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칼랭
로맹 가리 지음, 이주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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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옛적에 아주 유명한 작가가 있었다. 개성적인 문체와 유명 문학상을 받기도 한 작가의 경력에는 빛나는 레지스탕스 활동 경력은 물론 외교관으로의 영예도 빠지지 않았다. 무엇하나 부족해 보이지 않던 작가는 권총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으로 세상과 이별을 고했다. 그의 사후, 그가 익명으로 발표한 책의 실제 작가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세상은 경악했다.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지 대충 짐작하셨으리라. 그의 이름은 로맹 가리, 하지만 나는 그를 <그로칼랭>과 <자기 앞의 생>의 작가 에밀 아자르로 기억하고 싶다.

공쿠르상은 프랑스 문학계를 대표하는 상으로 절대 같은 작가에게 두 번 주어지지 않는 불문율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모든 규칙은 깨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듯이 공쿠르상 역시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에 의해 그렇게 되었다. 1956년 <하늘의 뿌리>로 첫 번째 공쿠르상을 받았던 로맹 가리는, 딱 20년 만인 1976년에 <자기 앞의 생>으로 두 번째 공쿠르상의 영예를 안았다. “열렬한 포옹”을 뜻하는 <그로칼랭>은 로맹 가리의 아바타 에밀 아자르의 데뷔작이다. 


 


<자기 앞의 생>으로 에밀 아자르와 만났던 나는 왜 이렇게 <그로칼랭>이 우리 곁에 도착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곰곰 생각해 봤다. 그건 아마도 가리-아자르 소동 탓이 아니었을까. 개인적으로 로맹 가리의 이 시도를 긍정적으로 보지만, 또 어떤 이들은 대작가의 장난질이라고 폄하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은 상대적이니 말이다. 게다가 <그로칼랭>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로맹 가리가 아닌 신예 작가의 글이라 초판에서 편집부의 입김이 강력하게 작용을 해서 원래의 ‘생태학적 결말’과는 사뭇 다르게 출판이 되었단다.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그로칼랭>은 원래 나온 판본과 훗날 다시 출간된 에밀 아자르가 구상했던 결말이 고스란히 실려 있어서 비교해 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책에 얽힌 이야기가 풍부해서 그런지 서두가 길었다. 자, 이제 중고인구 천만 명이 복작거리며 사는 파리 시내에 사는 미셸 쿠쟁과 비단뱀 “그로칼랭”을 만나 보자. 이 소설의 화자는 37살의 독신남 쿠쟁이다. 쿠쟁이 말했다시피, 이 책은 동물학 개설서이다. 그런데 어떤 동물? 바로 길이 이 미터 이십 센티미터의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는 아프리카산 파충류 비단뱀 “그로칼랭”이다. 쿠쟁은 즐겨 만나는 친구나 애인도 없이 그로칼랭과 침대에서 뒹구는 것을 좋아한다. 아, 그렇다고 너무 앞서나가는 에로틱한 상상은 하지 마시길! 쿠쟁은 ‘미국적 잉여’ 상태에 빠져서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애정을 비단뱀 그로칼랭에게 아낌없이 투자하는 중이다. 독자는 이 애정결핍에 빠진 불쌍한 중년 남자에 대한 동정과 상상만으로도 흉측한 비단뱀 그로칼랭에 대한 혐오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로칼랭을 위해 허가증을 받고 완벽한 준비를 한 쿠쟁이지만 심각한 문제에 봉착한다. 바로 그건 그로칼랭에게 무얼 먹일 것인가 하는 생존을 위한 본질적 문제다. 살아 있는 먹이만을 먹여야 하는 그로칼랭을 위해, 꼬마 생쥐 블롱딘을 사들이지만 그 녀석에 애정을 느끼는 바람에 결국 그로칼랭의 밥으로도 사용하지 못하고 불편한 동거가 시작된다. 



 

한편, 쿠쟁은 자신의 직장인 인구 통계학 연구소인 STAT에서 같이 동료로 일하는 드레퓌스 씨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 기아나 출신으로 흑인인 그녀를 가젤 영양처럼 조심스러운 존재로 묘사한다. 자신만의 상상 속에서 그녀와 사랑을 하고, 엘리베이터의 그 짧은 접점을 통해 그는 행복해한다. 그로칼랭과 동거하는 아파트의 벽에서 이 기묘한 동거를 내려다보는 레지스탕스 영웅 장 물랭과 피에르 브로솔레트의 시선은 파시즘을 반대하면서도 사랑의 파시스트를 자임하는 쿠쟁의 이중적 모습에 대한 냉소라고나 할까.  


 

자발적으로 고립되고 외로운 도시인의 전형으로 재현된 캐릭터 쿠쟁은 사랑의 강을 넘기 위해 교구 신부님과 대화를 해보고, 또 학살과 인권유린에 맞서 싸우는 이웃의 추레스 교수와도 교제를 시도해 보지만 번번이 퇴짜를 맞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일까? 21세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소통이라는 것을 모두가 공감하면서도, 그 소통에 노력하지 않는 현실을 에밀 아자르는 냉정하게 꼬집는다. 네 이웃이 아닌, 비단뱀과 대화를 하려고 노력하고 심지어는 비단뱀 그로칼랭이 사람으로 변하는 기적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에 연민이 느껴진다. 그렇게 애타게 고대하던 드레퓌스 씨의 방문은 비극으로 끝나고, 그녀는 쿠쟁을 떠난다. 에밀 아자르는 환상과 착각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통계작업’을 계속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소에서의 쿠쟁과 드레퓌스의 재회는 차라리 희비극이라고 해야 할까?

에밀 아자르라는 아바타로 암약한 로맹 가리는 <그로칼랭>의 곳곳에 자신의 흔적을 부비트랩처럼 설치했다. 우선,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상징적 존재인 장 물랭의 사진을 신줏단지 모시듯이 애장하고 있다. 로맹 가리의 특징인 여성성도 숨길 수가 없다. 자신의 페르소나로 등장시킨 쿠쟁 역시 유대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슬쩍슬쩍 드러낸다. 역자는 후기에서 ‘아자르 문체의 천재성’을 꼽기도 했는데, 사실 원어가 아닌 번역으로 대한 그의 문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 싶다.

이렇게 나는 <그로칼랭>과의 열렬한 포옹을 끝냈다. 서늘한 그로칼랭과의 포옹과 조임 그리고 매듭이 남기는 여운이 한여름밤의 무더위와 어우러지는 그런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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