신부님과 대화를 해보고, 또 학살과 인권유린에 맞서 싸우는 이웃의 추레스 교수와도 교제를 시도해 보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소통이라는 것을 모두가 공감하면서도, 그 소통에 노력하지 않는 현실을 에밀 아자르는 냉정하게 꼬집는다. 네 이웃이 아닌, 비단뱀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고 심지어는 비단뱀 그로칼랭이 사람으로 변하는 기적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진다. 그렇게 애타게 고대하던 드레퓌스 씨의 방문은 비극으로 끝나고, 그녀는 쿠쟁을 떠난다. 에밀 아자르는 환상과 착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통계작업’을 계속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의 쿠쟁과 드레퓌스의 재회는 차라리 희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에밀 아자르라는 아바타로 암약한 로맹 가리는 <그로칼랭>의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부비트랩처럼 설치했다. 우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상징적 존재인 장 물랭의 사진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애장하고 있다. 로맹 가리의 특징인 여성성도 숨길 수가 없다. 자신의 페르소나로 등장시킨 쿠쟁 역시 유대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슬쩍슬쩍 드러낸다. 역자는 후기에서 ‘아자르 문체의 천재성’을 꼽기도 했는데, 사실 원어가 아닌 번역으로 대한 그의 문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싶다.

이렇게 나는 <그로칼랭>과의 열렬한 포옹을 끝냈다. 서늘한 그로칼랭과의 포옹과 조임 그리고 매듭이 남기는 여운이 한여름밤의 무더위와 어우러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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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저항하는가 - 국가에 의한, 국가를 위한, 국가의 정치를 거부하라
세스 토보크먼 지음, 김한청 옮김 / 다른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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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들어보는 작가의 이름이다, 세스 토보크먼. 그래서 바로 온라인 서점을 뒤져서 그의 다른 책이 우리나라에 출간된 적이 있는가 찾아봤다. 물론 헛수고였다. 세스 토보크먼은 다른출판사에서 나오고 있는 “다른 만화 시리즈”의 3탄 <나는 왜 저항하는가>의 작가다. 소위 말하는 급진적인 내용을 담은 만화를 주로 그리는 작가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언론 매체인 뉴욕타임스가 연재를 중단했을 정도라고 한다. 이 사실만으로도 그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한다. 



 

솔직히 말해서 세스 토보크먼의 판화가 세련된 맛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투박스러운 그의 판화로 찍은 만화에는 스타일과 더불어 뚜렷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난 바로 그런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는 왜 저항하는가>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메시지는 명확하다. 반전, 평화 그리고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빈곤으로 몰아넣는 세계화에 그는 반대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인간답게 세상을 세스 토보크먼은 그린다.

세스 토보크먼이 말하는 저항은 2000년 세계은행 반대시위를 하다가 연방교도소에 갇힌 학생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국가권력으로 상징되는 경찰은 학생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헌법에 엄연하게 보장된 자유인 집회와 시위, 결사의 자유를 억압한다. 뭐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토보크먼은 그들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다. 그는 세계의 부유한 국가들이 자금을 대서 만든 세계은행이 빈곤한 나라들을 옥죄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현실을 지적한다. 독자는 세계은행의 존립 자체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우리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독점 자본의 모순에 대해서도 토보크먼은 신랄한 비난을 퍼붓는다. 죽어가는 한 남자를 실은 구급차가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의 수도 한복판을 질주한다. 그를 받아줄 수 없는 병원을 찾지 못해 멀리 볼티모어까지 가다가 결국 환자가 죽고 말았다는 정말 어느 동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벌어지는 곳이 작가의 조국 미국이란다. 2000년 9월 11일, 테러리스트의 공격을 받은 뉴욕을 구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한 지역 소방서도 예산절감의 칼날은 피해갈 수가 없었다. 불이 나거나 혹은 긴급상황에서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할 소방서를 시민이 직접 나서서 지킨 실화를 토보크먼는 두터운 스타일의 판화로 담담하게 들려준다. 


 

정경유착의 폐해를 유감없이 보여준 이라크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칼라일 그룹이었다. 전쟁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이윤을 창출해낸 사실을 토보크먼은 촌철살인의 터치로 그려낸다. 21세기는 에너지의 시대라는 말처럼, 석유자원의 안정적 공급과 중동에서의 패권 유지는 미국이 이라크에 개입한 진짜 이유라는 것이 정설이다. 아울러 아프리카의 산유국 나이지리아의 이야기는 생소하지만, 다국적 석유회사의 횡포와 환경훼손 때문에 지역 주민이 입은 피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 무분별한 개발이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작용하더라는.

<나는 왜 저항하는가>에서 세스 토보크먼의 마지막 저항은 다시 미국을 조명한다. 2005년 9월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를 물바다로 만든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에 의한 것이라는 조사결과가 나온 바 있다. 계속되는 지구온난화의 여파로 상상을 초월하는 자연재해가 있을 거라는 전망을 부시가 이끄는 연방정부는 가볍게 무시했고, 가공할 만한 수해가 뉴올리언스를 덮쳤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장 가난한 이들이 큰 피해를 입었고, 그들의 보금자리인 공영주택단지에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부동산 개발업자들은 공영주택단지가 노른자 땅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그곳에 살던 빈민들을 내쫓고 새로운 주택단지 개발을 획책한다. 대대로 자신이 살아온 터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도시빈민들은 결연하게 투쟁에 나선다. 공영주택단지가 범죄와 마약의 온상이라는 언론의 프로파간다에도 공영주택단지의 세입자들과 활동가들은 굴하지 않고 싸우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도대체 세스 토보크먼이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궁금해서 사진 검색을 해봤다. 나름대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작가인데, 뜻밖에 사진을 구할 수가 없어서 놀랐다. 반 세계화주의자, 반전주의자라는 타이틀로 미루어 볼 때, 정부에서 보면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지만, 세스 토보크먼의 메시지에는 휴머니즘이 짙게 깔려 있다. 시민에게 봉사하라고 주어진 권력이 올바르게 사용되지 못하는 현실에 작가는 연대하고 저항하라는 주문을 한다. 



 

세스 토보크먼이 그린 포스터가 말하는 것처럼 역설적으로 국민이 내는 세금으로 운영되는 정부는 국민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 국가권력은 무상급식 같은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대신 용돈이라 불리는 노령연금을 줄일 궁리를 하고, 합리적 경영 운운하며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구한다. 도대체 어째서 이런 일들이 대명천지에 버젓하게 진행되고 있는 걸까? 그에 대한 작은 해답을 <나는 왜 저항하는가>를 통해 얻기를 바란다. 그리고 계속될 ‘다른만화’ 시리즈의 울림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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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캐리커처 - 유쾌한 20세기 디자인 여행 디자인 그림책 1
김재훈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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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한 한여름의 휴일 오전에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디자인 책 한 권을 읽었다. 사실 어젯밤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일주일 동안의 업무 스트레스로 그만 몇 장 읽다가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청량한 기운이 감도는 아침에 다시 집어 들었는데 단박에 다 읽어 버렸다. 그만큼 가독성과 재미가 있다는 방증이리라.

오래전에 모 신문에 연재하던 만화를 보고 팬이 되었다. 알고 보니 그 작가가 바로 <디자인 캐리커처>의 지은이 김재훈 씨였다. 당시 그의 홈피를 바지런히 드나들며 그가 그린 일러스트들을 모으곤 했던 좋은 기억에 절로 미소가 떠오른다. 당시에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중요한 인물이었던 사도 바울을 탁월한 후발 주자 출신 마케터라고 평했던 일러스트를 보고 고개가 갸웃거렸었는데 그가 디자이너가 되기 전에 한때 신학교에 몸담았었다는 말에 바로 이해가 갔다. 자, 초장의 이야기는 이 정도로 하고 <디자인 캐리커처>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우선 표지에 나와 있는 “디자인 그림책”이라는 말대로 나 같이 디자인에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그만의 스타일로 빚어내는 디자인과 그에 얽힌 이야기 삼매에 빠져드는 마력을 가진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물론 살바도르 달리나 코코 샤넬 혹은 다시 생각해도 가슴 두근거리는 뉴욕의 구겐하임 뮤지엄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같은 거장뿐만 아니라 정말 생소한 디자이너들의 향연이 <디자인 캐리커처>를 통해 펼쳐진다.

아이들이 즐겨 먹는 막대사탕 추파 춥스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나 말이다. 마치 사탕을 포크에 찍어 먹듯이, 막대에 쿡 찍어 놓은 단순한 발상이 대박 신화의 비밀이었다고. 더 놀라운 건, 추파 춥스 포장의 로고 디자이너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사실은 더 놀랄 노자였다. 하나의 상품에도 그런 디자인과의 하르모니아(조화)가 숨어 있다는 점에서 디자인의 힘을 느낄 수가 있었다.

우리가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볼 수 있는 지하철 노선도의 창시자인 해리 벡의 아이디어 역시 세상을 바꾼 디자인 중의 하나다. 사실 실제와는 엄연한 차이가 보이지만, 대도시의 지하를 미로처럼 누비는 지하철 노선에 대한 정보를 ‘왜곡’해서 단순함을 극치화한 해리 벡의 디자인 작업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다시 살펴봐도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뮌헨 올림픽에서 픽토그램이라는 기호로 인류 공통적인 소통 방식으로 논리적 규칙성을 강조한 오틀 아이허 역시 대단한 디자이너였다. 책 후기에 등장하는 잉게 숄이 그의 부인이었다는 말에 짠한 감동이 몰려오기도 했다.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통해 자동차 디자인에 대해 몇 번 본 기억이 나지만, 김재훈 작가가 들려주는 것만큼 현대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어 버린 자동차 디자인 열전 역시 빼놓을 수가 없다. 그 외에도 우리나라에도 세계의 내로라하는 디자이너들이 설계한 건축물들이 존재한다는 나만 모르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됐다. 몇몇 정치인들이 <디자인  서울>입네 하는 행정구호식 디자인을 외쳐 대지만, 전 세계의 명물이 된 빌바오의 구겐하임 뮤지엄 같은 한 도시의 랜드마크는 만들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디자인이 유행을 선도하는 걸까, 아니면 유행을 디자인이 좇는 걸까라는 단순한 질문이 들었다. 디자인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애플의 아이팟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모두 배제해 버리고, 새로운 메커니즘으로 휴대용 뮤직 플레이어라는 신개념을 선도한 애플의 초대박 밀리언셀러다. 애플에서 쫓겨났던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 아이폰으로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도약을 마련해 준 그야말로 효자 같은 녀석이 아니던가. 아이팟 이후에 출시된 제품들도 선배의 길을 따라 너무 복잡해서 소비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그런 복잡한 기능보다는 쉽게 작동할 수 있고, 쿨해 보이는 디자인을 좇게 되지 않았던가.

이 세상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말처럼 포스터 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엉클 샘의 모병 포스터 역시 그보다 먼저 세상의 빛을 본 영국의 것을 그대로 본뜬 것이었다. 굳이 가짜가 진짜를 대신한다는 보들리야르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량 복제의 시대에 김재훈 작가가 말하는 오리지널 아우라의 광휘는 점점 더 찾기가 어려워진다는 느낌이다.

그 어느 때보다 소통의 중요성이 주목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소통과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디자인이 그 첨병의 자리에 나서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밀턴 글레이저의 <I♥NY>처럼 언제 봐도 미소가 떠오르는 그런 멋진 디자인을 기대해 본다. 물론 그의 저작권 프리 정책처럼 나눔의 미덕까지 함께 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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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재앙
루이스 어드리크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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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티브 아메리칸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된 건, 연전에 읽은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덕분이었다. 그리고 작년 가을에 이제는 절판된 디 브라운의 ‘미국 인디언 멸망사’라는 부제가 붙은 <나를 운디드 니에 묻어주오>를 통해 다시 한 번 미국 인디언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이번에 읽은 루이스 어드리크의 <비둘기 재앙>으로 다시 한 번 고달픈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삶을 한 발짝을 내딛는다.

2009년 미국 유수의 문학상인 퓰리처상 파이널리스트에서 수상작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올리브 키터리지>와 경합을 벌였던 <비둘기 재앙>은 네이티브 아메리칸과 독일계 미국인 혈통을 지닌 루이스 어드리크의 최신작이다. 그녀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비둘기 재앙>을 통해 과거 조상의 영광과 부족의 전통을 오늘날에도 영위해 가는 그네들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었다.

책에 나오는 지명이 실재하는 지명인 줄로 알고, 이번에도 역시 구글맵의 도움을 빌려 보려고 했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가공의 지명이 지도에 나올 턱이 없지 않은가! 책의 뒷부분에 실린 글을 보고서야 나의 노력이 부질없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간접적으로나마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노스다코타와 미네소타 탐험은 유쾌했다.

이야기의 첫 번째 주자로는 에블리나 하프가 등장한다. <비둘기 재앙>에는 여럿의 화자가 등장을 하는데 한편으로는 주 이야기꾼 중의 한 명인 에블리나의 성장기도 다루었다가, 그녀의 무셤(할아버지) 세라프 밀크가 들려주는 과거의 끔찍했던 일가족 몰살 사건에 대한 에피소드, 그에 대한 사적인 보복 그리고 인디언 보호구역에서의 삶을 교차하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채색된다.

무셤과 할머니인 주네스의 운명적인 만남과 필연적인 도주, 미치프족의 영웅 루이 리엘 등에 대한 이야기에, 무셤과 그의 동생인 로맨티스트 샤멩과를 자주 찾아오는 캐시디 신부와의 위스키 한담으로 줄줄이 이어진다. 에블리나는 사촌인 코윈 피스의 이름을 자신의 몸에 백만 번 쓸 정도로 애착해 하면서도, 새로 학교로 부임해온 메리 애니타 버큰도프 수녀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괴로워한다. 그녀에게 ‘고질라 수녀’라는 별명을 붙여 주고서 고민하는 에블리나의 모습에서 여느 십 대 같은 이중성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에 그들이 사는 타운인 플루토에서 벌어진 끔찍한 한 사건이다. 한 가족이 끔찍하게 살해되고, 그 범인으로 일단의 인디언들이 지목되면서 살해당한 가족의 이웃인 버큰도프와 와일드스트랜드 집안의 무장한 남자들이 세 명의 무고한 인디언들을 잡아서 교수형에 처했다는 비정하기 짝이 없는 과거의 실체가 드러난다. 보안관으로 대표되는 공권력도 제지하지 못하는 사적인 폭력인 린치에 무고하게 희생된 이들의 억울한 외침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이 사건의 피해자 중의 한 명인 홀리 트랙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얽히고설킨 이야기의 모티브로 작용한다.

또 다른 중요한 화자인 안톤 바질 쿠츠 판사의 좀 더 객관성이 담보된 시각이 반가웠다. 사실 에블리나나 뒤에 등장하는 만 월데(만 피스)의 이야기는 신화화된 상징성 탓에 현실계에서 조금은 벗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타운의 어느 연상녀와 내연의 관계를 맺고 있던 안톤 쿠츠가 어느 날 자각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길을 뒤따르는 법률가의 길을 걷게 되고 에블리나의 이모인 제럴딘과 운명적 만남을 하게 된다는 설정은 확실히 네이티브 아메리칸에게 부족 중심의 사회 시스템이 갖는 중요성을 각인시킨다. 안톤 쿠츠가 들려주는 부모 이전 세대에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선 원정대 이야기에서는 잔혹한 린치를 휘두른 폭도로 변한 버큰도프네가 공유한 운명 공동체의 원형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 뒤에 나온 빌리 피스와 존 와일드스트랜드가 벌이는 어이없는 부인 인질극에서는 정확하게 영화 <파고>의 줄거리가 떠올랐다. 실제로 1987년에 미국의 미네소타에서 벌어진 일을 영화화했다고 하는데, 루이스 어드리크도 아마 같은 소재에서 영감을 받았을까? 사건의 주모자 중의 하나인 빌리 피스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는 얼토당토않은 신앙 공동체를 건설한다. 그의 법적인 부인인 만 월데의 입을 빌려 듣는 거의 불사신 같은 빌리(그는 벼락을 맞고도 살아난다!)에 대한 에피소드에서는, 과학적 이성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종교의 지배를 받는 미국 중산층의 단면을 엿보기도 한다.

<비둘기 재앙>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개별적이면서도 서로 등장인물이나 네이티브 아메리칸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이데올로기를 공유한다. 이 사실 역시, 책의 뒷부분에 나온 설명을 듣고서 서로 다른 잡지에 발표된 글들을 한데 묶어서 출간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가 있었다. 근사한 외모에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로맨티스트 샤멩과의 장례식에서 캐시디 신부가 지껄이는 어이없는 추모사 부분에서는 어드리크 작가의 블랙유머가 돋보였다. 드디어 대학생활을 하게 된 에블리나가 영원의 도시 파리와 아나이스 린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정신병원에서 보조사로 일하게 되는 과정은 작가 루이스 어드리크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작가가 소설의 곳곳에 배치해둔 복선과 암시의 부비트랩은 맨 마지막 화자로 배턴을 이어받은 코델리아 로크렌이 맡아서 확실하게 폭파시켜 준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던져, 독자가 의심하기 시작한 부분을 명징하게 물 위로 떠올려준다.

어드리크의 문장은 아주 매혹적이다. 그녀의 글에서는 마치 노을이 지는 황혼녘이 연상된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과거의 이야기를 읊조리는 관조적인 서술은 애잔함 그 자체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하나는 에블리나가 일하는 정신병원에 찾아온 코윈의 바이올린 연주 묘사다. “음악의 낫이 너른 공간을 휙 베”었다는(394쪽) 구절은 플루토를 감싼 어두운 과거와의 단절이 느껴졌다. 다른 하나는, 우표수집에 목숨을 건 에블리나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우표가 “값비싼 작은 먼지 무덤”이(427쪽) 되는 것을 지켜보는 장면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물질이 무엇이건대 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우리 호모 사피엔스는 그렇게 집착하는 걸까?

소설의 어디선가 로맨티스트 샤멩과의 바이올린 연주에 파편화된 상식과 인정받지 못한 갈망이 담겨 있다고 했던가. 미국의 주류 사회에서 괴리된 채, 보호구역에서 오늘도 살아가고 있는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뻑뻑한 삶이 읽혔다. 우리가 꿈꾸는 자유는 마음, 머리 그리고 손에 있다는 샤멩과의 고백이 절절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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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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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북부에 있는 메인 주의 자동차 번호판에는 “Vacationland"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예전에 부시 대통령 부자가 임기 중에 여름휴가를 보내던 케네벙크포트도 메인 주에 있을 정도로 휴가지로는 그만이다. 남쪽의 떠들썩한 플로리다 바닷가와는 달리 조용한 대서양 연안의 정취를 느낄 수가 있다고나 할까. 바로 이 메인 주 출신의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에게 2009년 퓰리처상의 영예를 안겨 준 <올리브 키터리지>는 메인 주 크로스비라는 작은 마을을 그 배경으로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차를 타고 20여 분을 가야 집이 한 채씩 나올 만큼 인적이 드문 메인 주에(물론 포틀랜드나 뱅고어 같은 대도시가 아닌 시골 마을의 이야기다) 크로스비라는 작은 마을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수가 있을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모두 13개의 서로 연관된 단편을 읽고 있자니, 마치 던킨 도넛에서 커피를 마시며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크로스비 주민의 가십을 듣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만큼 이야기의 전개가 편안하다는 방증일 게다.

소설의 주인공인 올리브 키터리지는 고등학교 수학교사로, 입이 걸고 까칠한 성격의 소유자다. 아무런 유서나 쪽지도 없이 생을 마친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하는 직설적인 성격이다. 그녀와는 반대로, 올리브의 남편 헨리는 약국을 경영하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공동체 생활에 헌신하는 모범적인 시민의 본보기로 등장한다. 서로 상극에 서 있는, 캐릭터들의 묘한 조화라고나 할까. 이렇게 상이한 성격 차이는 갈등의 원인이 되기보다는, 이 혼잡한 세상을 대하는 우리네 생김새만큼이나 다른 다양성에 대한 상징으로 읽힌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작곡가 빙 크로스비를 연상시키는 작은 마을 크로스비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우선, 헨리의 약국에서 일하는 성실한 데니즈는 어이없는 총기 오발 사고로 사랑하는 남편을 잃는다. 무대 공포증을 이기기 위해 보드카를 입에 달고 사는 작은 바의 피아노 연주자 앤지는 숨은 애인 맬컴에게 결별 선언을 했다가 욕만 실컷 얻어먹는다. 헨리와 올리브의 외동아들이자 족부의학 전문의인 크리스토퍼는 우연히 마을에 들린 닥터 수잔과 “샷건 웨딩”을 떠올릴 정도로 급하게 결혼식을 치른다. 부부 관계를 거부하는 마누라 대신 다른 파트너를 찾는 남성이 있질 않나, 작은 마을 크로스비의 내부는 현란한 요지경 속이다. 





일면 서로 다른 듯해 보이는 각각의 이야기들은 상호 텍스트 작용을 통해, 서로 이어진 막다른 골목에서 ‘감정적 배신’이라는 공통 상황과 맞닥뜨리게 된다. 자신 남편의 장례식에서 그의 부정을 알게 되고, 배가 아파 들린 화장실에서 인질로 잡혀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던 와중에 아들 크리스토퍼가 가족을 떠나게 된 이유가 바로 그녀 때문이라는 헨리의 힐난에 올리브는 충격을 먹는다. 성급한 결혼과 결별을 경험한 아들에게 배신감을 느낀 올리브는 자신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놓인 이웃 라킨네 들러 조금은 치사해 보이는 위안을 찾지만, 모욕만 당하고 돌아선다. 올리브는 자신에게서 아들 크리스토퍼를 뺏어간 며느리 닥터 수잔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속옷을 훔치고 그녀의 스웨터에 매직으로 낙서한다. 설상가상으로 남편 헨리는 중풍으로 요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올리브 키터리지>에는 버거운 세상살이에 지친 소시민의 대리만족이 오롯이 숨어 있다. 그녀의 발언은 거침이 없다. 보통 사람 같으면, 머릿속에 담아만 두고 내뱉지 않았을 말도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툭툭 던진다. 막말도 서슴지 않지만, 자신의 의무와 도리를 다하는 그녀를 누가 나무라겠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그녀가 전직 수학교사라는 사실이 그녀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논리적 사고와 수학 공식은 변화무쌍하게 돌아가는 삶의 무대에 유효하지 않다. 아니 누가 배가 아파서 잠시 들른 병원에서 마약을 찾아온 강도들에게 인질이 되리라고 예상이나 했겠나.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자신의 처녀작인 <에이미와 이자벨>(1998)을 쓰는데 6~7년이 걸렸다고 한다. 데뷔작에서 그녀가 그렸던 싱글맘과 그녀의 딸이 빚는 삶의 갈등은 <올리브 키터리지>에서 더 많은 등장인물과 확대한 구조 속에서 비등점을 향해 내달린다. 이해와 사랑만으로 타인을 감싸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이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우리네 현실은 그렇게 만만치 않다. 왜곡과 비틀림의 일상화에 삶의 무게는 더없이 버겁게 느껴진다.

한편, 비밀이 존재하지 않는 작은 커뮤니티에 대한 작가의 따스하면서도 동시에 냉소적인 작가의 양가적 시선이 느껴졌다. 사생활 보호를 위한 병원의 기밀 유지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떠도는 소문은 확대 재생산되어 간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공동체 원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소심한 마음의 소유자를 위한 변론이라고나 할까.

<올리브 키터리지>의 다른 제목인 <메인 바닷가에서>를 보고 찻잔 속의 담은 잔잔한 이야기를 기대했다면, 예상외의 허리케인을 만날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진중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이 책을 통해 우리의 삶은 예측불허의 변화무쌍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깨닫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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